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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5월27일 토요일 79코스를 트레킹하는 날 사위네 가족들과 해변가에 아담하게 지어진 함평군내의 농어촌에 도착해서 마을과 해변풍경을 관람하고 숙박을 하면서 28일엔 두 시간이 소요되는 퍼플섬을 가기 위해 아침 07:30분 숙소에서 출발 7.2km의 길이인 천사교를 경유하여 인위적(人爲的)인 것은 모두가 짙은 보라빛으로 치장된 해변길을 걷고 바닷물 건너의 섬과 연결하여 한바퀴 돌아오게 만든 데크길 위를 걷고 1.5km의 숲길을 걸어서 큰 규모의 라벤다 축제장에 도착하여 한 시간동안 짙은 보라빛의 꽃길을 걸으며 실제 수는1009개라는 물건너의 1004도를 바라보다가 해변길로 내려와서 7인승의 탈 것인 소형차 10여대가 오가며 데크길 앞까지 실어나르는 승차장에 오니 대기하는 승객이 30여명이여서 1000원을 주고 산 차표를 손에 들고 20분 가량을 기다렸다가 타고와서 데크길 앞에서 내려 또 데크길로 물을 건너 주차장에 도착하니 낮 12:10분 가던길을 돌아 함평 읍내에 도착하니 두시반이 지난시간 농협마트에서 먹거리를 사들고 마을 어귀 정자에서 점심식사를 하고는 매년 나비축제가 열리던 엑스포공원에 갔는데 두개의 산봉우리까지 연결된 공원에 볼꺼리가 너무 많아 꽃이 활짝핀 실내의 식물관에은 종류별로 나비가 춤을 추고 곤충이 노니는 곤충관 나비관 화훼관 식물원등은 일정대로 이동하는 시간상 볼 수가 없어서 그 곳을 나와 주포한옥단지와 해수욕장을 관광하고 숙소에 가니 19:30분 2박을 하고 29일 사위가 서산은 열 한시경 비가 개인다고하니 다른 갈 곳을 취소하고 가자고해서 딸 사위가 직장인여서 부처님 오신날 덕분에 3일 연유라서 이 번엔 쉽게 왔지만 일요일도 직장에 가는 날이 종종이여서 내가 쌍수(雙手)를 들어 동의를 하니 서둘러 07:30분에 숙소를 출발 폭우가 쏟아지는 빗길을 달려 서산에 오니 비가 개이고 걷기 좋은 날씨였답니다. 정오 전인데 점심을 먹고 대산터미날에 도착하니 혼자 걷기라서 제대로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어 팀장님께 전화를 했는데 길안내 설명을 잘 해주셔서 무사히 잘 다녀왔답니다... 서해랑길 79코스 : 대산터미날 ~ 화곡어린이집 ~삼길산 ~ 삼길포항 12.2k, 4h 서산시의 연혁 석남동·일람리 등지에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여 지금의 지곡면 일대에 치리국국(致利鞠國)이라는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여 기군(基郡)이 설치되었고, 성대혜현(省大兮縣, 지금의 태안군)과 지육현(知六縣, 지금의 지곡면)이 예속되었다.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과 교류하는 관문 역할을 하였으며,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84)과 보원사지(普願寺址) 등을 통하여 불교문화가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전국이 9주(州)로 정비되면서 757년(경덕왕 16) 서산 지역은 웅천주(熊川州)에 속한 부성군(富城郡)으로 편제되었고, 성대혜현과 지육현은 각각 소태현(蘇泰縣)과 지육현(地育縣)으로 개칭되어 부성군에 속하였다. 또한 지금의 운산면 지역인 여읍현(餘邑縣)은 인접한 혜성군(槥城郡, 지금의 당진시)의 관할에 속하였다. 894년(진성여왕 7)에는 최치원(崔致遠)이 태수로 부임하였다. 고려가 개국한 뒤에도 부성군이 유지되다가 1143년(인종 21) 부성현으로 고쳐 현령을 두었다. 이후 1182년(명종 12) 현민들이 민란을 일으켜 폐현되었다가 1284년(충렬왕 10) 이 지역 출신인 대호군(大護軍) 정인경(鄭仁卿)이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 공으로 서산군(瑞山郡)으로 승격되었다. 1308년(충렬왕 34) 다시 서주목(瑞州牧)으로 승격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2) 모든 목(牧)을 폐지함에 따라 서령부(瑞寧府)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지서주사(知瑞州事)로 격하되었다. 고려 때에는 조세로 거둔 현물을 보관·수송하던 조창(漕倉)의 한 곳인 영풍창(永豊倉)이 지금의 팔봉면 어송리에 설치되었으며, 삼남 지방의 세곡을 해상으로 운송하기 위해서는 서산을 거쳐야 하였으므로 이를 약탈하려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다. 