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 길을 잃었다 사람소리 물소리 없는 곳에서 구두를 망가뜨리며 나는 걸었다 아무도 갈지 않은 땅 비가 내려도 젖지 않았다 새들도 없이 하늘은 나직이 내려와 있고 알지 못할 작은 꽃 키 큰 잡초들 지나가는 바람 소리 칼날 같았다 다람쥐만 지나가도 깜짝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 숨을 헐떡이며 사람을 만나 다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염불암 가는 길
서 종 택
한발 한발 걸어갑니다 종아리 힘줄 힘을 줍니다 구불구불 산길 걸어갑니다 티끌 없는 바람 불어옵니다 내 발자국 밟으며 걸어갑니다 힘들면 나무들이 밀어줍니다 거기 자작나무 숲이 없다면 염불암까지 어떻게 올라가겠습니까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입니다 새소리도 새로운 산길입니다
배추벌레
서 종 택
배추잎 뒤에 붙어숨어사는 세상 불안하고 답답하고 지루하여라 온몸으로 온종일 꿈틀거려도 나의 삶, 배추잎 한 장에 불과하였네 말없이 눈물없이 일요일도 없이 날 수 없는 날개 사무치게 간직한 배추잎 한 장으로 세계를 덮었네 내가 짠 실로 내 몸을 묶어 움츠릴 대로 움츠려서 갇힐 때까지 죽었다고 남들이 말할 때까지 눈부신 흰 날개에 하늘을 싣고 배추밭을 넘어서 날을 때까지
<약력>
▲1948년 경북 군위 출생. ▲경북대 사대 역사교육과를 졸업. ▲197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박목월시인에 의해 시 <호루라기>가 당선 되어 등단. ▲2000년 첫시집『 보물찾기 』(시와시학사) 펴냄. ▲'신감각' 동인. ▲대구시인협회장, 대구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현재 영신중 교장으로 재직.
[연변시총서]『 시향만리』(2010.5호)<한국시 특집>박정남 시-'냉이꽃' 외2편
냉이꽃
박 정 남
끓어오르는 맑은 사골 육수에 뜯어온 냉이 넣어 살짝 익히고 소금으로 간했더니 오래 앓아 온 아이가 “엄마가 캐어온 냉이가?” 하며 잘 먹는다 어린 냉이는 살도 연하고 향기가 있다 하얀 꽃을 맺기 시작하는 냉이는 꽃대에 심이 생기고 잎도 까칠까칠 솜털이 돋고 뿌리도 달큰한 맛이 없어지며 씹힌다 “나는 더 이상 향긋한 나물이 아니야.” 사람들에게 선포를 하는 것이다 “나는 꽃을 달기 시작했어. 어미야.“ 계속 선포하는 것을 놓지 않는 것이다 하얀 별부스러기 흩어진 냉이꽃 내려다보며 “그래 너는 어미야. 잡아먹히면 안 되는 어미야, 나도 손마디가 굵어졌네.”하며 냉이철 지난 줄을 알면서도 두리번두리번 어린 냉이를 찾아 차고 밝은 논두렁 햇빛 속을 헤매 다니는 것은 차고 밝은 논두렁 햇빛도 몽땅 쬐어 딸에게 주고 싶어서다
나팔꽃과 어둠
박 정 남
나팔꽃은 새벽 두 시에서 네 시 반 사이에 핀다 나팔꽃이 피는 데는 얼마간의 어둠이 필요하다 이제 나팔꽃은 아침에 피는 나팔꽃이 아니고, 하나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라고 나팔 불지도 않는다 그때 스무 살의 나에게 쓸데없이 연애 경험 있느냐고 물어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아침에 나팔을 든 나팔꽃은 내 어린 날처럼 따라다녔으면 좋겠다 동네방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면 크게 나팔 불어 소문을 내 주었으면 좋겠다 나팔꽃은 햇빛과는 상관없이 어둠 속에서 핀 꽃이다 어둠 속에서 네가 본 것이 무어니? 너의 어둠은 무엇이었니? 더욱 또록또록해진 눈을 뜬 아침의 나팔꽃에게 이제는 내가 나직이 물을 차례다
