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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 명 | 漢字 表記 | 里 |
부여읍 | 扶餘邑 | 가증리[佳增里], 가탑리[佳塔里], 관북리[官北里], 구교리[舊校里] |
구룡면 | 九龍面 | 구봉리[九鳳里], 금사리[金寺里], 논티리[論峙里], 동방리[東芳里],용당리[龍塘里],주정리[舟亭里],죽교리[竹橋里], 죽절리 [竹節里], 태양리[太陽里], 현암리玄巖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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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면 | 窺巖面 | 규암리[窺巖里], 금암리[金巖里], 내리[內里], 노화리[蘆花里] |
남 면 | 南面 | 금천리[金川里], 내곡리[內谷里], 대선리[大船里], 마정리[馬井里] |
내산면 | 內山面 | 금지리[金池里], 마전리[麻田里], 묘원리[妙院里], 온해리[溫蟹里] |
석성면 | 石城面 | 봉정리[鳳亭里], 비당리[碑堂里], 석성리[石城里], 정각리[正覺里] |
세도면 | 世道面 | 가회리[佳檜里], 간대리[艮大里], 귀덕리[歸德里], 동사리[東寺里] |
양화면 | 良花面 | 내성리[內城里], 벽룡리[碧龍里], 상촌리[上村里], 송정리[松亭里] |
옥산면 | 玉山面 | 가덕리[加德里], 내대리[內垈里], 대덕리[大德里], 봉산리[鳳山里] |
외산면 | 外山面 | 가덕리[佳德里], 갈산리[葛山里], 만수리[萬壽里], 문신리[文臣里] |
은산면 | 恩山面 | 가곡리[佳谷里], 가중리[佳中里], 각대리[角垈里], 거전리[巨田里] |
임천면 | 林川面 | 가신리[加神里], 구교리[舊校里], 군사리[郡司里], 두곡리[豆谷里] |
장암면 | 場巖面 | 북고리[北皐里], 상황리[上黃里], 석동리[石東里], 원문리[元門里] |
초촌면 | 草村面 | 산직리[山直里], 세탑리[細塔里], 소사리[素沙里], 송국리[松菊里] |
충화면 | 忠化面 | 가화리[可化里], 만지리[晩智里], 복금리[福金里], 오덕리[五德里] |
홍산면 | 鴻山面 | 교원리[校院里], 남촌리[南村里], 무정리[務亭里], 북촌리[北村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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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쪽에는 마정천이 흐르며, 대부분 낮은 구릉지 이다. 발티소류지가 있다. 백제시대에는 가림군(加林郡), 신라시대에는 가림군(嘉林郡), 고려시대에는 임천군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천군 박곡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지경리, 구리곡리의 각 일부와 홍산군 남면의 마서리 일부를 병합하여 점상리라 하고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고이티(덕림,묘티), 양룡, 왁새말(학촌), 덕림 등이 있다. 고이티는 고이티 고개 밑에 있다 하여 붙여졌고, 덕림사가 있었다. 양룡은 양지편과 용골을 합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왁새말은 왁새(왜가리)가 많이 깃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덕림마을에는 고려말 이방원(李芳遠,조선 태종)의 스승이었던 풍양조씨 회양도호부사(淮陽都護府使) 조신(趙愼)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점상리 [Jeomsang-ri, 店上里]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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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상리(=1리+2리+3리)
▶점상1리=위 발티(上 鉢峙),아래 발티(下 鉢峙)/땅고개/
모새골/ 서녘골<또는 옹기정골>/상령골/용골
<또는 욕골>/ 높은마당/양지편 등으로 구성됨.
▶점상2리=왁새말(학촌마을),음지편?? (양지편의
맞은 편에 위치)
▶점상3리=고이티(덕림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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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 산소
조상님 산소
조상님 산소에서 바라본 아래 발티 마을(左측)
위 발티,아래 발티 마을의 맞은편 (포장)도로
아래 발티에서 바라본 조상님 산소(左측-위 발티 맞은 편)
아래 발티 마을의 맞은 편 (포장)도로
조상님 산소에서 바라본 위 발티 마을
조상님 산소에서 바라본 위 발티 마을
■(남면)마정리[馬井里]
남면의 동쪽에 위치해서 남쪽으로는 마을이 형성되는 야산과 들녘이 그리고 북쪽으로는 금천을 낀 광막한 들이 자리한 지대에 마정리는 위치한다. 고려 중기 전원으로 은거하는 남양홍씨의 정착과 나주나씨, 담양전씨, 남평문씨의 정착으로 안정된 생활권을 이룩한 지역이며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남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마동리, 마서리와 임천군 북박면(北朴面) 역리, 지경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큰 우물이 있었으므로 말우물 또는 마정의 이름을 따서 마정리라 하고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4.23㎢에 가구수는 270호이고 인구는 768명이다. 한때 이름난 마정장터가 현재에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으며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골뜸, 큰샘이 있는 마을이라 샘골 또는 정곡이라 부르고, 마을이 서쪽에 있으므로 서편 또는 마서리, 마을 지형이 소라처럼 생겼다해서 소라말이라 부르며 송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마을 지형이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소머리, 시장이 있는 마을이라 장터, 또는 장대(場垈) , 뒷산의 형국이 제비 형국이라 집을 높은 곳에 지어야 좋다 하여 점상 (漸上), 점생이라 부르고, 무학대사가 말에 물을 먹였는데 말발자국이 생겼다 하여 말우물, 마정, 또는 샘속 바닥에 말머리처럼 생긴 바위가 있고 입과 같은 구멍에서 물이 나온다 하여 신성시하는 우물로 전해지고 있는 마을들이 있다.장터 또는 장대(場垈)부근에는 마정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남면)송암리[松岩里]
남쪽으로는 덕림고개 그 북쪽으로 산악지대가 준령을 만들고 그 북쪽으로 서서히 금천쪽으로 낮은 야산지대와 들을 조성하는 지역에 송암리는 자리한다. 고려초 연안이씨가 정착을 하였고 그 후 서림이씨의 정착으로 집성촌을 이루며 마을을 형성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호암리(虎岩里),송곡리, 마서리 일부와 상동면의 동촌, 죽리, 송수리(松樹里)의 각 일부와 임천군 북박면의 구리곡리(九里谷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송곡과 호암의 이름을 따서 송암리라 하여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송암리의 큰 마을 송곡과 호암에 서림이씨 60여세대가 집성촌을 이루어 현재에 이른다.
