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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명조(明朝 / 1368 ~ 1644)의 흥망성쇠(興亡盛衰)(5) - 格物致知와 陽明學과 秘話들
임광자 추천 0 조회 74 08.06.01 08: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조(明朝 / 1368 ~ 1644)의 흥망성쇠(興亡盛衰)(5)- 숨겨진 비화(秘話)들

 

마. 숨겨진 비화(秘話)들                                                이길상

 

(1) 명대(明代)의 유학과 격물치지(格物致知)

 

오늘날 중국의 지형도어느 시대건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사상적 혹은 학문적인 이념이 있고, 그 이념이 바로 그 시대를 반영한다. 이런 것을 이데올르기라 한다.

 

명나라를 대표하는 학문을 흔히 양명학(陽明學)이라고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 시대 유학의 또 다른 유형이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일 뿐학문의 중심은 역시 성리학이었다.

 

다만 성리학이 관학(官學)으로 자리잡으면서 과거(科擧)에합격하기 위한 교과서 역할을 담당하게 됨에 따라 더 이상의 학문적인 발전은 기대할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변화되는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기에는 여러 가지 부족한 것이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성리학은 남송시대 주희(朱熹 / 1130 ~ 1200)가 사서(四書)에대한 해석(四書集註)을 도덕적인 명분론(名分論)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풀이한 내용을 중심으로 발전시킨 유학이다.

 

유학에서 사서(四書)라고 하면, 대학(大學), 중용(中庸),논어(論語), 맹자(孟子)를 말한다. 이 가운데 대학에서 말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대한 주자의 해석이 잘못되었다 하여 반론을 제기한 것이 왕양명이었고 이런 왕양명의 새로운 학설에서 양명학은 시작된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대학에서 이르기를"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에 대한 풀이를 이미 대학의 편찬 당시 주(註)를 달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덕으로 천하를 다스리려면(平天下)
먼저 그 나라를다스려야 하고(治國),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다스려야 하고(齊家),
그 집안을 다스리려고 하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아야 하고(修身),
몸을 닦으려고 하 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고(正心),
그 마음을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정성스럽게(誠意)해야 된다 (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하는 것인데,

 

여기까지는 이미 편찬 당시의 주해(註解)가 명료하게기술되어 있어서 후대의 학자들간 이설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머지 네글자, 즉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에 대한 해석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에 이를 둘러싸고 북송시대부터 뜨거운 논쟁이 거듭되었으나 결국 주자의 학설을 정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사변적(思辨的)인 철학적(哲學的)인 가미 없이 글자의 뜻대로 해석하면,
정성스럽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앎에이르러야 하고(致知 / 뭘 알아야 하고),
앎에 이르고자 한 자는 먼저 사물을 바로 잡아야 한다(格物 /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단순한논리도 말꼬리(?)를 잡기 시작하면 그 논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정답은 모호하고의문만 가중된다. 이런 사변적(思辨的)인 논제는 생각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설이가능하기 때문이다.

 

격물치지에 대하여 주자는 천지만물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氣)이 있는가 하면 그 형상을 조종하는 마음(理)이 있다고 보았고, 다시 그 마음은 성(性 /仁義禮智)과 정(情 / 喜怒哀懼愛惡慾)으로 나누어 지는데, 이(理/ 형상의 조정 능력)는 성(性)에만 깃들인다고 하여, 성인이 되는 길은 마음 속의 본능인 정(情 / 感情)을 멀리하고 이지적 경향인 성(性 / 理性)을 충실히 하는데있다고 하였으며,

 

이성을 충실하게 하는 방법은 마음 밖의 있는 사사물물의 이(理)를 하나하나 밝혀 파악하고(格物致知) 널리 책을 읽고 고전을 연구함으로써 완성된다고 가르쳤다.

