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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당연히 우리가 1등이다"
튜브 엔터테인먼트의 김승범 대표
2001.02.12 / 오동진, 이지훈 기자
"올해는 당연히 우리가 1등이다. 라인업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근데 배급시장은 매년 바뀐다. 디즈니가 한 해 일등한 다음에 콜럼비아가 일등할 수도 있는 것처럼 올해는 1등이 가능하지만 내년엔 안 될 거다."
처음에는 컨설팅 회사 직원이었다. 조금 있다가는 창투사의 수석 투자심사역이 됐다. 그리고 지금은 메이저를 꿈꾸는 배급사 사장이 됐다. 김승범 튜브엔터테인먼트 사장 얘기다. 그의 지난 5,6년은 국내
영화계 격동의 현장 한가운데였다. 그 파고를 헤치고 그는 메이저로서의 등극을 자신만만해 한다. 정상의 자리를 위해 지난 1년을 준비해
온 남자. 그 남자와의 준비된 대담, 기다려온 만남.
오동진 기자: 올해 튜브는 시네마 서비스, CJ 엔터테인먼트의 2강
배급구조를 치고 들어가 배급의 3강 구도를 만들겠다는 계획인가?
김승범 대표: 내가 늘 생각해왔던 거다. 재밌는 게 뭐냐면, 배급에
대해 시네마서비스나 CJ가 어쩌구 저쩌구 하기 시작한 게 불과 3,4년
밖에 안 됐다는 거다. 95년에 내가 제일 처음 <은행나무 침대> 할 때,
극장이 몇 개였는지 기억하나? 서울에서 겨우 6개였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게 말이 되나? <접속>도 7개였다.
이지훈 기자: 요 몇 년 동안 한국영화 상황이 정신없이 변했으니까.
김: 근데 불과 3년 정도가 지나니까 프린트 100벌씩 떠놓고 서울 45개씩 지르더라. 이러니 배급, 배급들 하게 된거지. <은행나무 침대>는
신씨네 신철 사장이 혼자서 프린터 30벌 들고 지방까지 다 다녔다.
오: 그게 맞는 얘기가, 3년 전만 해도 배급 가지고 기사 안 썼다. 근데
요샌 화제가 되는 영화를 쓰려면 스크린 수 몇 개, 배급 누구, 이거부터 쓰니까.
김: 가장 큰 이유는 직배사가 갑자기 미국 배급방식을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이다. 한국 지사장들 경영성과를 개봉 첫날 좌석수로 따지기
시작했으니까. 좌석수 늘리려면 스크린수 늘여야지 별 수 없지 않나?
심지어 코아 아트홀이나 동숭아트센터 같이 아트영화 하던 데까지 찾아가서 "니네 할래?" 이렇게 된 거다. 아트영화가 좋아서 한 게 아니라
영화가 없어서 하고 있던 극장은 "어유, 감사합니다"하고 다 받아버린
거지. 그 결과가 두 가지다. 아트영화 시장이 다 없어져 버렸고, 한국영화도 직배와 경쟁하다 보니까 2-30개씩 스크린수를 늘리게 된 거다. 이런 배급경쟁은 굉장히 큰 폐해를 낳고 있다고 본다. 실제로 영화라는 건, 관객 10만짜리는 10만 먹고 20만짜리는 20만 먹는다. 어떻게 해서든. 처음엔 반응이 없더라도 입소문 나면 다 들게 되고. 옛날
배급방식이 제작자들한테는 덜 위험했지. 근데 지금은 다 사장되는
분위기다. 이건 미국이나 홍콩식 배급이다. 홍콩에 가보면, 볼 수 있는
영화가 두세 개 밖에 없다. 한꺼번에 쫙 걸고 한꺼번에 바꾸니까.
오: 배급의 문제점이나 위험을 다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새롭게 3강
구도 재편을 준비한다고 하면 그 폐해를 방지할 복안이 있나?
