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영분공 약사(永芬公 略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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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의 비는 죽방부인 박씨요 슬하에는 3남 1녀가 있었으나 장(長)은 태자라 금강산에 들어가 바위를 의지하고 마의초식으로 생을 마쳤고 차(次)는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중이 되어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했다.
셋째 아드님이 바로 영분공으로서 부왕의 뜻을 따라 부왕을 모시고 고려로 가시니 삼국사기에는 향차(香車)와 보마(寶馬)는 30여리에 뻗치어 도로는 울음바다로 막혔고 구경꾼은 담을 두른 것 같았다.라고 쓰여 있다.(향차보마 연단 30여리 도로전 인 관자여도: 香車寶馬連旦三十餘里 道路塡咽觀者如堵)영분공께서는 부왕의 손위하시려는 뜻을 받들어 삼왕자 중에서 오직 한 분만이라도(장형마의태자와 차형황공은 고려에 손위를 반대하고 입산하였음) 손국행차에 부왕을 모시고 고려에 가심으로써 양국의 관계에 완전한 화합이 이루어져 부왕의 높으신 뜻이 값지게 이루게 되는 상황이었음을 잘 알고 계셨다. 그러기 때문에 공만은 부왕을 따라 고려에 가신 것이다.
참고로 삼국유사에 나타난 후백제 견훤편을 보면(견훤의 경우는 덕과 처지가 다르나) 견훤은 이미 고려에 항복하였으나 자식들은 신검(神劍)을 잠왕으로 받들고 고려 왕건에 항거하다가 천복(天福)원년(936병신)에 왕건의 토벌로 황산탄현에서 항복을 하니 견훤은 분이 터져 발단)되어 수일 후에 황산불사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그 후손이 희사함은 대조가 된다.한편 공의 입장에서 고찰할 때 공은 왕자로 태어난 몸이 1천년 왕업의 조국을 잃고 모후는 금강산에 들어가 여승이 되어 법명을 돈도라 하셨고 돈도암으 창건하셔 수선(修禪)으로 생을 마치셨다. 공은 모후와 양형을 이별하고 오직 부왕의 대의로운 큰 뜻에 순응하여 고려와 평화적 정권 이양의 대의에 따르셨으니 충성과 효심의 깊음이 세상을 버리고 입산하신 두 형님에 비하여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차원이 높은 충효였으며 지금 우리 후손이 번창하고 있음은 공의 큰 음덕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인정으로 살필 때 당시 공의 심회(心懷)는 얼마나 외롭고 허전하셨으랴 그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신라왕자로서는 영분공만이 유일하게 부왕을 모시고 고려에 가신 것은 전술하셨고 가신 뒤에는 왕자로써 체모를 지켜 의연히 처신하셨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어려운 고려의 초기에 경순왕의 덕을 이을 인품이 되시어 왕건이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경순왕의 식읍으로 하였던 경주를 형망제급(兄亡弟及)의 원칙에 따라 본관으로 사(賜)함을 받았으니 신라를 상징한 유일한 정통의 씨족으로 계승되었음을 알 것이다. |
2.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공은열묘지명 (高麗平章事 輔國大安君 金公殷說墓誌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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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임금 8년(갑진년)에 시중공의 지석과 평장사공 소보공 두 분의 지석을 우연히 발견하였으니 대개 남의 산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지석을 파묻어 숨겼더니 지금에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으므로 여러 일가들이 모여서 그 지석의 글을 읽어보고 서로 의혹이 풀렸다고 하며 말하기를 이 지석 때문에 족보의 미비했던 계통을 참고 할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하니 이것은 조상의 혼령의 도움으로서 자손의 다행인 것이 아니겠는가나(사목)의 증고부 효간공께서 족보의 일을 시작하던 것을 부친께서 계속 물려주셨으니 내가 어찌 두려워만 하여서 사양하겠는가.
그 지석 한쪽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아들 시중시랑이며 고려때 평장사이신 휘 은열로서 무진년 3월 초 4일(기축일)에 세상을 떠나시어 성 북쪽 10리 바깥 종암아래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합곡 임좌언덕에 안장하였으며 형님은 일과 황과 명종이요 아우는 중석과 건과 선과 종이며 아들은 강릉군 태화라고 하였다.다음에 그 자손들이 자세하게 참고 할 뜻이 있어 다시 묘소 위로부터 바로 북쪽 다섯걸음 거리에서 지석을 캐어내니 그 한쪽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고려평장사 김 황을 아우 시중시랑 김은열의 묘소에 이어서 안장하였으며 경순왕의 둘째아들과 넷째아들이 고려태조의 외손이며 공신으로서 특별한 장지를 성 북쪽 10리 오룡산 남쪽기슭 30리 주위를 주었다고 하였다.
그 한쪽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부의 7세손 검교 태자소보 김경보로서 부친은 공부시랑 휘 한공이요, 조부는 추봉공부상서 휘 계삼이요, 외조부는 예부원외랑 김태기이며 공의 나이 82세로 대금나라 황룡 10년(경오년) 4월 17일(계해일)에 본댁에서 세상을 떠나시어 7월 17일(을유일)로써 오룡산에 안장하였으며 아들은 유림랑 감찰어사 비어대 휘 작문이요, 맏사위는 정주사 시전중 내금사 윤유연이요, 둘째 사위는 전옥서승 유면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시중공 바로 북쪽 다섯걸음 거리에서 지석 1개를 캐내니 그지문에 기록되어 있기를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아들 평장사 보국대안군 은열의묘이니 성 북쪽 10리바깥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합곡 금계포란형(금닭이 알을 안은 형국)임좌병향이다. 라고 하였으니 앞의 지석 두면의 뒤에 얻은 지석 1개로써 증거한다면 시중시랑이 경순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으며 그 형제 차례와 그 아들의 벼슬과 이름도 밝혀졌으며 다음 한쪽으로 본다면 공부상서공의 위와 강릉군의 아래에 다시 2대수가 의당 있어야 하겠는데 상서공의 휘자도 족보와는 같지 아니하며 또는 모든 지석에 작호가 족보와는 서로 어긋나니 대개 족보의 미비한 것은 의심할 수 있으되 지석의 문자는 실로 믿을 만한 일이므로 이제 바로 족보의 기록을 고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상서공위 2대수가 증거할 문헌이 없고 경순왕과 평장사공 휘(인위)의 연대가 너무 가까운 것이 더욱 의심나는 것은 역시 모두 고칠 수 없으니 차라리 따로이 기록을 하여서 후대를 기다려야 하겠으니 여기에서는 감히 경순왕 이하 세대차례를 가로로 쓰고 아울러 그 자손을 기록하여 한가지 예규를 만들어 미비한 족보 옛날기록 아래에 붙인 다음에야 지석과 족보가 서로 증거되어 신중성이 있을 것이니 의심과 신빈성이 각각 전해지면서 중복되는 혐의가 없을 것이니 여러 일가의 중론을 따른 것이로되 다만 옛날 기록이나 또는 어떤 족보에는 시중시랑의 성과 이름위에 삼녀라는 글자가 있고 또는 공부상서 휘자 위에 자를 썼으니 이것은 옳지 않으나 아직 옛 것대로 보존하였다.
지금에 지석을 씻어서 그 내용을 모두 드러낸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후손 사목은 삼가 기록함.시중공 묘소 오른쪽에 또 큼직한 하나의 무덤이 있으니 그 둘러 쌓은 담의 남아있는 흔적을 보건데 뚜렷하게 특이한 무덤으로서 한 구역내에 똑같은 형체로써 그 무덤에서 출토된 기물은 모두 부녀자의 화장기구이므로 그의 부인인 것 같으나 지석이 없으므로 확정할 수 없어서 아직 부록으로 뒤에 증거할 자료로 하였다.가보를 살펴본다면 경순왕과 평장사공 사이에 누락된 대수가 있다고 종중의 전해오는 말이 있으나 그 사이에 몇대인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지금에 청주족보에는 공부시랑 은열이 경순왕의 셋째아들로서 5대를 전하여 휘 영고에 이르러서 직접 평장사로 전해 이은 차례를 삼았으니 어떤 근거에서 인지는 알 수 없으며 경순왕 이전 세대가 벌써 사기와 서로 부합되니 이 5대라는 것이 착오될 이치가 없는데 다만 의심할 곳은 경순왕이 본래에 고려태조와 같은 세대에서 경종임금 3년(무인년)에 상사났으며 평장사공이 현종 15년(갑자년)에 벼슬을 그만 두었더니 지금의 평장사공이 벼슬 그만둔 것이 비록 70년대인 것은 확실하지 않으나 대개 벼슬 그만둔 것이 늙은 다음의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 갑자년으로부터 70년을 거슬러 올라 간다면 광종 67년 을묘년 병진년 간에 출생하였을 것이며 경종은 광종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경순왕의 상사난 해에 평장사공의 나이 벌써 이십사오세가 되었을 것이니 비록 소목(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차례[맨 위 첫째 중앙에 시조를 모시고 왼쪽은 소=2,4,6,8, 오른쪽 목=3,5,9])을 따져서 부자지간이거나 혹은 조손간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세대에 혹 나이 8~90세 45대 손자를 보게도 되나 여기에서 그렇지 않은 것은 족보에서 벌써 낙랑공주가 낳은 은열의 출생이 그 다음해인 정유, 무술년간 이라면 이때로부터 평장사공의 출생년도(을묘,병진년)가 불과 18,9년이니 그간에 어찌 45대가 될 수 있겠느냐 또는 족보 중에서 여러 일가의 본관의 갈리는 데에서 안산김씨에서는 이르기를 경순왕 12세손 계림군 김균의 후손으로서 비로소 안산김씨로 본을 삼았다는 것이 벌써 고려때에 있었으니 우리 김씨는 본래에 경주로 본관을 하였으면 이 안산김씨가 김균의 후손이라 한 것은 사실 증거가 없으며 12세라고 이른 것은 반드시 증거가 있은 다음에 썼을 것이니 경순왕과 평장사공 사이에 벌써 이 5세대가 있었다면 어찌 17세라고 아니하고 12세라고 하였겠느냐. 지금에 계림군 김균으로부터 평장사공에 이르까지 바로 만 12대수라고 한 것은 앞에 말한 소목과 조손이라는 말이 이에 가깝지 않느냐.
지금 평장사공에서 경순왕까지의 연대가 이렇게 가까운 것을 알만한데 후손들이 알지 못하고 연대가 멀다고 하며 대수가 탈락되었다는 전해 내려오는 말이 이와 같으니 문서에 증거할 것이 없어서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또는 고려가 열전을 참고하건데 명종 때에 영고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등성 김인경의 부친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연대가 어긋나므로 혹시 두사람의 이름이 같은 것이라고 의심할 만하다. 족보계통은 중대한 일이므로 애초에 신중하여야 하겠으되 족보에 기록된 것이 이렇게 모순되는 것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으며 나중에 족질 휘여의 가승(한 집안의 기록)을 보건데 휘 순웅이 실로 평장사공의 부친이라고 하였고 그 주석에 이르기를 순웅의 아들 인위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여러 일가가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우리집에서는 알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석과 아울러 기록해 놓으니 평장사공 위에 이런 장군공의 1대수가 있다면 여기로부터 경순왕년대에 소급해보면 더욱 가까운 것이니 여기에 5대수라는 것은 아직 부록으로 하여서 후일에 다시 참고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평장사공 23세손 덕운은 삼가 기록함.
