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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용어, 이대로 좋은가?
(1). 예배 용어를 중심으로
1, 예배하다와 예배드리다.
"예배하다"는 명사인 예배에 "하다"가 붙은 동사가 된 말이다, 현대어 성경에는 "예배하다"라는 말은 쓰이지 않고 존대어인 "예배드리다"로 바꾸어 쓰이고 있다. 예배의 사전적 풀이는 "신이나 부처와 같은 초월적 존재 앞에 경배하는 의식 또는 그런 의식을 행함"을 뜻함으로 이 하나님께 "예배하다"를 좀 더 존대하는 말로 "예배(를)드리다"로 사용해야 한다. 또한 "하다"와 같은 동사 중에는 맛을 보다, 만져 보다와 같이, "보다"라는 것도 "하다"와 같이 동사로 쓰임을 받고 있어 "예배 보러간다!"란 말도 흔히 써왔으며 교역자들이 "김 집사님 댁에 예배를 봐주러 갑니다!"란 말도 자주 쓰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주관적인 응답 행위가 아니고 피동적인 어감이 들어, 이를 쓰지 않기로 제86회 총회에서 결의된바 있다, 이것도 "김 집사 댁에 예배를 드리러 간다!"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2, 대예배란 말은 쓰면 안 된다
예배에는 경중이 이을 수 없으나, 보통 주일 11시 예배를 "대 예배"라 하는데 그러면 "소 예배"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대예배"라는 말은 쓰지 말아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그 크신 사랑, 구속의 은총을 깨닫고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와 감격으로 경건하게 응답하는 행위 예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하며, 이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응답의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더 크신 은총을 힘입게 되며 믿음 안에서 새로운 힘과 용기와 평안을 얻게 된다, 따라서 이 예배 행위는 경중이 있을 수 없는 것으로 꼭 구분한다면 주일 낮 1부, 2부나, 9시 예배 11시 예배로 불러야 할 것이다.
3, 열린 예배와 열린 집회
"열린 예배"란 용어는 1988년 미국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 교회에서 현대 문화에 젖은 청소년과 믿지 않는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도록 짜여 진 예배를 전통적인 경건 예배에 대한 말로 쓰이는 것이다. 즉, 이 열린 예배란 전통 예배의 거룩과 경건성을 접어두고, 발랄하고 역동성 있는 노래와 율동과 자유스러운 복장에 형식에 구애됨 없이 드려지는 예배의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 열린 예배를 쓸 경우 상대적으로 전통적인 모든 예배는 닫힌 예배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되며 상대적으로 침체를 면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앞으로는 "열린 예배"는 젊은이를 위한 "젊은이 예배"나 불신 청소년을 위한 "열린 집회"등으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2001년도인 제86회 총회에서 결의된바 있다.
4, 축하 예배와 감사 예배
교인 중에 개업, 합격, 승진, 학위 취득, 당선 등 여러 모양의 축하 행사가 있어 이를 기리기 위해 드리는 예배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보내는 축하 예배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예배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예배란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모든 것을 집중하여 드리는 능동적인 응답 행위인데, 이 예배에 좋은 일을 맞은 사람을 떠올리며 그에게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분산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하와 예배는 공존할 수 없으니 예컨대 "졸업 축하 예배"란 말은 "졸업 감사 예배"로 "개업 감사 예배" "학위 취득 감사 예배"로 바꿔 불러야 할 것이다.
5. 제단을 쌓는다
예배드리는 것을 "제단 쌓는다!"라고 하는 것은 부적절한 표현이다, 제단 쌓는다는 말은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제물을 올려놓은 후 제사를 지낸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 말이다, 그러므로 예배드리는 것을 제단을 쌓는다는 말로 표현하게 되면 교회 밖의 사람들이 듣는다면 교인들도 "신령이나 죽은 넋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드리는 의식"을 거행하는 집단이 아닌가? 라는 의구심을 갖게 될 것이다. 구약 시대는 하나님께 땅의 소산이나 정결한 짐승으로 제물을 삼아 제사장이 제사를 드려주었으나,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대속물이 되신 후로는 예수를 믿는 우리는 만인 제사장의 특권으로 하나님께 직접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지난 제87회(2002) 총회에서는 제사와 관련된 용어 중에 '제사'는 "예배"로, '제단'을 "성단"으로, '제물'을 "예물"로 바꾸어 사용할 것을 채택하였다. (전거 ; 최태웅 장로 지음 도서출판사 카이로스 2006. 07. 10 발행,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 P31-36, 28-30, 37-40, 67-69, 85-87에서 발췌)
(2). 예배드릴 때를 중심으로
6, 받들어 봉독하겠습니다.
예배 중에 성경 봉독을 맡은 사람이 "이제 성경을 받들어 봉독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봉독하다"는 말속에 이미 "받들어"란 뜻이 내포되어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즉 받들 봉(俸), 읽을 독(讀)으로 윗사람에게 받들어 읽어드림이 되는 것을 굳이 봉독 앞에 받들어를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역전(驛前)앞, 처가(妻家)집, 고목(古木)나무, 약수(藥水)물과 같이 한자의 명사의 끝과 같은 뜻을 갖은 말을 중복하여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성경 봉독을 맡은 사람은 다만 "이제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족하다.
