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을 맛보다
김 경 숙
새로 바른 벽지 사이로 아직도 풀 냄새가 난다. 가지런한 책장들 위에는 예쁜 풍선 꽃들이 줄지어 있고, 밝은 조명 아래 초록 화초들이 내뿜는 싱그러움이 보기 좋다. 현수막과 의자의 위치까지 다시 한번 확인해 본다. 준비는 다 된 것 같다. 잔뜩 긴장되어 있는 몸을 위해 자꾸만 심호흡을 하게 된다. 설핏설핏 어젯밤을 보냈지만 피곤하지 않다. 새로 이사한 도서관을 사람들에게 소개해야 하는 부담감이 태산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도서관에 혼자 서 있다.
도서관에 대한 나의 기억은 ‘맛’이다. 그래서 도서관은 나의 맛집이다. 조그만 시골에서 몇 시간씩 걸어 다녀야 했던 학교는 꼬맹이에게 버거웠다. 어느 날 선생님 심부름을 하다가 학교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가장 외진 곳, 아무도 없는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심심해진 꼬맹이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다. 유리창에 어둑해진 기운을 느끼고 교문을 나서며 했던 말 “참 달콤하네.” 책 속에 빠져들었다가 나온 뿌듯함과 가슴이 가득 차오르는 기분은 달콤한 꿀맛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아버지를 따라 전학을 했다. 운동회도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서 하는 학교에 적응하느라 도서관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다행히 중학교에 진학하니 5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었다. 나무 상자에 담긴 도서 목록 카드를 골라 사서에게 책을 빌리는 것도 신기했고, 시험공부를 위해 줄을 서서 들어가야 하는 것도 재미있기만 했다. 전날 읽었던 책을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에게 풀어내는 즐거움에 매일같이 도서관을 들락거렸다. 언젠가 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어낼 것 같았다. 철부지 단발머리 소녀에게 도서관은 풋사과 맛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도서관과 멀어졌다. 아이를 키우며 우연히 아파트 안에 엄마 봉사자들이 운영하는 ‘작은도서관’을 발견했다. 책을 실컷 읽고 싶다는 욕심으로 봉사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학창 시절 다녔던 도립도서관에서 평생교육 강좌를 한다는 전단을 보게 되었고 수강 신청을 했다. 우물 속에 살던 개구리가 바다를 본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배울 것도 많고,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누군가에게 주기 위해 나를 채워야 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나를 충전하기 위해 대학교에 입학했다. 일과 육아도 같이 해야 했던 날들은 육상선수처럼 숨 가쁘기만 했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공부하며 일하고 있었다. 바쁜 중에도 도서관 봉사는 계속했고, 도서관에서 늦은 밤까지 공부하며 꿈을 키우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뽀글 머리 아줌마에게 도서관은 매워서 호호거리면서도 먹게 되는 라면의 맛이었다.
도서관과의 인연은 이어져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 와서도 작은도서관 봉사를 하게 되었다. 어쩌다 도서관 운영 책임을 맡게 되면서 오랜 숙원인 도서관을 이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공간이 좁고 벽이 많아 행사 때마다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새 단장을 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전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쉽지 않았다. 회원들부터 관련 단체까지 설득하고 도움을 구한 지 3년 만에 가능하게 되었다. 오래 비워 두었던 공간을 새롭게 꾸미고, 8천 권이 넘는 책들을 옮기고, 다시 정리하기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회원들과 아파트 주민들, 아이들까지 모두 마음을 모아 주었기에 조금씩 도서관이 움직였다. 처음엔 쓰지만 단맛이 도는 산나물 맛 같은 시간이었다.
몇 달의 노력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날이 왔다. 아니 내게는 몇 년의 시간들이 모여 있다. 소박하게 하려던 행사였는데, 의도하지 않게 커졌다. 몇 시간 뒤면 수십 명의 손님이 올 것이다. 인사말을 연습하며 도서관에 앉아 있으려니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회원 한 분이 조용히 들어오셨다. 소박하게 포장한 꽃을 내민다. “왠지 걱정하고 계실 것 같아 응원하러 왔어요.”라며 그동안 수고했다는 격려도 해주신다. 눈물이 찔끔 나면서 용기가 생겼다. 행사는 성대하고 훌륭하게 끝이 났다. 도서관을 가득 채운 아이들이 즐거워하던 모습, 손님들의 축하 말씀, 함께해서 기뻤던 웃음소리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마음의 짐을 모두 벗어버리는 시원한 사이다 맛을 느낀 날이었다.
꼬맹이가 학교 도서관에서 책 읽는 꿀맛을 알았고, 단발머리 소녀가 도립도서관에서 풋사과의 설렘을 알았다, 뽀글 머리 아줌마가 입맛 당기는 매운맛과 산나물 맛을 알았다. 그리고 상쾌한 사이다 맛도 보았다. 도서관에서 매일 아이들을 만나 함께 읽으며 함께 자라고 있는 지금의 삶이 행복하다. 도서관에서 배우며 살아갈 수 있어 행운이다.
또 어떤 맛으로 다가올지 기대하며 오늘도 도서관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