임진년 족보를 살피건대 경순왕 이하 족보 탈락한 것은 다만 여러 기록에 어긋나는 말을 증거로 의문점 그대로 남겨 두었는데 정조임금 갑진년에 시중공소보공의 지석을 발견하여 비로소 선대계통을 알았으므로 지금에 구족보의 기록을 수정하였으며 경헌공은 추가로 기록하며 구족보에서 일가 덕운이 기록한 것을 작은 글씨 두 줄로 아래에 써서 참고케 하였다. |
3.김순웅(金順雄) 대장군공(大將軍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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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초에 응양군(鷹楊軍)과 용호군(龍虎軍)의 이군(二軍)을 거치고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尉衛),금오위(金吾衛), 천우위(千牛衛),감문위(監門衛) 등 육위 장군을 거쳐 대장군이 되어 안서홀성주(安西忽城主) 즉 황해도 병마사가 되다.
공의 아들 인위(因渭)는 문하시랑평장사로 고려현종의 국구가 되고 손(孫)인 원정(元鼎)은 문하시랑평장사로 문익공(文翼公)의 시호를 받고 증손 이하의 후손들도 대거하여 높은 벼슬에 이르다.
공의 13세 장손인 휘 균(??)은 고려말에 밀직부사를 역임하다가 1392년(공양왕 임신)7월 개성 수창궁에서 배극렴 등 중신들과 힘을 모아 이성계(조선태조)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개국 공신으로 계림군(??林君)에 녹훈(錄勳)되고 보국숭록대부에 승계하여 문화찬성사 의정부 좌찬성에 제수되고 태상사(太常寺)에서 집심극장왈제(執心克莊曰齊)요, 강덕극취왈숙(剛德克就曰肅)이라 제숙공(齊肅公)으로 시호가 선법되고, 1666년(현종병오)에 후손인 시진(始振)이 예조참판 때에 공훈을 상소하여 계림부원군에 추봉되고 1362년(공민앙 임인)에 안주(황해도 재령)에서 개경으로 입경하여 1394년(태조갑술)에 한양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여 살면서 조선국의 동반서아(東班西衙)에서 권좌에 이르며 휘 헌(櫶)은 호가 송강(松岡)이요 이부시랑으로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함경도 영흥지방에서 정착해 살며 휘 은(??)은 이부시랑으로 예조판서에 추증되어 충문공(忠文公)의 시호를 받고 함경지방으로 가서 정착하고 휘 서(??)는 이조판서로 정숙공(貞肅公)의 시호를 받고 황해도 이천지방에 정착하고 휘 능(??)은 고성 현령(縣令)이 되고 황해도 서흥 지방에 정착해 살다가 양주,보은 등지로 산거하고 휘 남기(南基)는 예의판서가 되고 강원도 평강지방에 정착하여 살다가 동해안 지방에 산거하며 현재는 경향 각지에서 대거 활동하고 있다. 장군공의 묘소는 황해도 재령의 평장동에 있다. |
4.김인관(金仁琯) 태사공(太師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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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종 조문과 장원입사 누승위위시경.
예종 19년 전이부랑중으로 요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했으나 여진의 병란으로 길이 막혀 회행했다. 족보와 고려사에 의하면 예종은 전년에 대비 국상을 당하다 요왕은 조문사로 왕경(王敬)을 보내와 위조문하고 아울러 낙기복을 칙명으로 허락했다. 왕은 이에 대한 사은사를 요에 파견했는데 이때 사신이 바로 낭중 김인관인 것이다.
낙기복이란 상중에 있는 자를 탈상하게 하고 평상생활을 하게 하며 관직에도 복귀함을 뜻한다.3년 탈상을 당겨 탈상시키는 것을 말한다. 공은 또 상서도성 좌사랑중재임시 발영시'拔英詩 : 삼품 이상의 조관이 응시하는 과거'에 괴탁과(魁擢科)에 등과했다. 즉 갑과에 장원을 뜻한다.
그후 공은 문하시랑 평장사 주국 개국자(작) 경조현에 녹작되고 검교태자 태사로 치사하다. 그후 왕은 추증 : 삼중대광상서성령 숭록대부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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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김경손(金慶孫) 문간공(文簡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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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손(?∼1251) 시 문산공이다. 초휘는 운래(雲來)요,
평장사 태서공의 제3자이며 대안군의 십세손이다. 서기 1231년 고종 때 상장군 동왕 18년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때에 불의에 침입한 몽고군을 막아 자진 12명의 결사대로 적진을 유린 기세를 꺽고 다시 구주에서 적을 협공 몽장 철례탑(徹禮搭)을 상대로 20여일 혈투끝에 격퇴시켰으며1233년에 대장군 지어사대사에 오르다.
서기1237년 상서병부로서 자진 전라 지휘사가 되어 도원수라 하며 광주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괴수 이연년(李延年)을 평정하여 추밀원 부사로 승자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고 각 주현을 수복하고 인망이 날로 높아지자 권신(權臣) 최항(崔沆)이 시기모함으로 실각하고 급기야는 서기1247년 백령도에 유배되니 공은 평생의 충위가 물거품이 되자 비분한탄 피눈물을 흘리며 궁성을 향해 절하고 제지를 물리치고 해중에 투신했다.
이때 중원에는 원의 성길한(成吉汗 : 칭기스칸)이 아시아,중동,유럽 전역을 석권 세계제국을 건설 그세가 전성시대가 되었다. |
6.김혼(金琿) 충선공(忠宣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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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혼은 명장 경손의 제3자로 고종의 부마도위 낙랑군이며 대안군의 11세손이다.
거란과 왜구의 침략 때마다 토평에 앞장서서 크게 공을 세워 품계는 삼한벽상삼중대광정일품이요,공신군호는 상락군이다.
그 뒤에 계림부원군으로 관력 또한 화려하다. 그 후손이 안동김씨로 내성하는 자도 있다. |
7.김장유(金將有)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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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의 산풍고(山風蠱) 상구(上九)괘에 말하기를 왕후를 섬기지 아니하는 그뜻이 고상하도다. 햐였으니,
생각하건데 우리 증시조 판도판서 장유공은 그때를 당하여 그 의를 다하시니 유능하시도다. 모든 사람은 벼슬을 함에 있어 위태롭고 어지러운 때를 당함에 누가 편안함을 보존하고 용감하게 물러설 계책이 없으리오마는 다만 이익에 골몰하고 벼슬을 탐내어 물러가지 못하다가 재앙을 당하고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자 많으니 참으로 슬픈일이로다. 우리어중시조는 고려말기에 벼슬하여 판서의 높은자리에서 청렴과 결백을 스스로 지키더니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법률이 해이해져서 아첨하는 무리가 들어서고 어진 신하가 물러나며 민심이 흩어져감을 수습치 못할세라 군자의 나갈바를 생각하고 도장끈을 풀어 벼슬을 버리시고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표연히 조용한 산골에 물러앉아 문을 닫아 손님을 끊고 다만 글을 벗하되 입으로는 조정의 잘못을 말하지 아니하고 귀로는 나라의 기우러짐을 듣지 아니하여 수록속에 쌓여 진실한 성품을 기르고 덕을 닦아 천수를 다하였으니 이를 일어 그 뜻이 고상하여 왕후를 섬기지 아니한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그 뒤 자손들이 창성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음에 이르니 이 모두가 우리 중시조의 청덕을 원차대한 계책아래 후손들에게 끼치신 음덕이어늘 후손으로서 보답한다는 것이 산소를 잃었으니 세월이 오래고 여러번의 병란을 겪은데서 온 결과라고는 하나 후손된 자로서 그 어찌 통탄하고 슬퍼하지 않으리오!
지난 어느 해 어느 날에 고을종족이 모여 단소를 설립하기로 뜻을 모으고 힘을 합하여 사단을 산소가 있던 마을앞에 저답촌 동쪽기슭에 세우고 집과 전답을 마련하여 해마다 10월에 축을 읽고 향사를 올리니 우리의 중시조의 영령이 때 맞추어 사단에 내려오시어 흠향하시게 하였다.
불초가 일즉 호주 한문공의 비문을 읽은바 그 속의 한구절에 공의 신령이 천하에 계신 것이 마치 물이 땅 속에 있음과 같아서 가지 않은 곳이 없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럴진데 우리 중 시조의 신령이 한문공의 넋과 같다면 어찌 산소라면 흠향하고 사단이라 흠향치 않을 리가 있겠는가! 살피건데 조상의 마음과 자손의 마음이 기운과 피로 엉킨 바로 재실은 공경히 받드는 곳이 아니던가.부인은 삼산이씨이니 판도판서의 벼슬을 사임하기 전에 귀향하셨고 송고(松固)의 딸이라. 이에 사단에 비를 세우고 글자를 새겨 함께 제사하노라.
그 큰아들 중남(仲南)은 벼슬이 감찰규정이니 이단의 동쪽에 자리를 베풀고 비를 세워 한 날에 제사올리나 부인은 고증할 바가 없으니 후손이 슬퍼할 바가 아니랴?
김장유는 경주인이나 신라경순왕의 후손이라 고려 때에 벼슬이 판도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말기에 정치가 어지러워짐을 보고 보은저답금평각리저돈론(報恩猪畓今坪角里猪敦論)으로 내왕한 후 보은면종곡리로 옮겨 대대로 살다.
숭정후 네번째 무진(서기 1868년) 8월에 불초17대 손 수홍(秀弘)은 삼가 피 눈물로 씀 |
8.김남기(金南基) 예판공(禮判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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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공(휘 순웅)의 8세손인 휘 광준(光俊)의 2남 중 둘째로 공을 중시조로하여 예판공 종중을 형성했다.
종래는 중시조인 예판공의 6세손인 휘 순(恂)의 호를 따라 춘고공(春皐公) 宗中이라고 칭하여 왔다.
순의 세 아들 중
휘 처곤(處昆)은 세종 12年生 관 : 통훈대부행 홍원현감을
휘 처의(處義)는 세종 14年生 관 : 여선전관 봉석주, 함안군수를
휘 처형(處衡)은 세종 23年生, 관 : 성균관생원통덕랑을 역임했다.
단종복위의 역사(役事)에 연루된 죄로 일시 충청도 공주로 은신하였다가 다시 경주로 낙향하여 후손들은 오늘에 이르고 있다. |
9.김인경(金仁鏡) 명암공(明庵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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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경의 초명은 양경(良鏡)이오 경주인이니 영분공 휘 명종의 8세손인 평장사 양신공 의진(義珍)의 사세손이오 부 영고(永固)는 흥교도관역사(興郊道館驛使)가 되어 공청자혜(公淸慈惠)하여 한사람도 매질하지 아니하였다.
