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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만드는 ‘지금’의 두 얼굴
―주일례 시의 특성
백인덕(시인)
1.
지상의 생명이란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받은 존재다. 무엇으로부터인가, 창조든 진화든 신(神)은 아니다. 고뇌의 형이상학으로 나아가기 이전에 모든 생명은 물질적 필요에 따라 활동하는 본능이라는 한계에 갇힌다. 몸이 먼저고 사유가 나중이며, 사유는 선험적(先驗的)이지만 몸은 즉물성(卽物性)으로 현전(現前)한다. 다가올 겨울을 나기 위해 열심히 도토리를 모아 저장하는 다람쥐를 보고 모든 존재가 미래를 걱정한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자기 존재의 존재론적 의미를 묻기 위해 한나절 바위에 붙어 있는 거북손이나 쉬지 않고 원을 그리며 도는 개미는 우화(寓話) 밖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발생과 지속(성장과 쇠퇴), 필연적인 소멸이라는 서사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시간’이다. 특히 현대인은 과학적으로 일반화한 시간을 존재의 근거로 삼아 행동한다. 시간이 곧 축복과 저주의 주재자인 것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시간에 대해 기존 물리학에서는 시간을 마치 강물을 얼려놓은 상태에서 일정하게 등분하여 공간을 나누는 식으로 설명한다. 반면에 앙리 베르그송은 이에 대해 강물은 항상 흐르기 때문에 이를 얼리거나 나눌 수 없다고 비판한다. 시간은 지속의 개념으로 사유해야 인간 또는 우주가 창조되고 진화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지속’은 단순 유지가 아닌 순간마다 무언가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의미에서 활동성이다. 예를 들어 목동이 소를 풀어놓고 소의 수를 셀 때 소들은 수를 세는 순간에도 풀을 뜯고 있으므로 수를 세기 전과 이미 질적으로 다른 소가 된다. 따라서 균질(均質)의 정확한 수는 확정되지 않는다. 어떤 것을 사유할 때 항상 ‘지속’이라는 개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예라 할 수 있다.
주일례 시인의 이번 시집, 『당신만 모르고 다 아는 이야기』는 ‘지금’을 주요 테마거나 기준 시점으로 설정한 작품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시간이 빚어내는 변화를 함축하면서 동시에 지속, 즉 질적 차이를 만드는 활동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지금’은 단순하게 시제 상의 ‘현재’를 지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분화해서 불가지론에 빠지고 마는 수학적 ‘순간’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번 시집에서 의미하는 ‘지금’은 시인의 존재가 갑자기 자기 눈앞에 떠오르는 ‘계기(motive)’에 더 가깝다.
몇 번을 찍어도 버스 카드에 잔액이 없자
버스 기사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지갑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갑에 돈이 없다.
마음은 조급하고
이미 출발한 버스를
강제로 잡아 탄 상황이라
창피하고 난감했다.
버스에서 내리고
승객들 시선도 같이 내리고
불편한 마음도 함께 내렸다.
누군가 나를 보던 시선이
예전에 내가 누군가를 봤던 시선이었다.
남의 시간을 뺏는 건
누구에게나 그런 의미였다.
―「시간에 대해서」 전문
위의 인용 시는 이번 시집에서 ‘시간’이 표면에 드러난 유일한 작품이다. 일종의 낭패 체험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이미 출발한 버스를/강제로 잡아 탄 상황”이나 “불편한 마음”으로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해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시간을 뺏는” 것의 ‘의미’에 대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순간’을 보여준다.
일상에서 시간은 곧 ‘돈’처럼 일종의 교환가치로 환산된다. 굳이 그런 상황의 부자연스러움이나 그런 사유의 부작용에 대해 길게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돈이다’라는 명제는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지배 아래 일상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모든 현대인의 태생적 비극이라는 것만 인식하면 될 것이다. 시인은 “누군가 나를 보던 시선이/예전에 내가 누군가를 봤던 시선이었다.”라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그 ‘순간’은 돈이나 기타, 다른 가치로 계량화할 수 없는 생명의 지속으로서의 시간의 역할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일종의 곤란이 시인에게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확인시키는 셈이다.