7, 제물과 예물 그리고 흠향
헌금을 드린 후 봉헌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이 제물을 기쁘게 받으시고 ~~ "와 같은 기도를 자주 듣는데 이때 사용한 제물이란 용어는 적절하지 못하다, 구약시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제사였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 희생 제물이 되신 것으로 구약의 제사는 끝났고 신약의 예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할 때 우리가 드리는 것은 제물이 아닌 예물이어야 한다, 현대 국어에서는 제물이란 "제사에 쓰이는 음식물을 의미하며" 또는.."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물을 바치는 정성"으로 되어있음으로, 제87회 총회에서 "예물"로 사용토록 결의된바 있다. 예배드릴 때 기도 인도자가 "하나님 우리 예배를 '흠향'하시고---"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흠향(歆饗)은 신명(神明)이 제물을 받아서 먹으라는 뜻으로 제사 때 차려놓은 음식을 귀신이 받아서 먹으라고 할 때 쓰이는 말이다, 구약에서는 정결한 짐승으로 제를 지냈기 때문에 흠향이란 용어가 사용되었으나, 신약 시대는 제사가 아닌 예배를 드림으로 이 용어는 써서는 안 될 것이다.
8, 헌금과 봉헌
대한 예수교 장로회(통합) 제86회(2000)총회에서 교육부가 제안한 "헌금 순서"를 "봉헌 순서"로 할 것으로 통과시킨 바 있다, 이것은 "헌금"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돈을 드린다는 의미로 해석되므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린다는 뜻에 미흡하므로 "봉헌"으로 바꾼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가 가진 것을 드리는 순서인 봉헌 순서에 비단 돈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드림은 물론 성대를 이용한 찬양, 통회하는 기도, 봉사와 안내 등 모든 것이 봉헌에 포함된다 하겠다.
9, 예배 도중에 박수를 ---
예배 도중에 설교자는 물론 누구를 위해서도 박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아니하다, 이는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전통적인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닌 듯 하기 때문이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과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하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 총회 헌법 "예배와 예식"에 명시된 대로 설교자는 물론 찬양대나 어떤 특정인을 내세워 칭찬하거나 환영하거나 기리기 위해 박수를 치는 것은 금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외 다른 대상에게 관심을 돌리는 것은 예배의 근본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전통을 중시하는 교회에서는 사람에 대하여 관심을 쏟는, 사람 소개나 환영이나 광고나 시상 같은 순서는 예배가 끝난 후에 친교 시간에 넣는 것이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예식서 제4장 1에는 "성도들이 드리는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의 목적과 내용은 인간 중심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과 감사 찬송을 드리도록 준비되어야 한다."라고 규정해 놓았다.
10. 설교 중 "축원합니다!"라는 말
본 교단 총회는 1980년 제65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 보고를 채택하였고 제86회(2001)총회에서도 재차 결정하였다, <설교 도중에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는 하지 않는 것이 가한 줄 아나이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 따라서 사람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치시키거나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을 넣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치시킬 수 없습니다. --- 그런데 설교에 인간의 기도식 기원이나 기도 등의 형식을 개입하는 것은 위의 두 가지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신학적 입장에서)
(2). 예배 순서에서 찬송, 신앙 고백, 기도, 성경 봉독, 찬양, 하나님의 말씀 선포, 청종, 봉헌, 축도 등이 있으니 그때 질서대로 따로 하면 되고 혼합해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설교는 설교대로, 기도는 기도대로, 축도는 축도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예배학적 입장에서)
(3).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은 회중에게 자극을 주고 흥분시켜 아멘으로 응답하지 않고는 안 되게 만들어 설교의 질서를 문란케 하고, 흥분시킴으로 미신적 기복 사상을 키워 줄 우려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중에 말씀하시는 그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이 되는데 --- 기복 사상으로 오는 폐단, 즉 설교의 원 목적이 흐려지고 회중들에게는 설교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아멘 만을 하면 된다는 식으로 유혹되기 쉽습니다(설교학적 입장에서). (전거 ; 최태웅 장로 지음 도서출판사 카이로스 2006. 07. 10 발행,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 P58-60, 61-63, 64-66, 124-126 41-43, 79-81에서 발췌)
(3). 찬송에 대하여
11, 성가대와 찬양대 및 박수로 격려하는 것
"찬양"은 성경에 있는 그대로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말하지만 "성가"란 성경에 근거한 말이 아니다. 찬양은 우리 기독교의 고유한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성가라 하면 타종교의 노래도 포함되는 일반적인 단어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성가대는 다시 "찬양대"로 환원시키도록 제86회 총회에서 결의된바 있다. 우리는 예배 시간에 "지금 찬양을 잘했으니 찬양대에게 박수를 합시다!"라고 하는 것을 가끔 본다, 예배 시간에는 하나님 이외 누구도 칭찬이나 높임을 받아서는 안 된다,
찬양도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한 순서이지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한 순서가 아니다. 찬양을 잘 불러 교인을 기쁘게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닐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 찬양을 잘 불러드렸다고 해서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할 예배에서 찬양대를 칭찬하는 박수를 칠 수는 없다. 이것이 용인된다면 기도 인도자, 성경 봉독자, 설교자도 박수를 받아야하지 않겠나? 어불성설이다.
