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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상상력 속에 담긴 생에 대한 메타포 - 무림일검의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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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진주같은 영화제 개막작으로 장형윤 감독 컬렉션(모두 애니메이션이었다.)을 보여준다. 그 첫 작품이 <무림일검의 사생활>. 아주 신선했다. 무엇보다 상상력이 아주 기발하고 유쾌하였다.
무협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와서 할 말은 다 하고 마는 영화다. 주인공은 강호에서 멋진 칼을 휘두르고 싸우다 죽는다. 좀더 강한, 강철같은 자가 되길 원하며 죽어간다. 그러고 소원대로 강철같은 자판기가 되었다. 자판기가 되어서도 그는 늘 자객들로부터 쫓기는 신세다. 그 자판기를 어느 술 취한 엉뚱 소녀 혜미가 줍는다. 외로이 버려져있는 자판기를 안쓰러워하여 집에다 모셔놓고는 아침에 일어나 중얼거린다. '어떤 미친놈이 자판기를 자기집에다 버리고 갔다고.' 혜미분식 앞에서 늘 혜미를 기다리던 자판기. 어느날 혜미가 늦어서 기다리가 가 보니, 버스를 놓쳤다고 한다. 자판기는 혜미를 태우고 도시를 날아 집으로 돌아온다. 마치 '토토로'가 날듯이 기분이 날아갈 듯 흥분되었다. 혜미는 자판기를 위해 자판기 가슴팍을 열고 화분을 넣어두기도 한다. 자판기는 혜미 앞에서 사람으로 변신하기도 하는데, 어느날 사람인데도 커피가 나오는 스스로를 보고 놀라기도 한다. 서로 좋아져버린 혜미와 자판기. 그러나 자판기는 혜미를 떠나기로 하고 강호의 그 멋진 칼로 요리를 해 놓고 집을 나왔다가 적수를 만난다. 그러나 그 적수(얼룩말)는 꼬마의 장난감 목마가 되어 있었다. 꼬마를 태워주다가 벌떡 일어서서는, '오백원입니다'라고 하는 대사에서는 모든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자판기도 원수 얼룩말도 참 돈벌어 먹고 살기 딱한 처지들이었다. 얼룩말은 얼굴의 얼룩 검정을 지우며 말한다. 혜미가 잡혀갔다고. 빨간 목도리를 조심하라고. 혜미를 떠나려던 자판기는 혜미를 구해내기 위해 달려간다. 도시의 가로등을 밟으며 슝슝 날아가는 우리의 멋진 주인공 무림일검. 빨간 목도리는 어마어마한 졸병들을 거느리고 왔다. 여자는 풀어주고 정정당당하게 싸우자. 적은 순순히 여자를 풀어준다. 그러나 언제나 적은 너무나 강대하고(적은 백곰이었다.) 역시나 자판기는 졌다. 하필 그때 네모난 자판기로 변신해버려서 제대로 싸울 수도 없었던 거다. 자판기는 쓰러져서 가물가물 의식이 흐려지고...
자판기(이때 자판기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다시 환생한 건가?)와 혜미는 국밥집 같은 곳에서 밥을 먹는다. 혜미가 말한다. "이제 쌈질 같은 건 그만하고 착실하게 살아.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하든지." ㅋㅋㅋ
끝까지 코믹하게 실컷 웃겨준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1. 강철보다는 따뜻한 커피가 낫다는 것. 마지막에 백곰과 싸우고 나서 자판기는 커피를 백곰들에게 나눠준다. 적까지 데워주는 따뜻한 커피 한 잔.
2. 생은 늘 싸움이다. 환생해도 늘 자객에게 쫓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싸움에서 진다. 이 영화는 설정 자체가 생에 대한 메타포다. 늘 쫓기고 늘 지는 우리 인생에 대한 메타포.
3. 알고 보면 적도 또한 똑같은 중생이다. 적도 벌어먹고 살기 힘들다. 이 영화에서 적에 대한 증오심, 복수심 따윈 없다. 그저 싸운다. 사실 왜 싸우는지는 처음부터 물어보지 않는다. 싸우도록 태어났으니 싸울 뿐이다. 우리도 대부분 왜 사는지 물어보지 않고 그저 태어났으니 살고 있다. "왜" 사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늘 고민해야 한다.
4. 마지막 대사가 압권이다. 쌈질이 곧 인생인데 그걸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하는 것이 착실하게 사는 것이라는 말. 이건 그야말로 반어다.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하며, 착실하게 사는 것, 쌈질은 멈추는 것, 그것이 대체 진정 사는 거냐고 물어보는 기막힌 반어! (사랑이나 가족의 이름으로 곧장 요구되는 안정된 삶, 안정된 직장, 안정, 안정! 도대체 '안정'이 뭐지? 누군가가 요구하는 그 '안정'이 곧 죽은 듯이 사는 삶을 뜻할 수도 있다.)
소개자의 말처럼 '천재 감독' 맞는 것 같다. 천재는 결코 무겁게 말하지 않는다. 이 영화 또한 얼마나 유쾌한가!
첫댓글 기발함에 웃고, 담담한 나레이션을 통해나오는 주옥같은 대사들에 다시 웃었다. 정말 유쾌한 영화~ 다시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