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은 고구려 구토인 만주 요동 땅을 되찾을 기회가 4번은 있었다?
고려와 조선은 고구려 구토인 만주 요동땅을 되찾을 기회가 4번은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668년 고구려가 망하니 통일신라의 국경선은 황해도와 강원도이니 만주 벌판은
물론 한반도 내에서도 평안도와 함경도를 잃어버렸으며 백두산은 남의나라 땅이 되었습니다.
첫번째 기회는 1370년 11월의 1차 요동정벌로 20년전 부터 원나라가 홍건적등 한족의 반란으로 세력이
약해지자 공민왕은 북진을 시작하니, 1356년 유인우를 보내 동쪽 쌍성(함경남도 영흥)을 되찾는데
이때 조돈과 원나라 천호인 이자춘 및 아들 이성계는 원나라를 배반하고 고려군에 내응해 성문을 엽니다.
그전인 1269년에 서북면의 최탄이 반란을 일으켜 원나라에 귀부하니 1270년 평안도와
자비령 이북 황해도는 원나라 동녕부가 되는데 이에 고려 원종은 베이징에 찾아
가서는 쿠빌라이 황제에게 동녕부를 돌려주십사고 탄원하고 이후 충열왕이 계속
해서 탄원하니.... 원나라는 1290년 평안도 땅을 고려에 돌려주고 동녕부는 만주로 옮깁니다.
60여년 후인 1351년에 즉위한 공민왕은 군대를 검열하고 육성해 쌍성을 수복한후 다음해인
1357년 6월에 인당에게 병력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도록 했으니 옛날에 서안평이라고
불렸던 안동 일대 파사부(婆娑府) 등 세 참(站)을 공격해 격파했는데 1359년과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는 개경을 점령당했으나 다음해에는 홍건적을 몰아냅니다.
1368년 원나라가 대도를 버리고 만리장성 북쪽 상도로 패주하니 북원인데, 1370년 1월 공민왕
은 이성계에게 북진을 명하니 기병5천, 보병 1만으로 강계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첫 수도 졸본성이 있었던 오녀산성을 공격해 점령했으며 그후 기사인테무르
는 고려인 김바얀과 손을 잡고 요동 일대에 남아있던 원나라 유민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합니다.
기사인테무르는 공민왕에게 살해당한 권신 기철의 아들로 원수를 갚고자 요동으로 이전
된 동녕총관부를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켜 고려 북쪽을 침공하니 고려는 공격을
막아낸후 본거지인 요동성을 치는데 총사령관은 서북면도원수 지용수이고 그
아래에 서북면부원수 양바얀, 동북면원수 이성계, 안주상만호 임견미가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1370년 10월말에 압록강을 도하해 11월 2일 나장탑에 도착해 비장 홍인계가 기병 3천으로 선봉이 되니
요동성의 기사인테무르는 맞싸우러 나왔으나 뒤이어 도착한 본대에게 중과부적으로 패했으며 이어
고려군은 성을 공격해 함락시키는데 고려군이 성내의 식량창고를 불태우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이때 북쪽 심양에서 군벌 나하추가 남하하는데 식량창고는 불탔고 고려 본국에서 보급은 오지
않으니 식량이 없는지라 이틀만에 황급히 철수하는데 지용수는 적군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왔던 방향인 동남쪽 대로를 버리고 서남쪽으로 행군해 요동반도에서
해안가를 따라 철수했는데 나하추 세력과 연합했으면 명나라에 대응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두번째 2차 요동정벌로 고려말 1388년 5월에 우왕과 최영이 주도해 5만대군을 일으켜 압록강을 건넜으나
우왕이 최영의 출진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원수가 없는 정벌군은 비가 내리자 위화도에서 이성계와
조민수가 회군해 최영과 우왕을 죽이고 조선을 세우면서 무산되었는데, 최영은 1354년 원의 요청으로
2천명이 파병되어 유탁 지휘로 장사성과 싸웠고 1357년 인당 휘하에서 파사부를 공략하기도 했었습니다.