12, "찬송"과 "찬송가"를 구별하자
예배 인도자가 예배 순서 가운데 찬송 순서에서 "찬송 00장을 함께 부르시겠습니다!"라고 안내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또는 "찬송가 00장을 함께 부르시겠습니다!"라고도 한다, 얼른 들으면 두 가지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찬송가 00장을---"이 맞는 표현이다. 그럼으로 "찬송 00장을 부르자"가 아니라 "찬송가 00장을 부르자"로 "가"를 넣어서 해야 맞는 표현이다.
예컨대 "00장 찬송"이란 마치 성경에서 "00장00절 말씀"과 같이 "말씀"에 해당함으로 그 앞에 "요한복음"이란 성경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 같이 "찬송가"라는 책이름을 밝혀야 한다, 찬송가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를 구별하기 위해 그 앞에 신정, 합동, 새, 개편, 통일이란 이름이 부쳐왔다, 지금 우리가 쓰는 찬송가는 통일 찬송가인데 통칭 "찬송가"로 불리어지고 있다.
13, "준비 찬송"이라는 용어
"준비 찬송"이란 용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를 드리는 것이나 말씀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에 조금도 뒤질 바 없이 중요한 이 찬송이 미리 분위기를 가라앉히거나,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 또는 자리를 정돈하는데 필요한 수단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준비 찬송"이 되어서는 안 된다(제86회 총회결의) 찬송은 예배의 한 중요한 내용으로 하나님을 찬양함은 물론, 기도와 말씀에서와 같이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총에 대한 감사의 노래이며, 죄 가운데서 나를 구속해 주신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나의 죄를 회개하는 속죄와 통회의 눈물이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뜻대로 살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이며 결단이기도 하다.
14, 특송을 들으면서와 음악 예배 개최(거행)하다
"특송을 들으며 헌금합시다!"라는 말은 잘못 표현된 것이다, 특송은 예배 중에 사람이 들으며 즐거워하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다, 따라서 가수가 청중을 위해 부르는 노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000집사님의 특송이 있으시겠습니다, 그리고 준비된 예물을 봉헌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음악예배를 개최(거행)하다"란 말도 부적절하다, "음악예배를 드리다"로 해야 한다,
즉 거행하다고 했을 때 초점을 음악에 맞추어 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예배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행위이다, 즉 절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음악예배란 예배인데 음악을 많이 곁들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일진대 일반 행사 때 쓰는 개최나 거행하다를 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전거 ; 최태웅 장로 지음 도서출판사 카이로스 2006. 07. 10 발행,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 P44-50, 51-53, 54-57, 64-66 73-75에서 발췌)
(4). 기도의 서두를 중심으로
15. 기도의 서두
우리가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을 부르지 않고 "오늘도 주님 전에 나왔습니다―", "이제 적은 무리가 머리를 숙였습니다―,"로 시작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기도는 감사와 소원을 아뢰는 의식인데 서두에 하나님을 높인 호칭을 빼면 불경스럽게 느껴진다, 예수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등과 같이 서두에 하나님 호칭을 하고 이어서 아뢰올 말씀을 하나님께 아뢰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기도, 또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본받아 기도의 서두는 하나님 호칭하는 것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무방하다, 즉 "전능하신", "거룩하신",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등은 마치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와 같은 맥락이 된다.
그러면 "사랑의 주님―" 또는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을 호칭하여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 먼저 "사랑의 주님"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위(位)인 성부인지 성자인지가 불분명한 술어가 되며, 그리고 우리가 기도를 마칠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끝내는 것은 논리적으로 우리가 성부 하나님께 기도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도 서두에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을 호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6.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기도의 서두에 하나님을 호칭할 때, 하나님의 호칭인 '거룩하신', '자비하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등을 앞에 놓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으나 "살아계신 하나님",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 호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것은 죽을 수도 있다는 말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반감시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직접 육신의 아버지를 향하여 '살아계신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제87회 총회결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노니―" 외 마26;63, 롬9;26, 고후6;16, 딤전 3;15, 4;10, 히3;12, 9;14, 10;31, 12;22, 계7;3 등에도 "살아 계신 하나님"이 쓰였다, 그런데 이는 내가 하나님을 직접 부를 때 쓴 것이 아닌 하나님을 3인칭에 놓고 하나님의 속성을 묘사한 것이다.
17. 기도 서두에 성경구절 외우기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 서두에 하나님을 부른 후 그 다음에 감사, 회개, 소원, 간구 등을 아뢰는 것이 기도의 순서이다, 그런데 기도 인도자가 서두에 교훈적인 내용이 담긴 성경구절인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항상 기뻐하라―'등을 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때로는 기도 중에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으나 이를 실천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 주시옵소서!"와 같이 성구를 인용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기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우리의 감사와 간구와 소원을 아뢰는 의식이므로 인도자가 회중에게 교훈하는 것 같은 성경구절을 읽는 것은 기도와 거리가 먼 것이다.
