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박지연)이라는
가수는??
“이것이 한국형 솔(Soul)이다.”
소문난 가창력의 주인공 거미가 2집 ‘It’s Different’를 내놨다. 흑인음악의 리듬을 타고 흘러가는 한국적 멜로디. 거미는 “솔이나 R&B를 좋아하지만 그대로 따라하고 싶지는 않다”며 “이번에 만든 음악의 멜로디는 우리 엄마도 좋아할 수 있을 만큼 한국적”이라고 강조했다. “1집을 낸 후에 솔 가수가 너무 발라드를 많이 부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적잖이 받았어요. 그래서 이번 음반은 리듬이나 코러스가 아주 화려해요. 전형적인 솔이죠. 하지만 제가 아무리 흑인음악을 열심히 흉내내도 그들만큼 잘 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역시 한국 사람이니까요.” 전통적 솔은 미국 본토에서도 이미 무너졌다. 레이 찰스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고, 샘 쿡이나 재키 윌슨, 혹은 제임스 브라운 등은 그야말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들’이다. 최근 이 분야에서 각광받는 알리시아 키스, 에리카 바두 등의 음악도 ‘네오 솔’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린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적’ 솔을 모색하겠다는 거미의 의지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거미(巨美). 본명 박지연. 전남 완도에서 좀더 들어간 ‘금당도’라는 섬에서 태어났다. 그 궁벽한 곳에서 대여섯 살 무렵부터 피아노를 쳤다. 모친의 열성 덕분이었다. 거미는 “그땐 우리 할아버지 새우 양식장이 아주 잘 됐대요”라며 큰 소리로 웃었다. 툭 트인 성격이다. 현재 동덕여대 실용음악과 4학년.
거미는 지난해 2월 데뷔앨범 ‘Like Them’을 내놓고 곧장 ‘떴다’. 인기의 비결은 외모도 춤도 아니었다. 오직 “노래 잘 한다”는 입소문 덕택이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가수는 미국의 로린 힐과 한국의 인순이. 솔의 ‘여왕’이었던 아레사 프랭클린의 뒤를 잇는 가수로 평가되는 로린 힐은 힙합과 레게까지 능란하게 구사하는 흑인 뮤지션. 사회성 짙은 노래를 즐겨 부르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대한 노골적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영화 ‘시스터 액트 2’에서 로린 힐이 노래하는 것을 보고 한눈에 반했어요. 기타 하나 들고 자기 인생을 노래로 표현하는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었죠. 인순이 선생님은 저희 학교에 강의를 나온 적이 있는데, 그때 많은 걸 배웠어요. 쉬지 않고 노력하는 열정적인 모습을 꼭 닮고 싶어요.” 자신 있는 음역은 저음. 그렇다고 고음이 약한 것도 아니다. 이번 앨범의 첫 곡 ‘Gummy Skills’는 꽤 높은 음역에서 특유의 내지르는 창법을 뽐낸다. 타이틀곡은 5번 ‘기억상실’. 스스로 “한국형 솔”이라고 강조한 이번 음반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 있는 곡이다. 휘성이 래퍼로 참여한 7번 ‘Tonight’은 경쾌하고 흥겹다. 스위티의 멤버 이은주와 듀엣으로 노래한 11번 ‘Witches’에서는 부드럽게 흐느적거리는 창법을 선보인다. 거미의 장기인 저음의 묘미가 살아 있다. 4번 ‘날 그만 잊어요’와 10번 ‘So Much’에서는 지난 8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서재호의 음성을 코러스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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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0일. 그 날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데뷔 후 처음으로 TV 프로그램(SBS 인기가요)에서 1위를 차지한 날이다. 1위 발표 순간에도 너무 놀랐지만 앵콜송을 부르려는 순간에는 더욱 목이 메어 결국 앵콜송을 하지 못했다.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방송이 끝나고도 울고 또 울었다. 그날 다른 가수의 안무를 위해 같이 출연한, 평소 절친하던 댄서들도 함께 울었다. 매니저 오빠의 눈에도 감격의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것을 봤다. 다른 스케줄을 위해 이동하는 차안에서도 계속 눈물이 나왔다. 엄마와 통화하면서 전화기를 붙잡고 또 울었다. 그날 새벽께 일산 집 근처에서 소속사 대표인 (박)경진 오빠와 소주를 마셨다. 소주를 마시면서 나도 울고 경진이 오빠도 함께 울었다.