 

다시 말하면 모든 만물에는 理가 있는데, 이를 하나하나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窮究) 겉과 속(表裏), 매끄러움(精)과 거친(粗) 것이 있는것과 같이 사람의 마음에도 성(性 / 理性)과 정(情 / 感情)이 있고, 性이 곧 理라고하여(性卽理) 이것을 인간도리의 근본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성인군자가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분수와 체면을 지킬 줄 아는 이성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어야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감정만을 앞 세우면 배움 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이성이라는걸 모르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주자가 생존했던 송 나라시대에는 이민족의 압박으로몹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기막힌 현실에서 힘만을 앞세우고 무지막지하게 달려드는 이들 오랑캐들을 도덕적 원리로서 비하(卑下)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인간의 탈은 썼다고 해서 모두 같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으로서의 예절을 모르는 것은 오랑캐일뿐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왕수인(王守仁 / 陽明 / 1472 ~ 1528)이 생존했던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은 한족(漢族) 부흥의 기치(旗幟)를 앞세우고 명나라가 창업(創業)한지 1세기를 지난 후였다. 따라서 고답적(高踏的) 원리주의만을 강조하는 성리학만으로는 학문적 욕구나 변화하는 사회를 감당하고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더구나 정치기강이 문란하고, 뇌물이 판을 치고, 황금만능이 통하는 세상에서 겉치레에 불과한 체면만을 중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며,이런 사회 풍조에 반발해서 사상적으로는 선종(禪宗) 불교의 영향을 받아 심학(心學)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문학적으로는 시(詩)·부(賦) 대신에 원곡(元曲)을 발전시킨 소설이 등장하여 인간의 복잡한 감정세계를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선지후행(先知後行)을 강조했던 성리학에 의문을 가지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도덕을 중시하는 양명학(陽明學)이 등장하였으며,소위 중국의 4대 기서(奇書)라고 일컫는 연의삼국지(演義三國志)와 수호지(水滸誌),그리고 서유기(西遊記)와 금병매(金甁梅)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도 이 시대에 나타난새로운 시대 조류라고 볼 수 있다.

 

(2) 폐업(廢業)한 황제

 

명나라는 그 치세 276년간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를시작으로 의종(毅宗) 숭정제(崇禎帝)까지 모두 16명의 황제가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1세(世) 1원(元)의 원칙이 확립되어황제는 그 치세기간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 연호에 따라 홍무제니 영락제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열 여섯명의 황제가운데 황제업은 아예 문을 닫고 너무나 자유분방하게 방탕 생활로 일관했던 것이 10대 황제로 등장한 무종 정덕제(正德/ 1505 ~ 1521)였고, 그의 행적에서 단편적이 남아 이 시대의 또 다른 모습도 볼수 있다.

 

명나라 9대 황제 효종(孝宗) 홍치제(弘治帝 / 1467~ 1505)는 생모(生母) 가 묘족 출신의 비천한 여관(女官) 인데다가 그가 출생했을 때는 만귀비(萬貴妃)라는 여걸이 궁중을 휘어잡고 있었기 때문에 성장과정에서 어려움이매우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황제로서는 보기 드문 명군에 속해서, 구준으로 하여금 대학연의보를 편찬케 하였고, 일종의 행정법전인 대명회전의 편수를 착수했으며,균요법을 시행하여 요역을 공평하게 하고, 대명률 이래의 새로이 마련된 법전을 정리한문형조례를 만들어 재판의 공평을 기했다고도 한다.

 

이런 아버지와는 달리 그의 아들 무종 정덕제는 처음부터 음락(淫樂)에만 탐익(耽溺)하여 노는대만 치중할 뿐, 골치 아픈 정무는 유근(劉瑾)을 비롯한 8호(八虎)라고 부르던 여덟 명의 환관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새로운 놀이를 찾아 항상 바쁘게 뛰어 다녔다. 모든 정사(政事)는 환관 8호 가운데 우두머리 격인 유근이라는 자가 전결권을 가지고 황제권을 대행하게 된 것이다.

 

유근은 중국의 서북쪽 섬서성(陝西 / 싼시)에서 보잘것 없는 빈가(貧家)에서 태어나 야심을 가지고 자궁환관(子宮宦官)이되어 궁중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그가 맡은 일은 태자 곁에서 만담(漫談)이나 기예(技藝) 등으로 무료한 황태자를 즐겁게 해주는 일종의 오락담당이었고, 글은 쓰기는 고사하고 읽지도 못했다.

 

놀기 좋아하는 황태자에게 여러 가지 사음(邪淫)과 비술(秘術)을 전수하여 노는 즐거움을 제공하고 신임을 얻었다가, 황태자가 황제로 즉위한 후에는 그 신임을 미끼로 일종의 백지위임장(?)을 황제로부터 받아내고 정무를 독단하고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당황한 중신(重臣)들이 여러 차례 간언(諫言)을 올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환관 유근은 그를 비방하는 이런 중신들을 응징하기 위해서 정덕 2년(1507) 3월에는 거짓 칙령(勅令)으로 간당부(奸黨簿)라는것을 만들어 53명의 숙청 명단을 발표했다.

