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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33:19 |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
33장은 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겠다”(3) 하시는 하나님께 모세의 간청으로 말미암아 “내가 친히 가리라”(14)는 허하심을 받는 내용입니다. 깨어진 돌 판처럼 파괴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세의 중보로 말미암아 회복이 된 것입니다.
본 장에서 주목해야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총”(恩寵)이라는 말입니다. 모두 다섯 번(12, 13, 13, 16, 17)이나 등장합니다. 이는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말씀입니다. 비극적이고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모세가 앞세우고 기도한 것은 다름 아닌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은총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그러므로 본 장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게 되면 의외다 싶게 주제가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것은 달리는 없습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11) 가슴 아픈 말씀
둘째 단원(12-16) 모세의 중보기도
셋째 단원(17-23) 은혜로운 말씀
첫째 단원(1-11) 가슴 아픈 말씀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3).
하나님께서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1)한 그 약속을 지켜서 너희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겠다”(3)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동행하여 주심은 모세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16) 말한 대로 최고 최대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 하는 그 안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총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에 상응하는 책임이 뒤 따라는 법입니다. 그래야만 이 복된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러하지를 못했습니다.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거듭(3, 5) 말씀하십니다. 목이 곧다는 말은 순종과는 반대되는 고집이 세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들과 동행하신다면 “중로에 너희를 진멸하까 염려함이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와 동행할 수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동행하지 않는 것이 너희를 위하는 일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은 약속한 “선물”은 주되, “자신”은 주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선물입니까? 주 자신입니까?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했다”(4상)고 말씀합니다. 이는 황송한 말씀이기보다는 “서운한 말씀”(현대인의 성경), 보다는 “가슴 아픈 말씀”(공동번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통곡을 하면서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했다”(4하)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호렙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한 근신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금 신상은 바로 이 단장품(32:2)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실족케 한 오른 눈을 빼어 버리듯”(마 5:29) 하는 결단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본 단원에는 “진멸”(3, 5)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고 뒷 부분에는 “은총”이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도 주목해보아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진멸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후로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7) 했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묘사는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가 소원(疎遠)하여졌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중에서도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9) 합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11)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멀리, 떠나게” 된 상황에서도 이 중보자로 말미암아 소망이 남아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2절 이하에는 얍복 강변에서의 야곱의 기도(창 32:24)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눅 22:44)를 연상케 하는 모세의 중보기도가 나옵니다.
둘째 단원(12-17) 모세의 중보기도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①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12) 합니다. 이는 “전에 말씀하신” 약속을 붙잡고 하는 기도입니다.
②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13상)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간구가 무슨 자격이나, 공로나, 청구할 만한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만을 기대한다는 간구인 것입니다.
③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13중)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입니다.
④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13하)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기도입니다. 만일 이들을 진멸하시면 어찌되겠습니까? 신명기 9:28-29절을 보십시오. 진멸 당할 위기 때마다 모세는 만일 그렇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들일 능력도 없고 그들을 미워도 하사 광야에서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셨다 할까 두려워하나이다 그들은 주의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곧 주의 기업이로소이다”고 간구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이에 이르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14) 하고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용기를 내어 더욱 육박합니다.
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15) 합니다. 자신들도 올라가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여주시지 않는다면 가나안 땅인들 무슨 기쁨이 되겠나이까, 하나님 계신 여기가 좋사오니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⑥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16) 합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이것이 최대의 은총이요 축복임을 말씀합니다. 모세는 바로 안 것이요,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박탈하신다면 천하만민보다 나을 것(구별하심)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중보기도입니다.
셋째 단원(17-23) 은혜로운 말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로 “내가 친히 가리라”는 허락을 받아내기에 이른 것입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는 말씀이 “가슴 아픈 말씀이라”면 “내가 친히 가리라”는 말씀은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은혜로운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18) 하고 실로 엄청난 소원을 말하기에 이릅니다. 모세가 이렇게 하고 있음을 무모한 소청이라고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증거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린” 시점에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하고 간청하고 있음을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전환점이 있습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그것은 앞장에서는 “증거판이 깨어지고”(행위언약), 본 장에서는 “주의 영광”(복음)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라는 말씀은 복음이지 휘장이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의문(儀文)에 속한 말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이 누구에 의하여 어떻게 가능하여지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알았기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의문의 수건이 벗어지고 막힌 휘장이 찢어져야만, 달리 말하면 증거판이 깨어져야만 주의 영광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깨뜨려)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골 2:14). 이는 이 대목을 해설해주는 적절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하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은 율법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이는 복음 중에서도 최고봉이요 극치인 것입니다.
이점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21)는 말씀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반석”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대번에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라”(17: 6) 하신 “그 반석”으로 인도해줍니다.
① 모세가 하나님께 은총을 입을 수 있었던 것도 치심을 당한 반석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② 목이 곧은 백성들과 동행하심이 가능해진 것도 반석이 치심을 당했기 때문에 가능하여진 것입니다.
③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허락된 것도 치심을 당한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만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22-23)고 온전히 허락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모세는 광채 나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웠더라”(34:33)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구약에 속한 자요 예표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한계입니다.
형제여,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반석 틈에 엎드려 있도록 손으로 덮으시지 않을 것입니다. 등만 볼 수 있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기는커녕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고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는 그 영광의 형체를 수건으로 결코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19)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