예전에 보지 못한 세상을 본다
시뻘건 너로 인하여 아득했던 흔적이 예쁘고
이토록 가슴이 저미는 그리움
너는 저 별이고 억새이며 바람이다
사람이 지나가는 순간을 알 수 있다면 좋겠다
소중한 사람이 너임을 알고 표현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나 너를 보고 있는 것처럼
네 안 가득 나라는 사람이 살았으면 좋겠다
네가 가을이구나 느끼는 순간
우리 삶이 제대로 보였으면 좋겠고
가을이 우리를 지나가는 동안
삶이 우리를 안고 이렇게 썼으면 좋겠다
―「나뭇잎은 밟지 않아도 소리가 난다」 전문
시인은 계절이 바뀌는 순간에 직면해 있다.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는 강제된 시간에 우리 자신을 맞춰야 한다. 하루 24시간, 일주일, 한 달 등. 사계(四季)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행성의 위도에 따른 기후 현상이라는 근거 외에는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사람은 자연적인 만큼 문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계를 경험하는 것은 늘 ‘환절기’라는 인습적인 정서적 격변기가 형성될 가능성을 열어준다.
인용 작품은 “예전에 보지 못한 세상을 본다”라는 고백적 명제로 열린다. 제목에 ‘나뭇잎’이 등장하기 때문에 계절이 가을이라는 걸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유추에 의지해 “시뻘건 너로 인하여 아득했던 흔적이 예쁘고/이토록 가슴이 저미는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시행을 이해할 수 있다. 시인은 지금에 서서 계절의 변화라는 항구적이며 동시에 일시적인 현상의 이면을 바라보고자 한다. 계절에서 자기에게로 정서적 유발 요인을 끌어오는 감정이입은 사실은 자기 내면의 심적 바람(希)을 드러내려는 몸짓이다. 시인은 2연에서 “사람이 지나가는 순간을 알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자기 기도(企圖)를 슬쩍 내비친다. 그렇지 않은가, 계절은 나의 관여(關與)와 별개로 압도적인 힘으로 시간의 제 길을 따라 흘러갈 뿐이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지금’을 건져 스스로 서자면 ‘순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3연에서 “네가 가을이구나 느끼는 순간/우리 삶이 제대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표면에 드러내면서 2연의 “사람이 지나가는 순간”과 “소중한 사람이 너임을 알고 표현하는 순간”의 진정한 가치를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언급된 “표현하는 순간”은 생명으로서 ‘인간’에게 부여된 또 다른 차원의 ‘축복이자 저주’와 연결된다. 그 차원은 우리가 끊임없는 의사소통을 하는 존재라는 것과 이를 대부분 ‘언어’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주일례 시인은 ‘지금’이라는 순간에 집중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시인이 지독한 ‘현세주의자’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시인이 집중하는 ‘지금’은 다시 앙리 베르그송에 따르면 ‘엘랑비탈(élan vital)’에 가깝다. 생의 도약을 위해 활기를 가두고는 있지만, 아직 터지지 않은 ‘폭죽’에 비유할 수도 있다. 이번 시집은 시인이 생활이라는 외피 안에 가득 쟁여 둔 에너지들이 축적되는 방향과 방식을 보여주는 시편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유한한 생명으로서 ‘시간’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고, 다른 차원에서는 의사소통을 기획하는 언어적 존재로서의 곤란으로 드러난다.