 

이 53명의 명단 중에는 당시 제일의 시인이자 대학자였던 이몽양(李夢陽)도 들어 있었고, 병부주사로 있던 35세의 왕수인(王守仁)도 들어 있었다. 홍치 12년(1498) 진사에 합격하여 관로(官路)에 올랐던 왕수인은 유근의 횡포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때 그 보복으로 태장(笞杖) 40대를 맞고 만지(蠻地)인 귀주 용장이라는 곳으로 좌천되었으나, 운명은 너무도 묘한 것이어서 그곳에서 양명학의 길을 열었다.

 

유근의 횡포는 여기에서 그치지를 않고 이듬해 정덕3년(1508)에는 다시 관료 3백여명을 옥에 가두어 청류(淸流)의 숨통을 아예 끊어버렸다. 그리고 쫓겨난 그 빈 자리는 유근의 측근이나 추종자들로 채웠다.

 

이렇게 되자 유근의 문전에는 찾아오는 사람들로 성시(盛市)를이루고, 뇌물(賂物)이 판을 치고, 정의니 원칙이니 하는 것은 오히려 사치에 불과했고,사방에서 군도(群盜)와 유적(流賊),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등 가치관이 전도되고 세상은 온통 뒤범벅이 되고 말았다.

 

결국 유근은 중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환관이 황제가 되겠다는 흉계를 품었다가, 같은 환관의 탄핵을 받고 처형되어 그 시체가 갈기갈기 찢겨졌다고 하는데, 그 찢겨진 살점을 사서 입에 씹고 그에게 당한 한을 풀은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5년 동안 모은 재산이 당시 명나라 10년 세입(歲入)과 맞먹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잘못된 전제군주제도란 이렇게 위험한것이다.

 

유근이 실각하자 이번에는 전녕(錢寧)이라는 노예출신의 환관을 총애하여 주씨 성을 주고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이 전녕의 권유로 외정에 표방신기(豹房新奇)라는 사음(邪淫)의 절간을 지어 악공, 라마승, 이슬람 상인들을 데리고 들어 박힌 체 밤낮으로 난음(亂淫) 비희(秘戱)에 열중했다.

 

그러다가 민란 진압 차 징발되어 온 변경 수비대 가운데 힘께가 쓰고 활 솜씨가 보통이 아닌 강빈(江彬)이란 자가 몽골과 국경지대인 선부(宣府/ 宣化)에는 미녀가 많고, 몽골 초원을 누비면서 몽골인들을 사냥(?)하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라고 부추기자,

 

자금성을 떠나 표방을 선부로 옮기고 부녀자를 납치하여, 밤낮으로 즐기고는 자신에게 위무대장군총병관주수(威武大將軍總兵官朱壽)라는 벼슬을 내리고 진국공에 봉하여 5천석의 녹봉을 하사한다는,... 황제가 황제자신을 관료로 임명한다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조칙(詔勅)을 만들게 했다.

 

황제를 포기하고 자유분방한 신하로 처신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후세의 사람들은 그가 불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훗날 청나라 때 편찬된 명사(明史)에서도 그를 폭군이라고 쓰지는 않았다.

 

거의 같은 시기 조선왕조에서도 연산군(燕山君 / 1494~ 1506)이 성종의 뒤를 이어 10대 왕으로 등극, 두 차례 사화(士禍)를 일으켜 말썽많은 선비(士類)들을 싹 쓸어 몰아내고, 채준사(採駿使)니 채홍사(採紅使)니 채청사(採靑使)니하는 해괴한 관직을 두고 전국의 준마와 미녀들을 뽑아다가 질펀하게 놀았다.

 

백마(白馬)의 고기가 정력에는 그만 이라는 근거 불명의 속설을 믿고 말 고기를 즐겨 먹고는 난음(亂淫)에 묻혀 일세를 풍미했던 연산은 제위 10년을 겨우 넘기고 중종 반정으로 물러났다가 30세를 일기로 병을 얻어 생을 마감했다.

 

명의 정덕제 역시 종실(宗室)에서 일으킨 반란 진압차 출동했다가 귀로에 호수를 건너다가 배가 뒤집혀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병을얻어 30의 나이로 그가 만든 표방에서 숨을 거두었다. 10대(代)라는 옥좌와 30년을살다간 연륜, 병을 얻어 일찍 죽었다는 공통점을 중국과 조선이라는 공간을 사이에두고 거의 같은 시기에 있었다는 것은, 이를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흥미 있는사실이 아닐 수 없다.