김: 사실은 나도 없다. 산업이란 게 우리 혼자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싫지만 이렇게 따라 가야 한다. 배급력을 과시해야 되고,
좋은 영화 가지고 압력을 넣으면서 안 좋은 영화 붙여야 되고. 극장 쪽에서 1년 라인업 보고 영화 없으면 다른 배급사 찾아가서, 뭐 없냐?
이렇게 가니까.
오: 그런 면에서 2강에서 태클을 걸겠다.
김: 아직은 다행히 경쟁자로 생각을 안 하는 것 같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 라인업이 별로 인식이 안 됐는데, 웃기는 게 뭐냐면, 그 전에 극장들한테 라인업 다 나눠줬는데도 안 보고 있다가 <왓 위민 원트>가
좀 되니까 "올해 튜브는 어때?"하면서 굉장히 심할 정도로 많이들 찾아온다. 올해 튜브 라인업이 아주 좋다. 자기네들도 보니까 웬만한 직배사보다 낫거든. 한국영화, 일본영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골고루 섞여있고.
이: 극장주들이 라인업을 보고 그런 얘기를 한다는 건, 배급이란 게
힘의 논리이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작품의 질이 가져오는 영향력이 우선이라는 얘긴가?
김: 그렇다. 작년에 튜브는 올해 배급할 물량을 준비하는 기간이어서
한동안 배급이 끊겨 있었다. 작년에 준비하던 한국영화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나 <2009 로스트 메모리즈>나 <파이란> 같은 것들이
올 초에 알려지면서 갑자기 관심이 우리한테 쏠리고 있다. 아직까지도 극장은 스크린쿼터 때문에 한국영화를 우선해서 본다. 그래서 한국영화를 적당히 배치해 놓은 다음 외화들을 접촉하고 있다. 직배사한테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한국영화다. 극장들이 직배사한테 그러거든, "니네 거 해주고 싶어도 쿼터 때문에 한국영화 해야 된다"고.
오: 직배사가 한국영화 배급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결국은 쿼터 때문
아닌가?
김: 그렇다. 직배사가 유일하게 약한 부분이 그거니까. 자기네 배급
라인업에 한국영화가 끼어있어야 쿼터도 유지해주면서 라인을 계속
살릴 수 있으니까.
오: 튜브는 요새 KTB하고 뭔가 준비 중이지 않은가?
김: 튜브는 투자사에서 배급사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도 다양한 투자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KTB, 삼성벤처 등과 얘기를
하고 있다.
오: KTB에서 봤을 때는, 배급사가 한두 개 업체로서 독점화 되는 거보다 다양하게 배급구조가 유지되는 게 투자의 위험이 덜 하다고 생각할 거다.
김: 배급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 그렇게 생각한다.(웃음)
이: 작년 한해 같은 경우엔 물량도 없었고, 배급하는데 힘들었겠다.
CGV랑 마찰도 있지 않았나?
김: 그렇다. CGV하고 갈등이 있었는데, 영화가 약한 배급사와 큰 극장의 관계니까 배급 논리상 당연히 그랬다. <가위>랑 <포스트맨 블루스>, <왓쳐>, 뭐 한 네 편 했는데 큰 영화가 하나도 없었다. 해보니까
영화업종 중에 제작업, 수입업, 상영업 뭐 여러 개가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창립자금이 많이 드는 게 배급사다. 제작이야 좋은 감독에 좋은
스탭, 좋은 배우, 좋은 시나리오 정도만 준비 열심히 하면 지금 돈대줄
사람이 많다. 근데 배급은 다르다. 올5월까지 우리가 필요한 돈이 300억이다. 왜냐면, 배급을 하려면 적어도 1년치 물량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그때그때 사서 배급하는 거? 이젠 천만의 말씀이다. 극장한테 1년치 라인업을 던져 줘야 한다.
오: 그게 정상이다. 그래야 극장도 준비를 한다.