그녀는 온다는 말도 간다는 말도 없이 가버렸네
그날, 그녀가 열고 사라진 문을 보지 못하고 와버렸네
그날일 줄 모르고
그 문일 줄 모르고
집에 와서야 깨달았네
그 문이고
그날이었다는 것을
―「문」 전문
이 작품은 지상의 생명 중에서 인간이 받은 또 하나의 ‘축복이자 저주’인 ‘언어’의 측면을 잘 보여준다. “온다는 말도 간다는 말도”는 단순한 고지(告知)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소통을 전제한다는 측면에서 타자, 즉 말의 건너편에 있는 존재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행위가 된다. 언어 습득기에 집요하게 ‘나 간다’를 되풀이하는 놀이 상황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용 작품은 ‘그녀’, ‘그날’, ‘그 문’처럼 ‘그’라는 미확정의 타자를 가정하며(경험상으로는 이미 특정된 누구이겠지만, 언어적으로는 무한히 열린 ‘그’) 시인의 지금의 상태를 기록한다. “그날일 줄 모르고/그 문일 줄 모르고/집에 와서야 깨달았네”라는 시적 진술은 시인의 지금이 시간적 개념과 동시에 공간적 소유, 즉 자기가 시공간에서 무언가를 결정할 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그 문이고/그날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집’에 와서 깨닫는다. 즉 일련의 사태를 자기화하는 순간이 ‘지금’인 것이다.
시인은 ‘문’과는 다른 계열이지만 같은 의미를 함축하는 시어로 ‘못’을 보여준다. 제목만 살펴봐도 「못」, 「대못 1」, 「대못 2」 등 세 편이나 된다. 확장하면 「흔적」과 「틈」이 직접적 연관성을 보이고 함축한 의미로는 그 범위가 더 확장될 것이다. 그중에 한 편을 보자.
화가 나면 생각이 이성을 잃지
입에서 나온 말을 자제할 수 없지
사람 냄새 없다는 소리
돈 냄새만 난다는 소리
상상하지 못한 말이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지
그날 이후 내 몸에 박혀
점점 옹이가 되어갔지
―「대못」 전문
여기서 ‘못’은 사물인 ‘못’이 아니라 박혀 빠지지 않는다는 특성의 비유로 원관념은 ‘말’이다. 진짜 ‘못’이었다면 언젠가는 빠져 ‘흔적’으로만 남겠지만. 그것이 ‘말’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존재와 함께 성장해 ‘못’이 아니라 ‘옹이’가 되어버렸다. 못은 끝끝내 이물질이기 때문에 ‘생의 도약’을 추동할 수 없다. 그러나 ‘옹이’는 밖에서 왔지만 ‘나’가 되어버렸기에 아무리 아프더라도 변혁의 기화점(起火点)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필자는 이 글의 제목에서 ‘시간이 만드는’이라 했지만, 더 풀어쓰자면 ‘시간이 만들고 언어로 표현된’이라고 해야 한다. 지상의 생명인 인간에게 존재로서 그의 가능성이자 한계는 ‘시간과 언어’ 두 차원의 동시적 작동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안다는 건 어제보다 멀리 왔다는 것이다.
네가 지금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안다는 것도 지금보다 배는 더 멀리 왔다는 것이다.
그때 알지 못하고 지금 아는 것들
―「인생은 한 번뿐이다」 전문
인용 작품을 통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시인에게 ‘지금’은 과거의 기억들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편린(片鱗)으로 무작위로 떠오르는 회한의 ‘순간’이 아니라 생의 질적 변화를 추동하는 힘을 축적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때 알지 못하고 지금 아는 것들”에는 씁쓸한 후회의 감정이 묻어날 수밖에 없지만, 그 자체로 ‘지금’ 이후를 기대하게 한다.
이런 기대는 시인의 개인적 서사에 갇히지 않고 시간이 만드는 간극(間隙)을 돌파하면서 어떤 보편성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가령, 「자화상」에서 보이는 “세상 혼자 살 수 없는데 혼자인 것처럼 살았다”라는 자기 고백은 「아들에게」에서 “네게 간절히 말하기를/머릿속을 비워 발로 뛰라는 것이다./가슴으로 일해야 비로소 생기는 자리가 있다.”라는 충고로 전환된다. 나아가 「뒷모습에도 풍경이 있었다」의 “평소 그는 성깔이 고약하고 욕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가까이 오는 사람이나 자식까지 매몰차게 내치는 사람이다./그 사람이 가고 난 후 옷장 정리를 했다./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옷이다./상표가 그대로 붙은 옷이다./아들이 아버지 요양원에 모시며 사준 옷이다./그 주머니 안에 아버지 쓰라고 챙겨 넣은 새 돈이 있었다.”라는 사실의 발견을 통해 알게 된 어떤 노인의 진심에 대한 경탄이 되기도 한다. 실제 ‘지금’ 알게 된 것만이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의미 있게 한다는 판단의 우회적 표현인 셈이다.