후에 귀주갑장(龜州甲仗)이 되었는데 김보당(金甫當)이 군사를 일으켜 패배하매 영고가 잡혀 영주옥에 갇히어 죽음을 당하게 되매 흥교 인민들이 처치사(處置使)에게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비니 처치사(處置使)가 차마 베지 못하고 고랑을 채워 서울에 보내니 승선(承宣) 이준의(李俊儀)가 본래 영고와 좋아하므로 영구(營救)하여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집이 이미 관에 적몰(籍沒)되고 처자가 기한(飢寒)하여 의탁할 곳이 없으매 흥교의 이민이 또 미백(米帛)을 거두어 후히 보내었고 벼슬이 합문지후(閤門祗侯)에 이르렀다.
인경은 재식이 정민하고 예서에 능하였으며 명종 때 을과(과거성적의 제2등) 제2인에 합격하여 직사관이 되고 누전(累轉)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고종초에 조충(趙沖)이 거란병을 강동성에서 토벌할 새 인경을 불러 판관을 삼으니 이때 몽고원수 압진(哈眞)과 동진원수 완안자연(完顔子淵)이 군량을 청하거늘 충이 이를 정찰코자 하였으나 그 사람을 얻기가 어려웠는데 인경이 가기를 청하니 충이 이르기를 幕중에서 주책(계획)함은 군의 직능인 바이나 험난을 무릅쓰고 가서 정탐함은 평소에 익힌 바 아니어늘 어찌 감히 청하리요. 하니 인경이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데 몽고의 포진은 손오(孫吳)의 병법을 취함이라 하니 내 젊어서 육서(六書)를 읽어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감히 청하나이다. 답한즉 충이 이에 허락하고 곧 인경으로 하여금 정병 천을 거느리고 미(米) 일천석을 실어다 주게 하였다.
마침 압진과 완안자연이 거란병을 대주에서 공격할 새 주의 서 독산에 둔치고 있거늘 인경이 병사를 거느리고가 뵈오니 두 원수가 풍악을 베풀고 잔치를 열어 위로하여 환락을 다하고 파하거늘 인경이 주의 서문밖에 나아가 방진을 치니 두 원수가 높은데 올라 바라보는데 몽고 46인이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서로 대해 서거늘 인경이 재인(才人 : 재주를 넘는 광대)으로 하여금 군전에 벌여서 고조(북을 치며 고함지름)하여 잡희 (雜戱)를 짓게 하고 또 선사자(활 잘 쏘는 사람) 20여인으로 하여금 일시에 함께 쏘니 화살이 주의 성에 들어가매 거란의 성에 올라 망보는 자가 다 달아나 피하는지라 두 원수가 군용이 정숙함을 감탄하여 다시 인경을 맞아 상좌하고 다시 연위(宴慰)하였다.예부랑중에 옮겼는데 논공하여 추밀원우승선에 발탁되었다.
14년에 동진이 정 장 이주에 침구하거늘 인경이 자중군병마사가 되어 더불어 의주에서 싸와 크게 패배하고 이듬해에 참소를 입어 상주목사로 좌천되니 고구(故舊)가 한 사람도 전별하여 주는 자가 없고 다만 문생만이 교외에 전송하는지라 인경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한번 말을 채찍질하여 호진을 거의 다 쓸어 버렸는데(호인의 전란) 만리의 남쪽 변방에 쫓기는 신하가 되었도다. 옥순(풍채의 아름다움에 비유한 것임) 같은 문생들이 많이 나와 전송하니 감회가 깊어 눈물이 수건 적심을 금하기 어렵도다.라고 하였고 또 주의 벽에 쓰기를 감히 창천을 향해 원정을 품으리오 귀양살이로 왔지만 오히려 스스로 전성함을 얻었도다. 어느 때 영각(鈴閣 : 태수의 거소)이 황각(黃閣 : 재상의 관서)에 올라서 태수의 행이 재상의 행이 될고 라고 하더니 얼마 아니되어서 형부상서 한림학사에 재배되고 이어 지추밀원사 상서좌복야(尙書左僕??)가 되니 당시의 미담이 되었다.
19년에 정당문학 이부상서 감수국사에 나아가고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라 22년에 졸하니 정숙이라 시하였다. 인경은 문.무.리의 재가 함께 넉넉하고 시사가 청신하고 특히 근체(근시체재)의 시부를 잘하니 세상이 양경시부(??鏡詩賦)라 일컬었다. |
10.김요(金瑤) 문선공(文宣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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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병옥(秉玉) 관은 삼중대광상장군계림부원군(三重大匡上將軍鷄林府院君) 시(諡)문선(文宣)이요 영분공 휘 명종의 12세손인 정숙공 인경의 손이요 승지예부시랑상서좌복야(承旨禮部侍郞尙書左僕야) 휘궤(諱軌)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사(麗史) 정원일록(政院日錄)을 안찰하면 충숙왕 시에 공의 시사를 전형할 즈음 임금님이 그 세덕을 물으니 정신(廷臣)이 상조(上朝 : 명종)에 김인경의 손이라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정숙의 문장덕행이 뛰어났는데 요와 같은 손자가 또 있으니 정숙이 사망하여도 그 성망(聲望)은 살아있는 것 같다고 극찬하였다.
1남을 낳으니 휘 정윤은 충선왕조에 문과에 올라 병부시랑을 역임하고 예의판서에 증직되었다. 정윤이 4남을 낳으니
장자 휘남보(南寶) 병판공파
둘째 휘남분(南賁) 판삼사사공파
셋째 휘남길(南吉) 평장사공파
넷째 휘남귀(南貴) 밀직공파
이상 4파로 분파되어 홍유거경(鴻儒巨卿)이 많이 배출되었다 |
11.김승무(金承茂) 한림시어사공(翰林侍御史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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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무는 영분공 휘 명종의 12세손인 고려 고종 때 명신 김인경의 손자이다.
용모가 단아하고 재식이 출충하여 소시적에 등과하여, 한림원에 입직하여 사관이 되었다. 그 뒤 승진하여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그때 승선(承宣) 허공(許珙)이 정권을 잡고 제도 안찰사(諸道 按察使)로부터 뇌물을 받아 세상의 시비를 받던 중, 강헌.한완(康軒.韓琓) 등이 허공에게 아부하여 뇌물을 탐하다가, 김시어사에게 탄핵되어 바로 잡혔다. 초휘는 영(營) 호는 송암(松庵)이다. |
12.김덕재(金德載) 병조판서공(兵曹判書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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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이름은 덕재요 자는 도중(道重 : 어느 책에는 호를 벽송이라고 하였다.)이요 경주사람이니 신라의 경순왕 15세 손이다. (세대를 따라서 연대를 계산하면 판서공이 출생한 해는 고려조의 말년에 있었던 것 같다.) 관은 정헌대부 병조판서이다.
기탄없이 소신을 말하여 간하다가 임금의 뜻을 거슬려서 정평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하나의 설에는 홍무명태조의 연호 무인 1398, 태조7년에 태조가 왕위를 피하여 함흥의 본궁에서 계실 즈음에 조정에서는 여러번 사신을 보내어 찾아가 뵈었지만 태조께서는 노하시고 모두 죽이었다.그때를 다하여 공이 병부상서로 자청하여 왕명을 나아가 뵙고 굳세게 간하였더니 태조께서 그의 간절한 충성을 아시고 중산에다 벼슬을 떨어뜨리고 귀양을 보냈다고 하는데, 지금 실록을 근거하여 보면 태조께서는 왕궁을 나와 다른 곳에서 놀으시었음은 신사 1401년, 태종1년 임오 1402년, 태종2년의 2년간에 있었으며 본궁으로부터 궁궐로 돌아오신 것은 바로 태종2년임오 1402년 겨울 12월이다.
이 먼저 홍무무인 1398년, 태조7년에는 태조께서 아직도 개성에 머물고 계시었으니 이른바 봉영사가 어떻게 북방에 먼저 들어간 자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설을 믿기가 어렵다.).공이 처음에 주이사(朱伊社)의 큰 길 아래 중흥리에서 사시었지만 세대가 아득하게 오래되고 사람은 죽어 없고 옛 터만이 내버려두어 못쓰게 되었으며 손수 심었던 연지만이 아직도 남아있으니 옛날부터 지금까지 직형지라고 이름하였다. 공이 일찍이 지은시가 있어 이르기를 한번 관계를 떠난 지 10년을 지내니 경주의 옛 땅은 꿈속의 영혼만이 슬퍼하네, 수레를 돌려 옛 고향에 갈 날이 언제이던가?
이제부터는 중심이 이 나라 고향이라네. 하였다. (중산은 고려조의 정평의 옛 이름이며 같은 까닭으로 다시 정평이라고 개칭하였다.) 죄를 용서하는 특전을 받지 못하고 끝내 정평의 집에서 돌아가시니 조정에서 지사를 보내어 주이사의 우봉산에 금계가 알을 품은 형국의 감룡(坎龍)에 정향(丁向)의 언덕을 가려서 장례지냈다.배정부인 임씨의 묘도 같은 자리에 합폄하였다.
병판공묘소 - 함경남도 정평군 주이면 중흥리 중봉동
병판공모현사 - 함경남도 정평군 장원면 교항리(병판공외 22배위)
13.김균 계림군 신도 비명 (金균 계林君 神道碑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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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께서 복조(福祚)를 열어 천의에 응하고 민의에 순하니 이때에 문무충훈의 신하들의 실로명세(세상에서 뛰어나)의 위인이 아니면 그 어찌 능히 용의 비늘과 봉의 날개를 거린(擧鱗)하였겠는가! 저 계림군 김공의 역사에 실린 사업은 비록 적료하나 산하에 맹시한 철권과 기린각에 모신 도상은 가히 무궁토록 빛날 것이다. 어찌 주나라의 십란(주 무왕을 보좌한 열 사람의 신하, 난의 치의 뜻)이라고 해서 모두가 서술한 전기가 있겠는가!
공의 체백지장(體魄之藏)은 광주오포태현 간좌원에 있으니,예전에 그 곳이 실전되었다가 후손 상국이신 사목이 이 고을 유수로 있을 때에 고로들에게 수소문하여(찾았으나) 오직 인사라는 것은 궁한 연후에 통한다고 하더니,이는 자못 공의 성대한 훈업이 능히 신인의 도움을 얻었다고 하겠다.예전에 주제의 묘소가 타인의 소유가 된 적이 있으니, 대저회옹(주자)이 손자가 되었음에도 오히려 이러하였으니, 그 수호하는 정성이 진실로 또한 어렵다고 하겠다. 마침내 흙을 쌓아 봉분을 다졌다. 그 뒤에 현각을 세우지 못하고 공의 사손 참봉 정택이 그 아들 인시을 시켜 나에게 신도비문을 청하니 내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그 보록을 살펴 서술한다.