우왕은 아버지 공민왕이 친위대로 아끼던 자제위가 모반해 암살당하자 최영이 없으면 혹시 모반이
일어날까 걱정해 붙잡은 것인데... 최영이 출진해 정벌군을 지휘했으면 위화도 회군은
없었을것이며 북원과 연합해 명나라에 대응하여 3발 솥 처럼 정립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가지 아쉬운건 1388년 요동정벌은 시기적으로 늦었으니.... 1387년 6월 말에 나하추가
명나라에 귀부했고 북원은 1388년에 브이르 노르의 동북에서 남옥의 명군에게
대패해 쇠락하지만 외몽골에서 1635년까지 명맥을 유지합니다. 그러니 고려군의 정벌
이 1년만 빨랐더라면 나하추 세력 및 북원과도 연합해 명나라에 대응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성계는 1392년 11월 예문관학사 한상질을 명나라 사신으로 보내 주원장에게 우리나라 이름을 지어
주십사며 조선(朝鮮) 과 화령(和寧) 2개 후보 이름을 바치는데 화령(和寧) 은 1258년 원나라가
점령해 쌍성총관부를 설치한 곳으로 1356년 공민왕이 북진해 수복후 화주목(和州牧) 으로
부르다가 1369년 화령으로 개칭한 곳인데 이성계의 출생지니 1393년에 영흥(永興) 으로 바뀌게 됩니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은“동이(東夷) 의 국호에 다만 조선의 칭호 가 아름답고, 또 그것이 전래한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이 명칭을 근본으로 삼아 후세에 이를 본받도록 하라.”라고 하명하니
화령은 국호에서 폐기 되고 1393년 2월 15일에 우리나라 국호를 조선 이라 칭하게 됩니다.
세번째는 1449년 토목보의 변이니 23살의 명나라 황제 영종은 환관 왕진의 간청을 받아들여 8월 5일 50만
대군을 이끌고 원나라를 세웠던 투르크화된 몽골족 오이라트부를 친정하는데 거용관을 떠나 19일 대동
에 이르렀다 선부에 이르니 오이라트 기병의 공격으로 4만이 전사하자 황제는 동쪽 토목보(土木堡)로
피하는데 에센군이 토목보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한후 공격하니 수십만이 죽고 영종을 포로가 됩니다.
1439년 토곤이 죽자 이은 에센의 오이라트는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만주의 쥬센(여진)인
들을 정복하고 서쪽으로 차카타이의 후손 아불하이르칸을 격파했으며 1444년
중국과의 국경인 감숙성으로 진출하고 1449년 타이슨칸의 몽골군과 연합해
4개군으로 국경을 넘으니 그 중에 에센의 본군은 산서성의 대동을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베이징의 명나라 조정은 우겸이 영종의 이복동생인 주기옥을 경태제로 올립하니 다음해에 에센은
가치가 없어진 영종을 풀어주자 명나라 조정은 황제가 2명이니 혼란에 빠지는데 1457년 1월 경태제
가 병이나자 석형, 조길상, 서유정등이 정변을 일으켜 황제를 폐하니 영종이 복위하는데... 이런
혼란기에 조선이 만주로 진출해 오이라트와 동맹했다면 세발 솥처럼 3국이 공존할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네번째는 1673년 3번의 난으로 청나라가 궁지에 몰렸을 때이니 그전 1660년 순치제는
오삼계의 대장군 인장을 회수하고 병력도 5만 중에 2만을 줄였고 1667년 강희제
는 관리 인사권을 박탈했으며 운남의 군비 중에 3분지 1인 은 백만냥을 감축
하는데 1673년 상가희가 70세로 물러나면서 고향 요동으로 은퇴하기를 청합니다.
오삼계와 경정충도 황제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퇴진을 요청하자 받아들이니 운남과 귀주를
다스리던 평서왕 우싼구이(오삼계) 가 반란을 일으켜 호남성으로 진격하자 광동성의
평남왕 상즈신(상지신) 과 복건성의 정남왕 겅징중(경정충) 이 합세하니
"3번의난"이라고 하는데 팔기군의 절반 정도인 10만으로 강남땅을 차지하고 북진합니다.
