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선거혁명' 문턱서 좌절…"애인이 마지막 경고장 보냈다"
[7.28 재보선] 민주당 안방에서 '민노당 선전' 의미는?
기사입력 2010-07-28 오후 11:17:48
딱 한 뼘이 부족했다. 민주당의 안방 광주에서, 사상 처음으로 민주당 후보의 턱 밑까지 쳐들어갔던 민주노동당이 석패했다. 야권연대의 상대였던 민노당을 향해 "한나라당의 2중대"라며 원색적 비난을 퍼부을 만큼, 선거 기간 위기감을 느꼈던 민주당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됐다.
하지만 비(非)민주 단일후보가 예상치 못했던 바람을 일으켰던 것은 그 자체로 상당한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영원히 변할 것 같지 않던 든든한 애인이 배신의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광주 민심은 민주당에게 경고장과 동시에 마지막 기회를 주는 선택을 한 셈이다.
거대한 골리앗과 맞서 '선거혁명'의 가능성을 만들어냈던 민노당은 졌지만, 이겼다.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광주에서 균열의 첫 삽을 뗀 주인공이 됐다. 2012년 총선은 물론이고 대선에서의 야권연대를 위한 협상력도 덩달아 높아지게 됐다.
민주당, 간신히 안방 지켰지만 체면 다 구겼다
▲광주 남구에서 민주당 장병완 후보가 2만6480표로 55.91% 득표율을 기록해 당선됐다. ⓒ연합뉴스
28일 치러진 재보궐 선거 광주 남구 선거구의 개표 결과 민주당 장병완 후보는 2만6480표로 55.91% 득표율을 기록했다. 민주노동당 오병윤 후보는 2만877표를 얻어 44.08%의 득표율을 나타냈다. 득표율만 놓고 보면 11.83%포인트 차이였다.
"민주당 공천장만 받으면 마른 나뭇가지에서도 꽃이 핀다"던 광주에서의 패배라는 치욕은 면했지만 자존심은 이미 있는 대로 다 구겨졌다.
당초 재보선 초기 야권연대를 얘기하며 민주노동당은 광주 남구를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민주당은 콧방귀를 꼈었다. 거의 다 잡은 고기도 아니고, 손 안에 쥔 고기를 달라는 건 양보가 아니라 무조건 내놓으라는 협박이라는 것이었다.
정작 선거가 시작되니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오병윤 민노당 후보는 단일화 이후 급격한 속도로 상승세를 탔다. 지지율이 올라가자 민노당은 "이제는 (광주 남구를) 준다고 해도 안 받는다"며 자존심을 세웠다.
끝내 민주당은 중앙당 지도부가 하루 뒤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해야 할 정도의 비난까지 동원하며 "힘을 실어 달라"고 엎드렸다. 오랫동안 공생의 관계를 유지해 온 시민단체에게도 "도를 넘지 말라"며 감정을 드러냈다. 위기감의 발로였다.
인물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장병완 후보는 13명의 예비후보를 제치고 당에서 영입한 인사였다. 기획예산처 장관 경력도 가지고 있다. 광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물론 전남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오병윤 후보와 비교하면 덜 친밀하다 할 수는 있지만 광주 남구와 별다른 인연이 없기는 오 후보도 마찬가지다. 여러 차례 선거 출마 경력이 있는 점이 오 후보의 장점이기는 하나, 17대 때는 광주 서구갑에서 18대 때는 서구을에서 출마했었다.
"이번에는 경고 수준에서, 그래도 안 변하면 다음에는 '민주당 심판'?"
광주에서의 고전은 민주당에게 광주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광주는 민주당의 그야말로 안방이다. 누구에게도 내줄 수 없는, 저지선 것이다. 광주를 빼앗기면 수도권은 더 볼 것도 없다.
이런 광주가 민주당에게 "배신할 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보냈다. 다른 말로는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단기적으로는 지난 지방선거 광주시장 후보 공천 과정에서 발생했던 여러가지 '잡음'에 대한 비판이다. 광주에서 민주당은 서울 여의도의 한나라당과 다를 바 없는 권력이다. 당연히 공천장을 쥐기 위한 지저분한 다툼도, 각종 비리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져 나온다.