공의 휘는 균이니 그 선대는 신라 경순왕에서 나왔다. 휘 순웅은 고려에 벼슬하여 장군이 되었으니 이로부터 대대로 대관이 나왔다. 증조의 휘는 수(粹)이니 예빈경이오 조의 휘는 기연(起淵)이니 판서요 고의 휘는 지윤(智允)이니 증 찬화공신 참지문하부사이다.공은 날 때부터 특이한 자질을 갖추시어 엄연하고 굳세며 기국(器局)이 깊고 문사(文詞)가 뛰어나니, 제배들이 감히 바라볼 수도 없었다. 공양왕초에 밀직부사가 되고 신미년 가을에 왕이 수창궁에서 잔치를 베푸는데 공이 취흥을 타서 시 한 수를 읊었더니 헌사(憲司)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안중서로생(安中書魯生) 정복제총(鄭復齊摠)이 모두 시를 지어 위문하였다.흥무 임신년에 익안대군 방의 등 39인과 더불어 성주를 추재하여 이미 수훈을 세우시니 봉호를 내려 주었다. 예로부터 제왕이 일어날 시에 비록 천명을 받았다 하더라도 또한 충직하고 지혜스러운 사람이 나서서 앞 뒤로(주서해 준) 뒤에야 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하늘과 사람이 같이 응하는 이치가 또한 속일 수 없다고 하겠다.건원릉과 헌릉의 신도비의 음사에 모두 공과 배공 극렴(1325~1392) 여러 공신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벼슬은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이르고 시호는 재숙공이오 사당은 백세불천지묘로 되었다. 생년은 고증할 수 없고 무인 8월 10일에 돌아가셨다.공은 전후배(前後配)가 있으니 묘소에 합부하였다. 배 안동권씨는 판서 현의 딸로 1남을 두셨으니 맹성(孟誠)이라 판서 희경공이오, 1녀는 신한에게 출가하였으니 장령이다. 배 무송윤씨는 지평 식녀로 2남을 두었으니 중성(仲誠)은 판봉상사사로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계성(季誠)은 산원대경으로 판서에 추증되었다. 장방은 무후하여 차방이 공의 제사를 주관하였다. 안민(安民)은 판사재감사요 신민(新民)은 집현전부제학이오, 인민(仁民)은 (한성)판윤이오 사정 신서와 사정 박경지는 두 여서이다.계방에 종순(從舜)은 한성부윤이오 정랑 권격은 여서이다.증현손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못하니 자손이 번역하고 관작이 빛나니 명공신경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생각건대 공이 쌓은 음덕의 소치라 하겠다. 그 뒤로 가장 뛰어난 분은 대사헌 승경, 판결사 춘경, 목사 태경, 판의금 하경, 전한 전, 좌찬성 당, 참판 시, 직제학 천령, 판서 인손, 대사헌 만균, 절도사 경원, 좌의정 경림부원군 명원, 참의 위, 찰방 성지, 판서 남중, 목사 원립, 부제학 경여, 참판 시진, 현감 진수, 감사 몽신, 영돈령 경은, 부원군 주신, 참판 재현, 참의 후연, 참봉 성호, 군수 정운, 판서 성운, 판서 효대, 판서 기대, 감사 여, 좌의정 사복, 참판 영작, 집의 성갑, 판서 정집, 좌상 홍집, 승지 철원, 참판 승집, 판서 창희, 부윤 철희, 참의 춘희, 유림 교헌 공으로부터 여기까지가 18대손이니 과거로써 미래를 점쳐 볼 때 어찌 다 헤아리겠는가! 한문공이 일찍 이르되 누가 그 냇물을 풍성하다 하였는고! 그 근원은 생각지 않는가 하였으니, 나는 공에게 또 이렇게 말하겠다. 명왈 이 광릉의 언덕은 훈덕을 갈무린 바라. 산이 무너지지 않고 물이 마르지 않을 지니, 바라건대 그 이름 길이 빛나리라.
시 문충공 연제 송병준 근찬 18대손 가선대부 중추원의장 송당 김정목 근립
14.김능(金稜) 현령공(縣令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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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령공(휘 : 능)은 장군공(휘 : 순응)의 9世孫인 휘 南美의 子 4兄弟 중 둘째 시랑참지사 휘 精의 둘째 曾孫이니 즉 장군공의 13世孫으로 貞肅公(휘:서)과는 兄弟間이요.
계림군(휘:균)과는 8寸間이다. 관직이 고성현령을 역임하였기에 公을 中始祖로 한 후예를 현령공 종중이라 전하여 왔다. 공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600여년 그간 녹권(錄卷) 世譜등 많이 소실되었다고는 하나 그 와중에도 乙丑譜를 비롯 丁丑譜, 庚午譜 또한 거금(距今) 80년전에 차한 보책에 계하사목(啓下事目)과 같은 귀한 문헌을 기본으로 1993년 계유(癸酉)에 宗人의 숙원인 譜冊을 간행하므로 宗人이 하나되는 희열을 보았다.公의 德이커 계림팔도에 공의 후예가 번성하여 그 時代에 나라와 사회에 공헌하여 왔음을 자부하오나 그 중에서 公의 6世孫인 咸原君(휘:瑄)을 낳아 주심은 공의 자랑이요 全宗中의 자랑으로서 咸原君의 발자취를 흠모함이 숭조의 일조가 되리라 사료되어 소개한다.
휘:선은 조선조의 成宗, 燕山君, 中宗 때의 명신으로 1457年 乙未(成宗 6)에 이조좌랑의 봉직을 시작으로 사헌부 집이, 全州府尹, 강원도관찰사, 중추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연산조의 士禍, 中宗反正 등의 파란만장한 세파에도 불구하고 조정과 세도에 굴함이 없이 오직 正道를 택하여 걸러온 기개나 赤心은 이 시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동량(棟樑)으로 추앙된다. |
15.김충유 두계선생 신도비음기 (金沖裕 杜溪先生 神道碑陰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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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문동의 제현은 부녀아동들도 지금까지 그 절의를 크게 칭송하고 있지만 그 중에 이의판서 두계선생도 또한 포은(정몽주) 목은(이목은) 도은(이색) 야은(길야은)의 외경한바 되었으니 그 얼마나 성대한가.
아!위대하도다 선생의 사행은 제현들이 소상하게 찬술하였고 또 심석송선생병순(心石宋先生秉珣)이 신도비문을 변술하여 그 평생대절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러나 단지 그 문중에 선생의 자남(子男)이 차서와 작위가 혹은 누락되었음으로 김씨제족이 오래도록 유감으로 생각하더니 이제 문적(文籍)을 널리 고찰하여 확증을 얻어가지고 비로소 개정은 하였으나 문적만 고칠 것이 아니라 비석까지 고쳐야 한다고 드디어 구비(舊碑)를 개수하기로 합의하고 나에게 비문을 받으러 왔으나 나는 인휘문천(人徽文淺)한지라 사절을 하다 못하여 근안하니 선생의 휘는 충유(沖裕)요 자는 선경(善卿)이며 시는 문간(文簡)이요 김씨관은 경주인데 경순왕의 17세손이라 대대로 명공거경이 계승하였으니 양신공 휘 의진(義珍)은 유술이 뛰어났고 4세를 지나 휘 인경은 관이 평장사요 시는 정숙이며 삼한벽상공신인데 선생의 고조라 증조의 휘는 궤(軌)인데 상서좌복야요 조의 휘는 영(瑩)인데 전객령(典客令)이며 고의 휘는 서인(瑞仁)인데 판도정랑이요 비는 형(邢)씨인데 전서군소(典書君紹)의 여로 단장정숙(端莊貞淑)하였다. 4남을 생하니 그 장자로 천성이 효우에 독실하고 재조는 문무가 겸전하니 소년에 등과하여 청화한 벼슬을 역임하니 나아가면 청백리요 들어오면 직신으로 이의판서(吏儀判書)에 이르렀다.
일찍이 정세운,김득배 제공(諸公)을 따라 홍두적을 토벌하여 공을 새우고 개선하니 여러 소인들이 무고(誣告)하여 충량들을 살상한지라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여 다시 출세할 뜻이 없었다. 고려가 망함에 그 제 수은공 휘 충한과 더불어 두문동으로 들어갔다가 그 후에 또 남원지리산 북쪽 요천위로 멀리 피신하여 두계라 자호하고 형제가 우애하여 즐겁게 살면서 정학을 밝히고 사설을 배척하며 초동목수와 더불어 벗을 삼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을 하되 장례는 간소하게 하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세구(歲久)함에 분묘가 실전되었고 후세사람들은 두곡마을을 지칭하되 백이숙제 의 서산과 같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후손들은 이 마을에다 축단하고 해마다 제사지내고 유림들은 또 두남사를 건립하고 존봉하였다. 배는 부부인순홍안씨인데 문경공보(文敬公輔)의 여로서 구고(舅姑)를 섬기는 데는 예를 다하고 부군을 받드는 데는 뜻을 어김이 없었다. 11남을 생하니 장남의 휘 계는 밀직부사로 태종조의 2남은 영(纓)인데 참의로 태종조에 좌리공신이요 손유성은 대사성이요 유견은 수호군이며 광성은 중산대부문하찬성사요 유성의 자는 기(麒)인데 참의며 광성의 자는 비(費)인데 목사요 3남은 선 인데 중랑장이요 손에 유적(有迪)은 참지정사요 유적의 자는 종(鍾)인데 장사랑이며 4남은 광우(光宇)인데 진사요 손에 세좌(世佐)는 문과로 지평사의에서 홍문관응교에 이르고 세좌의 자는 진(璡)과 근(瑾)과 당 이 모두 사마(司馬)요
5남은 광유(光由)인데 생원이요 6남은 광해(光海)며 7남은 광하(光河)요 8남은 광추(光秋)며 9남은 광해(光垓)요 10남은 광벽(光壁)이며 11남은 광탁(光擢) 인데 참봉이요
손에 한통은 내자직장이요 유직은 통덕랑이며 한통의 자는 종인데 생원이요 유직의 자는 연련인데 사복시정이라 처음에 설단견비자(設壇堅碑者)는 기옥과 광지과 백신이요 심석에게 청문하는 자는 상희라 비유컨데 선생의 세대는 멀어지고 문적은 산질되어서 비록 그 덕업의 전모는 알 수 없으나 그 행존하여 있는 것만을 가지고 정험하더라도 또한 선생의 고명하신 식견과 독실한 조행으로 강유가 상제하는 자질을 겸하여 경국제세하는 재주를 가지고 출처하는 것은 분수에 엄격하여 망복의 절의를 고수하여 한번 산중으로 들어가서 은거한 후로는 산문 밖으로 성명이 누설될까 두려워 하였음을 알 수 있으니 도리에 심득한 분이 아니고야 어찌 이와같이 할 수 있으리오 사람들이 지칭한 서산에 백이숙제란 말이 허언이 아니다.
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몸을 굽히도록 하오.
무진서기 1988년 3월 曰 영광후인 송천(松泉) 김태경(金太璟) 주해(註解) |
16.김충한 수은선생 신도비명 (金沖漢 樹隱先生 神道碑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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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에 육은이 계셨으니 수은선생은 그 중의 한 분이라. 세교(세상의 교화)를 심으셨고 유학에 공이 많으셨다.
