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을 위한 설교로 준비한 것인데요, 묵상의 깊이는 보잘 것 없더라도
함께 은혜나누기 원합니다... ^^*
"인내는 하나님과 가장 닮은 성품입니다”
본문 : 창세기 41장 46절
참을 인자를 세 번 쓰는 이유
참을 인자를 세 번 만 쓰면 살인도 면한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저는 학창시절에 이 속담의 의미를 알고는 있었지만 문자 그대로 해석해보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공을 들여서 참을 인(忍)자를 세 번 써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참을 인자를 세 번 쓰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글자의 특성상 이리저리 점을 찍고 각을 세우고 위와 아래 각기 다른 글자를 제대로 조합을 시키면서 전체적인 윤곽을 드러내야 하는 글자였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을 인자를 세 번 쓰는 것은 정말 살인을 면하게도 하겠구나. 인자를 세 번 쓰는 동안 또 다른 스트레스가 살인을 불러일으키는 스트레스보다 강할 수도 있겠구나” 어이없는 적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다시 한번 옛 선조들의 지혜는 참으로 말씀처럼 깊고 오묘한 맛이 있다고 결론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스트레스 받는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가 직장에서 맡겨진 일을 감당하면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와 짜증 섞인 상황의 불합리성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상황과 종류가 있겠지만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스트레스가 쌓이는 시간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불합리하고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상사의 요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억울하게 남의 잘못을 뒤집어쓰는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는 이런 여러 가지 스트레스 발생의 가능성이 산재해 있습니다. 어찌보면 스트레스가 없는 날, 없는 부서, 없는 회사를 찾는 것이 훨씬 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쁘게 살고 싶은 것은 인류 공통의 소원입니다. 누구든지 화내면서 짜증내면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어떻게든 해소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망각의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가장 많습니다. 담배로, 술로, 쾌락으로, 편집증에 가까운 취미생활로 스트레스를 망각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망각의 힘을 이용한 시도는 처음에는 상당히 효과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오늘 술을 먹고 인사불성의 상태가 되어도 내일 아침에는 말짱합니다. 술을 먹어서 의식이 불분명한 상태가 되면 스트레스도 짜증도 그 어떤 괴로움도 다 잊은 듯 합니다.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물론 다른 어떠한 사실들로 같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강인한 체력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 아마도 이런 시도를 하는 사람은 더욱 큰 스트레스를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근본적인 문제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내라는 또 다른 가치를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인내라, 정말 좋은 말인 것 같지만 그리 친근한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내하는 것이 쉽다면 우리는 스트레스 받지도, 짜증나지도 않는 직장생활 때문에 행복해서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스트레스 많이 받은 사람
오늘 함께 읽은 성경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요셉이라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에 얽힌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고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에 대한 약력소개는 이 시간에 꼭 필요한 일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시간에는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 그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그는 우리만큼 이나 스트레스를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성경에 나와 있는 객관적인 정보들을 종합해 보자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스트레스와 짜증나는 하루하루를 살았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읽을 수 있는 내용을 그대로 재구성해 본다면, 역사상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사람 중에 하나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요셉은, 17세 때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에로 팔려옵니다. 이 사실 만으로도 스트레스는 사춘기 소년을 죽고 싶은 절망으로 몰아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겨우겨우 이 스트레스를 이겼을 무렵, 그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지키려는 노력 때문에 어이없게도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포악하고 잔인한 죄를 짓고도 감옥에 가면 괴롭고 짜증나고 견디기 힘든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잘못도 없이 감옥에 간 사람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요셉은 억울함과 분함과 노여움이 하늘을 찌를 듯 했을 것입니다.
저는 우연찮게 미국 드림웍스사에서 만든 “요셉”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요셉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애니메이션입니다. 극적인 구성을 위해서 성경에서는 언급이 없는 내용들도 이 애니메이션에는 등장합니다. 잊혀지지 않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 감옥 바닥에 누워 하나님을 원망하는 장면입니다. 아무리 창세기를 자세히 살펴보아도 요셉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을 늘어놓았다는 기사는 읽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인간적으로는 너무나도 스트레스 받고 절망하고 좌절했던 한 젊은이의 모습을 다시 찾아보아야 할지 모릅니다.