김: 우린 벌써 작년 12월 말에 올해 배급할 15개 내지 16개 물량을 몇
월 몇 일 날짜까지 박아서 다 돌렸다. 거기에 안 올린 작품까지 하면
올해 한 25,6편 정도 갖고 있다. 한국영화 6편의 제작비만 300억이 넘어 간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라는 말이다. 두 가지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는 자금확보 능력, 또 하나는 작품확보 능력이다. 이 두 가지가 다 있어야 배급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강제규 필름이나 싸이더스에서, 자 오늘부터 배급하자, 이러면 내일부터 배급이 되나? 안 된다. 배급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1년 정도 후에, 그것도
진짜 열심히 준비했을 경우에 그렇다. 적정 공급물량이라는 게 1년에
15~20편 정도는 대줘야 하는 거다. 강제규 감독, <쉬리> 만들고 나서
<단적비연수> 나올 때까지 무려 1년 6개월 걸렸다. 우리나라 제작사라는 게 1년에 한 작품 하기도 어려운데, 배급 한다는 건 말도 안된다.
단지 공동의 이익을 생각해서 싸이더스, 명필름, 또 다른 영화사 몇 개
더 붙어서 제작은 따로 하되 배급은 같이 하겠다 한다면 그건 또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그렇게 하려고도 했었고.
오: 할리우드 영화에 선투자도 하지 않았나? 3-4백만 달러 정도씩.
김: <왓 위민 원트>도 그랬고, <툼 레이더>도 마찬가지다.
오: 그런 면에서 위험부담이 크지 않나? 적절한 비교가 될지 모르겠지만, 동아수출공사에서 <하드 레인>을 굉장히 크게 선투자했다가,
정말 손해 많이 봤던 걸로 기억하는데.
김: 맞다. 위험하다. <왓 위민 원트>가 제대로 안나왔거나 <툼 레이더>가 제대로 안 나와주면 우리가 그 피해를 다 물어야 되니까. 굉장히
위험하지만 배급 라인업을 세우기 위해선 그런 큰 영화가 있어줘야
한다. 예를 들면 삼성영상사업단이 <쉬리>에 투자한 것도 그런 케이스였다. 삼성은 당시 한국영화들의상당수가 버거운 예산으로 가니까
차별화한다면서 <정글스토리> <세 친구> <코르셋>같은 작은 영화들을 했다. 근데 이게 다 실패한거다. 고민하던 차에 뉴 리젠시 영화들을
계약하고 배급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니까 <쉬리> 같은 영화를 선택했던 거다. 어떻게 보면 위험한 프로젝트였지. 원래 강제규 감독이 쫓아다닌 건 나였다. 투자해달라고. 난 도망다녔었고. 강 감독이 순제작비
24억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40억 짜리였다. 그거 회수하려면 서울에서 6-70만이 들어야 되는데, 당시엔 1년 40만 넘어가는 영화가
끽해야 두 편이었다. 그럼 삼성은 왜 했나? 강감독은 날 쫓아다니는데, 삼성은 강감독을 쫓아다녔다. 그러다가 내가 최종적으로 거절하니까 삼성에서 했던 거다. 역시 배급 때문이었다. 큰 영화를 라인업에
넣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투자 결정한 다음에 바로 다른 투자사들한테 지분을 팔았던 거다. 위험 부담을 줄이려고. 난 그게 맞다고 본다.
<툼 레이더>는 자신이 있어서 한 거지만 자신이 있다고 우리가 100%
리스크를 모두 안고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누가 됐든 관심이 있는
회사에 지분을 할애해야 한다. 우리는 배급사니까 배급을 통해서 오래 가야지, 한 편 한 편에 회사가 흔들려선 안 된다. 나는 우리의 적정
지분이 한 영화당 3-40%를 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배급업의 기본은 좋은 영화를 터트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위험 요소를
줄여서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거다.
오: 그러니까 예전의 홈런 방식은 안된다는 얘기가 아닌가?
김: 맞다. 플러스, 마이너스 200% 씩 순이익이 왔다갔다 하는 배급사는 절대로 오래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제작사는 우리나라 구조에선 큰 피해가 없지 않은가? 손해 봐도 투자사들이 다 챙겨주고.