 

(3) 양명학(陽明學)의 등장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 시기에 명나라 최대의 학문적 성과인 양명학이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양명학을 일으킨 왕수인(王守人 / 1472 ~1528)은 절강성(浙江省 / 져쟝성) 여요(餘姚 / 위야오) 출신으로 자를 백안(伯安).호 양명(陽明)이라 하였다.

 

관직에 있던 부친을 따라 베이징(北京)에서 성장한 그는,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과거에 합격하여 28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었다. 과거에 합격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 관학인 성리학을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는것이다.

 

왕양명에게 학문적으로 길을 열어 준 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환관 유근의 비행을 적은 상소문을 올렸다가 그 보복으로 태장(笞杖) 40대를 맞고 머나먼 귀주 땅 용장(貴州龍場)이라는 곳에 역승(驛丞)이라는 미관말직(微官末職)으로 좌천된 것이 학문적 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묘족(苗族)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기후도 불순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방(異邦)의 세계였다. 그리고 유근이 보낸 자객(刺客)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한 몸 추스리기도 힘겨워 산 기슭에 석실(石室)을 만들고 거기서 고통스러운 생활을 보냈다.

 

그가 항상 의심스러웠던 것은 주자가 말한 천지만물 모두에게 있다는 그 많은 이(理)를 어떻게 밝혀낼 수 있을까? 저 푸른 대나무와 지천으로널려 있는 많은 잡초들의 이는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등의 의문을 가지고 사색과명상에 들기를 즐겼다고 하는데,.... 그르던 어느날 밤 석실 속에서 정좌(靜坐)하고 문득 깨친 것이 심즉리(心卽理), 지행합일(知行合一), 만물일체(萬物一體)였다고한다. 이때가 정덕 4년(1509) 그의 나이 37세, 석실생활 2년만에 얻은 이 득도(得道)의요체(要諦)가 양명학의 본질이 되었다.

 

왕양명의 심즉리(心卽理)는 마음(心)을 성(性/本性)과정(情/感情)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혼연 일체인 있는 그대로의 마음, 그것을 이(理)라고 보아 주자와의 해석을 달리 하였다. 세상의 법이나 관습 등 모든밖의 이(理)가 마음 속에 있다는 것으로서, 사람의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성과 정 모두가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자는 仁, 意, 禮, 智라는 4端만을 참다운 마음, 곧 理라고 보았으나, 왕양명은 여기에 喜, 怒, 哀, 懼, 愛, 惡, 慾 이라는7情도 참다운 마음인 理에 포함시켜야 된다는 것이다. 격물치지라는 난해한 용어에서 격(格)에 대한 해석을 주자는 이르다(至)라고 보았고, 왕양명은 섬기다(事)라고 해석을달리 했다는 것인데, 사변적인 철학 용어를 풀이하기에는 그 심연의 경지를 모르는 입장에서 단순히 양명학을 실천적인 유학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환관 유근이 실각하고 왕양명은 다시 관로에 올라 출세 가도를 달렸다. 이름 난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군략가(軍略家)로서의 명성도 대단하여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한 전공도 세웠다. 이렇게 바쁜 가운데서도 학문에 대한 연찬을 계속하다가 가정(嘉靖) 8년(1529) 1월 광서(廣西 / 꽝시)의 적을 평정하고 돌아오던 중 남안(南安)에서 향년 57세로 숨을 거두었다.

 

이러한 양명학이 중국에서는 두 갈래로 갈라져 정통파는 다시 주자학 쪽으로 기울게 되고, 소위 왕학 좌파는 더욱 격렬한 논조로 발전하여 사람은 배움으로서 완전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지 않고도 누구나 있는 그대로가 이상적인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성인군자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명 말의 유학자 이탁오(李卓吾)는 도덕적규범까지도 악으로 보고 세상의 모든 학자 정치가들을 무능한 위선자라고 침을 뱉고 경서나 성인군자 역사적 인물에 대한 가치 평가까지 깡그리 뒤집어 엎고 물의를 일으켰다가, 관료와 사대부들의 탄압과 박해를 받았고, 그 박해가 그를 감옥으로 보내자 자신의 최후 주장을 자결로서 반항하면서 생을 마감하였다.

