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 왕발이 낳고 죽은 시점은 우리의 삼국시대가
전장터로 변해 있을 시점이었습니다. AD 650- 676년까지 27년을 살았던 왕발이
남긴 등왕각서는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그럴싸한 경치좋은 곳에 세운
기념물 오픈식 때 축하시 한편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27세의 왕발이
'등왕각서'에 남긴 구절 구절은 1300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돌아봐도
손색이 없는 나름의 우주관과 철학 인간과 자연 권력에 대한 것까지
잘 버무려진 작품인지라 한 구절 한구절을 음미해 보는 것이 좋을 터인데
방송에선 그 작품 가운데 몇구절만 간추려 돌아봤습니다. 아마도 뜻이 있는
분들은 스스로 알아서 왕발의 '등왕각서'를 이미 보셨을테고, 또는 찾아 보실 줄 압니다.
이곳은 자리가 좁아서 그 넓은 왕발의 시와 노래를 이루 다 옮길 수 없었음을 널리
이해 바라면서 방송글 다음에 짤막한 왕발에 대한 단상을 실어볼까 합니다.
완성711월.hwp
♣ 고전코너 ‘신 명심보감 --- 왕발, 등왕각서에 남긴 구절 ’
놀보 이 시간은 마음을 밝혀줄 보배로운 거울같은 ‘명심보감’을
새롭게 풀어보는 ‘신 명심보감’ 자리입니다.
초란 고전 속에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며 마음에 양식을 쌓아보는
‘신 명심보감!’ 오늘은 고전 속에 어떤 구절인가요?
놀보 당나라 때 스물일곱살에 요절한 천재시인이기도 한
왕발의 등왕각서 몇구절 돌아볼까 합니다.
초란 요절한 천재시인이라고 하니깐 우선 짠한 생각부터
드는군요. 어쩌다 스물일곱 나이에 그렇게 됐을까요?
놀보 열네살에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 나갔으니
중학교 1학년짜리가 국가고시에 합격한 셈이죠.
초란 열네살에 벼슬할 정도라면 그 당시 기록을 세웠겠요.
거기다 그렇게 시를 잘 지었던 모양이군요.
놀보 그런데 재주가 너무 넘쳐서 궁중 안에서 장난삼아
벽보에 올린 글이 문제돼서 좌천당하기도 했었죠.
우리 춘향가에 그 왕발의 시가 등장하는데 기억나세요?
초란 춘향가에 유명한 시인들 시구절 참 많이 등장하는건
들었는데요. 당나라 요절시인 왕발의 시가 어느 대목에?
놀보 이도령이 춘향이 만나기 전에 책을 엉터리로 읽으면서
이 해가 언제 지느냐 아버지는 언제 퇴근하신다냐 하면서
(성독조) ♬남창은 고군이요 홍도는 신부로다~~ 이 대목이
바로 왕발의 ‘등왕각서’ 시작 부분이거든요.
초란 아, 거기에 왕발의 시가 등장하는군요. 남창이란 고장은
예로부터 역사적 유래가 오랜 큰 고장이요 홍도라는 곳은
새로 일어난 신흥도시라는 뜻으로 쓴 대목이었잖아요.
놀보 그걸 춘향가에선 이도령 말로 뒤집어서
(성독조) 홍도 어이 신부되리 우리 춘향이 신부되지.
태고라 천황씨는 이 쑥떡으로 왕했것다.
방자 아이고 도련님 태고라 천황씨는 이 목덕으로 왕 했단
말은 들었지만 쑥떡으로 왕했다는 말은 첨 듣소.
놀보 그렇게 이도령과 방자가 설왕설래 하는 장면에
바로 왕발의 등왕각서 한구절이 나오는데요.
등왕각이란 커다란 정자 누각을 고쳐 짓고서 큰 잔치를
했을 때 왕발이 마침 부친을 만나러 가는 길에
그 고장에 들러서 등왕각 축하잔치 현장에서 바로 쓴
글이 그 유명한 ‘등왕각서’가 됐던겁니다.