매미
박 정 남
저 푸른 하늘이 어쩜 뜨거운 여름 대낮의 검은 바위 속일지 모른다 정말로 그럴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매미들이 목청을 다해 울 까닭이 없다 숱한 매미들이 뜨거운 여름 대낮 속으로 날아 들어가서 머리를 박으며, 뜨겁게 캄캄한 여름 대낮의 바위 속을 이리 날고 저리 날며 바위 속을 밝히고, 제 머리를 아프게 박을 때에야 가까스로 빛이 나는 곳에서, 소리가 짜랑짜랑 울리는 곳에서, 날개가 이리 쪼개지고 저리 쪼개지며, 얇아질 대로 얇아지며 투명하게 슬픔의 선들 살아나는, 가벼운 몸의 길을 간다
<약력>
▲1951년 경북 구미 출생. ▲1975년 『 현대시학 』으로 등단 ▲시집으로 『 숯검정이 여자 』, 『 길은 붉고 따뜻하다』 『 이팝나무길을 가다 』. 『 명자』가 있음 ▲대구시인협회상 및 금복주문화상 수상 ▲대구시인협회장 및 대구 효성여고 교사 지냄. ▲대구대 강사 역임 ▲현재, 대구시인협회 고문.
[연변시총서]『 시향만리』(2010.5호)<한국시 특집>서지월 시-'국화빵' 외2편
국화빵
서 지 월
대형마트에 밀려난 시골장날 헐렁한 바지처럼 구겨진 풍경이지만 연신 악기를 연주하듯 국화빵 찍어내는 저 아주머니 손놀림이 마치 활을 켜대는 연주자 같다 밀가루 멀건 반죽이 찌그러지고 빛 바랜 주전자 입을 통해 한 칸씩 정해진 제자리 차지하면 한꺼번에 수십 개씩 찍혀나오는 저 국화빵들 뜨거움도 한순간이라 견뎌내는데 팡파레도 박수갈채도 없는 시장 한 귀퉁이 아주머니 혼자 쓸쓸한 앉아 국화빵 굽어낸다 꽃무늬 양산같은 국화빵이 강보에 싸인 아기처럼 동그란 얼굴을 하고 웃고 있지만 봉지에 넣어 사가는 이 없는 이 무료함 국화빵 굽어내는 손길은 바빠 흘러간 노래처럼 국화꽃무늬 피어나지만 아, 데러갈 이 없는 핏기없는 고아들 같다
흰꽃
서 지 월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 낙타가 빈 사막을 등짐 버리고 걸어가는 것이었다
바가지가 물도 담지 않고 텅 비어있는 것이었다
囚衣 입은 미이라 빛이었다 집도 울도 없는 벌판에 풀 한 포기 없는 무상무념 같은 것이었다
만지면 재가 되어 사라지고 후후 불면 날아가는 입김
유리창에 낀 성에 같은 것이었다
옥계천 일화(玉溪川 逸話)
서 지 월
일찌기 조선시대 詩人墨客들이 수양버들과 시냇물을 그려놓은 탓에 그 수양버들과 시냇물은 이제는 저들끼리 스스로 잘 알아서 수양버들은 세필을 들어 시냇물 위에 쉬임없이 일획필치를 놀리는데 공중의 꾀꼬리가 날아와 장단 맞추며 놀아주기는 처음이라 한다
조선시대 詩人墨客들이 수양버들과 시냇물을 그릴 때 날으는 꾀꼬리 놓치기 만무했으리라 詩人墨客들 들었던 붓 뉘어놓고 수양버들 아래서 점심 먹는 동안 그 청아한 울음소리는 놓치고 말았다나
오백년이 지나온 지금도 玉溪書院 벼랑 아래 가면 수양버들은 세필을 들어 시냇물 위에 쉬임없이 가지를 늘어뜨리고 공중의 꾀꼬리가 날아와 장단 맞추며 함께 놀아준다 한다