 

중국 판 계몽주의 사상이라고할 수 있는 왕학좌파의 이런 주장이 먹혀 들기에는 유학이라는 벽이 너무나 높았다.

 

현실과 괴리된 종교나 사상은 원산지에서는 빛을 보지못하고 다른 지역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경우는 허다하다. 불교가 그렇고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교적인 도덕률을 두고 당시의 조선에서는 언감생심 평천하(平天下)라는 황제자리는 쳐다볼수도 없는 금단의 문이었다.

 

다만 치국의 자리인 제후(왕)로서 만족하면서 소중화를 자처하고, 그 전제가 되는 격물치지에 대해서는 끝없는 사변논단을 전개하여 퇴계와 율곡을 정점으로 주리파(영남학파)니 주기파(기호학파)니 하는 학파가 형성되고 성리학을 학문으로서 완성 단계에 이르게 하였다.

 

양명학이 조선에도 전해져 장유(張維), 최명길(崔鳴吉),정제두(鄭齊斗) 등이 연구하였으나 주리학파와 주기학파라는 성리학의 큰 기류에 눌려서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를 사문(斯文)으로 폄하(貶下)하고 이단으로 취급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조선 사회가 몹시 경직되어 있었다는 반증이라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조선에서 받아들인 성리학을 제멋대로 재단(裁斷)하고 다시가공(加工)하여 평천하 자리에는 천황(天皇 / 텐노)를 앉히고 엉뚱하게 세계의 중심은 자기들이라고 주장하였고, 양명학을 받아들여서는 이를 연구 발전시켜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근간을 이루었다.

 

(4) 파란(波瀾) 속에 묻혀 산 세종(世宗) 가정제(嘉靖帝/1507~1566)

 

겨용관 부근의 만리장성황제 독재(獨裁) 권력(權力)이제도적으로 확립된 사회에서는 황제의 개인적인 자질과 성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혹독한 시련과 재앙도 세월이 지나면그 속에 묻혀버리고, 이를 외면한 자연의 섭리(攝理)는 또 다른 장면들을 열심히 만들어 간다. 이런 것을 역사학에서는 발전사관(發展史觀)이라고 한다.

 

무종 정덕제는 아주 열심히 뭇 여인들과 정사(情事)를 즐겼지만, 신체적인 결함인지 신의 노여움인지는 알 수 없으나 후사(後嗣)가 없었다.

 

1521년, 내각에서는 유조(遺詔  / 죽은 황제의 유언장)라는 걸 만들어 황태후의 승인을 받고, 효종의 아우로 하북(河北 / 후빼이)의 안륙(安陸)에 있던 흥헌왕(興獻王)의 맏아들 주후총을 모셔다가 뒤를 잇게 했는데 이가 15살 나이로 명나라 11대 황제가 된 세종 가정제다.

 

유조(遺詔)를 만들고 세종 가정제를 세우는데 공헌을한 것은 양정화(楊廷和)라는 내각의 태학사였다. 그는 새로운 황제 지명자가 그의 봉지(封地)인 안륙을 떠나 수도까지 오는데 소요되는 40 여일 간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무종 정덕제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뒷 정리를 단숨에 해 치우고자 했다.

 

유조(遺詔)라 하여 수도에 와 있던 국경수비병을 원대복귀시키고, 표방이라는 해괴한 절간도 부셔버렸다. 표방에 머물고 있던 라마승과 일반 승려들과 도사(道士)들, 그리고 수많은 악공(樂工)들과 사방에서 진상한 미녀들도 추방하거나 각자의 고향으로 돌려 보냈다.

 

세종이 즉위하자 이번에는 정식으로 조칙(詔勅 / 황제의명령)을 만들어 환관들의 정보기관인 동시에 악의 소굴로 악명 높았던 동창(東廠)을 위시해서 서창(西廠), 내창(內廠)을 모두 없애버렸다.

 

환관세력에 빌붙어 녹봉만을 축내던 15만명은 파면되고,환관의 양자나 친척으로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과 환관들의 추천으로 전봉관(傳奉官)이 된 사람들도 대부분 추방됐다.

 

이런 일련의 서슬 푸른 조치에 대해서 환관측에서는 분노의 잇 빨만 갈뿐 손 쓸 겨를 없이 쳐다 만 보고 있어야 했다. 그 전의 황제들은 동궁시절부터 환관들의 손아귀에서 자랐기 때문에 황제 즉위 후에도 그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지금의 황제는 외부에서 영입했기 때문에 환관들로서는 새로운 황제를 아는 사람도 없고 특별한 통로도 없었기 때문이다.