18. 하나님께 '당신'은 안 된다
우리나라 말은 존비법이 매우 발달된 언어이다, 인칭 대명사의 경우에도 예사말과 존대 말이 구별되어 쓰이는데 제2인칭의 예사말은 '너, 자네, 그대'등이며, 존대 말은 '노형, 당신, 어르신네' 등이다, 그런데 '당신'은 존대 말이기는 한데 높임의 정도가 매우 낮다, 즉 '하오'체 정도에서 쓰이는 말이다, 이 '당신'을 지존하신 하나님께 쓰는 것은 불경스럽지 않을까?, 유다 민족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감히 부를 수 없어서 "주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당신'이 아주 높임말로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3인칭을 가리킬 때이다, '우리 할아버님 당신께서 쓰시던―' 이런 경우 '당신'은 제3인칭으로 할아버지를 높여서 부른 말이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7장에서 "아버지"를 39회나 불렀으나 '당신'으로 대체한 것은 한 건도 없다, 이 '당신'은 서양 선교사들이 'You'를 '당신'으로 호칭한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나,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당신'을 쓰지 않기로 제86회 총회에서 결의한바 있다. (전거 ; 최태웅 장로 지음 도서출판사 카이로스 2006. 07. 10 발행,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 P91-95, 99-101, 105-108에서 발췌)
(5). 기도 중에
19. "용납"과 "용서"는 다른 뜻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죄를 '용납'해 주옵소서!" 라고 할 때가 종종 있다, 이것은 잘못된 기도이다, '용납'이란 "받아드리다"는 의미임으로 우리의 죄를 그대로 긍정하고 받아 달라는 뜻의 '용납'해 달라는 기도는 드려서는 안 된다,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주님의 백성으로 용납해 주시는 것은 죄를 묵과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우리 대신 대속 물로 죽으신 것이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위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와 용서의 길을 트신 것이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죄의 '용서'를 구하는 회개의 기도만 있을 뿐이다.
20. 하나님께는 영광 우리에게는 은혜―
"이제 찬양대가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거두시고 우리에게는 크신 은혜를 내려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을 종종 듣곤 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합당한 것이나, 이 "영광을 받으시고"라는 말을 '거두시고'라 할 때, 이렇게 말을 하게 되면 우리 인간도 영광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되며, 또한 이 영광을 하나님께서 회수해 가시라는 어감이 들게 되므로 "영광을 받으시거나" "돌려드립니다"로 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은혜를 내려달라"는 기도에 대하여, 찬양은 하나님의 성호를 찬양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데, 이 목적 이외 은혜를 받을 목적을 내포시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며, 이 두 가지 일은 별개의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으로 전적으로 하나님 소관이다, 우리가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면 우리에게 크신 은혜를 부어주실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21. 대표 기도와 중보 기도
"000장로가 대표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사람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음으로 "대신하여 기도"하는 대표성은 인정될 수 없다. 즉 기도 인도자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며, 그와 함께 머리 숙인 성도들의 소원을 보다 깊게, 보다 하나님 뜻에 맞게, 아울러 그 절차를 정리해 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그리고 만인 제사장의 사상은 곧 하나님 앞에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 사상이다. 고로 '000장로가 기도 인도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중보(中保)기도란 중보자(예수님)가 하는 기도를 뜻하며, 중보자(예수님)가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는 기도라는 분명한 의미를 지닌 용어이다, 딤전 2;5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하였으니, 오직 중보자는 예수님뿐이시다, 그런데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이웃만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을 '중보기도'라 부르면서 심지어 중보기도 모임, 중보기도회 같은 이름도 생겨나는데 우리 교단의 제87회 총회에서는 이 '중보기도'를 "이웃을 위한 기도"(또는 중보적 기도)로 쓸 것을 결정한바 있다.
22. "기도 잘하셨습니다!"라는 말을 삼가 해야
기도는 하나님과 성도간의 교제요 대화를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찬양과 경배, 감사, 죄의 회개를 드리며, 하나님은 성도의 아룀을 들으시고 말씀하시며 하나님 뜻을 보여주시고 성도의 간구에 응답하신다, 기도는 성도의 영적 호흡이며 성도의 특권이다. "기도 잘 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할 때, 이 말은 논리적으로 문맥이 틀리지 않고 내용도 비교적 충실하게 시간도 적당히 차분하고 침착하게 기도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정말 잘한 기도는 말은 비록 더듬거리고 문맥이 논리에 맞지 못해도 때로는 길거나 짧을 지라도 차분하고 침착하기는커녕 경건하고 엄숙한 자리에 서고 보니 너무 두려워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떨리는 기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여 하나님의 응답과 함께 머리 숙인 성도들도 흡족한 은총 속에 기쁨의 눈물이 쏟을 수 있는 기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잘한 기도가 아닐는지. 우리는 기도에 대해 우열을 가릴 수 없으며. 이렇다 저렇다 비판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소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하위자가 "기도 참 잘하셨습니다!"라는 인사는 적절치 못하다, 그러나 칭찬과 격려의 뜻이 담고 하위자에게 "기도 잘했다"와 같은 표현은 용납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감정을 나타내려면 "기도를 '통해서,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인사는 있을 수 있다고 하겠다. (전거 ; 최태웅 장로 지음 도서출판사 카이로스 2006. 07. 10 발행,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 P112-114, 118-123, 148-150, 151-153 에서 발췌)
(6). 기도를 마치면서
23. 예배를 하나님께 의탁하옵고
기도 인도자가 하나님께 감사와 속죄와 간구를 아뢴 후 기도가 끝날 무렵에 "오늘의 예배를 하나님께 의탁하옵고---"라는 표현을 가꿈 듣게 되는데 이것은 잘못된 기도이다, '의탁'이란 말은 몸과 마음을 다른 곳에 맡길 때 쓰는 말인데, 현재 드리고 있는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구원의 은총을 깨닫고 감격하여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응답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주체는 우리가 된다.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 맡긴다(의탁)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고 성경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예배의 수수 방관자가 되므로 부당하다 하겠다. 또한 "---부탁하면서"도 같은 표현이 된다.