**옥계서원(玉溪書院): 지금은 어ㅕㅂ어진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2리의 옥계천의 서원.
<약력>
▲1955년, 고주몽 연개소문과 같은 생일인 음력 5월 5일 단오날 대구 달성 출생. ▲1985년,『심상』,『한국문학』신인작품상에 각각 시가 당선 되어 등단. ▲1999년, 전업작가 정부특별문예창작지원금 수혜시인에 선정됨. ▲ 2002년, 중국「長白山文學賞」수상. ▲시집『꽃이 되었나 별이 되었나』(1988, 나남),『江물과 빨랫줄』(1989, 문학사상사),『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시와시학사),『백도라지꽃의 노래』(요녕조선민족출판사),『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2003. 천년의 시작)등 있음.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상임위원, 현대시창작 전문사숙 대구시인학교 지도시인. ▲현재, 한국시인협회 중앙위원. 대구문인협회 외국문학 분과위원장.
[연변시총서]『 시향만리』(2010.5호)<한국시 특집>허혜정 시-'적들을 위한 서정시' 외2편
적들을 위한 서정시
허 혜 정
다시 의문은 시작되었다 숙맥들은 눈치채지 못할 신호를 돌리다 슬며시 자리를 터는 그들은 어디로 몰려가는 걸까 뒤늦게 홀로 구두를 찾아 신고 내려오는 시간 확실히 내가 모르는 암호가 있는 것이다
악수도 모르고 멀어지던 거만한 그들 뭔가 안 보이는 벽 너머에서 내일이 있는 척 웃어대던 얼굴들 나에겐 너무도 힘들었던 문제들 흥나는대로 지껄여대던 혀들 내심 옆사람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알 수 없는 귓속말을 즐기는 그들
굳게 잠가놓은 안쪽에서 그들이 어떤 세상을 세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함부로 넘겨짚진 않지만, 내가 알고 싶어하는 건 벽 너머 세상, 어쩌면 그 호기심조차 다 똑같은 목적 때문이라고 생각할지 모를 그래서 혹 내 꿈을 안다고 재단해왔을지 모를 그들
하지만 성공까지는 바래본 적이 없다 종이가 무엇이란 걸 알기 때문에 목적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니다 닥치는 대로 쓰고 핸들을 돌리다보면 어디선가 들어맞을지 모를 숫자를 찾아 한 칸씩 한 칸씩 정교하게 조합해 맞춰보는 퍼즐 반쯤 왔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방향을 틀었다 알았다고 생각할 때 바보같이 머리를 쳤다 알만한 농담으로 웃어넘겼던 말도 생각하며 걸었다
오늘 다시 틀렸다고 생각한 말들을 지운다 부패한 방언으로 가득한 대화에서 떨어져나온 외로운 미치광이가 되어 차갑고 단단한 구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단어는 뭘까 꼭두각시 하나 불태울 수 없는 말이라면 시 같은 건 손대지도 않았다
주유소
허 혜 정
인간은 모험을 사랑한다 새것을 찾아가다 바닥난 기름통을 채우러 주유소로 흘러드는 자동차처럼 유리문 너머 미끄러져오는 한 남자를 본다 바쁘다는 표정으로 차 한 잔을 마시며 시계를 흘낏거리는 동안 기름때 밴 주유기를 꽃아넣고 텅 빈 눈으로 미터기를 응시하는 주유소 직원처럼 이 직업이 아름답다 생각하긴 너무 슬프다 저녁마다 사무원들이 북적이며 몰려나가 식사를 하고 돈과 친구와 쾌락을 찾아 떠도는 도심 한복판에서 그렇다 이건 너무나 외로운 직업이다 언제 집어치워도 미련도 없을 슬프고 냄새나는 일들을 어서 때려치우고 싶어 포켓북을 청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있는 