조선이 개국한 뒤, 1407년(태종 7)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이 해미현(海美縣)으로 병합되었고, 1413년(태종 13) 전국이 8도(道)로 개편되면서 충청도에 속한 서산군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조선 전기에 걸쳐 군내면·대사동면·두치면·오산면·화변면·마산면·노지면·영풍면·대산면·율곶면·인정면·문지현면·지곡면·성연면·동암면의 15개 면 또는 여기에 안면면과 동음암면을 추가한 17개 면을 관할하였다. 1895년(고종 32)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되면서 해미군·태안군과 함께 홍주부에 속하였으며, 안면면이 태안군으로 분리되고 영풍면과 문지현면이 각각 영풍창면과 문현면으로 개칭되었다. 이듬해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충청남도에 속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해미군과 태안군이 서산군으로 통합되었다. 이때 서산군의 군내면·대사동면·율곶면·오산면이 서령면으로, 일도면·이도면의 대부분과 지곡면의 웅도리가 대산면으로, 해미군의 고북면과 동면 및 홍주군 고남면·상도면이 고북면으로, 마산면과 화변면이 부석면으로, 상성연면·하성연면과 동음암면 문기리 일부가 성연면으로, 해미군의 운천면·부산면·이도면과 서산군의 동음암면 및 면천군의 마산면 일부가 운산면으로, 동음암면·두치면·동암면·운천면의 일부가 음암면으로, 인정면·노지면·서산면의 일부가 인지면으로, 지곡면과 문산면·대산면의 일부가 지곡면으로, 영풍창면과 문현면 및 태안군의 동이면·북일면 일부가 팔봉면으로, 해미군의 동면과 서면·동암면이 지성면으로 각각 병합되었다. 이로써 서산 지역은 16개 면에서 서령면·음암면·인지면·부석면·팔봉면·지곡면·대산면·성연면의 8개 면으로 재편되었고, 태안 지역은 14개 면에서 7개면으로, 해미 지역은 10개 면에서 5개 면으로 재편되었다. 1916년 지성면이 해미면으로, 1917년에는 서령면이 서산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42년 서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8·15광복 후, 1957년 대호지면과 정미면이 당진시에 이속되었고, 1973년 태안면이 읍으로 승격된 데 이어 1980년에는 안면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서산읍이 서산시로 승격되어 분리되면서 부춘동·동문1동·동문2동·수석동·석남동의 5개 동이 설치되었고, 태안읍·안면읍·고남면·근흥면·남면·소원면·원북면·이원면이 태안군으로 분리되었으며, 대산면·고북면·부석면·성연면·운산면·음암면·인지면·지곡면·팔봉면·해미면은 서산군으로 재편되었다. 1991년 대산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95년 서산시와 서산군이 통합되어 도농복합형의 서산시로 새로이 출범하였다. 2019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읍(대산읍) 9면(인지면·부석면·팔봉면·지곡면·성연면·음암면·운산면·해미면·고북면) 5동(부춘동·동문1동·동문2동·수석동·석남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행정동인 부춘동은 법정동 2개 동(읍내동·갈산동)을, 동문1동은 법정동 3개 동(동문동 일부와 온석동·잠홍동)을, 동문2동은 법정동 1개 동(동문동 일부)을, 수석동은 법정동 2개 동(수석동·석림동)을, 석남동은 법정동 7개 동(석남동·양대동·죽성동·예천동·오남동·장동·덕지천동)을 각각 관할한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서산대산리유적[瑞山大山里遺蹟]
서산대산리유적은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일대에 있는 신석기시대~초기 철기시대의 유적이다. 학술 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정확한 성격을 알 수 없고 위치도 확실하지 않지만,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일대의 발굴 조사 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지역의 선사 문화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출토 유물로 볼 때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일대에는 신석기시대~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이 다수 분포할 가능성이 높다.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일대에 있는 신석기시대~초기 철기시대의 유적.