24.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와 "받들어" 기도
혹자는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라고 하는데, 예수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새사람이 된 우리들의 모든 것은 주안에서 이루어진다. 주안에서 생활하고 주안에서 찬양하고 주안에서 감사한다, 그러나 찬양과 감사를 그때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 기도드리는 내용을 감사하려면 "예수 이름" 앞에 "--- 감사하며"(감사하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한다면 별 무리가 없을 줄 안다. 또는 "예수님 이름을 '받들어' 기도합니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받들어'는 기도하는 사람을 낮추고 예수님 이름을 높이는 뜻에서 이렇게 표현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는다. 죄인인 우리가 기도를 하나님께 직접 아뢰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 예수님 이름으로 올려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 이름을 높인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 명의가 내포하지 않게 되므로 '받들어'는 빼고 그냥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로 하여야 한다.
2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요한복음 15;16에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던지 다 받게 하려함이라"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기도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끝을 맺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라고 하는 것은 무방하다, 즉 그리스도란 기름 부은 자를 가리키는 메시야의 헬라음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이름을 빼고 "그리스도" 만 지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즉 기름을 부은 자인 메시아는 선지자, 제사장, 왕 등이 있음으로 "그리스도"만으로는 성자인 예수님을 지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간혹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끝을 맺는데, 성경에서 "주"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지칭하고 있다, 예컨대 베드로의 고백(마16;16), 삭개오가 주께 여짜오되(눅19;8) 등과 같으며, 또한 하나님을 지칭하기도 한다,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9), "우리 주의 은혜가―"(딤전1;4)와 같은 경우이다, 그러므로 그냥 "주님의 이름으로"만 하게 되면 어느 위를 지칭하는지 분간이 안 되고, 또 예수님께서 "기도는 내 이름으로 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내 이름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를 하여야 한다.
26. '기도하였습니다!'와 '기도합니다!'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 같이 동사 '기도하다'의 시제를 현재형으로 써야 할 것을 요즈음에는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드렸습니다!'와 같이 과거형을 쓰는 사람이 점차 늘어가는 것을 본다, 그 기도가 끝나는 시점을 기준 할 때는 간구 한 모든 말들은 문법적으로 이미 과거 또는 현재 완료가 되므로 동사인 '기도하다'의 과거형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의 간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 생활을 간구하는 것이며, 어려운 역경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속에 평강과 강복의 바람인 소원으로 이 소원은 미래 지향적인 것이다, 우리 기도의 핵심인 간구의 내용은 우리가 언제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기도의 마무리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 '기도하옵니다!'가 더 적절한 표현이다.(제86회 총회결의)
(전거 ; 최태웅 장로 지음 도서출판사 카이로스 2006. 07. 10 발행,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 P139-141, 133-138, 127-132, 142-144 에서 발췌)
(7). 기도에 관계된 용어
27. 기도나 해 주세요
우리는 가끔 병문안을 가서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오시지 마시고 기도나 해주세요!"란 말을 듣곤 한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기도는 예배와 함께 최우선이어야 하지 차선이 될 수 없지 않는가? 그러나 "기도나 해주세요!"는 최우선이 되어야 할 우리기도를 차선책으로 마지못해서 할 수 없이 기도를 선택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좁혀지게 된다. 따라서 "기도나 해 주세요"나 "예배나 드리자"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못된다.
또 우리는 "00에게 기도해 준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여기서 "주다"가 어떤 동사 바로 다음에 쓰일 경우 그것은 바로 보조동사가 되는데 이 때 '주다'는 '주다' 본래의 의미로 쓰이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어떤 행동을 함을 나타내는 말(표준 국어 대사전)로 쓰이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라고 한다면 "그가 나를 위해 기도했다'는 의미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만일 '그가 나에게 기도해 주었다'라고 한다면 "그가 나에게 기도했다"와 같은 의미가 되므로 부적절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28. 축복에 대하여
요즈음, 교회 안에서 '축복'을 잘못 쓰고 있다, 축복(祝福)은 복을 빈다는 뜻으로 사전에는 '신의 은혜를 구하여 빎'으로 풀이되어 있다, 그러므로 축복과 강복(降福)은 구별되어야 한다, 따라서 축복의 주체는 인간으로 어떤 다른 분에게 복 주시기를 비는 것이며, 하나님은 복을 내려주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강복"하여 주시라고 빌어야 할 것이다. 개역 성경에서는 '축복'과 '복'을 분명히 구별하였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창12;1-3),
"그가(멜기세덱)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창14;19).",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침에(창27;30)"
이처럼 하나님은 복을 내리시는 분이요, 축복은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것으로 구별하여 썼다, 제86회 총회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는 "하나님 복 (내려)주시옵소서"라 할 것을 채택하였다.
29. '나라이(에) 임하옵시며'에 대하여
주 기도문에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나라가 임하옵시며"를 고어(古語)투로 표현한 것이다, 이 '나라이'를 많은 사람들이 무심히 "나라에"로 발음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면 의미가 아주 달라진다, 즉 '나라이'는 주격(主格)이지만 '나라에'는 처격(處格)이 된다, '나라이'는 현대 국어로는 주격 '나라가'되며 '나라에'는 글자 그대로 처격 '나라에'이다. 이 '나라에'로 발음하는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나라에 임하옵시고'로 이해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나라이'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길 바라는 기원인 것이다.