배급사로선 자기가 투자 위험까지 다 안게 되면 이거 힘들어지지. 난
플러스, 마이너스 2-30% 정도를 유지하면서 배급 수수료나 관리 수수료 같은 이익으로 먹고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이: 한 극장이 튜브하고만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했을 때, 지금
튜브 라인업 중에 포함된 한국영화만으로도 충분히 스크린쿼터를 채울 수 있지 않나?
김: 그렇다. 6편 정도 되니까. 물론 얼마 만큼 히트가 되고 롱런으로
가느냐가 중요하겠지만.
이: 근데 문제는 올해 튜브가 하려는 한국영화들을 보면 예산 규모가
굉장히 크다는 거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내츄럴 시티>... 이런 것들이 배급력 장악에 큰 포인트로 작용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 제작비 상승을 지나치게 부추기는 거 아닌가?
김: 맞다. 기본적으로 잘못된 거다. 배급사가 일반적으로 가져가야 할
라인업으론 잘못된 거다. 근데, 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신생 배급사라 우리가 라인업을 조정할만한 힘이 없다. 시네마 서비스처럼 위성
제작사가 많아서 넌 큰 영화하고 또 넌 작은 영화하고 이러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해야 한다. 회사를
만든 후 그동안 150-160편 가까이 시나리오를 받아봤다. 그 중에 선택한 게 올해 들어가는 6편이다. 뽑아놓고 보니까 전부 예산이 높은
것들이었다.
이: 취사선택할 수 있지 않았나? 결과를 보고 다른 걸 취할 수도 있었고.
김: 그런데 영화라는 게, 한번 좋다고 생각하면 남 주기가 싫어진다.(웃음)
오: 하루에 시나리오는 몇 편이나 검토하나?
김: 난 요즘 많이 못한다. 우리 제작관리부에서 1차로 거른다. 보통 일주일에 서너 편씩 들어왔는데 요샌 여섯, 일곱 편씩 들어오는 거 같다.
오: 영화 <플레이어>를 보면 어마어마한 시나리오가 제작자한테 들어오는데, 어떤 건 봉투도 안 뜯고, 어떤 건 읽지도 않고 버린다. 투자나
제작, 배급 결정을 할 때 시나리오를 보는 스타일들이 있는 것 같다.
시나리오를 다독하는 편인가, 속독하는 편인가?
김: 딱 한번 읽는다. 한 시간 반 정도. 옛날에 실패했던 영화들을 보면
자꾸 좋은 점을 발견하고 싶어서 두 번 읽고 세 번 읽고 했던 것들이다. 첫인상이 중요하다. 관객들이 영화를 두 번 보지는 않잖아. 요샌
밑의 직원들이 먼저 보고 브리핑해준다. 예전에 일신창투에 있을 때야 업무 자체가 투자라 시나리오를 많이 봤지만, 지금은 배급업이기
때문에 극장 사람들 만나거나 하는 일이 더 중요해진 거지. 또, 나도
이제 나이가 마흔이 다 돼가는데, 자꾸만 잘난 척 하게 된다. 괜히 시시껍절한 시나리오들을 안 보려고 하고. 지금 같으면 <할렐루야> 같은 영화는 들어오면 안 했을 거다. 근데 옛날엔 했다. 저급하지만 이거
재밌다 이러면서.
오: 강우석 감독이 배창호 감독이랑 <흑수선> 만드는 거는 어떻게 보나?
김: 강우석 감독은 굉장히 상업적인 거 같지만 의외로 다른 면이 있다. 강 감독은 자기가 충무로의 군주다, 그러니까 항상 좋은 것만 할
순 없다, 조금 힘들고 어려운 부분도 자기가 떠맡아야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처음에 강 감독이랑 싸움이 많았다. 내가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삼성, 대우, SK 3강 구도가 있었다. 그러다가 SK가
먼저 몰락하면서 대우가 약해지고, 일신이 부상하면서 일신이랑 삼성
2강이 됐고, CJ가 드림웍스 영화 가지고 막 들어올 때다. 그게 3년 전
얘기다. 시네마 서비스는 그때만해도 곽정환 회장이 서울극장에 붙일
영화들만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전국 배급 같은 건 생각도 안 했지.