정포은이 순국할 지경에 이르자 관(冠)을 남현에 걸어두고 태학생림선미등70여인과 더불어 만수산에 들어가 말하기를 원컨대 백이숙제를 따라 고사리나 캐리라 하셨는데 그때 사람들이 그 산 이름을 불조현이라 부르고 마을은 두문동이라 하다. 이태조가 여러번 불러 들여도 굴하지 않고 드디어 남원에 피적되어 두류산 서쪽에 살면서 골짜기를 막을 두(杜)자로 일컬으니 그 졸한 해를 알길이 없도다. 선생의 이름은 충한이요 자는 통경(通卿)이며 수은은 호라. 경주의 김씨가 신라경순왕에서 나와 고려에 이르기까지 중신과 현관이 여럿이 빛났는데 벽상공신평장사이셨던 인경(仁鏡)공과 상서좌복야이신 궤(軌)공은 가까운 할아버지요 판도정랑인 서인(瑞仁)공은 부친이요 어머니는 형씨니 전서인 군소(君紹)의 여이시다. 선생은 태어나시면서 남다른바 있으니 여러 아이들과 놀때에는 우뚝함이 학이 닭의 무리에서 섞여있음 같았고 의와 이(利)를 판별함에 만우(萬牛)로도 돌이킬 수 없는 용기를 가졌으며 백가의 서적을 두루 보실제 일독으로 깨우치지 않은 것이 없더라. 이러하니 화려한 소문이 날로 퍼져 일찍이 과거에 올라 이름난 관직을 거쳐 봉익대부예의판서에 올랐고 후에 군소란정(群小亂政)으로 이르자 혼탁함에 섞이지 않으려고 오직 청백 정직을 지키시니 그 어찌 정력(定力)이 평소에 있음이 아니랴! 서홍김씨 봉환씨댁에 장가 들어 3남 1녀를 두시니 자공(磁公)은 현령이요 승공(繩公)은 부사요 작공(綽公)은 직제학이며 여는 좌찬성인 고려산씨포시(包翅)라.
이 뒤로 후손이 번창하였는데 그중 나타난 이중 유윤(有潤)은 교리요 유간(有澗)은 부사요 위민(爲民)은 부제학이요 의동(意仝)은 대사헌으로 문학이 뛰어났으니 종파의 아들과 손자증손들이요. 종직(從直)은 우찬성이며 점필재선생이 장자답다고 칭하였고 미(楣)는 한림이요 영(楹)은 감찰인데 형제가 필재문인이여 문장과 덕행이 높아 세인이 중히 받드니 중파의 자와 손자증손들이요. 급경(及經)과 신경(信經)은 진사요 이정(利貞)은 정랑이며 영정(永貞)은 군수니 계파의 자와 손증손들이라. 한성부판윤경로는 임진왜란에 순국하여 충열사에 배향되었고 습독인 구(玖)와 진사인 집(潗)은 독행이 뛰어났고 군수인 호(浩)는 사계선생을 사사(師事)했고 익수는 주부요 진(進)은 동지며 임란에 권율 원수의 휘하에서 의와 용을 떨쳤고 광옥은 통덕랑이요 홍서는 진사니 병자호란에 의거를 하였도다.
이는 종파의 6.7세손이요. 만익(萬益)은 무신란에 창의하였으니 광옥(光玉)의 손이요 병사인 환(煥)은 숙종기사년에 송문정(宋文正) 김문충(金文忠)과 더불어 같이 화를 입었으니 군수 호의 현손이라. 주부인 정과 판관인 성(晟)은 임진에 의거했고 진사인 선(宣)은 독실한 학문과 선행이 있고 혼란과 조정에 나가려 하지 않았고 두곡서원에 추가로 배향되다. 참봉 수는 김청음 신상촌 서약봉같은 제현께서 천거하시어 첨정 벼슬을 거듭 내렸으나 나아가지 아니 하였고 주부인 열(悅)은 서궁수의가 되었으며 병자정축년 일을 통곡하여 사직하고 말았고 복(福)은 모두 경술과 학문이 높았고 참봉인 성건도 임진왜란에 의거하였다. 정설(廷卨)은 지극히 효행에 신명이 감동하여 한 여름에 메추리를 얻어 친환을 낫게 하셨다. 이상은 중파의 6.7세손들이라. 첨지인 현국(顯國)은 효우와 문학으로 칭송되니 열공의 오세손이라.
현감인 사종(嗣宗)은 선전관인 언종과 같이 임란에 진주성에서 순국하였고 그 아들 귀현(貴賢)과 선전관인 효남(孝男)도 강화군에서 순국하셨으니 모두 계파의 5.6세손이라. 이어서 문음(文蔭)으로 승습한 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하늘이 선생에게 보시(報施)함이 그 아니 두터운가? 슬픈지고! 두곡에 백용동에 선생의 묘가 있으련만 유명을 받들여 봉분을 높이지 않았더니 여러번 병란을 겪은지라 묘소를 실전하고 단을 쌓아 세사(歲祀)하다. 표절사와 두곡서원이 있어 추모터니 서원마저 헐렸는데 선생의 후손 종술(從述)과 영권씨들이 유촉은 갈수록 잦아질 것을 두려워 하여 단옆에 비를 세우려 할제 재현(載炫)씨가 지은 행장을 가져와 비문 짓기를 바라니 의로서 사양할 수 없어 약간의 사실과 자손의 대략을 우와 같이 엮었고 명을 붙이노니,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유해를 구의의 매뿌리에 모신 듯 계시는지? 사라졌는지 삼광의 빛과 궤도를 같이 하도다. 하늘이 그르다 여길진데 어찌 후손이 있으리요. 오직 충과 효는 진실로 끝없이 이어가리라.
정미년 묘춘에송정대부 전 의정부 좌찬성 완산 이용원(李容元)은 찬하다. 증직교지:이씨왕조에서 공께 증직하고 문민고의 시호를 내리다. 김충환에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증직하다. 전조(前朝:고려)예의판서였든자.건문 3년 8月 日(정종 3년 신사 서기 1401년)
17.김자정(金子汀) 전서공(典書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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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정 초휘 진용(震龍) 호는 휴암(休庵) 공조전서 시는 문열(文烈)이다.
태사공(휘 인관)의 9세손(1348~1391)으로 거구, 범초, 대담, 무쌍하며 옳은 일에는 항상 앞장섰다. 공민왕초, 홍건적이 개경 근방까지 쳐들어와 상하가 피난길에 분주한데 공은 피난은 커녕 동지들을 모아 창의군(彰義軍)을 일으켜 관군을 도와 평정에 공이 컸다. 당시 도원수 정세운(鄭世雲)은 그 어린 몸으로 의기가 가상하다며 동량지재(棟樑之材)라며 염흥방동정(廉興邦東亭) 선생 문하생이 되게 했다.
'고려사 참조' 공의 학문은 일취월장으로 공민왕 14년 사마시에 등과하고 동왕 16년 정미에 문과 장원하니 스승이요, 권신인 염흥방은 자기 동정학당이 명문이며 영재가 많다고 기고만장했다. 이에 공은 동료들에게 춘추범절은 숙수참저(熟穗斬低)라며 경계할 것을 일렀다. 공은 입사후 청렴과 공명적덕과 상벌을 엄수 신망속에 승자를 거듭 우왕 13년 정묘에 판정공사 ‘= 공조전서로 변방하고 여진정벌에 유공’삼한후작 상락군에 봉해지다.
공양왕 3년 6월 황해안에 왜구가 창궐하니 몸소 출전중 전상으로 졸하니 옹은 문상(問喪) 사포백(賜布帛)하고 문하찬성사 상서 도성령 병부령 삼중대광 표기대장군으로 추증하다.(종1품) |
18.김자수(金自粹) 상촌공(桑村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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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에서 철퇴의 화를 입어 한많은 국권회복의 대업을 성취하지 못하고 혈흔을 남긴 채 서기1392년 4월에 불귀의 객이 되신 포은 정몽주 선생과 유학의 비조이며 여말에 정치가이신 목은 이색(李穡) 선생과 함께 서산낙일처럼 기울어져 가는 고려왕실의 국운을 만회코저 항상 교우하시던 공은 휘(이름)를 처음에는 자수(子粹)라 하셨다가 고려가 망함을 보신 공은 스스로 자수(自粹)라 고치셨고 자(字, 이름과 같음)는 처음에는 거광(去曠)이라 하셨다가 목은 선생에 촉(燭)한다하여 다시 순중(純仲)으로 고치셨고 호(아호)를 상촌(桑村)이라 하셨다.
본은 경주 이시니 우리 김(金)성은 신라 국성으로 고려에 이르러 검교태자태사란 중직에 계시던 휘 인관(仁琯)은 공의 8대조이시며 합문지후(閤問祗侯)의 직에 계시던 휘 예(裔)는 증조이시며 삼사부사의 직에 계시던 휘 영백(英伯)은 조고이시며 통례문부사지제고의 관직에 계시던 휘 오 는 고(考)이시다.
공은 불행히 선고(先考)께서 일찍이 하세(下世)하시고 편모일직손씨(偏母一直孫氏)슬하에서 배워 생원시 장원에 뽑히셨다가 뒤어 공민 七년 갑인에 문과시 장원에 발탁되시었다. 일찍부터 과시(科試)에 나가지 않고 의대(依帶)를 고르지 아니하시며 주야로 지성을 다하시어 간호하셨으나 지성과 약석의 효력없이 별세하시니 애통하심을 마지 아니하시며 주문공의 가례에 의하여 경상도 안동에 안장하시고 묘막을 짓고 一日一食으로 운한풍상(雲寒風霜)과 삼복염천(三伏炎天)을 헤아리지 아니 하시고 “이러한 것을 시묘(恃墓)라 함”항상 봉분앞에 부복애통하시기 三년이라 지나는 길손이나 나무하는 아이들까지도 이 정경을 보고 각기 부모를 위하는 마음이 우러나지 않는 이 없으므로 일근일향이 다 이를 본받지 않는 이 없더라 조정에서도 이 말을 듣고 특히 효자비를 세우고 효자문을 지어 표창할 뿐 아니라 공의 시묘하시는 그 환경을 그림 그려 동국삼강행실록(東國三綱行實錄)에 수록하여 후세인으로 하여금 효심이 일어나도록 장려하였다.선비의 삼상을 마치시고 조정에 나아가시어 정언(正言)의 직에 봉직 중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궁내 부중에 충만한 탐관오리들을 숙청하고 선정을 베풀기 위하여 왕에게 직언극간하다가 도리어 전라도 돌산(현 전남 여천군)으로 유배를 가시게 되니 당시 유의지사들은 개탄함을 마지 아니하며 향간에는 “착한 관리 귀향가고 악한 오리 가득하니 이 나라 백성들은 누구 믿고 산단 말인가?”라는 민요까지도 돌았다.
공은 五年의 역을 끝내시고 조정에 서용(敍用)되어 홍청(洪淸) 도찰사(현 충남북도지사)로 제수되어 임지로 부임하여 도민을 자손같이 애무하시고 관하 수령들의 기강을 바로 잡으시려 하셨으나 정치는 이미 문란하였고 국고는 고갈됐으며 백성들은 사찰건설공연에 징용되어 원성이 장천하니 의중에는 간흉배만 충만한지라 공은 각처 사찰건설 공역을 중지하라는 상소를 수차하셨으나 효과 있을 까닭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치가(治家) 교자손(敎子孫)으로 구차스럽게 성명(性命)을 보전하여 오시던 중 기필(期必)함이 같이 고려 5백년 종사는 풍전의 등화가 되고 드디어 서기 1392년 壬申 7월에 이씨조선이 건국되니 신흥세력만 충만할 뿐이지 애민구휼한 노련한 정치인은 몇 사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태종은 고려 구신(舊臣)들을 찾아 공에게는 헌장(헌장:현 검찰총장)으로 불렀으나 공은 아무 말없이 두문분출하셨다.
