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대왕실록부록》 후기〔端宗大王實錄附錄後記〕
무인년(1698, 숙종24)에 ①신규(申奎)가 소장을 통해 노산군의 복위를 요청하였다. 전하께서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또 종친과 높고 낮은 문무(文武)의 관리 490여 명을 모아 놓고 그 문제를 조정에서 의논하였다. 그때 나온 의견은 서로 통일되지 않았으나 전하께서 반대하는 견해를 뿌리치고 머뭇거림 없이 실행하니 여러 신하들이 밝은 명을 공경히 따라 감히 반대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왕(大王)의 시호를 순정안장경순돈효(純定安莊景順敦孝)로 올리고,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이라 하였으며, 능호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왕후의 시호는 정순(定順), 휘호(徽號)는 단량제경(端良齊敬), 능호는 사릉(思陵)이라 하였으니 시호를 요청하고 올리는 모든 예는 오로지 법도에 따랐다.
12월 25일에 전하께서 직접 참여하신 자리에서 새 신주(神主)를 썼다. 다음 날 새로 쓴 신주를 의장대와 호위병을 갖춰 ②명정전(明政殿)에서부터 옮겨 종묘에 나아가 예법대로 배알한 다음 ③영녕전(永寧殿)의 임시 장막으로 다시 옮겨 모셨다. 27일이 되어 새 신주를 종묘의 서쪽 세 번째 방에 봉안하니 차례가 문종대왕(文宗大王)의 아래였다. 전하께서 몸소 제사를 올렸다.
애초에 대왕을 영월 땅에 장례 지냈고 왕후를 양주에 장례 지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옛 모습에 따라 함께 보수하였으니 모두 군왕의 장례 예법을 의거하였다. 이듬해인 1699년(숙종25) 3월 1일에 단종대왕의 능을 봉축(封築)하였고, 앞서 2월 20일에는 왕후의 능을 봉축하였다. 왕후의 옛 신주는 본래 영양위(寧陽尉) ④정종(鄭悰)의 후손 집 가묘(家廟)에 안치되어 있었다. 대례(大禮)가 정해지자 ⑤방제(旁題)를 깎아 낸 다음 임시로 ⑥시민당(時敏堂)에 옮겼다. 왕후의 신주를 단종의 신주와 함께 모시는 의식이 끝나자 왕후의 옛 신주를 사릉(思陵)에 묻었다. 장릉(莊陵)의 옛 사당에도 두 개의 위패가 있었는데 이것도 장릉에 묻었다. 이런 일들을 예관(禮官)에게 맡겨 처리하게 하니 수백 년간 행해지지 않았던 법도가 하루아침에 비로소 거행되었다. 정성과 의식을 모두 극진히 하여 어둡고 억울한 원한을 씻어 주니 참으로 종묘를 더욱 빛나게 하였고 백 대의 뒤에도 할 말이 있게 되었다.
6년 뒤인 갑신년(1704, 숙종30)에 사관(史官)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 지은 단종대왕의 역사 기록은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로 되어 있습니다. 글의 내용은 그 당시 사실에 근거하여 써놓은 것이므로 비록 의논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책 표지의 제목은 지금 옛날 그대로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이라고 고쳐야 합니다.”
또 청하기를 “복위할 때 있었던 사실을 모두 모아 기록하여 별도로 한 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선대왕들의 실록 가운데 부록의 예를 본받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전하께서 이 말을 옳게 여겨 곧바로 주무 관청을 설치하여 편찬하라 명하시고 대신(大臣)에게 그 일을 담당케 하였다.