곽회장은 쿼터 때문에 한국영화가 필요했고, 강 감독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강 감독과 얘기를 해보면 <퇴마록> 들어갈 때 날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98년 8월이이었는데,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이 강 감독이 <투캅스2> 이후 1년 만에 만든 영화였다. 일신은 그 때가 전성기였다.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스크림>, 하는 것마다
잘 됐다. 마지막으로 한 게 <조용한 가족>이었는데 사람들이 설마 저
영화까지 될까 했었다. 그것까지 터지니까 극장주들이 일신은 뭔가
있다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생과부...>가 8월 1일에 들어가고 나서 2주 있다 우리가 <퇴마록>을 건 거다. 그때 슬로건이 한국형 블록버스터였고 서울에서 30개 극장에 걸었는데, 이것 때문에 <생과부...>가 극장에서 다 떨어졌다. 강 감독 입장에선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도 모르는 내가 자기한테 슬픔을 주는구나 했겠지. 또, 중간에
우리 둘을 이간질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내가 설에
찾아가서 인사하고 하면서 풀어졌다. 그 양반 성격이 막 미워하다가도, 찾아가면 어 이제 우리 동지다, 그런 게 있다.
이: 일신에서는 왜 나왔나?
김: 직장생활 10년 했고, 이제 나와서 혼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 이유는, 98년 여름에 <퇴마록> 한 다음부턴, 내리 망했다.
<키스할까요?>, <닥터K>, 다 가기 시작했다. 2억에서 많게는 7억까지
일제히 가니까, 회사에서 나를 보는 시각도 변하더라. 넌 이제 맛이 갔구나 하고.
오: 일신에 있을 때 더 잠을 잘 잤나, 아니면 요새 더 잘 자나?
김: 처음엔 속 편해서 여기 와서 잘 잤는데, 내가 차린 거니까 더 못
자겠더라.
오: 나 같으면 70억을 질러 말어, 이런 생각하면 정말 잠을 못 잘 것
같다.
김: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그냥 직장생활 할 걸 하는 생각도 한다. 강우석 감독은 지금 한 400억 들어왔는데 앞으로 300억 더 필요하다고
하던데, 돈이라는 게 겁나는 거다.
이: 일신에서 회사 돈 가지고 할 때보다 지금이 더 소심해 질 수도 있겠고, 적극적이 될 수도 있을텐데, 어떤 편인가?
김: 더 적극적이 된 것 같다. 일신에 있을 때는 나한테 최종적인 권한이 없으니까 더 결정을 못했다. 오너가 못하게 하면 아무리 좋아도 못하는 거다. 그런데 지금은 좋으면 끝까지 주변을 설득해서 꼭 한다.
이: 영화가 될 거다 안 될 거다 하는 판단은 직관에서 나오나, 아니면
과학적인 분석에서 나오나?
김: 직관으로 한다. 서강대랑 한겨레 강의 나가면 학생들한테 이런 말
한다. 여러분들이 프로듀서 강의에 앉아 있지만, 영화에 대한 분석이나 시나리오 많이 읽고 이런 거 백날 해봤자 좋은 영화를 하기 힘들다,
오히려 인문학적 소양을 위해 책 많이 읽고 음악 많이 듣고 젊은애들이 뭘 좋아하나 그런 거에 푹 빠져 살아라, 영화선택은 직관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오: 처음 영화를 시작한 게 신철 사장하고의 관계 때문 아니었나?
