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 |
6월 |
{불교}지를 인수하여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고 많은 논설을 발표. 7월 9월 9월 24일 10월부터 10월 논설 11월 12월 |
7월 |
전북 전주 안심사에 보관되어 있던 한글 경판 원본(금강경, 원각경, 은중경, 및 유합, 천자문)을 발견 조사하다. 만화를 7월부터 9월까지 불교지에 발표하다. |
9월 |
논설 정교를 분립하라·인도 불교운동의 편신(片信)·국보적 한글 경판의 발견 경로를 불교지에 발표하다. |
9월24일 |
윤치호·신흥우 등과 나병 구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수용소 설치를 결의하다. |
10월 |
시론 한갈등(閒葛藤)을 불교지에 발표하기 시작하다.(다음해 9월에 끝냄). 논설 중국불교의 현상·조선불교의 개혁안·불교개신에 대하여 등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
11월 |
타이(의 불교를 {불교}지에 발표하다. |
12월 |
시론 중국혁명과 종교의 수난 및 우주의 인과율 등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수필 겨울 밤 나의 생활을 {혜성}지에 발표하다.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다. |
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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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
1월 |
수필 평생 못 잊을 상처를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원숭이와 불교를 불교지에 발표하다. |
2월 |
논설 선과 인생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
3월 |
사법개정에 대하여·세계종교계의 회고 등을 불교지에발표하다. |
4월 |
신도의 불교사업은 어떠할까를 불교지에 발표하다. |
5월 |
불교 신임간부에게를 불교지에 발표하다. |
8월 |
조선불교의 해외발전을 요망함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
9월 |
신앙에 대하여·교단의 권위를 확립하라등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
10월 |
불교청년 운동에 대하여, 기행문 해인사 순례기 등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월명야에 일수시 (月明夜에 一首詩)를 삼천리지에 발표하다. |
12월 |
전주 안심사에서 발견한 한글 경판을 보각 인출(印出)하다(당시 총독부에서 인출비용을 대겠다고 제의해 왔으나 강경히 거절, 유지 고재현 등이 출연한 돈으로 간행하다).이때를 전후하여 일제의 사족을 받은 식산은행이 일본화정책으로 조선 명사를 매수하기 위하여 선생에게 성북동 일대의 국유지를 주겠다고 했으나 이를 거절하다. |
1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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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숙원씨와 재혼하다. |
1월 |
논설불교사업의 개정방침을 실행하라 및 한글경 인출을 마치고를 불교지에 발표하다. |
3월 |
현대 아메리카의 종교·교정(敎政)연구회 창립에 대하여 등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
6월 |
선과 자아·신러시아의 종교운동 등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
9월 |
수필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를 삼천리지에 발표하다. |
10월 |
자립력행의 정신을 보급시키라는 논설을 신흥조선지 창간호에 발표하다.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다.이 해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방응모, 박광 등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짓다. 이때 총독부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
1934 |
9월1일 |
딸 영숙(英淑) 태어나다. |
1935 |
3월8~13일 |
회고담 북대륙의 하룻밤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다. |
4월9일 |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다. (다음해 2월 4일까지 연재함). 이때를 전후하여 대종교 교주 나철 유고집 간행을 추진하다.(미완성) |
1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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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후회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이 신문의 폐간으로 50회로써 중단되다.단재 신채호의 묘비를 세우다(글씨는 오세창). 비용은 조선일보 에서 받은 원고료로 충당하다. |
7월16일 |
정인보, 안재홍 등과 경성 공평동 태서관에서 다산 정약용의 서세(逝世) 백년기념회를 개최하다. |
10월 |
수필 모종신범무아경(暮鐘晨梵無我境)을 조광지에 발표하다. |
1937 |
3월1일 |
재정난으로 휴간되었던 {불교}지를 속간하여 {신불교} 제 1집을 내다(논설'불교 속간에 대하여'를 발표). 소설 철혈미인을 불교신집에 연재하기 시작하다(2호까지 연재하고 중단됨). |
3월3일 |
광복운동의 선구자 일송 김동삼이 옥사하자 유해를 심우장에 모셔다 오일장을 지내다. |
4월 |
논설 조선불교 통제안을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5월 |
역경(譯經)의 급무를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6월 |
주지 선거에 대하여, 수상 심우장설 등을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7월 |
선외선(禪外禪)을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8월 |
정진을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10월 |
불교 신집에 연재하기 시작하다 (이듬해 9월까지). |
11월 |
[제논의 비시부동론(飛矢不動論)과 승조(僧肇)의 물불천론(物不遷論)을 신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12월 |
논설 조선불교에 대한 과거 1년의 회고와 신년의 전망을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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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
2월 |
논설 불교청년 운동을 부활하라를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3월 |
공산주의적 반종교이상(反宗敎理想)을 불교신집에 발표하다. |
5월18일 |
장편소설 박명(薄命)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다(이듬해 3월 12일까지 연재). |
5월 |
논설 반종교 운동의 비판·불교와 효행나찌스 독일의 종교를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7월 |
인내를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9월 |
31본산회의를 전망함을 불교신집에 발표하다. |
11월 |
총본산 창설에 대한 재인식을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만단(卍黨) 당원들이 일제에 피검되자 더욱 감시를 받다.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불교사를 정리하려는 구상의 일단으로 불교와 고려제왕이란 제명으로 연대별로 고려불교사의 자료를 정리 편찬하려고 자료를 뽑기 시작하다(미완성). |
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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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갑을 맞아 박광·이원혁·장도환·김관호씨가 중심이 되어 서울 청량사에서 회갑연을 베풀다. 이때 오세창· 권동진· 홍명희· 이병우·안종원 등20여 명이 참석하다.(음, 7월 12일) 사흘 뒤 민족독립운동의 비밀집회장소인 경남 사천군 다솔사에서 김법린·최범술 등 몇 명의 동지와 후학들이 베푼 회갑 축하연에 참석하여 기념 시구를 하다. |
11월1일 |
{삼국지}를 번역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다9이듬해 8월 11일 중단됨). |
1940 |
2월 |
논설 <불교>의 과거와 미래를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5월30일 |
수필 명사십리가 반도산하(半島山河)에 수록되다. 창씨개명에 대하여 박광· 이동하 등과 반대운동을 벌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통도사사적을 편찬하기 위하여 수백매의 자료를 수집하다(미완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