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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 05. 31
▲고대일록(孤臺日錄) / 필사본 4권 4책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조선선비의 일기 『고대일록』
■고대일록(조선중기 전쟁과 일상에 관한 기록들)
저자 : 정경운(鄭慶雲)
임진왜란의 일기 하면 대부분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떠올린다. 그러나 『난중일기』 이외에도 오희문(吳希文)의 『쇄미록(鎖尾錄)』, 이노(李魯)의 『용사일기(龍蛇日記)』,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기(亂中雜記)』등 다양한 일기류 자료가 전한다.
『고대일록(孤臺日錄)』 또한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일기로서, 최근 남명학연구원에서는 『고대일록(孤臺日錄)』역주본을 출간하였다.
(2009년, 태학사 출판)
『고대일록』은 경상우도 함양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한 의병장 정경운(鄭慶雲,1556~1610)이 1592년부터 1609년 까지 소모관(召募官: 조선 시대, 의병을 모집하던 임시 관직)으로 참여한 임진왜란의 의병활동 등을 기록한 필사본 일기이다.
정경운의 본관은 진양(晋陽)으로 자는 덕옹(德 )이고 함양읍 백연리(栢淵里) 돌뿍[席卜]에서 살았으며 주변에 위치한 위천수(渭川水)의 뇌계(뇌溪) 냇가에 고송반석(古松盤石)으로 경승(景勝)을 이룬 소고대(小孤臺)가 있었으므로 자신의 호를 '고대(孤臺)'라고 하였다.
그가 전란 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의 소모유사(召募有司)로, 의병장 김면(金沔)의 소모 종사관으로 활약하면서 자신이 체험한 의병활동을 비롯해, 당시의 전언이나 편지, 조보(朝報), 방문(榜文)까지 수록하였다. 『고대일록(孤臺日錄)』은 오늘날 신문이나 뉴스처럼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또한 정경운은 정인홍(鄭仁弘)의 대표적인 문인이자 사족(士族) 신분으로 고향인 함양을 중심으로 활동한 정황들도 생생히 기록하였다.
정경운은 정유재란 시에 딸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일기에는 그 날의 비참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카가 산에서 정아(貞兒)의 시신을 찾았다. 목이 반 이상 잘린 채로 바위 사이에 넘어져 있었는데 차고 있던 칼과 손이 모두 평소와 같았다. 오호라! 내 딸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내가 처음 왜적이 기이한 행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차고 있던 칼을 주면서 ‘만약 불행한 일을 만나면 너는 적의 뜻에 따르지 말라.’고 하였다. 이후로는 한 번도 머리를 빗지도 않고 얼굴을 씻지도 않으면서 ‘큰 도적이 이제 이른다니 내가 살기는 어렵겠다.’는 말을 그 모친과 항상 말했다고 한다.
드디어 흉적을 만나자 당당하게 겁도 없이 왜적을 나무라면서 생(生)을 버리고 절개를 온전히 하였으니 곧구나, 내 딸이여!.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다. 오호라, 네가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한 것은 잘하기는 잘한 일이지만, 내가 여식의 목숨도 구하지 못해 흉적의 칼 아래 운명케 하였구나. 손을 붙들고 피난하여 시작과 끝을 함께 하고자 하였는데. 타일에 구천(九泉)에서 손을 잡고 다시 만날 때 나는 진실로 너만 못하니 무슨 낯으로 너를 위로하겠느냐?
너의 높은 절개는 내가 마땅히 그 뜻을 전(傳)을 지어 기록할 것이다. 의복을 다 잃어 몸을 염습(殮襲)할 도구도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통곡하고 또 통곡한다.
[猶子到山 得貞兒屍 斬首過半 覆於石間 所佩刀子及投手 皆菀若平生 嗚呼 我女至於此極耶 我始聞賊奇解 所佩刀子遣之曰 若遇不幸 汝不從賊云云 自後 一不梳頭洗面曰 大賊今至 我生難必之焉 與厥母每每說道云云矣 卒于凶賊 屹然無㥘 罵詈賊奴 捨生全節 貞哉我女 不愧其名矣 嗚呼 汝之捨生取義 善則善矣 我不能救一女息 殞命兇鋒之下 扶携避亂 以共終始 他日九泉 握手重逢 則我實負汝 何面慰汝 至於汝卓立之節 則我當敍傳以志矣 衣服盡失 殮身之具 草草莫甚 痛哭痛哭”]
자료>『고대일록』 1597년 8월 21일(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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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은 1592년(선조 25) 4월 23일부터, 1609년(광해군 원년) 10월 7일까지 19년 동안 쓴 일기로, 출생부터 부모를 일찍 여의는 등 불우한 시절을 보낸 삶의 행적이 나타나 있다. 그가 스스로 삶을 진술한 부분을 보자.
나는 두 살에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외조부께 의지하여 길러졌다. 아홉 살에 외왕부(外王父)께서 또 돌아가시고 열세 살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거상중에 맏형에게 수학하였고 외왕모(外王母)께 길러졌는데 열다섯에 또 여의었다. 이때부터 형 보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였고 형수 보기를 어머니와 같이 하였다.