태종은 심히 노하여 엄지(嚴旨)를 내려 만일 불러도 응하지 않는 자는 부모처자, 형제일가 삼족을 도륙하겠다고 다시 공을 형조판서(현 법무부 장관)로 부르니 공은 탄식하여 말씀하시기를 내 평생 충효에 뜻을 두고 스스로 격려하였거늘 지금 태종께 굴복하면 이는 의리가 아니라, 지하에 가서 선왕과 부모를 어찌 대하랴 하시고 그 자손에게 수의와 흉구등을 마련케 하여 행장을 수습하여 즉일로 길을 떠나 광주추령에 도착하시니 공은 “내가 일찍이 포은 선생을 쫒고자 하였으나 따르지 못한지라 이곳은 포은의 의대를 감추어 둔곳이니 내가 죽을 땅은 이곳이라 여자라도 두 남편을 좇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신하되어 두성(二姓)의 왕을 어찌 섬길 수 있으랴 기위결심(己爲決心)한바 있는지라 나를 이 곳에 장사하고 비를 세워 행적을 세상에 알리지 말지라.” 하시고 이어 절명시 이구(二句)를 지으시고 음독자진하신다 그 시에 “평생 충효로운 마음은 이 세상에 알리 있으랴.
한번 죽으매 한 됨이 없음이여, 지하에 가면 내 마음 알리 있으리라” 원문(平生忠孝意日有誰知 一死吾休恨九原應有知) 소윤 이 유명을 받들어 그곳에 안장하고 비를 세우지 아니하였다.(추령은 현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 다사동) |
19.김정(金淨) 충암공(沖庵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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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시. 학자 字는 원충(元충) 號는 충암(충菴). 고봉(孤峯) 판도판서공 휘 장유의 7세손, 1504년(연산군 10) 생원시에 합격. 1507년(중종2)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 전적에 보임되고 수찬. 병조좌랑 이어 병조정랑. 부교리.헌납.교리.이조정랑을 거쳐1514년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때 왕의 구언에 의하여 담양 부사 박상(朴祥)과 폐비신씨의 복위를 주장하다가 고향 보은에 유배되었다.
1516년 풀려나 응교. 전한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부제학.동부승지, 좌승지, 이조참판겸 홍문관제학, 도승지, 대사헌 등을 거쳐 34세에 형조판서겸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하여 현량과의 설치, 향약의 실시, 위훈삭제등 계혁정치를 펴다가 기묘사화로 금산에 유배. 이어 진도를 거쳐 제주에 유리 안치되었다. 1521년 36세로 사사되었다. 1545년 (인종1)에 복관되고 1576년 (선조9)에 문정(文貞)의 시호를 받았다가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1758년 (영조34)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수학하기 시작하였고 14세 때 초시에 합격하였고 20세 전후에 의리를 숭상하는 성리학의 전통을 이어받아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학문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시문에도 능하였고 글씨, 그림에도 능하여 새.짐승 등을 잘 그렸다. 청백리에 녹선되엇으며 상현서원, 신항선원, 화산서원, 귤림선원, 성곡선원, 숭현서원, 고봉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충암집.제주풍토록이 있다. |
20.김문기(金文起) 충의공(忠毅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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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신라 경순왕의 제4자대안군 휘 은열의 15세손으로 호조판서 퇴휴당공 휘순의 손자님이요 증 영상공 휘관의 아드님으로 1399년 2월 16일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하시었다. 초휘는 효기(孝起)였으나 장인이신 문정공 휘 김효정(金孝貞)의 휘자를 피하여 문기(文起)로 개명하셨다. 자는 여공(汝恭)이시고 호는 백촌(白村)이시며 정호는 마암(馬巖)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시고 천품이 총민하셔서 일찍이 학문을 대성하시었다. 그 성품은 강정하시면서도 활달하셨고 또 언변에 능통하였다. 한편 무예에도 뛰어나 공조판서 당시 경회루에서 열린 어전궁술대회에서 백발연중의 명궁 솜씨를 보시어 활과 화살.환도를 상급받으신 일도 있다.
1426년 생원시와 문과대책과의 합격하시어 예문관검열에 출사하여 1436년 사과원좌헌납 1437년 병조정랑 1438년 사재감부정 1439년 경상도아사 1441년 입직수문전 1443년 의정부사인 1444년 봉상시윤 1445년 함길도도진무 1448년 겸지병조사 1450년 승정원부승지 1451년 도승지 함길도도관찰사 1453년 형조참판 자헌대부함길도병마도절제사 1455년 공조판서겸삼군도진무 1456년 이조판서를 역임하시었다.
승지로 계실 때에는 다른 신하들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함길도의 둔전전제도를 실시하고자 홀로 문정 임금께 역설 상주하신바 있었는데 함길도도절제사로 부임하신 뒤 이를 실시하시어 큰 공적을 남기셨다. 또 한어와 외교에도 밝으시어 국방과 외교에도 많은 공적이 있었다.
공은 주자학에 연구가 깊으셔서 옥천 마암위에 정사를 지으시고 춘추로 선비들을 모아 강학하셨으며 선산 성묘하시러 매년 안에 가셔서는 지방 선비들을 모아 강학하시었고 경상도아사로 계실 때와 안동 부사로 계실 때 그리고 경차관으로 경주에 가셨을 때는 많은 지방 유생들을 강학지도하시었다. 또 승지로 계실 때는 서울 대가에 많은 자제들을 성균관에서 강학하시고 함길도도관찰사로 가시어 서는 각 고을에 학문을 일으키게 하시고 몸소 소학과 대학 주자가례를 강의하시어 부임하신지 2년에 학문이 크게 일어 공께서 이임하신 뒤에 지방유림들이 공분문 밖에 영당을 지어 그 공덕을 숭모하였다.
이와같이 공께서는 문무가 겸전하시어 출장입사하시고 또한 충절이 뛰어나시었다.
단종원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이 이른바 계유정변을 일으켜 좌상 김종서, 영상 황보인 등 원로 중신들을 암살하고 전권을 장악 총치하다가 1455년 (단종3년) 윤 6월 11일 왕위에 오르니 이가 즉 세조이다.
세조의 즉위는 비록 선양의 형식을 택하였다고 하지만 계략으로서 왕위를 찬탈한 것임으로 세조를 제거하고 잔역도를 숙청하여 상왕인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공께서는 왕년에 집현전학자로서 세종의 군총(眷寵)을 받았던 좌승부지 성삼문, 중추원부사 박팽년, 집현전부제학 이개, 예저참의하위지, 사헌부집의 류성원등 제공과 모의하여 세조 2년 6월 1일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향응하는 기회를 타서 거사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때의 일을 왕조실록에는 김문기는 박팽년과 족친이며 또 가깝게 지냈다. 이때 김문기는 도진무로 있었는데 박팽년.성삼문과 함께 모의하며 말하기를 “자네들은 안에 있으면서 일을 실패없이 이루도록 하라. 나는 밖에서 병력을 거느리고 있으니 비록 거역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제재하기가 무엇이 어렵겠는가?”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거사하려던 일이 뜻대로 안되자 6월 2일 김질 이 배신 밀고하여 모든 일이 탄로되어 6월 8일 아드님 예병제공 휘 현석(玄錫)과 동지들과 함께 형사 순절하시었다.
이때의 사실을 왕조실록세조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균관사예 김질이 그의 장인인 우찬성 정찬손과 함께 은밀히 아뢸 것을 청했다. 왕이 아들을 사정전에서 인견하니 김질이 아뢰기를 “좌부승지 성삼문이 사람을 시켜 신을 만나자고 하기에 그의 집에 갔더니 삼문이 조용히 말하기를 ‘요사이 혜성이 보이고 사옹방(司饔房:이조 때 궁중에서 임금의 음식을 맡아 보던일)의 질그릇이 저절로 우니 장차 무슨일이 생길 모양이라’”고 하기에 “무슨일이 생긴단 말인가” 하니 삼문이 또 말하기를 “요사이 상왕께서 창덕궁 복장문을 열고 금성대군의 예집을 왕래하시니 이는 필시 한명회 등이 낸 꾀이라”고 하기에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하니 삼문이 말하기를.“자세히는 모르나 상왕께서 위험한 곳을 지나실 때 한 두사람 역사들을 시켜 담을 넘어 망칙한 변을 내고자 함이요” 하고 잠시 후 또 말하기를 “상왕과 세자가 모두 어리니 만일 서로 보위를 다툰다면 상왕을 돕는 것이 정도요 그러니 그대 장인에게 잘 말씀드리오”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그럴리가 없겠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장인께서 무엇을 한단 말이요” 하니 심문이 말하기를 “좌의정은 명나라에 가서 오지 않았고 우의정은 결단력이 없는 사람이니 만일 윤사로.숙주.권람.한명회를 먼저 제거한다면 사람들이 그대의 장인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니 그때 의롭게 상왕을 복위시킨다면 누가 따르지 않겠소. 신숙주는 나와 친한 사이지만 죽어야 마땅하오” 라고 하였는데 처음부터 삼문이 말이 너무 커 우연히 들었으나 이 말을 듣고서 몰래 듣기를 “그대와 같은 뜻을 가진자가 또 있는가”하니 삼문이 대답하기를 “이개.위지.유응부도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왕이 명하여 숙위군사를 소집하고 급히 승지를 부르니 도승지 박원형, 우부승지 조석문, 동부승지 윤자운 및 성삼문 입시하므로 내금위 조방림을 시켜 삼문을 잡아 꿇어 앉히고 “너와 질이 무슨일을 논의하였는고”하였다.
삼문이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가 “청컨데 질과 더불어 대질한다면 아뢰오리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질에게 말하도록 하니 질이 줄줄 말하자 질의 말이 끝나기 전에 삼문이 말하기를 “그만두오” “질의 말이 대체로 맞으나 그 곡절은 아첨으로 사실과 다릅니다”하니 왕이 삼문에게 “그러면 그대는 무슨 뜻으로 말하였는가”하니 삼문이 대답하기를 “요사이 혜성이 보이니 신은 상왕을 해하는 자가 나타날까 두려워 한 말입니다”하였다. 왕이 명하여“결박하라”하며 이르기를 “너는 반드시 깊은 뜻이 있다. 너의 패간을 내가 다 들여다 보니 자세히 말하라” 하고는 매로 때리게 하니 삼문을 “신은 다른 뜻은 없습니다.”하였다. 왕이 공모한 자를 물으니 삼문은 말하지 않았다. 왕이 달래어 말하기를“그대가 나와 알은지도 참으로 오래이고 내가 그대를 극히 후대하여 왔다. 비록 네가 일을 저질렀건만 내가 친히 묻고 있는데 속일 수는 없다. 너의 죄의 경중도 또한 내게 달렸지 않으냐”하니 삼문이 말하기를 “하교가 그와 같으시고 신은 이미 대죄를 범하였으니 어찌 감히 숨길수 있겠습니까? 실은 박팽년.이개.하위지.류성원과 공모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다시 묻기를 ‘“그 뿐만 아니니 다 말하라’고 하니 유웅부, 박정도 또한 알고 있습니다”고 하였다.