이러한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해 새로 번역된 성경들은 마태복음 9;10의 처음 구절을 다음과 같이 바꾼 것을 볼 수 있다,"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공동번역), "나라가 임하게 하시며"(표준 새 번역), "아버지 나라가 임하소서!"(현대어),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쉬운), "아버지의 나라가 속히 오게 하소서"(현대인) 이처럼 '나라이'를 "나라가"로 고쳤으며 본 교단 제90회 총회에 주기도, 사도신경 재번역 연구위원회에서 제안한 주 기도에서도 이를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오며"로 번역한 것을 볼 수 있다.
30. '기도발', '영발'과 같은 저속한 말을 삼가라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말들을 가끔 교회 안에서 듣게 된다, 그것은 '영빨'이나 '기도발'(빨)과 같은 저속한 말들이다, 영력이 넘친다는 뜻에서 "영빨이 세다"라든가, 기도 효험이 있다고 해서 "내 기도빨이 먹혀 들어갔다" 또는 "내 기도빨로 시험에 합격했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 저속한 표현이다, 이 '발(빨)'은 일부 명사 밑에 붙어서 죽죽 내뻗는 줄 또는 그러한 기운을 뜻하는 말이다, 성령의 기름이 부어진다든지, 기도의 응답이 있다든지 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일 뿐 구하는 자의 공로가 아님을 모르는 소치이다. 성도와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이처럼 속되게 표현하는 것은 불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성도는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 감사와 간구, 죄의 회개를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은 이를 들으시고 말씀하시며 뜻을 보여 주시며 성도의 간구를 들어 주신다,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공로로 구하는 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혜인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가 시의에 맞춰서 구하는 대로 응답이 되었다 하여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 능력이 많아서나 성령이 충만하게 덧입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요 섭리일 뿐이다. (전거 ; 최태웅 장로 지음 도서출판사 카이로스 2006. 07. 10 발행, "교회 용어 이대로 좋은가?" P154-160, 161-162, 163-165, 167-169에서 발췌)
(8). 성직의 호칭에 대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직분이 필요하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 구역장, 권찰, 찬양대원, 교회 학교 교사 등 이들은 교회를 섬기는 귀한 직분이다, 이들 직분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해서 안 해도 좋은 직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경륜 속에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시는 소명이기에 다만 "아멘"으로 응답해야만 하는 성직이다.
31. 주의 '종'
목사를 가리켜 하나님이 택정한 직분인 "주의 종"이라 칭하는 것은 의미상 아무 문제가 없다, 성경에 나타난 "주의 종"이란 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 부르는 술어이다, 다만 '종'이란 가장 천한 신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남에게 쓰는 것은 예의에도 어긋난다 할 것이다, 그렇다고 '종님'이라 호칭하는 것은 더욱 문제가 된다, 이를 '사자', '사역자', '목회자' 등으로 대치하여 호칭하는 것이 바람직하게 여겨진다.
32. '당회장'과 '담임 목사'
헌법 정치 제27조에는 '목사'의 칭호에 위임 목사, 임시 목사, 부 목사, 전도 목사, 기관 목사, 원로목사, 무임 목사, 은퇴 목사로 정의하였다, 따라서 어떤 칭호의 '목사'이든 간에 '목사님'으로 족하다, 그런데 흔히 대외적으로 호칭할 때 "당회장"으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외 공문서에는 기관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할 경우는 별문제가 없으나,
우리 교회의 "장"으로 높임말이라고 쓰기 위해 '당회장'이라고 할 때는, 일반 사회의 특정 단체나 기업체의 '보스'를 지칭하는 것 같은 어감이 들고, 대내적으로도 당회장보다 상위 기관인 제직회와 공동의회의 '장'도 맡고 있으니 어딘가 어색한 감이 든다, 고로 "담임목사"로 부르는 것이 무난하다고 본다.
33. 수석 장로와 선임 장로
교회 내에서 연륜이 가장 많은 장로 즉 당회원 중 가장 먼저 임직한 장로를 '수석 장로' 또는 '수 장로'라고 부르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데 '수석'이나 '수'란 말은 바람직하지 않다, "수석"은 등급이나 지위 따위에서 맨 윗자리를 말한다, 수도 우두머리를 뜻한다, 이것은 서열이 있는 곳에, 즉 계급사회에서나 조직에서 쓰이는 말이다, 이보다 "선임"이란 말은 먼저 임직했다는 뜻임으로 "선임 장로"라고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34. '피택 장로' 및 집사와 권사
피택은 택함을 입었다는 의미인데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장로들도 다 피택 장로라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택함을 입어 장로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직 장로 임직(장립)을 받지 않은 사람은 '피택 장로'라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장로로 임직 받기까지는 "장로로 피선된 집사(권사)"일 뿐이다 '피택 안수 집사'라는 말은 국어 조어법상 안수 집사는 안수 집사인데 피택된 안수 집사란 뜻이 된다, 그러므로 피택된 안수 집사라는 용어는 부적한 말이다, '피택 권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적한 말이다 이들은 각각 '안수 집사 피선자' '권사 피선자'라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하다.