 

선악(善惡)에 관계없이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기존의 제도를 고치고 기득권을 빼앗는다면 피해 당사자들로부터 골수에 사무친 반발 또한 대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일련의 연출 담당의 주역이었던 양정화는 암살의 위험으로부터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수백명의 호위군사를 거느리고 나들이를 했으나 얼마 후 그도 결국 황제로부터 신임을 잃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런 문제의 발단은 세종 즉위 후 불과 6일만에 불거지기시작해서 만 3년 반을 끌다가 가정 3년(1524) 9월에야 겨우 결말이 난 "대례(大禮)의 의(議)"라는 것이다.

 

세종이 즉위할 때 그의 생부 흥헌왕(興獻王) 주유원은 이미 죽은 후였다. 죽은 황제의 생부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불거졌다. 문제는 중국의 관습상 같은 항렬(行列) 황제의 뒤를 이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 황제 무종과 세종사이는 사촌 형제간이다. 따라서 세종이 무종의 뒤를 이을 수는 없고, 무종의 아버지인 효종 홍치제를 이어야한다는 것이다. 결국 세종은 효종 홍치제의 양아들로 치고, 효종을 황고(皇考 / 황제의부친), 생부(生父) 흥헌왕(興獻王)을 황숙부(皇叔父 / 황제의 삼촌)로 하기로 정하고, 양정화 등 중신들은 이를 조정의 공론이라고 발표하여 여기에 이설을 말하는 자는 간당(奸黨)으로 몰아 부치겠다는 강경한 자세를 취했다.

 

여기에 대해서 당사자인 세종은 이것은 효도에 어긋난다하여 제동을 걸기 시작하였다. 자기 아버지를 어떻게 삼촌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생부 흥헌왕(興獻王)을 황고(皇考), 효종을 황백고(皇佰考 / 황제의큰 아버지), 무종을 황형(皇兄)으로 할 것을 고집했다. 이런 것이 보기에 따라서는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세종의 주장을 따를 경우 제사를 비롯한 각종전례(典禮) 문제는 그렇다 치고, 그의 봉지(封地)에서 수도로 들어오기까지 약 40일간 유조(遺詔)라는 이름으로 양정화 일파가 단행했던 일련의 사실들도 문제가 될 수있다. 불꽃 튀기는 접전은 그 자체가 위기였다.

 

세종이 계속 고집을 부리자 양정화 측에서도 일보후퇴하여 효종을 황고, 흥헌왕을 본생황고 흥헌제(本生皇考 興憲帝)로 부르자고 타협안을 제시했으나 세종은 끝내 듣지를 않았다. 나이 어린 황제의 고집치고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면서 3년 반을 끌어온 대례(大禮)의 의(議)는 결국 양정화 등 중신들을 물러나게 만들었고, 세종은 이름 없는 내각을 등장시켜 그의 뜻대로 생부 흥헌왕을 황고(皇考)라 해서 예종(睿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지어 바치고, 효종은 황백고라 불렀다. 결국 세종의 최종 승리로 일이 매듭되었다.

 

조선왕조의 경우 대원군(大院君)이라고 불렀던 국왕의 생부(生父)가 세 사람이 있었다. 명종이 후사없이 죽고 나서 그 조카에 해당하는 하성군이 뒤를 이어 선조가 되었고, 선조의 생부 덕흥군은 덕흥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헌종(憲宗)이 후사없이 죽고 나서 강화도령이라고 불리는 이원범이 그 뒤를 이어 철종이 되었고 철종의 생부 전계군은 역시 전계대원군으로추증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철종이 후사없이 죽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의 뒤를 잇게 하여 고종이 되었고, 효명세자는 익종으로 추존되었으며, 동시에 고종의 생부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이 되었다.

 

민비와 흥선대원군의 갈등을 비롯한 조선왕조 말기의 혼미(昏迷)한 정국은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전의 덕흥대원군이나 전계대원군은그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이미 죽은 후였다. 따라서 대원군이라는 존호만 올려주면 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그의 아들 고종이 12살의 나이로 즉위했을 때(1863), 44살의 혈기 왕성한 청장년으로 살아 있었다.

