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을 향하여
2023.01.01.(신년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2/ 세례에 관한 가르침과 안수와 죽은 사람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관련해서, 또 다시 기초를 놓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또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이 6/ 타락하면, 그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고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6:1-6)
들어가는 말
대부분의 신학교에는 사회복지학과도 있습니다. 감리교단에는 3개의 신학교가 있는데, 단과대학인 감리교신학대학을 제외한 종합대학인 협성대학교와 목원대학교는 사회복지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을 마치고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학생들 중에는 사회복지를 복수 전공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교계에서는 요즘 이중직에 관한 논의도 활발합니다. 목사가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을 교단이 허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복지를 복수전공하는 신학생들도 이중직 허용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사회복지는 이중직을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담임목사나 부목사가 사회복지 기관에서 일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중직이 허용되기를 바라며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학생들은 사실상 불가능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복지는 목회의 현장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회복지와 관련해서 볼 때, 이중직을 허용해달라는 것은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복지사가, 신학을 전공하고 교단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목사로도 인정해달라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기존 교회가 그렇게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복음증거와 전도를 하지 않아도 목사로 인정해 달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복지 분야에서 이중직이란 교회가 허용해 줄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복지가 이미 거부한 문제입니다. 관이 설립하고 종교기관이 위탁을 받아서 운영하든, 종교기관이 설립하고 관이 재정을 제공하든, 목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상, 복지사로서의 급여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만, 사회복지사가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이유로 교단이나 교회에 무보수로 소속될 수 있을 뿐입니다. 교단은 이러한 이중직을 왜 허용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목회를 하겠다고 헌신한 사람이 이제 목회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데도 말입니다.
변절을 경계하다.
1절은 ‘그러므로’로 시작됩니다. 앞 구절을 통해 왜 이렇게 시작하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5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서신을 받은 교인들은 배우는 자에서 가르치는 자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미 배운 초보적 교리를 남들에게서 배우고 있음을 질책하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교회도 지나온 시간으로 따져보면, 정말 교사가 되고도 남아야 할 시간을 보냈습니다. 물론 교회는 100년이 넘은 교회도 있고 신생교회도 있습니다. 개체 교회에는 오래된 장로도 있지만 새신자도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가 성숙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가 흘러온 시간에 맞게, 한국교회 중에는 성숙한 교회도 있어야 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시간이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성숙해지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히브리서의 말씀은 현 시점의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100년이 훨씬 지난 한국 개신교회 역시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조차도 오히려 ‘남들’(?)에게서 배우기를 좋아 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여전히 초보적인 내용만을 이 목사, 저 부흥사, 혹은 외국 목사들을 데려다가 부흥회라는 이름하에 계속 반복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물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12)라는 저자의 말은 한국교회를 향하는 말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젖을 필요로 하는 이는 아직 어린아이’이기에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하다’(13)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신앙 본질에 관한 깊이 있는 말을 조금만 해도 거부하기 일쑤입니다.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도 성숙해지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이 초보 수준에 머무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 초기에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만으로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외침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진 신앙 지식이 우리가 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한국교회 초기의 모습도 이러합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성경책, 그것도 교회에 한두 권 비치되어 있는 것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성숙하지 않음이란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음이 아닙니다. 퇴보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은 예전과 똑같다고 여겨지지만, 신앙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 이유는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복지를 하려는 신학생들의 예에서 본 것처럼, 그들의 미성숙은 신앙 이전으로 그들을 돌려놓고 있습니다.
성숙한 경지에 이르다.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14)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들이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14)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시간의 흐름 상,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초보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처럼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심각한 것으로, 사회에 해악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1절의 시작 ‘그러므로’는 과거, 즉 교회 이전으로 되돌아간 교회, 결국 타락해버린 교회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1) 우리는 더 이상 기초적인 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초적인 교리를 넘어 성숙을 향해 가야 합니다.
