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해가람여성문예공모전 큰상(대상)작품
한경희 김제시
<수기> 까슬
새끼손가락 손톱 아래쪽에 까슬이 생겼다. 피부가 얇게 벗겨져 안쪽에 피가 살짝 비친다. 여간 성가시고 아픈 게 아니다. 몸이란 참 희한하다. 멀쩡하게 제대로 기능을 할 때는 그 존재를 잊게 하지만, 조금이라도 탈이 나면 ‘나 여깄소.’ 한다. 그동안 푸대접한 앙갚음을 톡톡히 하는 것이다. 내내 새끼손가락으로만 신경이 쏠린다.
흉부 수술을 하고 중환자실에 있을 때, 면회 온 남동생이 처음 한 말이 생각난다.
“누나는 이제 몸이 어지간히 아파도 아픈 줄을 모르겠네. 지금 이렇게 큰 고통을 겪었으니······”
그러나 수술 이후 예민한 통증은 그 전과 다르지 않았다. 파를 썰다가 손가락을 조금만 다쳐도 호들갑을 떨었다. 문지방에 발톱을 찧으면 방방 뛴다. 행복에는 만성이 되어 쉽게 시들하지만 고통에 익숙해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나 보다. 언제나 새로운 아픔이 더해진다.
엄마에게 나는 늘 새끼손가락의 까슬이었다. 어릴 적에는 말 잘 듣고 말썽 한번 피우지 않아 혼낼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자식 셋 중에 가장 엄마 속을 알아준다며 대견해했다. 그런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 병치레가 끊이지 않았다.
엄마는 마흔두 살에 혼자가 되었다. 세상을 살아가기에 벅찬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게다. 그 중에 자식이 아픈 것만큼 힘든 일이 있었을까. 내 수술 날짜가 잡히고 기다리는 스무여 일 동안 엄마의 가슴은 다 녹아서 없어졌다 했다. 거기에 새 살이 돋아나기가 무섭게 다시 나는 생채기를 입혔다. 수술 후유증으로 여기저기가 아팠다.
나는 예전의 건강을 되찾지 못하리라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챙겼다.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도 찾아 나섰다. 내가 다시 튼튼해질 수만 있다면 엄마는 심장 한쪽도 떼어줄 듯 정성을 다했지만 나는 더 나아지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엄마는 늘 나에게 주파수를 맞추었다. 한 시간 거리의 신혼집에 하루가 멀다 하고 반찬을 해오고 빨래며 설거지, 청소도 도맡았다. 돌아갈 때면 아픈 허리를 두들기며 신신당부했다.
“언제든 엄마 불러라. 너는 꼼짝 말고.”
결혼해서까지 엄마에게 미안했다. ‘서른하고도 네 살이나 먹은 새댁이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는다.’는 주변의 눈총이 싫었다. 나 혼자 해보겠다고 종종걸음을 친 날은 예외 없이 드러누웠다. 엄마는 앓는 나를 보는 걸 살림을 해주는 것보다 더 힘들어했다. 엄마는 아프지 않은 게 가장 큰 효도라며 그렇게 1년 남짓 내 살림을 대신 해주었다.
나를 아끼는 만큼 남편도 아꼈다. 퇴근한 사위가 집안일까지 하는 게 안쓰러웠을 것이다. 사위가 미안해할까 봐 엄마는 당신이 다녀갔다는 말은 입도 뻥긋 말라고 했다. 남편은 내가 살림에 익숙해진 줄만 알았다.
얼마 전 내 생일에 엄마의 문자를 받았다.
“은행으로 5만 원 보냈다. 조금 보내서 미안해. 신랑하고 맛있는 거 사 먹어라. 항상 네게 미안하다. 건강하게 낳지 못해서.”
어차피 태어났으니 열심히 살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우리는 복 받은 사람들이란다.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겼나 구경도 했지 않느냐.’ 하신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엄마는 내게만 유독 민감하다. 결코 익숙해지지 않고 매번 새롭게 아파한다.
엄마는 할머니의 아픈 까슬이었다. 젊은 딸이 남편을 잃자 할머니는 그만 실신을 하고 말았다. 혈압이 높은 할머니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일가친척 모두 노심초사했다. 깨어난 할머니는 엄마부터 챙겼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생활비를 대주고 우리 삼형제의 학비를 도맡았다. 할머니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대학은커녕 엄마와 함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예순다섯의 엄마는 아직도 할머니에겐 돌봐주어야 할 어린 아기다.
할머니의 까슬이 되어 평생 미안해하는 엄마는 이제 그걸 나를 통해 되갚나 보다.
“니 할머니 도움 받을 때는 그냥 별 생각이 없었는데 니가 아픈 거 보니······ 그때는 나 힘든 것만 생각했는데······”
연애할 때 내 남자는 결혼 해 낳을 아이에게 한글 이름을 주고 싶어 했다. 예쁜 첫 딸을 원했다. 그는 몸이 약한 나를 많이 돌봐줬다. 그러다 나는 큰 수술을 했다. 회복은 더디었고 더 이상 결혼을 미룰 수 없었다. 신혼 때 나는 건강에만 신경을 썼지만 시간이 지나도 좀체 나이지질 않았다. 심사숙고 끝에 아이를 갖기로 결심했다.
병원을 찾았다. 간에 양성종양이 생겨 배가 부르면 위험하단다. 종양을 줄이는 시술을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수술 여부를 놓고 기로에 섰다. 의사는 암이 아니니 수술하지 않아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남편이 결단을 내렸다.
“그냥 우리끼리 살자.”
남편은 나만 있으면 바랄 게 없다고 했다. 다시 한 번 수술대에 오르는 나를 남편은 차마 못 보겠다고 하늘만 쳐다보았다.
나는 자식이 없으니 할머니와 엄마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아픔을 잘 모른다. 매번 가슴을 후벼 파는 통증에 대해 나는 머리로만 짐작만 할 뿐, 세월이 흐르면서 알게 될지.
나의 까슬은 남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미안함이 깊어지는걸 보니 남편은 나의 까슬 임에 틀림없다.
설거지를 하기 위해 까슬에 밴드를 붙였다. 물이 닿으니 금세 벗겨져 버린다. 한동안은 그냥 아픈 채로 물을 묻혀야 할까 보다. 굳은살이 배겨 아픔이 덜 하길 바랄 뿐이다. 손의 까슬이야 언젠가는 새 살이 돋을 것이다. 부풀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떨어져 나갈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까슬은 아물 줄을 모르나 보다. 아직은 물에 닿은 까슬이 쓰리기만 하다. <끝>
제5회 해가람 여성문예공모 당선소감
한경희
기차역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한참을 헤매고 난 후 열차에 올랐습니다. 제대로 탔다고 생각했지만 한참 후에야 잘못 탔다는 걸 알았습니다. 다시 가야 할 기차를 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스무 살 때 접은 글을 새로이 쓰기 시작한 건 마흔 둘이 되어서였습니다. 글 속에서 나를 비워가기도 하고 채워가기도 했습니다. 나를 찾아가는 일은 때론 아프고 쓰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건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좌절하려는 길목에서 손을 내밀어 주신 홍천문인협회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글은 붓끝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다고 배웠습니다. 마음 밭을 고르는 일에 힘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