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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산은 한라산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제주의 그외 모든 산은 기생화산으로 오름으로 불린다. 기생화산이란 화산의 측면에서 다시 용암이 분출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제주도 한라산 주위에 360여개가 분포되어 있다. 제주 한라산은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일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오름(기생화산)을 거느린 산이다. 오름 가운데 가장 높은 오름은 윗세오름으로 1,700미터가 넘는다.
영실에서 윗세오름으로 하여 백록담에 이르는 한라산 등산로는 정상에 이를 수 있는 가장 짧은 코스이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은 자연 경관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제주인들의 삶과 연결된 많은 설화가 깃들여 있어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산행코스가 되었다.
우리는 여행 이튿날인 2월 25일 이곳으로 산행에 나선다. 영실에서 출발하여 병풍바위를 올라 구상나무 군락지를 지나 선작지왓을 가로질러 윗세오름에 이르는 코스는 겨울 한라산 산행으로는 최상의 코스이다.
영실 코스는 영실에서 출발하여 영실로 되돌아 와도 좋고 윗세오름대피소에서 반대편 만세동산을 지나 어리목으로 내려올 수도 있다. 우리는 그날 전망이 좋으면 되돌아오는 길을 선택하고 전망이 좋지 않으면 어리목으로 내려올 예정이다.
(아래 사진자료는 2013년 1월 26일과 1월 28일 두차례 등반을 하면서 찍은 것이다. 26일은 눈이 왔고 28일은 아주 청명한 날씨였다. 두 종류의 사진이 섞여 있어서 혼란이 올 수도 있을 것이나 산행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여 함께 올린다. 그 외에도 이해를 돕기 위하여 다른 등산객의 사진들도 필요한 자리에 함께 올렸다)
↑1100도로를 타고 가다가 영실탐방안내소로 들어가 여기서부터 영실휴게소까지 약2.7km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 소형차는 다닐 수 있지만 대형차는 통행금지다. 소형차라도 겨울에는 눈이 항상 쌓여 있기 때문에 월동장비를 갖춘 차량 외에는 다닐 수가 없다.
처음 오른 2013년 1월 26일은 눈이 내려서 모두 걸어 올라가야 했다.
↑40분 정도 오르면 '오백장군과 까마귀'라는 간판을 단 영실휴게소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어지간한 등산 장비를 모두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행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과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주먹밥 등을 팔고 있다. 이곳은 음식도 맛이 좋아 맛집이라고 소문 나 있다.
↑영실휴게소 앞마당. 두 번째로 한라산에 오른 28일은 날씨가 아주 청명하며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틀 전에 내린 눈으로 차가 올라오지 못하여 앞마당 주차장에 자동차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영실표지석. 영실 해발 1280m. 영실은 신령스러운 계곡이라는 뜻이다. 설문대할망과 오백 명의 아들들의 설화에 의하면 영실은 '위패는 모셔 놓은 곳'(국어사전)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설화에 의하면 499 명의 아들들이 죽어서 바위가 되었다 한다. 그 바위들이 하나같이 하늘을 향하여 곧추선 모양이다. 그것을 망자들의 위패로 본다면 영실이라는 이름이 쉽게 떠오른다.
나중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곳이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과 닮았다 하여 영실이라 부른다는 식으로 전의되었고 오백 기의 바위는 '오백장군'에서 '오백나한'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영실을 제주도민은 신령스럽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휴게실을 지나 영실로 들어가는 등산로 입구이다. 눈이 거의 종아리를 덮을 만큼 많이 내렸으나 아직은 경사가 완만하여 힘이 드는 줄 모르겠다.
↑길가의 나무 잔 가지를 하얗게 두르고 있는 것이 눈인지 상고대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상고대는 수빙이라고도 하는데 공기 중에 있는 수분이 나뭇가지에 응결되면서 눈처럼 보이는 것을 말한다.
↑골짜기에서 오백 기암을 쳐다보았으나 눈이 시야를 가려 볼 수가 없다. 눈이 올 때는 이렇듯 산과 하늘이 구분되지 않는다.
↑맑은 날 비슷한 위치에서 찍은 사진이다. 상고대가 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너무 깊어서 현기증이 온다.
↑영실에서 윗세오름에 이르는 등산로 지도. 아직은 쉬운 녹색 구간으로 영실 능선에 오르기 전이라 여유가 있다.
↑능선에 오르자 눈구름이 걷히면서 영실 기암이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비폭포가 모두 얼어 있다. 비가 올 때만 폭포가 생긴다고 비폭포라하는데 눈이 오면서 모두 얼어붙었다.
↑병풍바위로 오르는 능선은 아주 가파르다. 나무 데크가 깔려 있어서 눈길을 오르기가 편하다. 눈이 내려 아래 주위 전망이 흐리다.