김: 그렇다. 대학 졸업하고 일본 가서 영화를 많이 접했다. 영화판에
들어오고 싶었는데 외아들인데다가 집이 어려워서 포기했다. 그래서
처음엔 월급 많이 주는 컨설팅 회사에 들어갔다. 그때 받은 월급이 일신 퇴직 때 월급하고 같았다. 한 1년 반 다니니까 재미가 없더라. 그래서 93년도부터 사장을 계속 꼬시기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영화에
투자하는 건 미친놈이라고 했다. 계속 설득했는데 안 되더라. 95년도에 신사장이 처음 찾아왔는데, 내가 동경했던 사람이 나한테 투자해달라고 했을 때는 정말 굉장히 떨리더라구. 그래서 이건 어떻게 해서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외설 춘향전> <엘리베이터> <은행나무 침대> 3작품 중 하나를 해달라고 해서, 내가 어떻게 고르냐,
당신이 봐서 될 것 같은 걸 골라달라고 했더니 <은행나무 침대>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사장을 또 설득했다. 그랬더니, 한번 해봐라, 하지만 단돈 10만원이라도 손해 보면 다시는 영화의 영자도 꺼내지 마라
해서 시작하게 됐다.
오: <은행나무 침대> 흥행 이후에 수익을 놓고 신씨네와 분쟁이 있지
않았나?
김: 분쟁이 아니라 수금이 안 된 거다. 신씨네로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동안 진 빚을 다 제하고 나니 수금하는데 4년이 걸렸다. 원금은
받았고 이익금은 작년에야 들어왔다. <은행나무 침대>로 단기간에 굉장히 많은 걸 배웠다. 그 때 투자자로서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웠다. 그
얘기하려면 한 이틀 걸릴걸.심지어 신철 사장 멱살잡은 적도 있으니까. 술 먹다가. 옆에서 오정완이가 말리고 그랬다고. 내가 신철 사장한테 그랬다, 당신이 뭔데 내 꿈을 짓밟냐고. 영화 잘 못해서 손해 볼 수도 있고 이익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신이 내 꿈을
짓밟을 권리는 없다고. 잃어도 좋고 망해도 좋은데, 투명하게만 해달라고 했다.
이: 기획시대와 튜브는 원활히 가고 있나?
김: 그렇다.
오: 기획시대 유인택 대표는 제작에 얼마나 관여하게 되나?
김: 유 대표가 과감하게 시작 시점부터 제작에서 빠지겠다고 했다. 참
편하게 해줬다. 대신 행정적인 문제들, 촬영장소인 부산시하고의 문제들, 뭐 이런 것들을 맡기로 했다.
이: 얼마 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제작 발표회 때 유 대표가 제작비를 좀 높게 발표해서 당황하지 않았었나?
김: 아하, 그 때 시끄러웠다. 제작발표회 때 한 40억 정도로 발표하려고 했는데 유 대표가 갑자기 70억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이: <흑수선>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과 같은 시기에 개봉할 거다.
오: 김동호 위원장이 상당히 고민하던데.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흑수선>을 할까, 아니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을 할까 하고.
김: 상관없다. 상업적으로 승부하는 거다. 영화제에서 각광 받고 이런
것보다도, 철저하게 상업적인 승부를 해야 한다.
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같은 영화는 워낙 장선우 감독 혼자 모든
걸 쥐고 있어서 투자사나 배급사 입장에선 굉장히 힘든 작품일 거 같다. 여러 영화사를 돌면서 말도 많았고.
김: 유니코리아에서 1년 여를 잡고 있다가 우리 회사 들어온 게 작년
4월인데 제작발표회 한 게 올 1월이니까 무려 8개월을 프리 프로덕션
한 거다. 맞는 얘기다. 장 감독이 모든 걸 쥐고 있는 게 문제다. 그래서
그 동안 우리가 했던 일도 장감독의 독자적인 권력구조를 분산시키는
거였다. 심지어 액션씬이 전체의 60%인데, 액션 쪽은 홍콩 무술감독한테 많은 걸 이양할 생각이다. 장선우 감독에게 모든 게 다 가있으면
당연히 위험이 커진다. 그런데 아직도 장 감독이 안 내놓는 부분이 있다. 액션 블록버스터는 풀콘티가 나와야 하고 테스트 촬영도 다 해보고 시작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오히려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그런 면에서 제대로 가고 있다.