초란 등왕각이란 누각이 올라 선 역사며 전통도 말하고
그날 모인 대단한 인사들 이야기도 하고 그랬겠군요.
꽤나 아름다운 미사여구도 많았을테구요.
놀보 그 글을 전체를 꼼꼼히 다 보면 무르팍 칠 구절
참 많지요. 오늘 이곳에선 몇구절만 간추려 볼까 합니다.
우리가 지금도 쓰고 있는 ‘흥진비래’ 있죠.
초란 질펀하게 즐겁고 기쁜 일이 다하면 바로 슬픈 일이 닥친다.
그 흥진비래도 왕발이 했던 말인가요?
놀보 그렇죠. 거기에 등왕각에서 바라 본 저 하늘과 우주까지도
쓸어 담은 기백이 대단한 글이었죠. ‘군자는 안빈하고
달인은 지명이라‘ 군자 지성인들은 가난을 즐길 줄 알고
분야 분야 뛰어난 달인들은 하늘이 준 자기 명을 안다.
초란 (성독조) ♬군자는 안빈하고 달인은 지명이라!
그 말도 왕발의 ‘등왕각서’에 나온 구절이었군요.
놀보 그래서 뜻이 깊고 심지가 굳은 시대의 지성인들은
나이들수록 강건해지고 가난할 수록 굳건해야 한다 했구요.
그 넘치는 재주와 인생을 꿰뚫어 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시 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초란 오늘 ‘신 명심보감’ ‘등왕각서’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다음 카페’ ‘우사모’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놀보 좋은 자료나 담론은 ‘우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이 열네살에 과거에 급제 했다는 왕발(王勃: 650~676)
우리로 치면 중학교 1학년 때 중앙의 청와대 4급 공무원 지위에 올랐다고 치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왕발은 그런 천재였다고 한다. 이런 인물을 만나면 우선
샘부터 난다. 못났다는 자기 고백 증상이다.
그런데 재주도 너무 넘친게 그를 일찍 죽게 했던 거 같다. 패왕부라는 황제와 가까운 거리에서
왕발은 아마도 어린 왕자들 교육과정 일부를 맡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장난끼가 발동한다.
황실 안에서 시시 때때로 닭 싸움판을 벌렸는데, 어린 왕발이 봤을 때 아이들 장난보다 못한 일로
나름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어른들이 싸움닭을 던져 놓고 서로 쪼아대고 찢어대는 투계를 그리도
좋아서 박수치고 이겨라! 물어라! 찢어라! 죽여라! 광분해 날뛰는 꼴을 보니 어린 왕발이 속으로
가소로왔던 모양이다. 그래서 장난삼아 닭싸움을 희롱하는 투계풍자 글 한편 써서
그 지엄한 궁궐 안에다 벽보로 붙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왕발은 파면당해 쫓겨났다. 그리고
헤매고 고생하며 세상에 대한 나름 울분도 깊었을 때, 사천지방을 방랑하면서 잠깐 지방에서 참군이란
벼슬도 했지만 결국 제 성깔 못 이겨 관노 한명을 죽인 죄로 쫓겨나게 되고, 아버지까지 연좌로 걸려
좌천 당하고 교지(交趾)로 쫓겨난 아버지 복치(福趾)를 만나러 가던 도중 , 등왕각 고쳐 짓고서
왕자며 지방 행정수반들 모여서 크게 잔치판 열었을 때 초청을 받았다고 한다.
워낙 어린 나이에 이름을 떨친 천재시인인지라. 왕자고 도독이며 절도사 같은 세도 좋은 것들끼리
모여서 등왕각 그럴싸 하게 짓고 잔치판 크게 열면서 그 화려함과 성대함에 걸맞는 글을 올려야 했는데
지방에 글께나 쓰는 자들이 모두 '왕발'에게 돌렸다고 한다. 그런데 <등왕각서> 원전을 보면 느끼겠지만
나이 스물일곱 치고는 꽤나 시건방지고 원숙한 티를 내는 글을 구사하고 있다.