하위지를 잡아 들이고 묻기를 “성삼문과 너는 무슨일을 논의 하였는가”하고 엄문하였으나 의지는 숨기고 모른다 하였다. 왕이 또 이개에게 묻기를 “그대와 나는 옛날부터 사귄 사이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다 말하여다오”하니 개 말하기를 “알지 못합니다”하자 왕은 “이 무리한 엄한 형으로 국문하여야겠다”하고 의금부에서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잡혀온 분들이 나가니 왕이 말하기를 “전일 내가 상왕을 금성 대군집 정자에 납시게 하려 하니 삼문이 나에게 말하기를 상왕이 이곳에 왕래하시면 혹 해하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하기에 경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보니 과연 그렇구나”하고는 윤자운을 상왕에게 보내어 “성삼문은 심술이 불초하나 학문을 닦았으므로 승정원에 두었다. 근래에 하는 일이 실착이 많아 예방에서 공방으로 개임하였더니 원한을 품고 상황이 금성대군의 집을 왕래하는 것을 반드시 불측한 일의 음모가 숨어있다고 말을 지어내어 대신들을 모두 죽이려 했으므로 국문하였다”고 고하니 상왕께서는 윤자운에게 술을 접대하였다.
공조참의 이휘가 일이 발각된 것을 알고 승정원에 나와 자수하며 말하기를 “신이 전의 성삼문의 집에 가서 권자신.박팽년.이개.하위지.류성원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그때 성삼문이 말하기를 ‘그대는 시운을 아는가’하기에 ‘내가 무엇을 알겠나’하니 성삼문이 좌중을 둘러보며 ‘잘 살펴 생각하오 어찌 모르겠소’하기에 신이 묻기를 ‘그 의론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하니 ‘박중림.박정도 안다 하므로 신이 먼저 나와 아뢰고자 하였으나 그 허실을 몰라 아뢰지 못하였다.’고 함으로 왕이 이뤼를 사정전에서 인견하였다.
이에 다시 성삼문을 꼬여 내고 박팽년을 천국하였다. 팽년을 매질하며 그 무리들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성삼문.하위지.류성원.이개.김문기.성승.박정.유응부. 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와 신의 부친입니다”더 대라 하니 “신의 부친도 감히 숨기지 아니하였거늘 타인이야 숨기겠습니까”하였다.
그 실행계획을 묻자 대답하기를 “성승.유응부.박정이 모두 별운검이 되었으니 무었이 어렵겠소”어느때를 거사시로 하였느냐 고 물으니 “어제 연회에서 하려다가 마침내 자리가 좁아 운검을 제거하였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뒷날 관가(觀稼)할 때에 노상에서 거사하기로 하였소”라고 대답하였다.
이개를 고문하니 팽년과 같이 대답하였고, 나머지는 다 죄에 굴복하였으나 오직 김문기는 굴하지 아니한 채 밤이 깊어 오므로 명하여 하옥케 하였다.
도승지 박원형, 좌팜찬 강맹경, 좌찬성 윤사로, 병조판서 신숙주, 형조판서 박중손 등이 의금부 제조파평군 윤암과 함께 호조판서 이인손, 이조참판 이효첨과 대간 등에 명하여 같이 국문케 하였으나 류성원은 자택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자결하였다. 왕이 사정전에서 명하여 의금부제조 윤사로를 불러 강맹경.인손.신숙주.성봉조.박중손.어효첨 및 승지 대간을 입궐케 하고 성삼문.이개.하위지.김문기.성승.유응부.윤영손.권자신.박정.송석동.이휘.노산군 유모 봉보부인 비인 아가지, 자신의 어머니 가 노인 불덕과 별감 돌중 등을 잡아들여 그 일당을 대라고 국문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이개.하위지.성삼문.성승.박중림.김문기.유응부.박정.송석동.권자신.윤영손.아가지.불덕등이 결당하여 어린 임금을 끼고 국정을 마음대로 하려고 6월 1일 거사하고자 하였으니 그 죄는 응당 능지처참할 것이며 재산을 몰수하고 연좌처벌하되 법문에 의거하여 시행하고자 하니 왕이 명하기로 아가지와 불덕은 연좌 처벌하지 말고 나머지 사람중 아비와 아들은 교수형할 것이며 모.여.처.첩.조.손.형제.자매와 자식의 처첩은 변방읍의 노비로 영속시키고 나이 16세가 못된 아이는 외방에 보수(보수)하되 어른이 되면 영속시킬 것이며 백숙부와 형제의 아들은 원방에 안치하되 16세가 못되는 아이는 외방에 보수하였다가 어른이 되면 안치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의금부가 아뢴 대로 하고 드디어 백관을 군기감 앞길에 둘러세우고 이개 등을 찢어 죽인다음 목을 베어 장대에 달아 삼일동안 시중에 둘려 보였다.
아! 이때 순절하신 제공들의 탁충이야말로 영원토록 추앙되리라.
세조도 참회하여 매월당 김시습을 시켜 위령제를 지내고 단종의 총신으로 순절한 충신명을 1457년에 금단팔폭에 친서하니 이른바 병자원적이라 이분들은 동학사에 초유(招侑:죽은 자의 혼을 불러 위로 해 준다는 뜻)하였다. 백촌공께서는 하늘에 관통하는 충열로 그 모진 고문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시고 돌아가시니 그 대절이야말로 천하의 사표인 것이다.
탁월하신 그 절의는 세월이 갈수록 빛을 더하여 1731년 3월 신원 복관작되시고 1778년 (정조2년무술) 3개월에는 충의라는 시호와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겸판의 금부사지경연춘추관사홍문관대제학지성균관사세손이사의 증직을 받으셨다. 1791년 2월 강원도 영월 장릉 경내 충신단에 배향되시고 그후 전국 사림에서는 다투어 사우와 사원을 세워 공의 영혼을 모시고 있다. |
21.김인찬(金仁贊) 익화군(益和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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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고려 충숙왕5년(1336년) 병자년에 익화현에서 탄생하시였으며 공의 휘는 인찬 자는 의지(義之) 호는 의암(毅菴)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공은 천성이 영매하고 총명하며 문무가 뛰어나서 고려와 조선 두 나라에 출사하여 나라와 겨레를 정의로 돕고 조선 태조원년에 익화군과 개국일등공신을 받으신 우리의 중시조이시다.
공은 신라 대보 김알지의 43세손이며 경순왕의 16세손이요 경순왕 제4자 대안군 은열 공의 제3자 김해군 염공의 14세손이다.
공의 고조는 전라도 관찰사 문제(文齊)공이요 증조는 고려때 목사 일성(鎰成)공이며 조부는 도승지 화녕도 상원수 개녕군 천익(天益)공이요 부는 고려 때 문고급제하여 벼슬은 전서 안변목사 증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존일(存一)공이요 모는 해주오씨이다.
인찬공은 제4자이시며 배위는 정경부인 밀양박씨와 정경부인 파평윤씨이다.
고려 충숙왕5년 병자에 익화현에서 탄생한 공은 총명한 천품으로 문무에 뛰어났으며 고려말에 이성계 이지란도 도원결의 때 공이 직시한 회맹문은 조선건국에 공헌한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1392년 7월 17일 배극렴과 더불어 이성계를 조선태조로 추대하니 태조는 공에게 보조 공신등을 제수하고 익화군에 봉하였다. 그후 공의 사우에 관한 사항을 이에 약술한다.
익화군 서거후 조정의 명에 의하여 불천신주를 부조묘에 봉안하고 역대 종군이 봉사하여 오다가 이곳 종가에 모시고 봉사하여 왔다. |
22.김천서 월성부원군 단비음기 (金天瑞 月城府院君 檀碑陰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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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이름은 천서요 호는 송은(松隱)이니 정포은과 이도은과 도의의 교우였다.
김씨는 본디 신라국성으로 경주를 본관으로 한다..평장사를 지낸 의진은 문헌공 최충과 친한 벗으로 문장과 유술이 당시에 뛰어났고 양신공 후덕은 내급사란 직책으로써 김양감 박시중과 함께 중국에 들어가 태묘(太廟 : 역대 임금의 위패를 모신 사당) 태학(太學 : 옛날 임금이 세운 대학)을 그대로 묘화하여 가지고 돌아왔으니 우리나라의 문묘(文廟 : 공자를 모신 사당)창건이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삼전하여 평장사 인경은 시호 정숙공이니 국가의 문장이나 책략의 모두 그 수증에서 이뤄졌으며 고려 고종 때 거란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웠다. 오전하여 일(鎰)은 군기소감이요 견 은 지제교요 문중(文仲)은 밀직승지니 선생의 아버지.할아버지.증조부이다.
선생은 승국(勝國:전조:前朝)의 세신으로 벼슬이 판예빈시사에 이르고 문하좌시중에 증직되었다. 당시에 나라가 날로 위망으로 기울어져 가고 정포은도 순국하였다.
세상에 뜻을 잃고 관악산에 들렀다가 다시 고양 구동으로 들어갔다. 일찍이 사록의 경사가 있었는데 정묘에 이르러 월성에 들렀다가 다시 고양 구동으로 들어갔다.
일찍이 사록의 경사가 있었는데 정묘에 이르러 월성 부원군이 되었다.그러나 선생은 부원군의 막중한 권위도 마음으로부터 잊고 문을 닫고 사람과의 사귐을 끊고 마침내 정막한 살림속에서 생을 마쳤으니 한문공(당나라 문호 한유)이 이른바 “도를 독실하게 믿음으로써 스스로를 앎이 명확한 자가 아닌가” 라고 하였다.
추강 남선생(생육신)이 지은 그 후손 영감형기(榮鑑亨記)에 동방문헌대족(東方文獻大族)이라 하였으니 추강의 높은 인격으로서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여 사실과 달리 과장해서 말했는가. 배위는 경위부인 담양이씨니 평장사 예(藝)의 딸이다. 2남 1녀를 낳으니 큰 아들 수(需)는 월성군 정호공이요 둘째아들 의열(義烈)은 형조판서요 따님은 정종대왕비 순덕왕후이다. 수가 1남 1녀를 낳으시니 아들은 평후공 이름이 겸(謙)으로 의정부우찬성이고 따님은 익평부언군 이석근(李石根)이다.
평후공이 3남을 두니 큰 아들 세민(世敏)은 영돈녕으로 시 평양공이요 둘째 민가(閔姜)은 부제학이고 셋째 효민(孝敏)은 직제학이다.
부원군의 차방손 준(準)은 예조판서요 차방 둘째손자 소(邵)는 진주목사다. 맹경(孟卿)은 준의 아들로 의정부좌찬상이고 공(鞏)은 목사의 아들로 이시애란(李施愛亂)에 원종훈(元從勳)하고 익산군수가 되었다. 대제학 정초(鄭招)와 현감 이몽(李蒙)은 목사의 사위다.
성균제주 형손(亨孫) 별좌 정손(貞孫)은 장방 수의 증손이요 승사랑 이화(以和) 참지 이공(以恭) 이량(以亮)은 고손이요 아성군 어세공(魚世恭)은 향손의 사위이다.