오: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복거일씨의 <비명을 찾아서>를 원안으로 한 건가?
김: 그런 걸로 알고 있다. 1909년에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실패하고
100년 후에 식민지 상태로 그대로 있다는 가상역사 스토리다.
오: 소설이긴 하지만 굉장히 오래 전에 나온 거라 많이 잊혀져서, 오히려 독창성이 있겠다.
김: 요즘 세대는 안중근이 누군지 잘 모른다고 하더라. 이 영화는 어쨌든 역사적인 소재를 택했을 뿐 액션 블록버스터다. 처음 도입부 10분 정도는 완전히 액션씬이다.
오: 그동안 영화 쪽 일 계속해오면서 김 대표 자신도 많이 변했을 거
같다. 아이가 "아빤 뭐하는 사람이야?"하고 물으면 영화인이라고 스스럼 없이 말하나?
김: 그럼. 처음 시작할 땐, 에이 영화 하다가 안 되면 다른 거 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다.
오: 그건 한국영화 산업의 미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는 의민가?
김: 그렇다. 한번은 어떤 정치인 모임에 갔는데, 거기서 한 정치인이
"요즘 한국영화 극장가서 볼 만한 게 있냐?"고 하더라. 근데 그 사람이
극장가서 한국영화 마지막으로 본 게 8년 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요즘이란 말을 쓰나? 한번 가봐라, 달라졌다고 말해줬다. 얼마
전에 직원 공채로 4명을 뽑는데 2000명이 지원했다. 그것도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이쪽으로 인력이 오고 돈이 오는데 가능성이 있지 않나?
오: 지금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이기도 하니까, 정책을 간접적으로 주도해서 바꿀 수 있지 않나?
김: 95년에 영화에 상업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요즘은 돈이 너무
많다. 투자자들끼리 경쟁한다. 제작자가 투자사를 고를 정도다. 정부에서 할 일은 너무 상업화되지 않도록 오히려 상업자본의 눈이 안 가는 독립영화나 단편영화, 미디어 센터 같은 걸 지원하는 거다. 영화의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게 시급한 정책인 거 같다. 지금은 투자
전문조합이 10여개에 달한다. 다 합치면 천억 이상이 된다. 1년에 나올 수 있는 한국영화는 제작능력은 4,50편인데, 오히려 투자과잉이다. 요즘 충무로에서 영화 못 만들면 바보라는 말이 돈다. 그만큼 돈
타내기가 쉽다는 얘기다.
이: 투자자들이 몰리는 이유가 한국영화의 수익성이 높아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영화 외적인 투자대상이 많이 약해졌기 때문인가?
김: 두 번째다. 벤처거품이 꺼지면서 영화 말고는 사실 투자할 곳이
마땅히 없어졌다. 영화는 투자회수기간이 짧고, 어느 정도 투명성이
보장되고, 화려한 일이라는 생각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선호
대상이다. 충무로에서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금융자본은
다 좋은데 너무 빨리 나간다고 한다. 그 말은 정말 나약하고 바보 같은
소리다. 그 사람들은 수익 가능성이 안 보이면 당연히 나간다. 그걸 탓하지 말고 오래오래 있을 수 있도록 해 주면 된다. 금융자본보다 제작자의 문제가 더 크다.
이: 투자회수기간이 짧아 영화를 선호한다는 얘기는 여러 군데서 들었다.
김: 모든 것은 시장의 문제다. 레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성장하는
게 GNP와도 관련이 있다. 소득이 높아지고 삶의 질이 상승하면 노는
시간이 많아지고, 노는 시간이 많아지면 영화라는 게 합리적인 소비가 되는 거다. 아직까진 싸고 재미도 있으니까. 그래서 극장도 늘고,
멀티플렉스도 생기고 하는 거다. 동반상승하는 거다. 올 하반기부터는 공무원이 주 5일 근무하게 되는데, 그러면 극장 수익률은 더 높아질 거다.