 

살아있는 대원군을 어떻게대접해야 하는가? 전례(前例)가 없는 문제를 두고 고심했으나, 아직은 고종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대원군은 대왕대비로부터 수렴청정권을 위임받아 정치 전면에 나섬으로서 급한 문제는 해결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많은 문제들이 동시에 잉태되고있었고 이런 것들이 근대사를 더욱 암울하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3) 불로장생의 비방들

 

"대례의 의"는 모처럼의 활력에 찬 물을 끼얹은 격이 되고 말았다. 다시 정치는 문란해지고 고질적인 환관들의 횡포가 사라진 대신 내각을 위시한 조정의 청류(淸流)들이 파벌을 형성하고 권력을 농단 하기 시작했다.

 

변방에서 어렵 살이 지내다가 어느날 갑자기 황제가 된 세종은 덮어 놓고 오래 살기를 원했다. 그 방법은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각종비방(秘方)을 구하는 것, 전국에 사람을 보내 선약(仙藥)을 찾게 하고 대궐에는 만수궁(萬壽宮)을 짓고 도교의 신들을 죄다 여기에 모셨다.

 

이렇게 되면 진짜건 가짜건 도사(道士)들이 판을 치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선약(仙藥)이 홍연환(紅沿丸)이라는 일종의 강장제(强壯劑)라고 하는데, 그 성분이나 제조과정은 알 수 없지만, 홍연환을 만들기 위해서 8세부터 14세까지의 동녀(童女) 406명을 두 번에 나누어 궁안에 불러들였고, 세종은 이 홍연환을 수시로 복용했다고 한다.

 

세종 가정연간은 북로남왜의 극성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다. 북에서는 알탄칸이 수도 베이징을 점령하기도 했고, 남쪽에서는 왜구를 앞세운 해적들이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그러나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서 황제는 불로장생만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경로야 밀수(密輸)건 해적 질이건 상관없이 다량의 은(銀)이 유입되면서 화폐경제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고, 상공업이 촉진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 나라 중기 이후부터 시작하여 근 8백 여 년 간 지속되었던 양세법(兩稅法)이라는조세제도가 만력제때 와서는 일조편법(一條鞭法)으로 바뀌어 일부 지방을 시작으로 조세의 은납화(銀納化)가 이뤄지게 되었다.

 

향신(鄕紳)이라는 새로운 지배 층이 형성되고 그들만의 문화가 꽃을 피운 것도 이 시기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춘화(春畵)에 가까운소설 금병매도 이 시기에 쓰여졌다고 한다.

 

- 다음호에 계속 -



Once Upen A Time In The West (영화 'Once Upen A Time In The West' 삽입곡) - 

 

 

세계는 지금.....................2002년 1월 27일. 일요일

1월 27일장충 체육관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의사들이
의약분업 실패에 대한항의 규탄집회에 참석....

개각을 앞둔청와대 앞에서는 각종 스캔들에 항의하여 민주노총 대원들이 밀고 나가자
이를 저지하는 경찰과 몸 싸움을 벌리고.....

Membersof South Korea's Democratic Labor Party scuffle with police as theyare blocked in their attempt to march to the presidential Blue Houseto hand over a note of protest against political scandals in SeoulJanuary 28, 2002. South Korean President Kim Dae-jung plans to reshufflehis government this week, because of a spate of political scandalsand a presidential election later this year. Photo by Stringer/Australia

오스트레일리아의미개척지 Woomera 의 불량자 수용소(refugee detention center)
밖에서 정체불명(An unidentified)의 사람이 카메라로 안쪽을 향해 열심히찍고 있다....

An unidentifiedcameraman tries to get shots over the perimeter fence outside
refugee detention center in Woomera, Australia's Outback
Sunday,Jan. 27, 2002. After the Jan. 26 unrest among the asylum seekers
in the detention center the Australian Protective Services relocated
the perimeter fence 250 meters (750 feet) further out to restrictaccess
for the media. (AP Photo/Rob Griffith)

아프간의양치기들이 앞을 향해 나가고 있는데
10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곳곳에산재한 수백만개의 지뢰는
이들 양치기들과 그들의 양들에게 생명을위협하고 있다.

Afghan shepherdstend to their sheep
in Kabul, Afghanistan, Sunday, Jan. 27,2002.
Life goes for the shepherds who still must risk theirlives and
the lives of their sheep for the millions of
landmines scattered all over the country
following decadesof war. (AP Photo/Bullit Marqu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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