나의 1위는 나 자신만의 기쁨은 아니었다. 정상에 오르자 가수로 데뷔하기까지 고생했던 일과 1집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자꾸만 밀려들어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외모가 가수 되는데 가장 큰 장애라는 사실에 좌절했었고, 결국 어린 나이인 고3때 성형수술까지 했다. 데뷔하기까지는 여러 기획사들 돌며 오디션을 봤지만 대부분은 나의 노래를 듣기보다는 내 얼굴을 봤고, 몸매를 봤다. 나의 음악성을 알아준 한 기획사는 실패의 두려움 때문인지 음반을 마스터링 작업까지 마쳐 재킷 촬영만 남기고도 엎은 일도 있었고, 그룹을 구성해 연습하다가 다시 백지화 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 기획사를 나왔고 우연히 함께 같은 날 오디션을 본 을 만나면서 지금의 경진오빠와 인연이 닿아 이곳에서 음반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경진오빠도 제작비가 없었다. 다행히 경진오빠는 (양)현석오빠를 만나면서 앨범을 제작할 수 있게 됐고, 결국 나도 거미라는 이름으로 앨범을 낼 수 있었다. 어렵게 음반을 냈기에 1위는 눈물을 쉬이 그치게 하지 못했다.

나는 외모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다. 주위 사람들은 나의 외모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할때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 계약을 맺은 A기획사에서 음반을 내기 위해 연습하고 있던 어느날, 우연히 소속사에 들른 한 방송사 PD는 내 노래를 듣고는 "노래는 좋은데 얼굴이.."라며 노래와 상관없는 내 외모를 지적했다.
또한 고등학교 2학년때 서울 잠실의 한 놀이공원에서 벌어진 한 가요제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 대회엔 린도 함께 참가했었는데, 당시 그 대회는 실력있는 아마추어 가수들이 많이 배출돼 많은 음반관계자들이 그 대회를 참관했다. 현재, 인기가수를 다수 보유한 L기획사의 한 매니저는 당시 "그런 얼굴로는 가수할 수 없어. 노래는 꽤하니까 코러스를 하는게 어떠냐"라는 말을 서슴없이 해 큰 상처를 입은 적이 있다.
휘성을 처음 만나게 됐던 한 기획사의 오디션에서 휘성은 내 노래보다는 외모만 평가하는 기획사의 처사에 "이런 곳에서는 가수로 키워준다고 해도 절대 하지 마라"며 나보다 오히려 화를 낸 적도 있을 정도로 나는 외모때문에 상처를 받아야 했다.
외모에 대한 고민은 남자와 어울리는 자리에도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친구도 만나지 않고 매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기도 했다. 그러나 성형수술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이도 너무 어렸고, 또한 '노래만 잘하면 됐지 가수가 되기 위해 얼굴까지 고쳐야하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번번히 외모로 오디션에서 퇴짜를 맞자 결국 주위의 설득과 스스로 자신감을 갖고 싶어 스무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눈과 코 수술을 받았다.
더욱이 성형외과 의사인 아버지 친구로부터 수술을 받아 수술을 저렴한 비용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도 성형수술을 부추긴 원인이 됐다.
 | 다섯살때 모습. |
데뷔 앨범을 내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나는 성형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관객이 방송에서나 객석에서 성형수술한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을텐데, 숨긴다는 것은 낯뜨거워 도저히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수술사실을 밝히고 났을땐 찜찜하다기 보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후 그것에 대해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말들이 너무 많아 '괜히 말했나?'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어찌됐든 지금 가수로서 많은 팬여러분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난 행복한 사람이다.