↑맑은 날 오르는 영실 능선.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가 힘이 들면 몸을 돌려 뒤를 돌아다 본다. 그러면 기막힌 경관에 탄성이 나온다. 그렇게 다시 힘을 얻어 병풍바위로 향한다.
↑가운데 늘씬하고 부드러운 산등성이가 볼레(불래)오름이고, 그 오른쪽으로 이스렁오름, 어스렁오름이 자리잡고 있다. 그 너머로 아스라이 한림 앞바다와 비양도가 보인다.
↑눈속의 영실 기암들. 영실 기암이란 '영실에 있는 기이한 바위'라는 뜻으로 '오백장군' 혹은 '오백나한'이라고도 한다. 오백장군이란 이름은 제주의 설문대할망 설화와 관련이 있고, 오백나한은 불교와 관계가 깊다. 오백장군이 불교가 들어 오면서 오백나한이라는 이름을 더 얻었으리라 생각한다.
(사진 출처-도전 2030 등산모임)
↑맑은 날의 영실 기암. 저기 솟아 있는 뽀족한 돌들이 모두 설문대할망의 아들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죽어서 된 돌들이라고 한다. 그 수효가 500여개에 이른다고 하여 오백장군이라고 하였다. 그 후에 불교가 들어와 제주에 뿌리를 내리면서 부처님의 제자 오백 나한의 수와 같다고 하여 오백나한이라고 불렀다.
(사진출처-길찾는 노루아빠)
↑나한은 아라한의 한자 표기로 아라한과를 얻는 수행자를 일컫는다. 아라한과는 모든 번뇌를 끊은 경지에 도달한 것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 이 아라한과를 얻는 제자들이 오백이나 되었다고 한다. 불교에 이 땅에 정착되면서 오백나한도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사진출처-길찾는 노루아빠)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의 설화에 의하면 이곳 영실은 아주 슬픈 유래를 갖고 있다.
흉년이 몹시 든 어느 해, 오백 명의 아들들이 양식을 구하러 가고 혼자 남은 할망이 아들들이 돌아오면 먹일 죽을 끓이는데 죽솥이 너무 커서 솥전 위를 걸어다니며 죽을 젓다가 그만 죽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것도 모르고 아들들은 돌아오자 어머니가 끓인 죽을 모두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막내가 죽을 푸는데 뼈다귀가 하나 걸려 나왔다. 이상하게 여긴 막내가 솥 안을 살펴보니 어머니의 나머지 뼈가 있었다. 어머니가 죽 속에 빠져서 죽은 줄을 비로소 안 막내는 그것도 모르고 어머니의 살을 먹은 형들과 같이 살 수 없다고 영실을 떠나 서쪽 바다 차귀도로 가서 슬피 울다가 돌이 되었다. 일의 전후를 알게 된 형들도 모두 슬퍼하다가 그 자리에서 굳어 돌이 되었다. 아들들의 영혼은 까마귀가 되어 어머니을 잊지 못하고 아직도 영실 주위를 떠돌아 다닌다.
영실에서 부는 바람소리는 흡사 통곡소리와 같은데 이도 역시 아들들의 울음이라는 것이다. 한라산 영실 주위에 까마귀가 많은 것도 이 아들들의 영혼이 이곳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5월이 되면 지천으로 피는 영실의 진달래, 철쭉꽃은 이 아들들이 흘린 피눈물이라고 전해진다.
설문대할망은 제주를 만든 신이다. 설문대할망이 육지에서 치마에 흙을 담아 부어 놓은 것이 한라산이고 이때 치마에 구멍이 생기면서 흘러내린 흙들이 바로 오름이라는 것이다. 이런 건강한 설화가 어떻게 비통한 결말을 가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제주도가 고려시대 이후로 육지의 귀족이나 관료들에게 수탈의 대상이 되면서부터 암울한 현실이 설화에 반영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눈을 들어 앞을 보면 병풍바위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가까이서 본 병풍바위. 일종의 주상절리이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식어 응고되면서 생기는 금을 말한다. 이로 인하여 돌기둥 모양으로 보이는데 보통 6각이 많지만 4각이나 5각도 많이 있다. 흡사 무논이 가뭄이 들면 다각형 모양으로 갈라지는 것과 같은 현상으로 보면 된다.
↑이제 병풍바위 위로 올라섰다. 여기서부터는 평탄한 길이다.
(사진출처-도전 2030 등산모임)
↑맑은 초가을 병풍바위 위의 전망. 서북쪽 오름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저 오름들 하나하나에는 그 오름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삶이 있다. 제주의 오름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저 오름들이 없었다면 제주민들의 삶은 아주 척박하였을 것이다. 제주민들은 오름에 기대어 살고 죽어서는 오름에 묻힌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요즈음 중국 자본이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곶자왈에 이어 중산간의 오름들이 파괴되고 있다. 개발이 능사가 될 수가 없음을.....