이에 삼가 중종조 이후 단종을 높이기 위해 진행한 모든 사실을 부록의 앞부분에 먼저 실어, 전하께서 오늘에 시행하신 이 일이 중종 이후의 왕들의 뜻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지 일개 소신(小臣)의 말에 의해 시행된 것이 아님을 드러내어 밝혔다. 또 복위시킬 때 올라왔던 소(疏)와 의(議), 그리고 시책(諡冊), 축(祝), 고유(告由), 반교(頒敎) 등의 글을 종류에 따라 차례대로 편입하여 복위가 이루어진 전말을 나타내고, 이것을 단종대왕의 실록에 합한 후 《단종대왕실록부록(端宗大王實錄附錄)》이라고 명명하였다. 실록이 이윽고 만들어지자 전하께서는 여러 사고(史庫)에 나누어 보관하라고 명령하셨다. 높은 덕을 지극히 하고 공덕을 드러내는 우리 전하의 뜻이 이러한 데까지 이르렀으니 더 이상 유감이 없다.
내가 때마침 외람되게도 태사(太史)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전하께서 그 일의 모든 과정을 부록의 뒤에다 기록하게 하셨다. 이에 나는 전하의 명을 받들어 조심스럽게 일이 진척된 대강을 모아 삼가 위와 같이 기록한다. 그리고 부록 중의 차례와 범례는 모두 전하께 아뢰어 재가를 받고서 전하의 의견을 취한 것이니 감히 한 마디도 나의 생각을 거기에 덧붙이지 않았다.
① 신규(申奎) : 1659~1708.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문보(文甫), 호는 취은(醉隱)이다. 1698년(숙종24)에 죽음을 각오하고 노산군(魯山君)의 복위 및 단종(端宗)이라는 존호를 추숭(追崇)할 것과 중종반정 때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출당한 중종 비(妃) 신씨(申氏)의 복위를 내용으로 하는 장문(長文)의 소장을 올렸다. 이에 노산군에게는 단종이라는 존호가 올려지고, 묘소는 장릉(莊陵)으로 추봉되었으나 신비(愼妃)의 복위는 실현되지 않았다.
② 명정전(明政殿) : 창경궁(昌慶宮)의 정전(正殿)이다.
③ 영녕전(永寧殿) : 종묘에 있는 건물이다. 이 사당에는 조선 태조의 선대 4조 및 종묘의 정전(正殿)에 봉안되지 않은 조선의 역대 왕과 그 비(妃)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1421년(세종3)에 건립되어 그 해 12월 목조(穆祖)의 신주가 제1실에 옮겨진 이래 170여 년을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정전과 함께 소실되어 1608년(선조41)에 중건되었다. 그 후 1836년(헌종2)과 1870년(고종7)에 각각 개수되었다.
④ 정종(鄭悰) : ?~1461. 조선 시대 문종(文宗)의 사위이다. 사육신 사건으로 죄를 얻어 수원을 거쳐 통진, 광주에 위리안치 되었다. 1461년(세조7) 승려 성탄 등과 모반을 꾀하였다 하여 능지처참되었다.
⑤ 방제(旁題) : 신주(神主) 아래 왼쪽에 쓴 제사(祭祀)를 받드는 사람의 이름을 말한다.
⑥ 시민당(時敏堂) : 세자의 사무 공간이다. 그러나 때로는 종묘의 신주를 임시로 봉안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도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돌아와 임시로 시민당에 종묘의 신주를 모신 적이 있었다.
ⓒ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김기 박종훈 이관성 정만호 (공역) | 2013
①단종대왕 신주를 고쳐 쓸 때에 옮겨 봉안하는 축문〔端宗大王改題主時移奉祝文〕
예전 ②정난(靖難)은 왕위를 선양(禪讓)하고 계승(繼承)하는 형식을 따랐으므로 높이 상왕의 자리에 계시면서 융성한 위호(位號)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마치지 못하였으니 어찌 진실로 사람의 잘못이겠습니까. 운수가 이끄는 바 있어서 일에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외로운 무덤이 산골에 있는 채 사사로이 제사를 모시는 것이 맞지 않은 일인지라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니 어찌 멀고 가까움이 있겠습니까. 이에 말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진실로 마음에 느껴 조정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여러 의견도 동일하였습니다.