휘성과 나는 2001년 4월 1일 한 기획사의 오디션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휘성은 나와 평소에 친분이 있던 나얼 오빠와 함께 오디션을 보러왔었다.
처음 휘성을 봤을 때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튿날 나얼 오빠를 따라 간 홍대앞 클럽 공연에서 휘성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반하고 말았다. 그 후 휘성에게 호감을 가지고 친구와 함께 자주 휘성을 만났다.
당시 휘성은 소속사 대표인 (박)경진오빠와 이미 '동거'하는 사이여서 자연스럽게 경진오빠와도 어울렸다. 경진오빠는 어느날 "지금은 돈은 없지만 꼭 너와 음반을 내고 싶다"고 제안해 선뜻 결심했다. 휘성이 믿고 있는 사람이라 나도 믿음이 더욱 갔다.
휘성과 나는 여느 연인들처럼 지냈고, 특히 함께 노래 연습하는 것이 좋았다. 주위 사람들은 휘성과 나를 한 사람으로 생각할 정도로 매일 붙어 있었다. 그런 휘성과 헤어지게 된 것은 어떤 일이나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휘성이 먼저 스타반열에 오르면서다.
휘성이 음반을 먼저 내고, 2집을 낸 후에야 나는 데뷔음반을 낼 수 있었다. 휘성은 이미 스타가 되었고 나는 1집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등 휘성에 비해 아주 미약했다. 처지가 달라지자 만나는 시간도 줄었고 예전과 같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휘성도 잘해주지 못하는 것을 괴로워했고 나도 서운함도 컸었다.
 | 어머니(오른쪽)와 오빠. |
결국 나는 휘성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휘성과 나는 만나는 동안 아무리 심한 다툼이 있었어도 '헤어지자'는 말을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휘성에게 헤어지자고 말했고, 휘성도 한숨을 쉬며 '그러자'고 말했다. 나도 힘들었고 휘성도 나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 2003년 말 우리는 헤어졌다.
헤어진 직후는 너무 괴로웠다. 이미 우리 사이는 주위에 너무 알려져 있어서 더욱 괴로웠다. 더 이상 같이 다니지 않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느냐", "휘성은 어디갔느냐" 물을때 마다 정말 괴로웠다. 특히 함께 무대에 서서 공연을 해야할때는 너무너무 괴로워 노래 부르기가 싫을 때도 있었다.
두 달간 가슴이 너무 아팠고, 슬프고 힘없이 지냈다. 그러다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다. 두 사람의 사이도 편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고, 음악적 동반자다.
최근 휘성이 한 케이블 TV와의 인터뷰에서 '함께 듀엣을 하고 싶은 가수가 누구냐'는 말에 '거미'라고 선뜻 대답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이제는 없어서는 안될 친구다. 음악적으로 서로 의지한다. 휘성과 나는 서로 음악을 모니터 해주고 함께 연구한다. 휘성도 나의 창법을 무조건 따라할 정도다.
결국 우리는 연인에서 친구가 된 것이다.
지난 10월 13일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바로 나의 '음악적 우상' 알리샤 키스를 직접 만났고, 그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노래까지 불렀기 때문이다.
알리샤 키스와 나는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다. 내가 지금의 '가수 거미'가 되기까지 알리샤 키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지금 솔(soul) 음악을 좋아하고 추구하지만, 처음 가수가 되려고 했을 때는 알리샤 키스라는 가수를 몰랐다. 나는 휘성의 소개로 알리샤 키스를 알게 됐다.
2001년 휘성이를 만나고 (박)경진 오빠를 만나면서 가수 준비에 한창이던 때였다. 휘성이 어느날 '알리샤 키스라는 가수가 최근 앨범을 냈는데 들어봤냐?'고 물었고, 내가 모른다고 했더니 한번 들어볼 것을 권유했다. 나는 알리샤 키스의 노래를 듣자마자 그녀의 음악에 푹 빠져버렸다. 늘 알리샤 키스를 듣고 노래도 따라 불렀다.