열아홉에 또 형님을 잃었는데, 학업은 어(魚) 자와 노(魯) 자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외로운 신세는 몸과 그림자가 서로를 위로할 지경이었다. 경오년(1570년, 15세)부터 기묘년(1579년, 24세)까지 형수를 우러르며 생명을 이어나가기를 마치 한유가 정부인(鄭夫人)에 대해서 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余二歲早孤 依外祖父鞠養 九歲外王父又沒 十三歲慈母見背 孤喪中從伯氏受學 衣食於外王母 十五又失之 自是視兄猶父親 嫂猶母 十九又失兄 學未知魚魯 形影相弔 自庚午至己卯 仰嫂爲命 猶韓愈之於鄭夫人]
자료>『고대일록』, 1605년 4월 7일(신해)
자술 이력서에서 정경운은 자신의 불우한 삶을 회고하고 있다. 2세의 부친 사망, 9세의 외조부 사망, 13세의 모친 사망, 15세의 외조모 사망, 19세의 형 사망 등 그의 어린 시절은 가족의 사망이 연속되는 시기였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맏형에게 수학하고 외조모에 의해 길러졌다.
15세부터는 형수에게 의지하여 삶을 이어갔음도 밝히고 있다. 불운이 연속으로 이어지던 그의 삶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인물이 바로 정인홍이었다. 일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주인공 외에는 바로 스승인 정인홍과 그의 동정에 관한 것이다. 정경운은 정인홍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사년(1581년, 26세)에 비로소 스승을 찾을 줄 알아 내암 선생께 배움을 청하였는데, 선생께서 못난이라고 물리치지 않으시니 그 후 잇따라 출입하였다. 매양 ‘가을달이 차가운 강물에 비친다[秋月照寒水]’는 시구1)를 생각하며 부모와 같이 우러르고 신명(神明)과 같이 믿었다. [辛巳始知尋師之道 請見於來庵先生 先生不斥之以無似 厥後夤緣出入 每思秋月照寒水之句 仰之如父母 信之如神明]
자료>『고대일록』, 1605년 4월 7일(신해)
정경운은 이어서 “나는 궁향(窮鄕)의 만학(晩學)으로서 이미 스승을 받드는 입설(立雪)의 고초도 없었고, 또 학우들과의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공부도 모자라 끝내 담장을 마주보는 듯함을 면하지 못해 도(道)의 영역과 서로 격리되었다. 마치 기러기가 풀이 무성한 못 가운데 내려 앉아 머리가 파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노둔함을 채찍질하여 선생께 나아가 많은 소중한 가르침을 받았고, 때로는 문안 편지를 올려 연달아 이끌어주시는 답장을 받았다.” 고 하여, 정인홍이 자신의 노둔함을 깨우쳐주는가 하면 편지를 통해서도 계속 가르침이 이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정경운은 정인홍이 고향으로 내려오면 거의 매일 찾아가 뵙는 제자이기도 했다.
1600년 7월 23일, 24일, 25일에는 연이어 스승을 찾아뵙는 기록이 보이며,2) 정인홍이 부인의 묘 개장을 위해 묘자리를 찾아볼 때도 수행한 3명(강위서, 강경정) 중의 한 명이기도 했다.3)
정경운은 어린 아들이 요절했을 때도 자신의 아픔보다, 역시 자식을 잃은 스승의 아픔을 먼저 생각할 만큼 충실한 제자였다.4) 오시(午時)가 지나서 어린 아들이 요절(夭折)했다. 불쌍한 마음과 애틋한 정을 글로 쓰자니, 참담하여 탄식할 따름이다.
나는 강보에 싸인 아이도 오히려 슬픈데, 하물며 내암선생은 어떠했겠는가?
[過午 稚子夭折 不忍之心 藹然之情書之 則慘於悒而已 以余襁褓之兒 猶且惻怛 而況於來庵先生乎]
자료>『고대일록』 1593년 4월 7일(신묘)
『고대일록』은 전쟁 체험과 전쟁 이후 사회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의미 이외에 당시 지방 사족의 중앙 정치에서의 대응 모습이나, 지방에서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모습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비교적 중앙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정경운이 지방에서 활약하는 모습들은 조선중기 생활사 연구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정경운이 정인홍을 절대적으로 존숭하는 모습에서 산림(山林) 정인홍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고대일록』의 완역을 계기로 이 시기를 살아간 선조들 모습이 보다 생생히 다가올 것을 기대한다.
1) 주자가 지은 시 [齋居感興]의 한 구.
2)『고대일록』, 1600년 7월 23일, 24일, 25일 기록 참조.
3)『고대일록』, 1600년 7월 25일(을축).
4) 정경운은 1593년 마흔 가까이 되어 아들을 얻었지만, 불과 열흘 만에 아들을 잃었다.