일테면 황실에서 놀아봤는데 지방에 그럴싸 한 것들끼리 모여서 잘난 척 하는 꼴들이 우스웠던 것이다.
그래서 니들이 이 등왕각을 고쳐 지었다고 여기 이름 새겨두고 수백 수천년 잘난 척 하고 싶은 모양인데
하늘도 그런꼴 만만히 봐줄 하늘이 아니고, 땅이나 인간들 역시 니들 생각대로
오래 오래 기억해줄 리 없는데 꿈도 참 야무지다. 하면서 이 젊은 천재시인이
거침없이 등왕각을 기점으로 역사며 지리 인걸에서 부채살을 사방으로 펼쳐 자연과 우주까지
그리고 하늘에 훨훨 날아 노니는 영겁을 보는 눈으로 마치 영원의 촛점을 발견한 듯 싶은 반짝임으로
인간에 대하여 특히 겸손치 못한 세력자들을 향해 젊은 사람이 겉으로 칭친하면서 속으로
질타하는 솜씨가 가히 절륜한 필치를 휘두르고 있다. 왕발의 진심을 알고자 한다면
'등왕각서'를 끝까지 조근조근 읽어볼 일이다.
시간 되는대로 왕발과 만나고 싶다면 찾아 볼 일이다. 내가 올려 주고자 해도 찾는 자 정성이
크게 복 받을 것이니 이런 글을 클릭 몇번이면 와르르 쏟아지는 세상 아닌가?
참으로 불행히도 왕발은
이 등왕각서를 쓰고 좌천당한 아버지 계신 곳으로 달려갔던 왕발은
결국 바다에 빠져 요절하고 마는데, 하늘이 재주를 줘도 너무 넘치게 줘서 목숨을 재촉한게 아닐까?
그가 조금 더 신중하게 처신했더라면 아무리 웃기는 닭싸움이라도
쉽게 조롱해서 황실에서 죽지못해 쫓겨나는 일 없었을 것이고, 지방에서 참군벼슬이라도 하며
자신을 조금 낮추고 오만치 않았다면 함부로 관노를 죽여서 다시 파면 당한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들 때문에 아비까지 좌천 당해 먼먼 오지에서 근무하니. 그 자식된 마음에 찾아가 위로
드린다는 것이 그만 이 '등왕각서' 한편 남겨두고 바다가 삼켜버린 운명이 됐으니
포악스러움이 넘치면 죽어서도 남에게 포악함을 돌려 받고
재주가 넘치면 스스로 재주의 칼날에 자신과 혈족을 베이는 일이 역사에 허다했으니
여기 잠시 그 길고 긴 장문의 등왕각서 몇구절 음미하며 왕발 왕자안王子安을 추모하고자 한다.
老當益壯하니,
늙을수록 더욱 강해져야 하나니
영지백수지심寧知白首之心이며,
어찌 젊은 채로 노인 마음을 알 것이며,
궁차익견窮且益堅하니,
가난할수록 더욱 굳건해져야 하나니
불추청운지지不墜靑雲之志라.
청운의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작탐천이각상酌貪泉而覺爽하고,
탐천의 물을 마셔도 상쾌하기만 하고
처학철 이유환處涸轍而猶懽이라.
곤궁하게 살아도 오히려 기쁘기만 하리.
북해수사北海雖賖나,
북해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부요 가접扶搖를可接이오,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면 이를 수 있나니.... ,
벵셉이 왈
자안이여 오늘 다시 그대에게 글을 청하면
저 하늘 열십자 우주 정거장 놓고 위태로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또 똑 같은 소리로 노래할것인가
' 난간 밖에 저 하늘 가에 구름만 공연히 흘러 있더라??'