리의 면적은 3.32㎢에 가구수는 148호이며 인구는 416명이다.
마을의 뒷산은 대부분 밤나무가 조림되어 있으며, 남쪽 평야지대에는 딸기, 수박 등 특용작물을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범바위와 송곡 등 2개 자연마을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범바위는 마을 뒤에 범을 닮은 바위가 있어서 범바위 또는 호암리라 부르고 마을이 아늑한 골짜기 안에 자리하고 있어 송곡, 송골, 송곡리라 불린다. 특히 선사유적지로 고인돌 3기가 있으며 마제석검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임천면)점리[店里]
점리는 백제시대 축조된 성터나 군량미를 감추어 두었다는 둔적골의 명칭으로 보아 이때에 설촌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박곡면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덕수장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였으며, 이어 수원백씨, 풍양조씨가 정착하면서 점차로 발전하여 간 곳이다.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박곡면 지역으로서 옹기점이 있었으므로 점골 또는 점촌(店村)이라 하였는데, 고종 때 성백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점리라 해서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검지 냇가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검지내, 현계(玄溪), 산아래 가파른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되니 또는 되니기, 고개지형이 말안장처럼 생겼다 해서 안장고개, 그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명을 따라 안장고개, 옹기점이 있었다 해서 점골, 점굴, 점동, 옛날에 군사가 주둔하였던 마을이라 하여 둔적골또는 든적골이라 불리우는 마을이 있으며, 그 맞은편에 신기(新基)또는새터라는 마을이 있고, 면적은 6.31㎢이고 가구수는 148에 인구수는 431 명이다.
■(임천면)군사리[郡司里]
서쪽으로는 금성산(錦城山)을 동쪽으로는 성흥산(聖興山)을 조성하고 그 중앙에 흐르는 임천천과 서쪽에서 유입하는 서주골천과 논실천가에 조성되는 들녘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넓은 들을 조성하는 중앙 위쪽으로 군사리가 자리한다.
백제 때의 아성인 성흥산성이 있으며 백제 이전부터 이 고을을 다스리는 관아가 있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웅진에 천도할 때는 이미 토호(土豪)가 백성을 다스리는 고을이었는데 그 기점이 성흥산성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는 임천군 읍내면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나주임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조성한 지역이 읍내리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청이 있었으므로 임천읍내, 이어읍내 또는 군사(郡司)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임천시장이 매우 번창하였다. 시장터에는 건어물, 의류점 등이 즐비하게 있었고 내 건너에는 가축시장(특히 우시장)이 아주 번창하였으며, 도축장도 있어 임천, 양화, 세도 상인들이 도축해 갔다. 그러나 지금은 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시골시장이 쇠퇴되어 장터의 흔적이 사라져 가는 실정이다.
리의 면적은 3.70㎢에 가구수는 320호이고 인구는 898명이며, 누룩구석, 내건너, 돌팍모랭이, 밤동산, 시죽골, 염통고개, 장인말, 절골, 호리동, 읍내, 좌동 등의 마을이 있다. 또한 임천향교(林川鄕校)가 있고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사당(庾黔弼祠堂), 부소산의 송월대지에 이전하여 사비루라 헌액한 강산루지(江山樓址)가 있다. 그리고 임천객사터[林川客舍址], 동헌터[東軒址] 자리가 있으며 그 앞에 묵묵히 서있는 노송(老松)은 400년동안 임천의 풍상을 지켜보고 서 있다.임천시장부근에는 임천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다.
■(임천면)구교리[舊校里]
북쪽에 위치한 성흥산 주변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산의 줄기가 동쪽에 대흥산 같은 명산을 남기고 남쪽에 다시 산악지대를 조성하는 그 서쪽으로 들을 조성한 지역에 구교리는 자리한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문화유씨, 평산신씨 등이 정착하여 오늘의 뿌리를 내리는 집성촌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이어 금녕김씨, 경주최씨, 단양우씨가 정착하여 임천 고을의 외곽지대에 큰 마을을 조성하였다.
구교리의 마을형성은 고을보다 한가한 지역을 찾아서 은둔하는 선비들의 낙향지로 선택한 데에도 큰 원인이 있다. 임천 향교가 있었으며, 오류정이란 정자로, 성리학의 고장으로 그리고 선비들의 풍류로 알려진 지역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읍내면의 지역으로서 향교골 또는 구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가림리(嘉林里), 세동리(細洞里), 학봉리(鶴洞里)를 병합하여 구교리라 해서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향교골에는 임천향교가 옛날에 있었으며 성흥산 남쪽자락에 유서 깊은 대조사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아래로는 가뭄을 대비해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조그만 소류지가 있다. 삼가레 마을에는 임천중학교와 임천장로교회가 있으며,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임주초등학교가 있었다. 황새울[관동]에는 조은 영농 조합법인이 있는데, 주로 팽이버섯을 생산하고 있다.
리의 면적은 3.85㎢이고 가구수는 215호이고 인구는 529명이며 가는골, 가사리, 향교골, 삼가레, 오류정, 황새울 등의 마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