장기적으로는 민주당의 '혁신'에 대한 바람 때문이다. 민주당이 2012년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성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질책인 것이다. 민노당도 선거 과정에서 이를 적절하게 자극했다. 오병윤 후보는 선거 기간 노골적으로 "2012년 정권교체는 민주당만으로는 안 된다"며 "더 큰 승리를 위해 양보할 줄 모르는 민주당에게 경고장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 오병윤 민주노동당 후보는 선거 기간 노골적으로 "2012년 정권교체는 민주당만으로는 안 된다"며 "더 큰 승리를 위해 양보할 줄 모르는 민주당에게 경고장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연합뉴스
결국 오병윤 후보가 얻은 44%의 마음이 민주당에 대한 완벽한 배신으로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광주 민심은 재보선에서 민주당에게 '이번에는 경고에서 그치지만 계속 무시하면 다음에는 민주당 심판이다'라는 사전 경고를 보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도 투표 마감 직후 기자들과 만나 "광주에서는 정신 차릴 정도로 이겼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제2야당 입지 굳힌 민노당…"졌지만 이겼다"
민노당은 창원에서의 권영길 재선, 사천에서의 강기갑에 이어 또 다른 지역구 의원 배출 가능성을 확인시키며 제2야당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것도 기아자동차 등 민주노총 조합원도 거의 없고 대부분의 주민이 중산층으로 광주에서 가장 민노당 기반이 약하다는 남구에서 이룬 쾌거다.
광주 현장에서 개표상황을 지켜본 민노당 이정희 신임 대표는 "민주당은 과거로 회귀하려고 했지만, 우리는 이미 정치적으로 이겼다"며 "승리한 선거였다"고 자평했다. 민노당 관계자도 "비록 졌지만 민주당 핵심 지지층에서 균열의 기미를 드러낸 것은 승리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광주에서는 이미 2006년 지방선거 이후 시의원, 도의원을 놓고 치러진 재보선에서 민노당이 민주당과 맞붙어 대부분 이겼던 경험도 가지고 있다.
광주에서의 선전을 계기로 2012년 총선과 대선 국면에서 민노당의 위상은 한 층 더 높아질 수 있다. 앞으로는 광주 등 호남은 제쳐 놓고 나머지를 주고받는, 기존의 민주당식 야권연대 협상은 무의미해진다.
광주에서의 선전이 엄밀히 말하면 민노당 자력으로 해낸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는 있다. 오병윤 바람은 '광주에서의 한나라당'인 민주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의 '야권연대'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더욱이 광주지역 시민단체도 민주당으로부터 "순수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오 후보를 적극 지원했다.
당연히 지난해 10월 안상 상록 재보선에서부터 민노당이 밀고 나와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정점을 이뤘던 '연합정치'의 흐름은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민노당은 2012년 대선까지 독자성 보다는 야권연대에, 그것도 진보신당 등 다른 진보정당보다는 민주당과의 연대에 무게 중심이 쏠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정민 기자
'운짱' 정세균 '사면초가'…민주당 "국민이 무섭다"
[7.28 재보선] 안일한 공천…'야권단일화=승리' 아니다
기사입력 2010-07-28 오후 11:53:41
불안감은 현실이 됐다. 전체 8곳에서 벌어진 7.28 재보선에서 민주당은 3석을 얻는 데 그쳤다. 5개가 기존 민주당 소속 의원의 지역구였던 것을 감안하면 참패다. 더욱이 송영길 인천시장이 3선했던 민주당 텃밭, 인천 계양을 한나라당에게 내줬다. 역시 민주당 안방인 광주 남구에서는 민주노동당이 턱 밑까지 쫓아왔다.
투표함을 열기 직전까지도 민주당 안팎에서는 "5석 이겨야 본전"이라는 평이 대세였다. 엄살을 떨었다지만 선거 초반 "1석이라도 건지면 다행"이라던 한나라당은 5석이나 가져갔다. 서울 은평을에서는 야권의 후보 단일화에도 불구하고 이재오 당선자가 2위 장상 후보와 20%포인트 가까운 격차를 내며 가뿐히 승리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이날 밤 10시가 넘어 당사 상황실에 모습을 드러내 간단한 인사만 한 뒤 곧바로 자리를 떴다. 정 대표는 굳은 표정으로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겠다"는 말만을 남겼다.
투표 마감 직후만 하더라도 예상 외의 높은 투표율에 잔뜩 고무돼 있던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 등 다른 지도부도 개표가 진행되는 내내 단 한 번의 환호도, 박수도 없이 조용하게 개표 상황을 지켜보다 10시 20분 경 자리를 떴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장상 후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인천은 너무 안일한 판단을 했던 것 같다"며 "국민이 무섭다"고 말했다.
투표율 높은 곳 다 빼앗겨…"여당 지지층 응집력이 더 강했다"
▲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굳은 표정으로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겠다"는 말만을 남겼고 박지원 원내대표는 "국민이 무섭다"고 했다. ⓒ연합뉴스
지난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단일화 바람'을 일으키며 대승을 거뒀던 민주당은 불과 두 달 만에 패배의 주인공이 됐다.