가수를 꿈꾸며 노래 연습에 한창이던 어느 날, 경진오빠가 현석오빠를 만나는 자리에 나를 데리고 갔다. 경진오빠는 현석오빠의 도움으로 휘성과 나의 앨범을 제작하려고 소개해주는 자리였다. 처음 현석오빠 앞에서 한 차례 노래를 불렀다. 현석오빠는 휘성에게는 대단한 만족감을 보였지만 나에게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는 거절당했다는 생각에 좌절했지만 그 좌절은 알리샤 키스 때문에 금방 사라졌다.
두 번째 현석오빠를 찾아간 자리에서 현석오빠는 나에게 "알리샤 키스를 아느냐"고 물었다. 알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약간 놀라는 눈치를 보인 현석오빠는 나에게 "그럼 알리샤 키스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다. 나는 늘 연습하던 대로 알리샤 키스의 데뷔곡 'Fallin'를 불렀다. 현석오빠는 아주 만족해 했다. 나는 곧 음반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휘성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휘성이 나에게 알리샤 키스를 들어보라고 권유했고, 결국 현석오빠를 노래로 감동시켜 음반을 순조롭게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와 '아주 특별한 인연'이었던 팝스타 알리샤 키스를 만난 지난 10월 13일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알리샤 키스에게 '당신의 나의 우상이었다. 당신의 노래를 불러 내가 가수가 됐다'고 말했더니 그녀가 굉장히 좋아했다. 방송에서도 나는 내 노래 이외의 노래를 부를 경우에는 꼭 알리샤 키스 노래를 부를 만큼 알리샤 키스를 좋아한다.
나는 너무 행복했다. 우상 알리샤 키스와 만났고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날이 올 줄 몰랐다.
 | 내 공연장을 찾아오신 어머니(오른쪽). |
나는 하마터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할 뻔 했다.
어머니가 나를 가지시고 만삭때 그만 연탄가스를 마시고 말았다. 어머니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신음했지만, 당시 아버지는 피곤해 곯아떨어져 어머니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하는 바람에 어머니는 가스를 많이 마실 수 밖에 없으셨다.
당시 주위에서는 연탄가스 흡입 부작용으로 태아가 잘못될까봐 '낳지마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까지 날 낳으셨다.
'연탄가스 사건'을 두고 어머니는 내가 속 썩일때면 전라도 사투리로 '그때 낳지 말걸 그랬다'고 말씀하시고, 내가 예뻐보이는 날은 '이것이 나올라(태어나려) 그랬구마이' 하면서 좋아하신다.
어머니는 나에게 무척 열성적이셨다.
완도에서 태어나 자라던 나는 초등학교 3학년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생면부지의 서울로 이주했다. 어머니가 나와 오빠의 교육을 위해 무작정 서울로 오신 것이다. 아버지는 고향에 남아 계시면서 해조류 양식장을 계속 운영하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쳤다. 어머니는 나를 서울로 데려가서 더 좋은 환경에서 나에게 피아노 공부를 계속 시켰다. 어머니의 열성과 당시 과외선생님의 도움으로 나는 세화여고 1학년때 미국으로 피아노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다. 미국 현지 학교의 입학 허가서까지 받아놨다.
그러나 유학 출국이 임박하자 갑자기 갈등되기 시작했다. 유학 후 대학문제와 진로에 대해 무척 고민스러웠다. 그러던 중 가수 제의를 받고 가수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유학을 포기했다.
나와 오빠의 교육을 위해 어머니는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고생은 내가 더 피아노를 열심히 치게 하는 힘이 되었다.
나는 이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추운 어느 겨울날 밤, 나는 일하고 돌아오시는 어머니가 추울까봐 어머니가 누우실 자리에 내가 누워서 그 자리를 따뜻하게 덮힌 뒤 내 어머니가 오시면 내 자리에 가서 자고는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한번씩 미울 때도 있었다. 성대 부상으로 1집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때,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에 오면 어머니가 "휘성이는 TV에도 나오고 하는데 너는 왜 안나오냐?"라고 말씀하시는 등 꼬치꼬치 물으실땐 짜증도 나고 얄밉기도 했다. 어머니가 안타까운 마음에서 그러시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내가 어머니랑 함께 다니면 사람들은 아버지는 보지도 않고 '아이구, 애가 아버지 닮았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나와 전혀 다른 미인이시다.