35. 바르게 써야 할 '사모'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는 위엄과 존경과 친애의 대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임금과 스승을 아버지와 같은 반열에 세워 존경한다는 뜻으로, 임금을 국부(國父), 스승을 사부(師父)라 하였고 그 부인을 사모(師母)라고 존경해서 일컬어 왔다, 헌법 정치 제24조 4 목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교인들을 깨우치는 '교사'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므로 사부(師父)에 해당하고,
그 부인을 '사모님'이라 부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사모'라는 호칭은 남들이 불러주는 호칭이지 결코 자기 자신을 가리켜 '사모'라 부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목사도 자기 아내를 '사모'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경우 '사모' 대신에 '제 집사람', '제 아내', '제 안사람'; '제 처'등으로 바꾸어 쓰면 좋을 것이다(제86회 총회 결의)
36. '사찰 집사'와 '관리 집사'
오래 전부터 교회의 자질구레한 일과 교회를 지키는 사람을 유급으로 채용하고 '사찰 집사'라고 불러왔다, '사찰'이란 조사하고 살피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사찰 형사', '세무 사찰'과 같은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말을 연상케 한다, 이런 말이 교회 일을 맡은 사람에게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를 "관리 집사"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좋겠다. (전거 ; 최태웅 장로 지음 도서출판사 카이로스 2006. 07. 10 발행,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 P 173 - 199에서 발췌)
(9). 장례 예식에 관련된 용어들
37. 소천(昭天)하셨다는 말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소천 하셨다' 또는 '소천 하셨습니다!'라고 하는 예가 있다, 이 말은 맞지 않는 표현이다, 총회 기독교 용어 연구 위원회에서는 '소천 하셨다'를 "별세하셨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숨을 거두었다" 등으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굳이 '소천'을 사용하려면 "소천 받았다" "소천 되었다"로 하는 것이 좋다(제86회 총회결의) 또한 저간에 통용되고 있는 "돌아가셨다"는 말도 무방하리라 여겨진다.
38. 명복(冥福)을 빕니다
상가에서 문상 시 인사말 중에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와 같은 말은 우리 기독교 용어로는 부적합하다, '명복'은 불교나 도교의 술어로서 죽은 후에 명부(冥府)에 가서 염라대왕에게 좋은 심판을 받기를 빈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명복을 빕니다!' 대신 우리 기독교 교리가 잘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또는 "부활의 소망으로 위로 받기 바랍니다!"라는 말로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좋겠다. 문상 중 인사말을 조객이 "부활을 기원합니다(부활)"하면 상주가"소망을 갖으렵니다(소망)"하거나, 조객이 "위로를 빕니다!"라고 인사하면 상주가 "감사합니다!"라고 답례를 하면 어떨까?
39. 영결식과 고별식 또는 발인
영결식(永訣式)이란 글자그대로 영원히 이별하는 의식이란 말이다, 고별식(告別式)도 친척이나 친지들이 죽은 사람과 마지막으로 결별을 알리는 의식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영결식, 고별식은 우리 기독교 교리에 맞지 않는다, 이 죽음이란 새로운 창조에 귀착하게 되고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며 죽음을 통한 후에 다시 만나게 된다는 부활 신앙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이 영결식, 고별식은 이제는 쓰지 않는 것이 좋으며 또 발인(發靷)이란 상여가 집에서 떠난다는 것의 뜻을 가진 말로서 상여를 쓰지 않는 요즈음은 무의미한 말이 되었다, 대신 "장례 의식"으로 고쳐 쓰는 것이 좋겠다(제86회 총회결의)
40. 미망인
'미망인(未亡人)'이란 '남편이 죽었는데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여인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은 남자에게는 쓰이 지 않고 여자에게만 쓰이고 있다. 이 미망인의 유래는 춘추 좌씨전 장공편에 순장(殉葬)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순장은 왕이나 귀족이 죽었을 때 처(妻)와 종자(從者)를 함께 매장하던 제도이다, 우리나라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순장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신라 지증왕 3년(502년)에 순장을 금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기독교에서 죽음은 망(亡)이 아니라 곧 영생의 길인 것이다, 고로 미망인이 아니라 "고인의 부인"으로 할 것을 제86회 총회에서 결의하였다.
41. '삼우제'가 아니라 "첫 성묘"로
장사지낸 지 3일 만에 묘지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삼우제(三虞祭)이다, 우제(虞祭)는 장례를 치루고 걱정이 돼서 올리는 제사인데 장례를 한날 돌아와서 초우를 지내고, 다음날 아침상식 때 재우를 지내고, 3일째 산소에 가서 지내는 것이 삼우제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제사는 드릴 필요도 없고, 고인을 산에 묻고 온 후 그 산역이 잘 되었나 살펴보기 위해 3일 만에 찾아 가서 묘지를 돌아보는 것이니 '삼우제' 대신에 "첫 성묘"로 부르는 것이 좋겠다고 제86회 총회에서 결의하였다.