우상호 민주당 대변인은 당선자의 윤곽이 드러난 이후 "애초 설정한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며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고자 했던 수많은 국민 앞에 제1야당으로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 같은 참패의 원인에 대해서 우 대변인은 "야당 지지층의 결집력보다 한나라당 지지층의 응집력이 훨씬 더 강했다"고 설명했다. 우 대변인은 "민주당 승리가 예측됐던 지역에서의 투표율이 비교적 낮았고 열세 혹은 경합 지역에서 투표율이 높았는데 이는 여당 성향 지지층이 강하게 응집한 것을 드러낸다"고 덧붙였다.
민주당 분석대로 "높은 투표율은 야당에 유리하다"는 '공식'은 깨졌다. 격전지였던 은평을은 40.5%, 강원 철원·화천·양구·인제는 47.5%의 높은 투표율을 보였지만 모두 한나라당이 가져갔다.
결국 민주당은 자신들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서부터 한나라당에 대패한 것이다.현 정부의 민간인 불법 사찰, 한나라당 강용석 의원의 성희롱 발언,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막말 파동' 등 야당에게 유리한 정국은 선거 내내 펼쳐졌지만 민주당은 기회를 승리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안일했던 공천…"여권은 거물급 내세웠는데"
여기에는 민주당의 안일했던 공천 과정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끌어낼 매력적인 인물을 민주당이 내놓지 못한 것이다.
대표적인 곳이 인천 계양을이다. 정세균 대표와 송영길 인천시장의 마음이 서로 부딪히면서 김희갑 후보라는 인지도가 현저하게 낮은 후보를 공천한 것이다. 여러 고비에도 불구하고 투표일 직전 단일화를 이뤄낸 서울 은평을에서도 민주당은 신경민 문화방송 선임기자를 코앞에서 놓치고 70대가 넘는 고령의 장상 후보를 내놓았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분석실장은 "여권에서는 거물급 인사를 내세웠는데 야당은 그에 비해 현저하게 미흡한 인물은 공천했다"며 "결국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에 부정적인 20~40대의 젊은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끌어오는 데 실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 실장은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후보를 내세우지 못하면서 선거기간 정권심판론 정서를 살리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도 "심판론 분위기가 작용하지 않을 때는 결국 지역 싸움인데 지지표를 끌어낼 전략이 없었다"며 "구태의연한 인물이거나 새롭지만 너무 약했던 후보를 공천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한나라당 조해진 대변인조차 "지방선거 결과를 보고 민주당이 공천을 안일하게 한 거 같다"고 평할 정도였다.
"야권 단일화=승리는 안일한 생각"…강원도 2석, 폐허 속 진주
단일화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은 "단일화 시점이 늦어져 효과가 별로 없었다"고 설명하지만, 역시 '인물의 경쟁력'에 1차적 원인이 있었다. 정권 실세로 '왕의 남자'로 불리는 이재오 당선자와 비교해, 당선될 경우 70대 초선 의원이 되는 장상 후보는 힘이 달렸다. 민주당이 후보 등록 전 신경민 선임기자 영입에 상당한 공을 들였던 것도 '장상 후보로는 안 된다'는 자체 판단 때문이었다.
윤희웅 조사분석실장은 "지난 지방선거는 야권이 끌어낼 수 있는 최대치였다"며 "야권 단일화가 곧 승리라는 것은 안일한 생각"이라고 잘라 말했다.
단일화 과정도 문제였다. 단일화 시점이 늦어진 데는 민주당의 책임도 일정 부분 있었다.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된 이후 민주당은 "국민참여당이 막무가내로 사퇴하라고 한다"며 천호선 참여당 후보를 공격했지만, 참여당과 민노당의 후보 등록 전 단일화 요구를 외면한 것은 민주당이었다.
"재보선 8곳 전체를 놓고 단일화 협상을 하자"는 두 당의 요구를 받아들여주지 않은 것이다. 정세균 대표는 "지방선거와 재보선은 다르다"고 일찌감치 선을 그었고, 단일화 필요성을 역설할 때조차 "다음 선거에서는 양보할 수 있다"는 하나마나한 얘기만 했다.
그럼에도 참패 속에 건진 강원도 2곳의 승리 의미는 적지 않다. 전통적으로 한나라당 강세 지역인 강원도에서 민주당은 이광재 도지사를 당선시킨 데 이어, 재보선에서도 두 곳을 얻어냈다. 정해구 교수는 "이광재 도지사의 직무정지에 대한 강원도민의 불만의 표출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강원도가 바뀌고 있다는 의미"라고 평가했다.
/여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