선조들이 승리했던 전투의 교훈들을 되새겨 보고 새로운 전쟁에 어떻게 적용시킬수 있을까 연구했다는
영명한 군주로 훗날 쥰가르를 친정해 갈단군을 격파하지만 이때는 스무살로 젊은 강희제는 쇼다이
를 보내 진압을 명하지만 오삼계군은 팔로군을 격파하고 사천을 거쳐 서안(장안)까지 진격하고
강남은 한족이 수복했으며 오삼계는 형양에서 주(周)나라 황제에 올랐고 차하르에서 반란이 일어납니다.
조선은 병자호란후 심양에 잡혀갔던 봉림대군이 효종 이 되어 명에 대한 의리와 삼전도의 치욕
을 씯고자 박서, 원두표 및 이완의 도움을 얻어 북벌을 위해 군대 를 양성했으나 죽고...
1673년에는 현종의 치세 인데 여진족은 인구가 100만명에 불과하니 5천만명의 인구인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 이주한지라 만주는 심양을 제외하고는 비어 봉금지로 묶인 상태 였습니다.
때문에 삼번의 난으로 중국 강남과 서부가 모두 한인의 손에 들어가 청나라가 곤경에 빠진 이때
진격하면 텅빈 만주를 차지하는 것은 아주 쉬웠으며 문제는 반격 인데, 청나라 자신이
위급한 지경이라 8기군을 만주로 되돌릴 수는 없으니 고구려땅을 되찾을 절호의 기회였다고 봅니다.
하지만 소심하고 나약했던 조선의 지도층은 끝내 요동 출병을 결행하지 못합니다. 하기사 태조
이래 사대(事大)를 국책으로 삼았으니 중국 사신이 오면 국왕이 영은문에서 영접하고
근정전 마당에서 왕이 칙사 앞에 2번 무릎을 꿇고 8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이궤팔고두례 二跪八叩頭禮 후에 꿇은채 황제의 칙서를 받이 근정전 안으로 모셨으니....
중국의 강남에서 3번의난을 일으킨 한족들은 자고나면 조선군이 만주로 들어왔느냐고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1674년에, 조선은 효종비 인선왕후의 상 을 당해 조대비가 상복을 9개월(서인) 입을지,
아나면 1년(남인) 입을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국운(?)을 건 당쟁에 빠지니 기회를 잃은 것입니다.
조선은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정적 이인임의 아들 로 잘못 기록된걸 고쳐
달라고 수없이 사신을 보내 애걸복걸하니 종계변무 宗系辨誣 라 하는데... 1394년에
발생해 수정되는 1584년까지 190년이나 걸렸으며 수정본을 받은건 1598년으로
황정욱과 역관 홍순언등 19명의 사신 일행 모두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봉해 큰 상을 내립니다.
또 광해군 세자 책봉을 명나라에 윤허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 명나라 예부(禮部)의 자문(咨文)
이 선조실록 37년 11월 25일자 기사에 나오는데.... "명나라 예부는 조선의 세자를
세우는 의논을 단연코 따를수 없으므로 장자(長子)를 세우는 상경(常經)을 주장하여
이번(夷藩)을 안정시키고 뒤폐단 막기를 성명(聖明)께 간청한 일 때문에 자문을 보냅니다.“
“세자를 정하였는데도 책명(冊命)이 오래 지체되기에 은전(恩典)을 속히 내려 인심을 진정하기를 성명
(중국 황제)께 간청한다고 하였는데, 세자를 세우는 일을 중국이 이미 허락하였고 봉전(封典)만 아직
행해지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 한데, 확실히 허락한 적이 없다” 라는 글이니 이후에도 사신
들이 계속 중국에 가서 머리를 찧으며 빌었던 역사 때문인지 만주 출병을 끝내 결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 조병학역 최후의 몽골 유목제국과 임계순의 청사(靑史), 조너선 스펜서의
강희제 그리고 위키백과와 나무위키 등 여러 글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