어머니는 무척 미인이신데다 노래를 무척 잘하신다. 말솜씨까지 좋아서 웬만한 행사의 MC는 너끈하게 잘 해내신다. 실제로 '음반을 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는 기획사도 많았다. 어머니는 뛰어난 노래 실력으로 라이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노래 부르실 기회를 드리고 싶어서 지난해 나의 첫 공연에서 따로 순서를 마련해 드렸다. 오는 27일, 28일 열리는 이번 두번째 단독 공연에도 나는 어머니를 위해 무대를 마련했다. 어머니와 듀엣무대도 가지고, 어머니는 따로 노래를 2곡 부르실 예정이다. 나의 어머니는 정말 멋쟁이다.
나는 데뷔를 빅마마 멤버로 할 뻔 했다.
처음, (박)경진 오빠를 만나 데뷔 준비를 할때, 당시 경진 오빠는 이미 빅마마 컨셉트의 여성중창단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게 멤버 제안을 했을 때는 나도 평소에 팀으로 가수 활동을 하고 싶었던 터라 흔쾌히 동의하고, 의기투합해 경진오빠와 빅마마 멤버 구하기에 나섰다.
(신)연아 언니와 (이)영현이는 이미 경진오빠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영현이는 휘성의 친구로, 경진오빠는 휘성을 통해 영현이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이)지영 언니와 (박)민혜를 경진 오빠에게 소개했다. 그러던 중 나는 자연스럽게 빅마마에서 빠지면서 솔로로 방향을 바꾸게 됐다.
올해 초부터 나는 영현이와 일산에서 함께 살고 있다. 성격이 맞고 내숭도 못 떨고 말도 잘 통해 싸울 일이 전혀 없다. 영현이는 또 나와 절친한 버블시스터스의 영지와도 절친해 서로 잘 지낸다. 데뷔 직전인 지난 2002년 겨울에는 강원도 양양으로 여행간 적도 있고, 올해 6월에도 갑자기 '필' 받아 영지랑 셋이서 청평으로 놀러간 적도 있다.
2집 두번째 타이틀곡 '날 그만 잊어요'는 영현이가 만들어준 노래다. 1집 활동 끝나자마자 영현이는 나를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다. 처음 내게 가사 없이 가이드송으로 만들어 줬을때 제목이 '선물'이었다. 2집에는 '인연'이라는 노래도 영현이가 만든 것이다. 비밀인데, 사실 이 노래는 세븐에게 갈 노래였는데 중간에 내가 가로챈 거다. (동욱아 미안 ㅎㅎ)
'날 그만 잊어요'는 2집 후속곡이기도 하지만 최근 개봉한 영화 '내 머리속의 지우개' OST 앨범의 타이틀곡이기도 하다. 영현이가 만든 노래가 영화 주제곡으로도 쓰여서 기분이 좋다. 그런데 내 타이틀곡 '기억상실'이 여주인공이 기억상실증(실제로는 알츠하이머)을 앓는다는 내용과 일치해 인연이 깊다. '날 그만 잊어요'는 또 '기억상실'에 걸린 여자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헤어지자는 말처럼 들려 참 이래저래 그 영화와 관계가 깊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나의 '스타고백'은 끝난다.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면서 팬 여러분께 감히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음악적으로 누가 봐도 무시할 수 없는 가수'라는 말을 듣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팬들에게 또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그 변화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모습 자체만을 보고 비판하시는 분이 계시다.
저 가수가 변화된 모습을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을 했나를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모든 가수들은 자신의 앨범에 최선을 다해서 모든 열정과 노력을 쏟아 붓는다. 비록 보시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하더라도 쏟아부은 노력 만큼은 인정해 주셨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저의 고백을 들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감사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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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완도물이 좋은가바요.......인물들이 많군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