당신이 생각이 많거든 옆에 잠든 사람을 보십시오.
당신과 함께 같은 공간에 사는 사람이지만
지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말을 하지 않아 모르지요.
혼자서 삭히는 습관 때문입니다.
당신이 외로운 이유지요.
같이 있어도 혼자인 순간입니다
―「지금」 부분
한 권의 시집에서 시인이 직설적으로 자기 시세계의 핵심을 형상화한 작품을 만나는 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어쨌든 시인은 인용한 「지금」이라는 작품을 통해 지금 생을 응축하는 ‘기억과 기대’라는 두 방향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나 그 보여주는 방식은 과거, 즉 기억의 환기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그 사실의 인정을 통해 미래를 담보하려는 의도로 진행된다.
인용한 작품은 “하루 감사하다는 느낌이 언제 드는지 생각해 보세요”라는 강한 질책과 “바로 지금입니다”라는 명쾌한 정의, 즉 작품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시인의 ‘엘랑비탈’을 극화하기 위해 인용한 부분처럼 과거의 사태들을 면밀하게 짚는다. 시인은 여러 차례 ‘그때와 다른 지금’을 표현의 중심에 놓는다. 물론 ‘그때’가 회한처럼 격렬한 감정으로 틈입하는 양태는 아니다. 「배려」에서 “주머니에 돈이 있어서 몰랐다/사는 게 넉넉해서 미처 알지 못했다/마치 풍성한 나무만 보고/쓸쓸한 모습은 보지 못한 것처럼”이라 후회의 감정을 드러낸다. 이런 앎, 혹은 순간의 깨달음이 비로소 ‘지금’을 형성한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모든 게 뒤죽박죽
안개 낀 길처럼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손바닥이라면 뒤집어보고
부침개라도 뒤집어볼 텐데
사는 것이 밤처럼 어두울 때가 있다
새벽 오는 게 더디고 힘들어 서러울 때가 있다
그래도 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
―「그래도 가야만 하는」 전문
주일례 시인은 “그래도 가야만 하는/길이 있다”라고 선언한다. 이 선언은 고백처럼 진술, 표현된 과거, 즉 기억을 생의 다른 방향으로 전화해 폭발하는 에너지로 만들겠다는 자기 선언과 같다. 이는 “사는 것이 밤처럼 어두울 때”, “새벽 오는 게 더디고 힘들어 서러울 때” 그래도 자기 ‘길’을 생각하는 시인의 의지로 시간과 언어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다.
3.
주일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지금’ 자기 존재로 서 있는 우뚝한 초상을 보여준다. 물론 그 이미지는 불안정하고 쓸쓸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시인은 ‘지금’에 집중하려 한다. 기억이 휘몰아오는 아픔을 지금의 에너지로 전환하고, 내일의 기대를 다시 지금의 동력으로 바꿔, 시인은 이 순간, 지금을 자기 존재의 중심으로 바꾼다.
마음이 많이 아픈 사람이
내게 왔다 간 후로
나는 겸손해지기로 했지
인생이 힘겹다는 생각은 사치
내가 가진 게 의외로 많다는 걸 알았지
따뜻한 집과
일할 수 있는 공간
지금이라도 갈 수 있는 여행
행복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도 몰랐다
―「사소한 행복」 전문
시인은 비록 ‘사소한’이라 제한했지만, 시인이 보여준 ‘행복’은 존재와 세계에 대한 물음을 시간과 언어로 환치해 보여주고 있기에 결코, 사소해지지 않을 것이다. 「사소한 행복」의 명제처럼 “인생이 힘겹다는 생각은 사치”일지 모른다. 그러나 감정 이전에 사태가 가득한 세상이기에 ‘지금’은 이번 시집에서 드러난 것처럼 자기 정위(定位)로 다듬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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