↑병풍바위를 넘어서면 구상나무 군락지이다. 구상나무를 제주에서는 '상낭' 혹은 '쿠살낭'이라고 부른다. 제사 때 향(상)을 피우는 나무로 사용하였다고 그리고 쿠살(성게)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상나무의 '구상'은 '쿠살'에서 온 듯하다.
눈 덮인 구상나무 숲 아래로 탐방로가 터널처럼 나 있다. 그 너머로 한라산의 화구벽 서북쪽 면이 보인다. 한라산 서북벽이 형성된 시기는 약 2만 5천년 전이다.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셈이다. 저 서벽에 올라서면 그 아래로 백록담이 보이고 제주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탐방금지구역이 되어 오를 수 없어 안타깝다.
↑제주의 구상나무는 우리나라 특산종이다. 학명으로는 아비에스 코리아나 Abies Koreana, '한국의 전나무'라는 의미다. 구상나무는 제주 한라산 1500m 이상의 고지와 지리산 노고단과 임걸령 사이, 그리고 덕유산에서만 자란다. 나무에 기름기가 많아 제주에서는 불쏘시개로 사용하거나, 제주형 뗏목인 태우를 만드는데 이용하였다. 나무 모양이 좋아서 정원수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구상나무는 2013년 세계적인 멸종위기 식물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다. 2014년 현재 한라산 구상나무의 절반 가량이 말라 죽은 것으로 파악되어 대책이 시급한 형편이다.
↑그런데 외국인으로서 구상나무를 처음 발견한 이는 미국 하버드대 부설 아널드 수목원 소속 아시아담당 식물학자인 어니스트 윌슨이었다. 구상나무의 가치를 알아 본 윌슨은 종자를 미국으로 가져가 개량하였다. 이때가 1920년대였다. 그후 구상나무는 몇 차례 품종 개량을 거쳐 서양인들이 애용하는 최고급 크리스마스 트리로 거듭났다. 그래서 '한국 전나무' 로 불리는 이 나무를 서양인들은 잘 알지만 오히려 한국인들은 잘 모르고 있다.
↑구상나무 터널을 통과한다. 바람이 불면 눈꽃이 날린다. 이 눈 천지 속에서도 길가 숲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기야 이런 곳에서 따끈한 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면 그 행복감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 것인가.
↑구상나무 군락지를 지나고 나면 시야가 확 틔면서 부드러운 능선의 오름들이 눈에 꽉 들어 찬다.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이 족은윗세오름 혹은 새끼윗새오름이다. 윗세오름은 '위에 있는 세 오름'이란 뜻으로 붉은오름과 족은윗세오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누운윗세오름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누운윗세오름은 샛오름 혹은 망오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저기 멀리 보이는 것이 한라산 서벽이다. 그 앞의 오름이 윗세오름의 맏형격인 붉은오름이다. 윗세붉은오름이라고도 한다. 붉은오름은 여기 말고도 두어 군데가 더 있다. 오름의 토양이 붉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과거에는 윗세오름을 지나 서벽을 타고 한라산 정상에 올랐다. 지금은 자연이 심하게 훼손되어 탐방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는 2월 25일에도 눈을 볼 수 가 있을까? 볼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눈 속을 걸어가야 한다. 위 사진 지난해 3월 14일에 윗세오름에 오른 사람들이 찍은 것이다. 그보다 시기적으로 20일이나 앞선 졸업여행 산행 시에는 많은 눈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반드시 아이젠을 챙기고 작은 보온병 하나씩 준비하는 것을 잊지 말 일이다.
↑윗세오름 대피소로 가는 길에 막내 오름격인 족은윗세오름으로 올라선다. '족은'은 제주말로 '적은'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 족은윗세오름은 반드시 오를 일이다.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단숨에 힘든 등정을 보상 받을 수 있다.
↑저 아래로 윗세오름으로 가는 사람들 혹은 영실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등산로 아래로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는데 이것이 '선작지왓'이다. '선'은 서 있다는 뜻이고 '작지'는 제주말로 돌을 '왓'은 밭 혹은 평원을 말한다. 선작지왓은 '돌이 서 있는 평원'이라는 뜻이다. 신선들이 이곳에서 백록(흰사슴)을 타고 놀았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그 너머로 서귀포시의 푸른 바다가 보인다. 봄이 되면 이곳은 털진달래와 철쭉이 피어 장관을 이룬다.
(사진출처-꿩나라카페)
↑오월의 선작지왓. 넓은 평원에 털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5월이면 여기서 한라산 철쭉제가 열린다. 철축제는 한라산 백록담 안에서 시작하였으나 해가 갈수록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면서 자연경관이 심하게 훼손되자 지금은 이 선작자왓에서 열린다.