거듭 묻노니
'관광지 삼아 고쳐 지은 등왕각에
왕발의 이름석자로 장사하기 바쁜데
요즘 황천에서 얼마씩 받고 있수?'
첫댓글 궁차인격.... 참으로 어려운 길 같습니다.....
王勃 왕발 등왕각 시 댓글로 올려봅니다..
등왕의 높은 누각 강가에 우뚝한데
옥소리 방울소리 가무도 사라졌다.
아침에는 단청한 서까래에 남포의 구름이 날고
저녁에는 주렴을 걷고 서산에 비를 바라본다
물에 어린 그림자 언제나 유유한데
세상 바뀌고 세월은 흘러 몇 해나 지났던고.
이 누각의 주인은 지금 어디 있는가
난간 밖의 강물만이 부질없이 흐른다.
왕발의 '등왕각서' 마지막 구절 원전을 해석했군요.
왕발이 말했던 거 처럼
누각의 주인은 어디 있는가 물었던 그 자신도
어디 있을지 모를 세월의 강에 이미 둥둥 흘러가고 있는데
강물만 부질없이 흐른다 했는데, 강은 단 한순간도 부질없이
흐른 적이 없었죠. 다만 사람이 보기에 부질없었을 따름인 것을
아마도 지금 왕발이 다시 그 강물 앞에 서면
자연 그대로 흘러가는 강물에 변해버린 자신의
얼굴만 부질 없이 백발임을 탄식했을테고,
인간중심으로 자연을 봤으니 그럴 수 밖에...
滕王高閣臨江渚
佩玉鳴鸞罷歌舞
畵棟朝飛南浦雲
珠簾暮捲西山雨
閒雲潭影日悠悠
物換星移幾度秋
閣中帝子今何在
檻外長江空自流
다만 무상한 것은 그 영화롭던 시절을 노래했던
귀한 인생들이 어디로 다 흩어지고 등왕각만 남았고
강물만 유유히 흘러가는 것이냐? 차라리 왕발이 탄식한 자리는
끝없이 흐르는 무상함에 겸손치 못한 인간이 이름석자 새겨 두려는
그 짧은 오만함에 대한 경고의 뜻에서 의미 있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 그대로 세계에서는 물 한방울도 무상한 적이 없는게
생명의 순환 그 섭리를 따라 흐르고 또 흐르기 때문이겠지요.
반대의 경우도 바로 성립하겠죠. 우주의 마당에선 한 티끌 먼지만도 못한
각양의 존재들이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사라지니
그런 무상함이 달리 또 어디 있을까? 아집도 숨 쉬는 순간까지인것을
요절 천채 왕발의 등왕각서에 나왔던 거군요.' 남창은 고군이요 홍도난 신부로다. 홍도 어이 신부되리 우리 춘향 신부되지.뜻도 모르고 앵무새처럼 잘도 외웠던 귀절인데요. 판소리 춘향가 가운데 천자 뒷풀이 바로 앞의 아니리 대목이죠.
대학 입학 시험때 이 귀절이 아마 시험곡 가운데 하나 였던 것 같은데.....
그 천재의 글 재간을 어떻게 말할 순 없고....다만, 자신이 조롱했던 사람들과 그 기념물에 자신의 글을 더해
오랫도록 세인들이 기억하게 했으니...그 일로 자신도 후세까지 더 유명해지고...아이러니!
놀보와 초란님의 대화에 아래 작가님의 덧뵈기글을 읽노라니 등왕각서에 모든것이 함축되어 있나봅니다
정말 무픕팍 탁 치게하는 구절이 이곳에서도 많이 있는데...
검색해서 좀 더 깊은 내용을 알아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금만 겸손하면 보이는 것도 오만하면 안보이나 봅니다.. 천재지만 요절한 애석한 주인공 왕발 왕자안 이였네요..
천재이면서 겸허함까지 갖춘 인물... 우리 시대에는 누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