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 수호를 위한 고종의 노력
(을사보호조약의 진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제물포항(현재 인천)에 정박중이던 러시아 함대에게 출항을 요구한 후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약 1년간의 전쟁기간동안 일본은 해전에서는 연전연승하였지만 내륙지방에서는 수만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여 더이상 전쟁을 끌고 나가기 힘들어 졌고, 제정 러시아 역시 1차 러일혁명의 여파로 극동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이런 양국의 입장이 맞물려 미국의 중재아래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에서 회담이 시작되었는데, 이 전쟁에서 중립을 선포하였던 조선이 엉뚱하게 희생양이 되었다. 흔히 고종은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국왕으로 인식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고종은 회담결과와는 무관하계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될 처지에 놓이게 되리란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에따라 국가 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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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기댈 수 있는 나라는 역시 1882년 상호 수호통상조약을 맺은바 있는 미국이었다. 이 조약 제1조 규정에 제3국으로부터 불공경모(不公輕侮)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 서로 도운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고종은 초대 미대사관 공사 알렌이 친일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조약의 규정에 따라 대한제국을 도와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따라서 고종은 러-일전쟁 중 신변의 불안을 느낀 고종은 알렌 공사에게 미국 공사관으로 자신이 피신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알렌 공사는 고종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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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국제관계에서 세력균형및 그와 관련된 국가이익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반면 루즈벨트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이익을 중요시 하는 실용주의자였고, 동북아 일대에서 제정러시아와 일본이 세력균형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종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제1조의 거중조정(good offices)의 규정을 매우 중요시 여겼으나, 루즈벨트는 ‘거중조정’의 문구는 외교 관례상 통상적으로 삽입되는 내용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에 두 사람은 인식의 차이를 보인 것이다.
아무튼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군대의 협박으로 조선과 을사보호조약(=을사늑약)을 강행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의 사실상(de facto)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보호조약 체결이 알려지자 조선의 조정과 국민들은 전국에서 반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고종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미국의 지지를 적극 호소하였다. 그 실례로 고종은 5차에 걸쳐 미국에 특사를 파견하거나 조선의 공사를 활용하여 조선의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고종이 최초로 미국에 특사를 파견한 것은 1904년 9월 30일.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의 총장이며 미국주재 조선 공사관 자문으로 활동한 니담(Charles W. Needham)을 통해, 조미 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규정에 의거 미국이 조선과 일본간의 문제를 중재하여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라고 주문하였다.
이에따라 니담은 해이 국무장관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러-일간의 전쟁은 현재 진행되고 있으나, 일본은 조선의 치안권과 외교권을 강제로 찬탈하고 있어, 조선은 머지 않아 일본의 수중으로 넘어갈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의 독립은 완전히 상실될 것이다. 그러므로 귀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진언하여 조선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위하여 도와 줄 것을 간곡하게 건의하여 주기 바란다.”
그러나 고종은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고종은 조선 주재 미국공사인 모건(Edwin V. Morgan)으로 하여금 본국에 건의하여 미국이 조선을 지지해 줄 것을 . 그러나 모건역시 고종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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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미국인을 통한 교섭이 이따라 실패하자, 제2차 사절로 미국에 있던 이승만과 호놀루루에 거주하던 윤병구를 워싱턴으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1905년 9월 호놀루루에서 미국으로 돌아가고 있는 태프트 육군성장관으로부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소개장을 가지고 미국 대통령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미국의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진은 청년시절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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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미공사관을 통합 공식접촉이나, 미국거주 한국인을 통한 교섭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대한제국을 위해 진심으로 일할 수 있는 미국인을 물색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고종은 제3차 사절로 당시 조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조선에서 일한바 있던 헐버트(Homer B. Hulbert)를 파견하게되었다.
그리고 헐버트는 1905년 11월 루트(Elihu Root) 국무장관을 통해서 고종의 메시지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하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 편지를 상세하게 읽고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종은 포기하지 않고 제4차 사절로 조선의 파리 주재 민영찬 공사로 하여금 미국에 공식 외교문서를 제출하라고 훈령하였다. 민 공사는 12월 7일 고종황제의 메시지를 루트 국무장관에게 전송하였다.
고종의 메시지의 주요 내용을 보면, 1905년 11월 17일 조선과 일본간에 작성된 조일 의정서의 조인은 일본 군대의 강압에 의하여 서명 되었으므로 완전히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이에대해 루트 국무장관은 민 공사에게 보낸 답신에서 미국정부는 조선의 요구사항이 공식 외교문서로 접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다.
고종의 제5차 미국파견 사절의 임무는 전 조선주재 미국공사 알렌에게 부여되었다. 고종은 알렌 전 공사에게 미화 1만 불 상당의 금을 주면서 미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알렌은 조선을 위해 외교활동을 할 수 있는 적당한 로비스트를 물색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는 할 수 없이 고종으로부터 부여 받은 임무를 포기하고, 금을 반송하고 말았다.
알렌의 실패는 당시 조선에 대한 워싱턴의 분위기로 보아 조선을 위해 로비활동을 하려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로비자금을 사용하여도 성공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그럴 경우 돈만 낭비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한 고종의 모든 노력은 국제정세에 대한 조선 조정의 인식부족이라고 볼 수 없다. 결국 어떤식으로든 강대국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짜여진 시나리오대로 끌려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은 조선독립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누구를 통해 어떠한 교섭을 추진하던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제국주의 시대 팽배하였던 약육강식의 다위니즘에 입각한 사고에서 비롯된 것으로써, 인류자체가 안고 있었던 종말에 이르는 병폐였다.
따라서 고종황제의 강력한 국권 수호의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의 시선으로 봤을때 약소국에 지나지 않았던 조선의 외침을 들어 줄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약소국에 대한 침략행위를 정당화 시켜 주었던 약육강식의 다위니즘은, 지구상의 모든 약소국을 소멸시켜 버렸다. 그리고 강대국만이 살아남게 되자, 오직 하나의 최강자를 위한 끔찍한 전쟁을 벌이고 말았다.
결국 다위니즘에 의한 적자생존법칙의 국제질서는, 스스로는 물론 전인류에 대한 파괴행위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