기초적인 교리란 이런 것들입니다.(1-2)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세례에 관한 가르침’, ‘안수’, ‘죽은 사람의 부활’, ‘영원한 심판’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러한 것들에 관해 또 다시 기초를 놓는 일이 없어야 한다’(2)고 말합니다. 여기에 매달리는 것은 돌고 도는 쳇바퀴일 뿐입니다. 결론도 없고, 미래도 없고, 전진도 없는 제자리걸음이며, 결국 퇴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3) 여기서 ‘그렇게’란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신자 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저자는 성숙하지 못하고 머무르는 것을 타락(6) 즉 ‘떨어져 나가버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본 사람.’ ‘성령을 나누어 받은 사람.’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본 사람.’(4-5) 이들이 타락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기초를 맛본 사람들이 성장하려고 하지 않을 때, 그들은 그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신앙지식에 안주한 신학생들이 사회복지를 하면서 이중직을 바라는 것이 순수한 신앙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 즉 신앙을 버리고 떨어져 나가게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와 그 신자들이 기초적인 신앙에 머무르면서 가난한 국가에 세워진 ‘고아원’에 지원하는 것은 타락을 넘어 범죄에 일조하는 것이라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기초적인 신앙을 성숙시키지 못하면서 외형적으로만 성장한다면, 그들은 결과적으로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정확히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교회와 신앙인이 성숙해지지 못하는 것은 타락하는 것이라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진정한 상속자가 되다.
저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6) 놀랍게도 시간이 지나면서도 성숙하지 못하고 결국 타락해 버린 신앙인은 다시금 회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금 돌아와 회개한다고 한들, 하나님이 다시는 그들을 받아주지 않으신다는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들은 결국 돌아올 수 없습니다. 이들은 성숙하지 않은 신앙이 굳어져서 무슨 말을 해도, 아무리 훌륭한 교사가 가르쳐도 자기만이 옳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 세상은 변할 텐데, 그러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초보적인 신앙은 반사회적인 타락한 모습으로 변질되어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돌이킬 수 없이 타락해 버린 이들의 모습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고 욕되게 하는 것’(6)이라고 말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초보적인 교리만으로 만족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그 정도가 부담감 없이 좋은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 진지해 보이고, 애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두려워지고, 한편으론 안쓰럽게 여겨질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돌이킬 수 없는 타락으로 이어진다면, 차라리 신앙인이 되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오늘날 한국교회는 정말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쌍욕과 폭력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들은 목사들입니다. 재건축의 현장에 최후로 덩그러니 남아있는 건물 중에는 교회가 많은데, 전광훈 목사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급한 욕지거리를 죄의식 없이 할 수 있는 것도 기초적인 교리만을 절대 진리로 신봉하는 교인들입니다. 이들이 신앙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지독하다는 것은 이제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기초적인 신앙 밖에 가진 것이 없었어도, ‘예수쟁이들’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그들은 사회의 모범이었습니다. 신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반드시 성숙해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성숙이 필연적인 것임을 말하면서, 동시에 보상의 ‘다름’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말하지만, 여러분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더 좋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9) 우리가 기초적인 교리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은 그 정도가 자신의 삶에 부담주지 않으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지만 그것이 필연적으로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습니다. 성숙하지 못하고 정체됨은 결국 나쁜 열매를 맺는 땅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성숙해진다는 것은 예전과 똑같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가는 말
초보 농부보다 경험이 풍부하고 기술이 성숙해진 농부가 거둔 작물의 상황은 해가 지날수록 더 나아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신앙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단순히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 하나님이 바라시는 열매가 더욱 더 계속해서 풍성해진다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정체는 퇴보지만 신앙의 성숙은 완전을 향한 진보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열매에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보상하신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을 수확한 자녀에게 칭찬과 보상에 인색할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므로, 여러분의 행위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10) 우리의 성숙을 기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애정 어린 눈길로 보고 바라시는 우리의 성숙한 수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을 섬겼으며, 또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10) 우리말로 옮긴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끼시는 백성들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며, 하나님이 보상을 아끼지 않으실 일입니다. “여러분은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상속받는 사람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12) 히브리서의 안내에 따라, 우리가 게으르게 되지 않고, 믿음과 인내를 가지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 충실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약속을 상속받은 크리스천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흘리는 수고와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새해에도 우리는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는데 최선을 다합시다. 한편, 우리들은 누구보다 많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았기에 더 많은 사랑을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