진사 호(浩)한성판윤 천형(天亨) 사웅원봉사 원일(元逸)은 수의 5세손이고 군수 치(致)사직 격(格) 족친위 수(修) 및 현감 숭효(崇孝) 훈련참군 숭례(崇禮)는 차방 의열(義烈)의 증손이고 보공장군 사원(嗣元) 충순위 경(經) 진사 사상(士尙) 사웅원 봉사 효남(孝男)은 의열의 고순이고 충순위 영년(永年) 교관 만손(萬孫) 홍문관수찬 응벽(應壁)영릉 참봉 극호(克浩)는 차방 의열의 5세손으로 나머지 순록은 번다하여 적지 아니한다.
9세손 청 은 벼슬이 대사간으로 사암 박상공에 이르기를 그 충의 사리벌과 눈처럼 결백하다 하였다. 그 아들 진사 등 이 병자란에 의병을 일으켜 여산에 도착하여 강화하였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면서 수양산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20세기 윤기 가 삼부장관을 거치는 동안 청렴결백한 관리로 이름이 있었다.
그렇다. 우리 집안이 한동안 침체의 기운이 있었으되 자손들이 고을마다 스스로 충실함으로 번성하니 이는 모두 선생의 음덕의 소치로서 지나간 일을 미루어 앞의 일을 점쳐 보면 어찌 틀림이 있을 것인가?
아 선생의 생졸연대를 상고할 수가 없고 야사에 의하면 정종대왕이 왕권을 양위하여 국가의 무궁한 휴경을 열어 넣음이 진실로 선생의 충언과 헌책을 받아 들었다고 한다. 선생의 분묘가 수원에 있었는데 수호를 잘못한 탓으로 실전하였다. 을미년 봄에 종인들이 수보의 모임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종인들의 발의에 따라 월성부원군의 제단을 요곡 병사의 동상에 설치하고 정호공과 형조공 양위를 부원군 단소의 동과 서의 위치에 설단하고 향사를 한 날로 봉향하기로 하였다.
우리 일가들은 선생의 가르침을 오늘에 뜻을 같이 하여 분수 밖의 부귀는 부끄럽게 여귀고 스스로 몸을 닦고 행실을 바르게 하면 이것이 곧 선인의 유지가 아니겠는가.
18세손 종연 근찬 |
23.역대명필(歷代名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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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자 |
원 문 |
번 역 문 |
1. 김부식(金富軾) (1075~1151) 고려 인종때 사가 문하 시중 시호 문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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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의 봄) 날이 새니 다락머리 환하여지고 버들 끝에 봄바람 하늘거리네 순라군 돌아가며 새벽을 알리오 어느듯 침문에는 아침 문안을 |
2.김부의(金富儀) (?~1166) 지추밀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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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안상인을 풍악에 보내면서) 강릉에는 날이 따숴 꽃이 폈건만 풍악산은 아직도 눈이 쌓였오 산수를 좋아한다 임은 웃지만 따라서 이리 저리 왜 못 노닐까 |
3.김돈시(金敦時) (?~1170) 김돈중의 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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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명사) 물결은 멀고멀어 아득하온데 절간은 바다위에 둥실 떠있네 대그림자 발 틈으로 어린거리고 맑은 여울 벼개뒤에 울고있구나 다락에서 밤을새니 불동이 차고 잠자리 달이 밝아 서늘하구나 이렇듯 좋은 경치 인연없어서 온 종일 종신놓고 두런거렸네 |
4.김돈중(金敦中) (?~1170) 시랑 김부식의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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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군선원에서) 어쩌다 절간에 찾어를 드니 향기로움 방안에 풍기는구나 대나무 잣나무가 어우러지고 뜬세상 멀리한 선경이로세 염불소리 들어보니 부처가 된 듯 안타가운 가슴 속 술이 달래오 게다가 밝은 달이 돋아 오르니 어느듯 이내마음 상쾌하구나 |
5.김인경(金仁鏡) 중서시랑 평장사 시호 정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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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상뒤 장지에 쓴 글) 꽃은 곱게 곱게 수를 놓은 듯 버들은 치렁 치렁 인끈 같은데 임금님께 아첨하는 무리들보다 번하는 꾀꼬리가 차라리 낫지 |
6.김극기(金克己) (?~1217) 한림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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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옹) 하늘은 고기잡이 싫어하는지 강호에 어이그리 바람 거센고 세상이 험악하다 웃지를 마소 언제든지 임자는 물에 살면서 |
7.김견명(金見明) (일연 : 一然) (1206~1289) 승 시호 보각 삼국유사 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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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을 칭송함) 의에 죽고서 생을 가벼이하니 천화와 백유 더욱 뉘아니 놀래라 다정하구나 어느듯 한칼에 몸이 없어지니 절에서 울려오는 쇠북소리 서울을 진동하네 |
8. 김방경(金方慶) (?~1300) 안동 평장사 시중 충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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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주영호루에서) 산도 물도 옛모습 그대로 있고 소년 시절 노든다락 변함 없구나 아직도 그전 풍토 남아 있어서 아름다운 노래로 이맘 달래네 |
9. 김 흔(金 炘) (1251~1309) 김방경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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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루) 십년전 노든 일이 꿈결 같은데 모든 풍물 다시 보니 기꺼웁구나 벽위에 높이 걸린 아버님 글월 어린몸 벼슬길 죄송하여라. |
10. 김영돈(金永旽) (1348년경) 김방경 손자 정승. 호 : 구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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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모시고 백마산에 가서 임금의 글에 대구하는 것) 취화를 받들고 임을 모셔 이곳에 오니 아름다운 퉁소소리 구름사이에서 들리는 듯 풍경은 맑고 맑어 세상을 멀리하니 청산만 완연하며 올망졸망 벌려있네 |
11. 김인찬(1336~1392) 좌찬성 익화군 충민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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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이지란과 형제의 맹서를 하면서) 우리 세 사람이 같은 세대에 났다 한평생의 고락은 다 그 마음 가운데 있어 재조는 성기나 공자의 삼천제자를 바라보고 몸은 늙어 강태공을 따르겠네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은 그 누가 맡을 것인가 임금을 섬기고 기강을 바로잡을 것은 나의 소망이다 관우 장비의 우정은 우리 다 알지 않는가 먼후세에 누가 죽백에다 우리 일을 기록하겠지 |
12. 김자수(金自粹) (1397년경) 충청감사 호 : 상촌 태조개국 반대 자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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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평생에 품은뜻 충성과 효도 오늘날 누가있어 알아나 주리 이렇게 돌아가니 내 원한도 그만인가 구원에 임의 정령(精靈) 이내뜻 알아주시리 |
13. 김천령(金千齡) (1507년경) 호당 직제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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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제가는 길가에서) 양원말 길지치고 갈길 멀은데 숲넘어 어느집 개가 짓는고 밤들어 달은지고 벌판 어둔데 메밀꽃 희게피어 마을 알겠오 |
14. 김 정(金 淨) 충암(沖庵) (1486~1522) 형조판서 문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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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루) 바람앞에 지는 잎 물위에 뜨고 연무 잠긴 강까로 갈꽃 피었네 깨고 보니 아득하다 그대는 가고 해저문 다락에서 혼자 울었소 |
15. 김세필(金世弼) (1473~1533) 십정헌 문간공 이조참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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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관포에 보냄) 요지음 임의건강 어떠하시오 날은차고 살어이니 이해도가네 알괘라 심심한 시골 살아서 가난하고 늙었어도 도(道)를 즐기지 |
16. 김남중(金南重) (1596~1663) 야당 대사간 정효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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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 민) 으스스 가을날씨 찬비내려 쓸쓸한데 문을 닫고 누으니 적막하기 그지없네 병이 잦아 쇠약한몸 약석으로 떠받들이고 어느때나 한가롭게 어초(漁樵)하양 늙어가리 바자울밑 구뜰울음 괴로웁게 들려오고 뜰가에 지는 잎새 근심스레 바라보네 서쪽변방 급하다는 놀랜소식 듣고나서 갑속의 칼을 빼니 푸른기운 번쩍이오 |
17.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호 : 추사 병조참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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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모습) 지내온 30년을 곰곰히 헤아리니 떠돌며 곱추마냥 움추려 살았구나 그대같이 오래살아 만수무강 모습이나 이제야 비로소 내 가련함을 알겠노라 |
18. 김영작(金永爵) (1802년경) 군정 이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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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오에게 화답함) 산 의지해 있는 정자 물을 비고 누었는데 노랑빛깔 비단주렴 사면으로 드리웠네 강건저 저산밑에 그대의 집 보이느니 장머리 석류꽃이 곱게곱게 피었구나 |
19. 김홍집(金弘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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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동) 여린풀 밟으면서 성을 끼고 가노라니 저물무렵 산경개 그지없이 좋더구나 비나리는 한식절 이번길 하게되어 망울진채 못다핀꽃 겨우보고 돌라가네 | |
김부식 (金富軾)1075(문종29)~1151(외종5) 고려]
학자자는 입지(立之),호는 뇌천(雷川), 본관은 경주, 좌간의대부 근의 아들, 부필.부일의 아우, 부의의 형, 숙종 때 문과에 급제, 안서 대도호부 사록.참군사가 되고, 직한림을 거쳐 중서 사인이 되었다.
1122년(인종 즉위) 보문각 대제로 송나라 사신 노윤적이 왔을 때는 관반으로서 이를 맞이했으며, 같이 왔던 서경이 문장과 고금의 음악에 통달한 그를 보고 감탄하여 ‘고려도경’에다 그의 집안을 소개. 송 황제에게 바침으로써 송나라에도 그 이름이 알려졌다. 의천의 비문 및 ‘진악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등을 지었다. 문집 20여 권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를 저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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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金正喜)1786(정조 10)~1856(철종 7)
[조선]문신, 문인, 금석학자, 서화가.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玩當), 추사(秋史),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파(果坡), 노과(老果), 본관은 경주, 판서 노경(魯敬)의 아들.
백부 노영(魯永)에게 입양.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 검열을 거쳐 1823년 규장각 대교가 되었다. 충청우도 암행어사 검상을 거쳐 1836년(헌종 2) 대사성을 역임, 이조 참판에까지 이르렀다. 일찍 24세 때 생부를 따라 북경에 가서 당세의 거유 완원 옹방강 등과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1840년(헌종 6)에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리안치, 1848년에 석방되었으나,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 문제 때 그 주창자로 북청에 유배,이듬해 풀려났다. 학문 연구에 있어서는 실사구시가 요도임을 주장하고 그것은 훈고로써 실천을 하는 데 있다고 역설했다.
또한 역대의 명필을 연구, 그 장점을 모아서 독특한 추사체를 대성한 명필로서 특히 예서, 행서에는 전무후무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그림에 있어서는 죽란과 산수를 그렸는데, 사실보다 품격을 위주하며 선미가 풍기는 남종화의 정신을 고취하고 있다.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어 1816년(순조 16) 종래 중 무학의 비석이라던 북한산 비봉의 비석이 신라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 단정했다.
[저서] 아당집, 김석과안록, 실사구시설, 아당척독묵죽도, 묵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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