시행되지 못한 전례(典禮)를 급히 거행하여 성대한 의식을 강구하자 능의 이름과 묘의 시호를 차례차례 추존해 올렸습니다. ③종묘로 모시기 위해 신주를 고쳐 쓰니 예법에도 마땅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마치 때가 오기를 기다린 듯하니 어찌 ④의기(義起)를 꺼리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사묘(私廟)는 그대로 두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며 ⑤방제(旁題)를 깎아 내는 것도 또한 전례가 있었습니다.
이에 좋은 날을 정해서 별전(別殿)으로 옮깁니다. 그날의 일을 생각하니 생생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축문을 지어 아뢰고 간소하게 제물(祭物)을 바칩니다. ⑥양양하게 여기 계신 듯하니 바라건대 흠향(歆饗)하소서.
① 단종대왕(端宗大王) …… 축문 : 단종대왕의 신주를 사묘(私廟)에서 시민당(時敏堂)으로 이봉(移奉)할 때에 지은 축문이다. 《肅宗實錄 24年 11月 22日》
② 정난(靖難) : 1453년(단종1) 10월 수양대군이 친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말한다.
③ 종묘로 모시기 위해 : ‘부조(祔祧)’는 조위(祧位)와 제부(躋祔)를 말한다. 조위는 종묘(宗廟)에서 제사를 지내는 대(代)의 수가 다 된 조상의 신주를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시는 일이고, 제부는 삼년상을 마친 뒤에 신주를 사당의 조상 신주 곁으로 모시는 것을 말한다.
④ 의기(義起) :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예라는 것은 의의 실질이니, 의에 맞추어서 맞으면 예는 비록 선왕 때에 없는 것일지라도 의로써 새로 만들 수 있다.〔禮也者, 義之實也, 恊諸義而恊, 則禮雖先王未之有, 可以義起.〕”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예문(禮文)에 없더라도 이치를 참작하여 새로운 예를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⑤ 방제(旁題) : 신주(神主) 아래 왼쪽에 쓴 제사(祭祀) 받드는 사람의 이름을 말한다.
⑥ 양양하게 …… 듯하니 : ‘양양여재(洋洋如在)’는 《중용장구》 제16장의 “양양히 그 위에 있는 듯하며 그 좌우에 있는 듯하다.〔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양양은 유동(流動) 충만(充滿)의 뜻이다. 이는 귀신의 거룩한 덕을 형용한 것으로, 마치 돌아가신 분의 영령이 실제 계신 듯 여긴다는 의미이다.
ⓒ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박종훈 오승준 이관성 정만호 (공역) | 2013
①단종대왕의 신주를 고쳐 쓴 뒤에 별전에 봉안하는 축문〔端宗大王改題主後仍奉別殿祝文〕
처음에 사묘(祠廟)가 사가(私家)에 있었으니 지금까지 여러 대에 이르도록 보는 사람마다 탄식하였습니다. 다행히 지금 추복(追復)하여 이미 위호(位號)를 정하였으니 사체(事體)를 헤아려 볼 때 이전과는 다름 점이 있습니다. 그대로 옛 사묘에 두는 것은 예가 아닌 것 같아 빨리 옮겨 모실 것을 생각했더니 조정의 의논도 또한 이에 합치하였습니다.
이에 좋은 날을 정해 삼가 전우(殿宇)로 나아감에 우선 일의 형편에 따라 신주를 종묘에 옮길 때를 기다립니다. 신(神)의 의용(儀容)이 여기 놓임에 물채(物采)가 모두 갖추어졌습니다. 진실로 정리(情理)와 예문(禮文)에 맞으니 신령께서도 편안하실 것입니다.
이에 지금까지 일의 전말을 아뢰고 삼가 정갈한 제사 음식을 올리니 바라건대 존귀한 신령께서는 이를 흠향하여 저버리지 마소서.
①단종대왕(端宗大王)의 …… 축문 : 단종대왕의 신주를 사묘(私廟)에서 시민당(時敏堂)으로 이봉(移奉)한 후에 지은 제문이다. 《肅宗實錄 24年 11月 22日》
ⓒ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박종훈 오승준 이관성 정만호 (공역)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