그리고 현재 사용 중인 장례 용어 중에 임종 예배, 위로(조문) 예배, 입관 예배(가족 상면 예배), 장례 예배, 하관 예배(매장 예배 또는 산골 예배) 등 여러 가지로 기독교에 걸 맞는 말로 조어하여 사용되고 있으나, 미흡한 점이 많아 앞으로 고유한 우리 민족의 정서와 기독교 문화와 순화될 수 있는 아름답고 부르기 좋은 새로운 용어가 창출되기 바란다. (전거 ; 최태웅 장로 지음 도서출판사 카이로스 2006. 07. 10 발행,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 P 223 - 241에서 발췌)
(10). 마지막으로 일반 교회 용어
42. '일요일'을 "주일"이라 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지 사흘이 되는 날, 즉 '안식 후 첫날'(마28;1,막16;2,눅24;1,요20;1)에 부활하셨다, 이 안식 후 첫날은 일요일인데 이 날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이며 우리 믿는 자들에게 부활 신앙을 확증한 날이 되므로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이 날을 "주의 날"로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입에서는 언제나 '일요일'이 아닌 "주일"이라 불러야 한다(제87회 총회결의)
43. '태신자'란 용어는 부적절하다
전도해서 꼭 신자로 만들겠다고 속으로 작정한 어떤 특정한 사람을 '태신자'라고 하는 말을 종종 듣고 있다, 임산부의 태 안에 들어있는 생명체를 태아라 부르는데서 연유하여 앞으로 출생할 신자라는 뜻으로 하는 말인데 이것은 매우 부적합한 용어이다, 태아는 누구의 배속에 들어 있단 말인가?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이 거북한 말을 당사자가 듣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의아해 하거나 씁쓸한 느낌이나 불쾌감을 갖지나 않을는지 생각해 봄직도 하다, 그러면 당사자가 듣지 못하도록 전도하는 사람만 써야만 하는 말이 되어서도 안 되며 우리들의 기독교 교리나 용어는 모두 오픈되어야 한다, 제87회 총회에서는 이 '태신자'란 말은 쓰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44. '사단의 역사'라는 말은 옳은가?
우리는 어떤 큰 시험으로 생각되는 일을 당하면 '이것은 사단의 역사가 분명해'라고 별로 생각 없이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역사"란 하나님이나 성령님이 어떤 일을 행하거나 이루시는 것, 또는 그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섭리" "영광" 등이 하나님에게만 쓰일 수 있고 사단에게는 쓰일 수 없듯이 "'역사"도 사단에게는 쓰일 수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역사'라고 하는 표현은 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사단의 역사'는 '사단의 힘'(공동 번역), '사단의 작용'(표준 새 번역), '사단의 능력'(현대인 성경) '사단의 활동'(개혁 개정)으로 바뀌었다.
45. '영광'의 주인은 하나님뿐
두란도 성경 사전에는 '영광'을 "신의 현현에서 나타난 광채 또는 빛남을 말한다, 하나님의 근본적 성격 또는 그것의 현현을 말할 때 사용된다, 현현(顯現)이란 명백하게 나타냄을 뜻하는 말이니 영광은 하나님이 나타내실 때 의 빛남을 의미하는데 이는 하나님 성격이 빛나기 때문이다, 성경적 용어로서의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이므로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하고 우리의 영광은 아니라는 것이며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가 될 뿐이지 영광의 주인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영광이라는 말은 쓰는 것은 삼가야 한다.
46.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야
은혜(恩惠)란 공로 없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며 속성이다, 이 은혜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심이며, 대신 죽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에게 영생이라는 선물을 값없이 주시는 것을 말한다, 결국 은혜는 인간에게 선(善)한 의지(意志)로써 다가오는 하나님 그 자신이라 할 수 있다, 은혜는 나 같은 죄인을 자녀 삼으신 것, 귀한 직분을 주신 것, 믿음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건강을 주신 것, 심지어 육체의 가시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나의 인간적 욕망이나 이해 관계 등에서 충족될 때, 하나님 은혜로---'라고 말하는 것은 삼가야 된다, 즉 "얼마 전 졸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상대방은 중상인데 나는 안 다쳤어, 하나님의 은혜지---" 이런 경우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가하면서 요행이 나만 득을 볼 경우, '하나님 은혜'라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감사와 감격으로 하는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귀한 말이다, 우리는 이 말의 깊은 뜻을 깨닫고 분별하여 사용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47. '성경'과 '성서'의 차이점
경(經)은 글, 법, 경서 등의 뜻을, 서(書)는 글, 책, 글씨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글자이다, 서(書)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모든 책을 다 포함해서 쓰는데 비해, 경(經)은 주로 경전의 의미로 국한해서 쓰이고 있다, 1938년 개역 성경이 나온 이후 우리는 줄곧 "성경"으로 쓰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음을 감안하여, '성서'를 지양하고 "성경"으로 쓰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불교에 관한 서적들을 불서(佛書)라 하며 교리를 밝힌 책들을 불경(佛經), 또는 불전(佛典)이라 한다, 성경을 영어로 Bible이라 한다, 책이 Book일진데 성스런 책인 성경을 Holy Book이라 하지 않고, Holy Bible이라고 쓰는 것도 같은 맥낙이다, 성서라는 말은 복음주의 전통 신학자 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로 쓰고 있음도 생각해 볼 일이다.
*좀더 깊이 있고 구체적인 전거가 필요하신 분은 최태웅 장로 지음 도서출판사 카이로스 2006. 07. 10 발행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책을 기독교 서점에서 구입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전거 ; 최태웅 장로 지음 도서출판사 카이로스 2006. 07. 10 발행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P 245-247, 269-271, 287-289, 296-298, 309-311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