↑전망대에서 본 구상나무 군락지. 군락지를 이제 막 빠져 나온 사람들의 보인다. 눈에 덮여 있어서 구상나무 숲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인데 근래에는 눈이 적게 내려 구상나무들이 말라서 죽는다고 하니 과거에는 눈이 여기에 얼마나 쌓였을까?
↑전망대에서 본 한라산 서벽. 가마솥을 엎어 놓은 모양이다. 한라산의 다른 말로 부악(釜岳)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가마솥을 닮은 산이라는 뜻이다. 가마솥은 음식을 끓여 먹는 것는 그릇이어서 먹을 것이 귀한 과거에는 사람들이 아주 소중하게 여겼다. 이 가마솥 모양에서 설문대할망의 죽 끓이는 설화가 탄생했을 것이다.
↑다시 길로 내려선다. 한라산에는 눈보라가 치면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이 길 옆의 붉은 기를 의지하여 가면 된다. 붉은오름 뒤로 보이는 한라산 정상은 사람의 머리를 닮았다. 그런데 나무가 자라지 않아 머리카락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한라산을 다른 이름으로 두무악(頭無岳)이라 불렀다. 머리가 없는 산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머리카락이 없는 산이라고 해석을 해야 맞다.
↑윗세 오름이 가까와 질수록 두무악은 작아진다. 두무악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설문대할망의 설화에 의하면 할망이 한라산을 쌓아 놓고 보니 산꼭대기가 너무 뾰족하여 하늘을 찌를 듯해서 손으로 쳐서 둥글게 만들었는데 그 꼭대기가 날아가서 산방산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꼭대기가 없는 산이어서 두무악이 된 셈이다. 이때 두(頭)는 머리로 새기지 말고 꼭대기라고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두무악 앞에 있는 붉은오름을 왼쪽으로 돌아가면 윗세오름대피소가 나온다.
↑해발 1,700m의 윗세오름 표지목. 이 나무 표지를 넘어서서 붉은 오름 뒤로 돌아서 한라산 남벽분기점으로 하여 돈내코까지 내려갈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오후 1시 이전에 저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 이후로는 출입이 통제된다. 두 번째로 영실에 오른 28일에는 12시가 조금 넘어서 통과할 수가 있었다.
↑윗세오름대피소. 대피소에서는 간단한 먹을거리를 살 수 있다. 컵라면 1,500원. 그러나 윗세오름에 오른 두 번 모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대피소 안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결국 둘째 날도 대피소에서 컵라면을 먹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남벽으로 내려섰다. 지금 저 멀리 보이는 바위산은 한라산 서북벽이다. 백록담 주위의 화구벽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한라산 1950m는 바로 저 서북벽의 높이다.
↑남벽분기점으로 가는 길 중 여기가 가장 위험하다. 눈이 많이 쌓이면 통과하기가 어렵다. 이 부근에서 조난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 전에도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서 눈이 허리까지 빠진다. 길을 벗어나 눈 구덩이에 빠졌는데 허리가지 단번에 쑥 들어갔으니 어쩌면 더 눈이 쌓였을지 모른다.
↑출입금지 경고판이 붙어있는 곳이 한라산 서북벽으로 오르는 길이다. 백록담에 이르는 가장 짧은 코스지만 지금은 휴식년제로 통제하고 있다. 서북벽으로 오르는 마지막 등정로는 거의 암벽 등반 수준이다.
↑아무도 길을 가지 않아 순백의 눈만이 눈이 부시다.
↑사람이 없는 능선에 까마귀가 날고 있다. 설문대할망의 설화에 의하면 저 까마귀는 어머니의 육신을 먹은 어느 아들의 한스러운 넋일 것이다.
↑대피소에서 한 40여분 걸어서 남벽분기점에 직전 방애오름샘에 도착하여 간단하게 요기하였다. 위로 보이는 것이 한라산 남벽(백록담 남쪽 화구벽)이다.
↑카메라를 당겨서 촬영하여 본다. 기묘한 형상의 주상절리로 되어 있다.
↑방애오름샘. 1월 말이었는데도 여기는 아주 따뜻하였다. 물맛도 아주 좋다. 돈내코로 내려 갈 것이 아니어서 다시 걸음을 돌려 윗세오름으로 돌아온다.
↑지난 번에는 남벽에 들르지 않고 바로 어리목으로 내려 갔지만 두 번 째 등반 때에는 다시 영실로 내려오는 길을 택하였다. 오후의 햇볕을 가득히 받고 있는 영실 기암들. 영실 코스는 내려 올 때 더욱 좋다.
↑영실을 내려오고 나서 중문 숙소에서 다시 바라다 본 한라산.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다. 이런 날이 일 년에 몇 번 없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길에 오르면서 다시 한라산 정상으로 눈길이 간다. 이날은 하루 종일 정상에 구름이 머물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