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하라 사토미의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한 마에타 테츠 감독의 일본 영화입니다. 지난 7월에 개봉했고 저는 7월 24일에 지난번에 갔던 같은 상영관에서 역시 집사람과 같이 봤습니다. 나이가 들면 같이 놀아줄 유일한 사람 중의 하나가 아내라고 생각하니 점점 그 앞에서 겸허해지고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집니다. 가족이란 그런 건가 봅니다. 아이들 둘도 여전히 둥지를 훨훨 날아가지 못하고 함께 벅적대고 있습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지금 이 시절은 아이들의 성장기를 지난 또 하나의 인생의 '화양연화!'가 아닐까 합니다. 서른이 되어가는 아이 둘과 함께 은퇴자의 신분으로 머물고 있는 이 시간이 제게는 소중합니다.
누구에게나 무방비의 시절은 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시기인 유년기를 말함이다. 인간사의 복잡다단한 무늬가 처음으로 아로새겨지는 시점이기도 하다. 슬프게도 그것은 아름다울 수도 있는 반면 고통스러운 어둠 속으로 침잠하기도 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카오스의 세계처럼 보인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일이 일견 단순해 보이지만 그와 연결된 수많은 변수들의 관계는 슈퍼컴퓨터로 계산할지라도 예측하기가 어려운 것과 비슷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모든 감정과 정서의 대차대조표는 인간이 성인이 되면서 이루어가는 모든 일의 막후에서 긍정과 부정의 복합적인 산출물을 만들어낸다.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네로나 간디의 유년 시절을 우리가 관찰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삶의 궤적을 함께 살펴볼 수 있다면! 우리가 얻을 것이 많을 것이다.
어린 시절 <소공자>, <소공녀>, <키다리 아저씨> 등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많이들 그러하듯이. 몸이 거주하는 공간인 이곳이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의 꿈이 투영된 저곳을 꿈꾸게 마련이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꿈일수록 인간의 목마름은 더 간절하고 깊어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인간의 삶은 있는 것(현실)과 있어야 할 것(당위)의 간극을 메꾸려는 노력이라는 해석도 있지 않은가? 나의 경우도 강력한 힘을 가진 누군가가 내 삶을 지켜보면서 나를 돌보고 있을 것이라는 은밀한 기대를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후원하고 손잡아 줌으로써 희망 없는 진창과 같은 현재의 삶의 조건에서 이끌어내어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았다.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내게도 나만의 키다리 아저씨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소설 속의 결말보다는 좀 더 나은 결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린 영혼은 작은 새의 가슴에서 뛰는 심장의 그 맥박과도 같이 섬세하고 신비로운 그 무엇이다. 몇 번 작은 새를 손에 잡고 그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생명은 참으로 깃털처럼 가녀리면서도 바위처럼 강한 그 무엇이다. '죄가 깊은 곳에 은총도 깊다.'는 자비로운 선언을 살짝 비틀어 '가장 무기력한 존재는 가장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갓난 아이가 우리를 무장해제 시키는 그 원리를 생각해 보라. 아무튼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자랄 수 있도록 보호받아야 한다. 지금 가자지구와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 떨어지는폭탄에 아이들의 몸이 찢기고 부서지는 소식을 매일같이 듣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부모와 함께 소멸하고 소각된 아이들의 눈동자를 생각한다. 불과 세 세대도 지나지 않아 원자폭탄의 사용도 불사할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세상이다. 세상은 기술적으로는 한 덩어리가 되었는데 정서적으로는 부족국가적 시절로 퇴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절망적인 생각도 하게 된다.
한 아이를 기르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협력해야 한다고들 한다. '아버지가 3, 엄마가 2'이라는 셈이 잘 납득되지 않는 설정의 영화였다. 자기들이 낳은 자식을 둘러싸고도 헤어질 때 온갖 추한 모습으로 증오심에 불타는 모습을 간혹 본다. 자식을 자기 감정의 방패막이로 삼거나 자신의 삶을 망친 배우자에 대한 미움을 아이에게 쏟아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세상을 떠난 생모의 자리에 새로 들어온 리카라는 여성이 유코라는 의붓딸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발견적 방식으로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유코의 생부는 자신의 꿈을 좇아 브라질로 떠났다가 실패하고 일본에 돌아와 재혼을 하고 살다가 유코의 결혼을 계기로 재회하게 된다. 리카는 유코의 희망을 충족시킬 조건을 갖춘 재력 있는 남자를 만났다가 헤어지고 모리야마라는 책임감 강한 사람을 만나 유코를 맡겨두고 사라진다. 리카를 제외한 남자들의 모습은 키다리 아저씨 급의 평면적인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리카의 죽음과 유코의 결혼은 하나의 매듭으로 풀려나가면서 영화는 동화적인 해피엔딩으로 마무리가 된다.
자, 그래서? 유코는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그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이 영화를 통해 달라질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은 평행우주와도 같은 선택의 문제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누군가의 선택에 따른 돌봄의 결과로 만들어졌고 또한 우리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스스로 내린 선택과 돌봄의 과정을 통해 우리와 연결된 사람들의 삶을 만들어가는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행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도록 하자. 그리고 특히 아직 어린 영혼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자.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당신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도록 하자. 그리하여 누군가의 삶에서 전경이 아닌 후경으로 머물 겸손함을 터득하도록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