발굴경위 및 결과
서산대산리유적(瑞山大山里遺蹟)은 1960년대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에 걸친 석기들이 채집되어 알려진 유적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지표 조사나 발굴 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며, 당시 채집된 석기들은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에 있는 대산중학교 향토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석기는 총 48점으로 신석기시대 석기 31점, 청동기시대 석기 17점으로 분류할 수 있다.
형태와 특징
신석기시대의 석기는 돌도끼, 갈돌 및 갈판, 굴지구, 화살촉으로 구분된다. 돌도끼는 양면을 갈아 날을 대칭되게 만든 조갯날도끼와 한 쪽 면만 갈아 날을 만든 한쪽날도끼로 분류할 수 있다. 조갯날도끼는 평면 사다리꼴에 날을 둥글게 만든 석기로 주로 단단한 편마암으로 제작하여 벌목용으로 사용되었다. 한쪽날도끼는 현재의 대패와 같이 나무의 가공용으로 사용된 것들이다. 갈돌 및 갈판은 곡물을 빻거나 견과류의 껍질을 벗기는 데 사용한 제분구의 일종이다. 갈돌 및 갈판은 청동기시대에도 사용되지만, 서산대산리유적에서 채집된 석기들은 형태로 볼 때 신석기시대에 제작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굴지구는 땅을 파거나 조개류를 채집할 때 사용된 것으로 뗀석기로 제작하였다. 서산대산리유적에서 출토된 2점은 충청남도 일대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굴지구들과 매우 유사한 형태이다. 화살촉은 4점이 출토되었는데 평면 형태는 삼각형이다. 화살대에 장착하는 부위의 형태에 따라 만입식 2점, 평기식 2점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석기는 반달돌칼, 한쪽날도끼, 간돌칼, 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반달돌칼은 청동기시대 곡물의 낟알을 거두는 데 사용된 대표적인 도구이다. 평면 형태에 따라 크게 반월형과 삼각형으로 구분되는데, 반월형은 전기 청동기시대에 주로 사용되었고, 삼각형은 후기 청동기시대에 주로 사용되었다. 서산대산리유적에서 출토된 반달돌칼 2점은 평면 형태로 볼 때 전기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어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한쪽날도끼는 긴 기둥 모양의 평면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신석기시대 것보다 크고 두꺼운 것이 특징이다. 간돌칼은 4점이 출토되었는데 파손이 심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다. 이단으로 제작된 병부와 긴 경부 등으로 볼 때 전기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시대 화살촉은 슴베가 있는 유경식(有莖式)으로, 형태에 따라 두 종류로 구분된다. 슴베를 이단으로 만든 석촉(二段莖式)은 3점이 출토되었고, 일단으로 만든 석촉(一段莖式)은 7점이 출토되었다. 이단경식은 전기 청동기시대에 주로 사용되고, 일단경식이 후기 청동기시대에 주로 사용되는 것으로 볼 때 대산리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 전 시기에 걸쳐 점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석기 이외에 한국식 동모(銅鉾)도 1점이 출토되었다. 이 동모는 한국식 동검과 함께 초기 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 중의 하나로 충청남도 서산시 일대에 초기 철기시대 유적이 존재하였음을 알려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의의 및 평가
서산대산리유적은 학술 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정확한 성격을 알 수 없고 위치도 확실하지 않지만,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일대의 발굴 조사 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지역의 선사 문화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출토 유물로 볼 때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일대에는 신석기시대~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유적이 다수 분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앞으로 이 지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삼길산[三吉山, Samgilsan]
충청남도 서산시의 대산면 화곡리에 있는 산이다. 조선조에는 산 앞에 평신진(平薪鎭)이 위치하여 있었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평신읍지』에 삼길산이 기록되어 있고, 『1872년지방지도』에도 삼길산, 평신진, 삼길포가 나와 있다. 또한, 『서산군지』(1926)에는 "삼길산을 오르면 당진, 면천의 여러 산들은 바둑판에 붙은 바둑돌 같고 삼길(三吉)의 바다 빛은 한 폭의 흰 명주가 매달린 듯하다. 풍경이 매우 뛰어나서 봄바람 불고 가을 달이 밝을 때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들 사료를 통하여 산 이름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엿볼 수 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또한, 삼길산과 삼길포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도 분명치 않다.