오: 영화를 좋아하는 취향하고 영화를 사업적으로 선택하는 게 충돌하지 않나? 가끔은 좋아하는 취향의 작품이라 한번 해보자고 그러진
않나?
김: 취향찾다가 무리하게 한 영화가 <산책>이었다. <산책> 시나리오
보니까, 야 요거는 잘만 만들면 386세대에 맞는 영화겠다는 오버를
하게 됐었다.
오: 150~160편 중에서 10편이나 6편 선택할 땐 거절하는 게 더 힘들겠다.
김: 그렇다. <내 마음의 풍금>은 그래서 한 거다. 거절할 시간을 놓쳐서. 2억 정도 손해본 작품이다. 처음에 시나리오 보니까 아니었다. 그래서 안 된다고 했더니 다시 써오더라. 다시 쓰는 거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다시 써온 걸 봐도 아니거든. 그렇게 두세
번 하다 보니까 3-4개월이 지난 거야. 마지막에 이영재 감독이 툭 오더니만, 그래도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더니 "이제 거절 하시기엔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하더라.
이: 이영재 감독이 정곡을 찌른 셈이다.
김: 그때 대판 싸웠다. 이감독이 다시 쓴 거지 내가 결정을 연기한 거냐 했더니, 그래도 끝까지 아니라는 거야. <북경반점>도 진짜 이상하게 시작한 영화다. 김의석 감독의 열의와 안동규 사장이 너무 밀어붙여서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잘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했다. 근데 진짜 그 사람들을 위하는 투자자라면 냉정할 땐 냉정해지는 게 결국엔 도와주는 것 같다.
오: 개인적으로 본받으려는 사람이 있나?
김: 이세키 사토로라는 투자자를 존경했다. 옛날에 <스모크> 한 사람인데 지금은 망했을 거다(웃음). 배급사 하면서는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이건 제작사하곤 다르다. 무슨 동호회처럼 재밌게 한번 만들어보자 해선 안 된다. 영화 하나 터지면 가서 막 파티하고 회식하고 세상
다 만난 것처럼, 또 안 되면 애들 패고. 절대 그런 걸로 가선 안 된다.
코스닥에서도 상위 레벨로 가야 할 회사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합리적이고 구조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난 영화일이란 게 매뉴얼만 만들어 놓으면 전체 일의 80%가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개봉 40일 전부터 뭘 해야되는 지를 꼼꼼하게 따지는 건 매뉴얼로 다 해 놓을 수 있는
거거든.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30개 주문할 때는 당연히 가져가는 거잖아. 그런데도 파는 애는 여기서 드실거예요, 가져가서 드실 거예요
꼭 물어보잖아.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러운 비유지만 그런 식으로 매뉴얼화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올해 시네마 서비스, CJ 엔터테인먼트, 튜브 3강 체제에서 어느
정도 위치까지 올라설 거라고 예상하나?
김: 올해는 당연히 우리가 1등이다. 라인업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근데 배급시장은 매년 바뀐다. 디즈니가 한 해 일등한 다음에 콜럼비아가 일등할 수도 있는 것처럼 올해는 1등이 가능하지만 내년엔 안 될
거다. 1등하고 안하고보다 지속적으로 나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내년 초가 됐을 때 배급 3강 이야기가 나올 수 있도록 할 거다. 근데 솔직히 2강이냐 3강이냐가 중요한 건 아니지. 실제로 회사가 이익을 내고 주주들이 돈을 버는 게 중요한 거다.
이: 마지막 질문이다. 요즘 행복한가?
김: 너무나 행복하다. 일단 재밌으니까. 후회되는 일 하나도 없다. 행복한 가장 큰 이유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앞일만 생각하니까. 영화
한두 편 깨졌다고 울고 있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