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돌풍
유병덕
2015harrison21@naver.com
이팝나무 꽃이 만발하여 마치 비단더미구름이 두둥실 떠있는 듯하다. 장미꽃도 화사한 자태를 뽐내며 그윽한 향기로 유혹한다. 누가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는 말했던가. 그 말에 토 달고 싶지 않다. 그러나 마냥 즐거워 할 수도 없다. 평온하던 하늘이 뜬금없이 표정을 바꾸어 세찬돌풍을 일으키듯 괴물 같은 코로나 왕국이 나타나 자기 방식대로 인간을 재배치하고 있다. 세상이 하 어수선하여 난 요즘 ‘구름카페’에 은거중이다.
코로나왕국에서 나대다가 이에 휘말려 비극으로 연결되는 소식이 홍수다. 죽은 듯 자연 속에 묻혀 지내는 것이 상책일 듯하다. 산과들에는 대지의 수액을 빨아들여 풀이 무성하다. 천연하게 피어난 이름 모를 풀꽃이 아름답다. 자세히 보니 예쁘다. 오래보니 사랑스럽다. 풀꽃마다 피는 시기가 다르다. 생긴 모양도 빛깔도 다르다. 그래서 특별하다. 하지만 각자의 가치를 깎아내리지 말란다. 다 같은 풀꽃이란다.
오월의 날씨가 심술궂다. 하늘 표정이 질투하는 것처럼 보인다. 평온하다고도 갑자기 돌변한다. 아름다운 꽃을 감상하다 사나운 돌풍을 맞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바람소리가 대수롭지 않게 들렸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려니 했다. 인시寅時에 잠이 깼다. 창틈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흔들리는 커튼모습이 음산하다. 구름카페 식구가 무사할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밀려온다. 이웃하우스 주인의 말이 떠오른다.
“돌풍이 불 것 같으니 문을 내려야 돼요.”
그러나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하늘의 표정이 겉으로 평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생각해서 해준 말일 터인데 이순耳順답지 못한 행동이다. 난 아직 농부라 말할 수 없는 처지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사월엔 일교차가 심하여 그 피해를 평정하느라 홍역 치렀다. 지인들이 찾아와 수분과 온도를 조절하고 시비施肥를 도와주어 흉했던 몰골을 겨우 돌려놓았다.
하우스 안의 작물은 연약하다. 조금의 바람에도 쓰러진다. 약간 덥거나 추워도 주저앉아 버린다. 부모 품에 매달려 지내는 캥거루나 다름없다. 노지에서 자란 작물은 튼튼하다. 비바람에 잘 견딘다. 비가 내리면 내린 대로 입과 뿌리에 간직하고,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일렁이며 뿌리를 단단히 만들어 돌풍에 대비한다.
그가 예상한대로 밤사이 돌풍이 불었다. 오랜 경험칙으로 알려 준 정보를 간과하는 우를 범했다. 지난밤 돌풍이 지나간 자리가 가관이다. 처음 겪는 일이라 생경스럽다. 발길질 당하듯 꺾인 것도 있고 두러 누운 것도 있다. 키 큰 것들은 바람에 쓸려서 한 방향으로 누워 취침하고 있다. 그들을 흔들어 깨우느라 탈진했다.
참으로 그 후유증이 크다. 그날 밤 잠을 자는 데 이곳저곳이 가렵다. 목과 팔등주변을 긁느라 잠을 설쳤다. 아침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니 화상환자처럼 보였다. 목 주변과 팔등이 붉어졌다. 여러 번 긁은 부위는 반점과 물집이 생겼다. 집에 있던 소독약을 발라보았으나 별 효과가 없다. 하루를 지나고 나니 온 몸이 물감들인 듯 빨갛다.
동네 병원을 찾았다. 의사가 피부를 두리번두리번 대더니 옻나무 만졌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하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옻독 같다며 심각한 표정이다. 옻 순 먹고 고생한 적이 스친다. 그 때도 식당주인이 옻오르면 먹지 말라고 했는데 무시했다.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피부병 환자가 되어 한 달 가까이 병원을 들락거렸다. 옻독이라는 말이 무섭게 느껴졌다.
“꽤나 오래가겠는데요.”
의사가 겁준다. 매일 구름카페에 문안인사를 다녀야 할 터인데 걱정이다. 가장 좋은 약으로 처방해달라고 부탁하니 주사부터 맞으란다. 그러더니 여러 가지 약을 먹고 바르란다. 알 수 없는 배포탄정, 파모스터정, 몬테스로정, 그리고 더모타손엠엘 크림을 처방해준다. 하나도 빼놓지 말고 시간 맞추어 먹고 바르라고 권고다. 일주일 지나도 잘 낳지 않고 계속 가렵다. 목 주변이 부풀어 쭈글쭈글해졌다. 산수傘壽가 다되어 보인다.
모두 내 탓이다. 남에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은 교만이나 오만에서 온 것이다. 갑자기 날씨가 바뀌리라 예상 못했다. 어제가 좋으면 오늘도 평온하리라 매너리즘에 빠져 살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해는 같지만 다른 날이다. 온도와 습도가 다르고 풍속과 풍향이 다르다. 또 구름의 모습이나 미세먼지의 농도가 다른 것이다. 오늘은 자고나면 역사가 되고 내일은 오늘이 되지만 새 날이다. 산다는 것은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것 같다.
오월은 돌풍의 계절인가 보다. 지난시절 겪었던 사건 한 장면이 문득 떠오른다. 느닷없이 선생님의 주먹이 날라 와 놀랐다. 친구를 때렸다는 이유다. 너도 얼마나 아픈지 느껴보란다. 항의하다 정학을 맞았다. 또 학교에서 보내온 통지표로 인해 부모님께 걱정 들었다. 모든 과목이 영점처리 되어 꼴지가 되었다. 친구들과 놀러가느라 중간고사를 보지 못했다. 그 일로 가출도 해봤다. 젊은 혈기에 싸워도 보고 반항도 했지만 우정도 쌓고, 시험 보면 일등하는 계기가 되었다.
‘돌풍이 불 것 같으니 문을 내려야 돼요.’한마디가 큰 교훈으로 다가온다.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경험칙으로 해준 말이다. 그 안에 어떠한 함의가 있다. 나의 교만이 화를 불렀다. 모든 말을 똑바로 듣고 이해할 나이가 지났는데 종심從心되야 귀가 순해지려나보다. 충언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 이롭고(忠言逆於而耳利於行), 독한 약은 입에 쓰나 병에 이롭다(毒藥苦於口而利於病)했건만 아직도, 행동이 생각에 따르지 못하고 있다.
언제까지 ‘구름카페’에 칩거해야할지 모른다. 오월의 돌풍은 나의 스승이다. 담금질 시키고 내공을 쌓게 한다.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말고 풀꽃처럼 겸손하라고 한다. 또 이미 만들어진 사회적 관습의 틀 속에 갇혀 있지 말란다. 지나온 삶의 방식은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듯하다. 산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다.
오늘도 ‘구름카페’로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