전성기 때의 삼길포에는 50여 척의 뱅어 잡이 정치망 어선이 앞바다에서 초봄부터 가을까지 파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1984년 대호방조제가 조성되면서 기능이 많이 쇠하여졌으며, 지금은 인천과 왕래하는 연락선이 기항하고 있다. 관련 지명으로 '밧생길'이 있는데 삼길포 마을 밖에 있는 삼길포 마을이라는 뜻이다. 또 '작은생길'이라고도 하는데, 삼길포 마을에 포함된 작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출처:(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
삼길사[三吉寺]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삼길산(三吉山)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
개설
조선시대에는 ‘삼길사(三吉寺)’·‘해월암(海月庵)’·‘해월사(海月寺)’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다. 최근에 절의 이름을 ‘삼길사’로 변경하였다.
내용
백제 때 창건된 절로 전해오나 이후 오랫동안 절의 연혁이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후기인 1619년(광해군 11)에 편찬된 서산군의 군지(郡誌) 『호산록(湖山錄)』에는 ‘삼길사’로 기록되어 있다. 1726년(영조 2)에 절을 중수하였는데 당시 원통전의 현판에는 ‘삼길산 해월암 중수기’라고 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볼 때 사찰의 본래 이름은 ‘삼길사’였지만, 18세기 이후에 ‘해월암’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해월암의 규모가 커지면서 암자에서 사찰로 격상되어 ‘해월사(海月寺)’라고 하였다. 해방 이후 최근에 와서 절의 명칭을 옛 문헌기록에 전해오는 ‘삼길사’로 변경하였다. 본래의 사찰 이름인 삼길사로 복귀한 것이다. 절의 건물로는 대웅전과 원통전,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에는 주불로 석가여래불(釋迦如來佛)을 모시고 있으며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관음보살(觀音菩薩) 등을 함께 봉안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백제 때 건립된 고사찰로 전해오나 이를 고증할만한 기록이 없기에 당시에도 사찰 명칭을 ‘삼길사’라고 했는지는 확인되지는 않는다.
참고문헌
『호산록(湖山錄)』
『한국불교사찰사전』(이정, 불교시대사, 1996)
『한국사찰전서』(권상로,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산 해월사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유물 / 개금중수기
삼길포항 [三吉浦港]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에 있는 국가 어항.
변천
삼길포항은 조선 시대부터 인천을 왕래하던 범선이 출입하던 포구였다. 1972년 지방 어항으로 지정되었으며, 1994년부터 현대식 항구로 바꾸기 위한 기본 조사 및 시설 계획을 수립하였다. 1999년에는 서산시에서 유일하게 국가 어항으로 지정되었고 2000년에 어항의 기본 설계 용역을 발주하고 2002년에는 실시 설계 용역을 발주하여 그 결과에 따라 2003년에 3만 2575㎡ 면적에 방파제, 물양장, 선착장, 호안, 선양장, 준설, 진입 도로 등의 공사를 착공하여 2011년 완공할 예정이다.
구성
2009년 어항 통계에 의하면, 어선 109척에 전체 톤수 242.23톤, 평균 톤수 3.14톤이며, 유람선 2척이 정박하고 있다. 계류 시설로 선착장이 167m, 2008년에 공사가 완료된 방파제는 299.5m이다. 물양장은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데 상·하부 357m 중 하부 공사는 2010년에 완료되었고 상부의 잔량 77m가 공사 중에 있다. 어항 면적은 4만 9000㎡, 어획고는 84억 100만 원, 어획량 4,331M/T이며 주 어종은 우럭, 노래미 등이다.
현황
2005년부터 우럭을 테마로 하는 ‘삼길포 우럭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2009년까지는 5월에서 6월 사이에 열렸으나 2010년부터 10월에 개최되고 있다. 2009년 1월에는 대산지방해양항만청에서 삼길포항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을 형상화하여 삼길포 붉은등대를 건립하였는데 등대 주변에는 우럭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쉼터 등이 조성되어 있어 우럭 등대로도 불린다. 한편 유람선은 대산항과 대산임해산업단지, 주변의 유·무인도를 구경하는 코스로 운영하고 있으며, 여름철에는 일시적으로 충청남도 당진군의 난지도를 연결하는 항로가 운영된다.
참고문헌
서해어업관리단(http://westship.mifaff.go.kr/)
서산시청(http://www.seosan.go.kr/)
한국어촌어항협회(http://www.fipa.or.kr/)
농림수산식품부 삼길포넷(http://www.samgilpo.org)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3-05-30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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