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상징주의의 최고봉이었던 보들레르 시인은 "파리의 우울"을 자신 스스로가 '이상한 책'
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시를 '소산문시'라고 소개하며 "리듬과 각운이 없으면서도 충분히
음악적이며, 영혼의 서정적 움직임과 상념의 물결침과 의식의 경련에 걸맞을 만큼 충분히 유연
하면서도 동시에 거친 시적 산문"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상징성이 무척이나 많은 에세이를 접한 느낌이었다.
만약 주석이 없었더라면 보들레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 등장하는 산문시 "이방인"은 보들레르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었다.
<이방인>
- 수수께끼 같은 친구여, 말해보아라, 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아버지?어머니? 누이나 형제?
나에겐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형제도 없소,
- 친구들은?
당신은 오늘날까지 내가 그 의미조차 모르는 말을 하고 있구려
- 조국은?
그게 어느 위도 아래 위치하는지도 모르오.
- 미인은?
불멸의 여신이라면 기꺼이 사랑하겠소만,
- 돈은 어떤가?
당신이 신을 싫어하듯, 나는 그것을 싫어하오.
- 그렇군!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느냐.
불가사의한 이방인이여?
나는 구름을 사랑하오,,,,,,흘러가는 구름을,,,,저기,,,,저기....저 찬란한 구름을.
자신을 이방인에 비유한 보들레르,,,그는 속세에 아무런 욕망이 없다, 단지 그가 추구하는 것은
'구름'이 상징하는 이상..이곳이 아닌 다른 삶에 대한 갈망을 끝없이 추구한 인물이었다.
늘 권태와 우울속에 지친 그는 마약과 술로 자신을 몰고갔으나 그곳에서도 자유와 안정을
얻지는 못한 듯 하다. 시속에 드러나는 시인은 파리를 지독하게 사랑한다. 하지만 파리의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고독한 존재이다. 그의 시선은 늘 불쌍하고 늙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시선이 가
머무르지만 그들과는 다르다는 자부심,,,댄디즘에 사로잡힌 그는 그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지만
그들곁에 다가갈 수는 없다.
<벌써>
마침내 해변이 보인다는 신호가 있고, 그쪽으로 다가감에 따라 그것이 눈부시게 빛나는 굉장한
육지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선 삶의 음악이 어렴풋한 속삭임으로 흘러나오고, 갖가지
초목이 풍요한 이 해안으로부터 꽃과 과일들의 감미로운 향기가 몇십리나 되는 멸리까지 풍겨나가고
있는 듯 했다.
곧 모두 기뻐하며, 우울한 기분을 버렸다. 자질구레한 모든 싸움도 잊고, 서로 간의 모든 잘못도 용서
하였다. 약속되었던 결투도 기억에서 지워벼렸고, 원한도 연기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나만이 홀로 서글펐다.
상상도 못할만큼 서글펐다. 신성을 박탈당한 사제처럼, 나는 가슴을 에는 듯한 서글픔 없이 떠나갈
수가 없었다. 놀라운 단순성 속에 그처럼 끝없이 변화무쌍한 이바다에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 지금도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살게 될 모든 영혼들의 기분과 고통과 법열을 제속에 간직하고
그것들을 제 유희와 걸음걸이와 분노와 미소로 나타내는 듯한 이 바다에서!
이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에 작별을 고하며 나는 죽을것 처럼 낙심하였다. 그래서 배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마침내!"하고 말할 때, 나만은 "벌써!"라고밖엔 달리 외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육지였다. 그 소음과 그 정열, 그 안락과 그 환락이 있는 육지였다. 그것은 풍요
하고 굉장한, 약속들로 가득한 육지, 우리에게 신비로운 장미향과 사향을 날려 보내고, 또
그로부터 삶의 음악이 사랑의 속삭임 되어 들려오는 육지였다.
<취해라>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해라,
그리고 때때로 궁궐의 계단위에서, 도랑가의 초록색 풀위에서, 혹은 당신 방의 음울한 고독 가운데서
당신이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버리거든, 물어보아라, 바람이든, 물결이든, 별이든,
새든, 시계든, 지나가는 모든 것 , 슬퍼하는 모든 것, 달려가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게 지금 몇 시인가를, 그러면 바람도, 물결도, 별도, 새도, 시계도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다. "이제 취할 시간이다!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취해라! 술이든,
시든, 덕이든 무엇이든 당신 마음대로."
시간의 무게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무조건 취하라...보들레르가 말하는 도취는 자신이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도취의 순간은 원하지 않아도 어느 때인가는 깨야만하고
그 깨어남은 그에게 또다른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감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탁월한 시인의 감성으로 느낄 수 밖에 없는 삶의 고통을
시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가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하거나 사람들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그의 시가 이렇게 우울하고 힘들지는 않았을텐데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