보낸이 : 한국고전번역원 ㅣ 글쓴이/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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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내용]
『고대일록(孤臺日錄)』은 4권 4책의 필사본 자료로,
정경운(鄭慶雲)이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선조 25) 4월부터 1609년 까지 19년 동안 기록한 일기이다.
전쟁 발발 직후 소모관(召募官)으로 의병 활동에 참여하였으므로, 당시 경상우도 지역 의병 활동 및 남명학파의 동향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동시에 전쟁 이후 향촌 사회의 복구 양상 및 사족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〇편찬/발간 경위
정경운이 쓴 원본 『고대일록』은 초서(草書)로 쓴 것인데, 이 책은 그의 네째 아들 정주석(鄭周錫)이 소장하고 있었다.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1900년대 초에 8대손인 정동규(鄭東奎)에 의해 해서(楷書)로 다시 필사되었고, 9대손인 정용호(鄭龍鎬) 대에 와서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에 큰 불이 나서 원본 『고대일록』은 소실되었다.
이후 정인홍의 자손인 정이상이 6부를 복사하였으며,
1986년 경상대학교 오이환 교수가 이를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1992~1993년에 걸쳐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에서, 『남명학연구』 2, 3에 영인하여 소개하였고,
2001년에는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임진왜란사료총서』 10으로 영인하였다.
2009년에는 남명학연구원에서 『고대일록』을 영인, 역주(譯註)하여 일반인도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〇서지사항
필사본으로 4권 4책 총 257장이다.
권1은 1592년(선조 25) 4월 23일부터 1593년 12월 30일까지 2년간,
권2는 1594년(선조 27) 1월 1일부터 1597년(선조 30) 12월 30일까지 4년간,
권3은 1598년 1월 1일부터 1602년(선조 35) 12월 28일까지 5년간,
권4는 1603년(선조 36) 1월 1일부터 1609년(광해군 1) 11월 1일까지 7년간을 기록하였다.
1599년(선조 32) 6월 11일부터 1600년 5월 6일까지 약 11개월 동안의 일기는 누락되어 있다.
또한 원본 일기의 앞의 부분 10여장이 떨어져 나가 임진왜란 발발 초기 기록이 누락되어 있고, 결락된 부분 80여 곳은 ‘결(缺)’이라 표시되어 있다. 초서로 된 원본을 옮겨 베껴 쓰는 과정에서 글자의 순서가 거꾸로 되어 옆에 점을 찍거나 글자를 빠뜨리고서 나중에 다시 곁에 작은 글씨로 첨가해 넣은 곳이 보인다.
책의 기술 방식은 다른 일기류와 별 차이가 없으나,
매해 정월 초하루의 기술에 있어서 『춘추(春秋)』의 기술 방식을 모방하였다.
예를 들어, 1593년(선조 26) 1월 1일 첫 부분을 보면 ‘이십일년 계사 춘 왕정월 병진 삭(二十一年癸巳春王正月丙辰朔)’이라 쓰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〇내용
『고대일록』은
함양 지역을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 지역의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 활동과 이 지역에서의 남명(南冥) 문인들, 특히 정경운의 스승인 정인홍(鄭仁弘)과 그의 동문인 김면(金沔), 조종도(趙宗道), 곽준(郭䞭), 이대기(李大期) 등의 의병 활동 내용이 잘 수록되어 있다.
기아와 살육, 국토의 황폐 등 전쟁으로 인한 참상과 전쟁 기간 중 이순신, 김덕령(金德齡) 등 여러 장수들의 활동, 명나라 군대의 행패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전쟁 이후 사족을 중심으로 한 향촌 사회 복구의 과정 및 조정의 정책에 대한 지역 사회의 동향 등이 수록되어 있다.
〇의의와 평가
『고대일록』은 임진왜란 초기 의병 활동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그가 정인홍의 제자였으므로 당시 남명학파의 동향이 잘 나타나 있으며, 전쟁 이후 남계서원(濫溪書院)을 둘러싼 함양 지역 사회의 사족 동향과 전후 복구 양상 등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이외에 당시의 일기 상태 및 당시 사족의 생활실태를 파악하는 데에도 도움이 크다.
[참고문헌]
『고대일록: 의병장이 된 선비,임진왜란을 기록하다』(정경운 지음,문인채·문희구 옮김,서해문집,2016)
「『고대일록』을 통해 본 함양 사족층의 동향」(원창애,『남명학연구』33,2012)
「임진왜란 관련 민간일기 정경운의 『고대일록』 연구」(김경수,『국사관논총』92,2000)
「함양 의병유사 정경운과 『고대일록』」(김륜우,『남명학연구』2,1992)
정경운(鄭慶雲, 1556년 ~ 1610년)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의병장이다.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옹(德顒), 호는 고대(孤臺)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함양(咸陽)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도와 왜병과 싸웠으며, 초유사 김성일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왜란 당시의 의병 활동을 기록한 일기 《고대일록》(孤臺日錄)을 남겼다.
[출처] 고대일록(孤臺日錄)이란?|작성자 어이무사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