요셉, 그는 꿈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사람의 노예가 되었을 때, 그리고 오해와 억울한 누명으로 어둡고 추운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과연 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진정한 요셉의 모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항상 형통하였던 모습이 아니라 피가 나도록 바닥을 내려치며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짓이겨진 삶의 자락을 슬퍼하고 애통해하는 모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다림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해 볼까요? 바닥을 내려치던 그가 발견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어두운 감옥 속에서, 낮에만 잠깐 들어오는 햇빛과 미약하기가 이를 데 없는 습기를 빨아들이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작은 묘목 한 그루였습니다. 앙상하기 이를 데 없는 가지가 뻗어 있는 그 묘목을 요셉은 자신을 바라보듯, 거울을 바라보듯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묘목 주위의 땅을 파고, 흙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묘목이 튼튼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주위를 돌무더기로 쌓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마셔야 할 물을 아끼고 아껴서 묘목에게 주었습니다. 몇 잎 되지도 않는 잎을 닦아주면서 그는 생명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질긴 생명의 힘, 그 생명의 힘 속에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묘목은 요셉이었습니다. 감옥 속 그 협착한 틈새 사이에서 피어오른 이 위대한 생명의 힘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요셉의 힘이었습니다. 그 묘목이 자라 그의 키보다도 커진 어느 날, 바로가 요셉을 불렀습니다. 그의 꿈을 해몽케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더 이상의 그늘이나 아픔은 없었습니다. 그는 인내했던 것입니다. 인내의 힘으로 묘목을 키웠던 그 생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사랑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몸소 체험하고 실천하였던 그의 인내의 힘으로 그는 강하고 담대하며, 지혜롭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금으로 태어난 사람이었으나 진주로 변화되었습니다. 오직 아픔과 상처로 조개가 인내할 때에만 맺히는 생명의 보석인 진주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순간이었습니다. “요셉이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는 애굽으로 17세에 팔려 왔었습니다. 13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의 13년 인생을 채운 단어는 오직 인내였습니다. 그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민족을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요셉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모형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둘 다 이스라엘 12 지파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삼촌들과 유업을 함께 받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내를 배우고 인내를 실천한 요셉을 기억하시고, 축복하셨고, 말씀대로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무조건적으로 참고 인내하는 것 보다는 건강하게 분노나 화를 표출시키는 것이 건강에 더 좋다는 의학적인 견지의 보고서를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사람에게만 있는 병 이름을 아십니까? 바로 “화병”입니다. 화가 뭉치고 뭉쳐서, 한이 서리고 서리가 내려서,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는 악성 종양 같은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인내는 결코 화를 억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하다가 화병에 걸린 사람은 없습니다. 인내는 무조건적인 화 참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인내는 사실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 화를 적절히 내고 분노를 지혜롭게 표출시키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 적절히 화를 낸다거나 지혜롭게 분노를 표출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상사 앞에서 적절하게 화내는 방법을 아시는 분계십니까? 고객 앞에서 지혜롭게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노하우를 지니신 분계십니까?
인내가 가장 지혜로운 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인내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인내입니까? 그것은 요셉처럼 사는 것입니다. 요셉과 같이 13년의 세월을 참아내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닙니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자살이라도 하면 그 깊고 지독한 배신감과 좌절감과 패배감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의 위대하고 신비한, 생명 속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내는 생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보다 더 귀중한 가치가 아니라면 눈을 딱 감아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은 의미 없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면, 하나님은 계속 일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알았던 인내의 비밀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비밀이 그를 인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리고 인내의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사랑하는 직장인 여러분, 우리가 속한 일터는 때로 형들로부터 버림 받아 굴러 떨어진 구덩이일 수도 있습니다. 누명을 받아 들어가게 된 애굽의 지하 감옥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인내라는 사다리가 있습니다. 인내라는 열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 분께서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성품을 갖게 하셨기에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선물이 바로 인내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내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아니 그 분 자신이 바로 인내 자체이십니다. 그 분께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시기까지 우리를 위해서 인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모든 행하심은, 곧 우리의 모든 것을 인내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스트레스를 이기시기 바랍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이 바라보았던 작은 묘목이 그의 키보다 더 큰 나무가 될 때까지,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여러분을 위한 바로 그 영광스러운 축복의 때를 위하여,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직장이 축복의 고센 땅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할렐루야!
첫댓글 오랜만에 박전도사님의 연재를 다시 기대하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