직원처럼 그렇게 날마다 지켜보고 있었다 유리창을 닦아내고 타이어를 손보고 연거푸 엔진오일을 채워주면 검은 매연을 얼굴에 내뿜으며 떠나는 그를 피로에 모지라진 입술에선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데 한 시인의 노트 위에 함부로 내팽개친 넥타이와 셔츠는 네 진보의 부산물이 아닌가 그렇다 세상, 나의 남편이여 너의 개인주의는 내 삶의 악몽이다 해를 넘길 때마다 시멘트 바닥보다 싸늘한 가슴으로 분노의 폐유는 응어리져가지만 시시한 브랜드 하나 없는 주유소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오늘은 낡은 영화를 본다 좌절한 욕망의 아이들이 주유소를 부순다 테이프를 감는다, 부수고 있다 다시 돌려 감는다, 부수고 있다 다시 돌려 감는다, 부수고 있다 다시 부수고 있다
오시리스의 배
허 혜 정
아직 불빛이 남아 있을까 창가에서 살펴보면 마지막 불빛 한 점 눈을 아프게 했다 늦도록 밤을 잊은 그는 누군지 그 어떤 고통의 자욱들을 지웠는지 아는 이는 없다 얼마나 기나긴 시간이 지나갔는가 오늘밤 나의 노트에는 나일강이 흐른다 아름다운 별빛의 강, 내 사랑의 간절한 고통이 올 때 낡아가는 말들로 빛의 관을 짠다 상실은 영원의 밤으로 출발하는 시작이니 아팠던 심장을 항아리에 봉하고 모든 시간의 이야기를 벽화로 새겼다 사랑하는 이여, 이제 그대는 먼지요 기억이요 이 한 줄의 문장보다 아무것도 아니다 말라가던 말들은 가슴 깊이 그림자로 새겨졌다 아팠던 펜을 내려놓고 침대로 돌아가면 손가락을 더듬는 바람의 창백함 피로한 몸은 한 줌의 잠을 목말라 하는데 가느다란 유골처럼 자그락이는 말들 침묵이여 다가와 나를 지우라 잠결에 뒤척이던 근심의 물결마저 잠잠해질 때 망각의 강 추억을 싣고 머나먼 우주를 항해하던 사람들 다시는 철석이는 물소리도 이름도 갈망도 없이 어떤 아픔도 손대지 않은 채 남겨두는 곳 수평선의 빛이여, 나를 축복하소서 나의 사랑은 끝났습니다
<약력>
▲1966년 경남 산청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7년《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1995년 《현대시》 평론상에 당선,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도 당선되어 시인이며 평론가로 활동. ▲시집 『 비 속에도 나비가 오나』 ▲저서 『 적들을 위한 서정시』『 현대시론 1.2』『 멀티미디어시대의 시창작 』등 있음. ▲계간 『 시와 사상』,『 서정시학 』편집위원으로 활동 ▲현재, 한국사이버대학 문예창작부 교수.
[연변시총서]『 시향만리』(2010.5호)<한국시 특집>강해림 시-'' 외2편
바닥
강 해 림
새벽 두 시 역 대합실 잠들지 못한 사내들 몇 깡소주를 마시고 있다
화끈거리는 알코올 도수 높은 어둠의 심해에 떠 있는 봉분들 저기 저 모포 한 장의, 얇은 주검 같은 잠에 든
등대에 불이 켜지듯 어둡고 불콰해진 얼굴들이 불현듯, 환해진다 누군가 우동국물을 얻어온 것 우르르 몰려드는 순간 퍽!
터져버린 검은 비닐봉지에서 흘러나온 면발로 흥건해진 바닥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오싹하다 주워 담을 수도 흘려버릴 수도 없는 이미 엎질러진
걸신 들려 노려보는 짐승 한 마리 내 안에 살고 있지 혓바닥이라도 대고 핥고 싶어
詩, 저 바닥없는
불멸의 완성
강 해 림
3300년 전 무덤 속 완두콩이 부활했다 이집트 왕국의 19세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이 죽을 때 부장품으로 넣었던 것 투탕카멘은 황금 가면을 쓴 미라로 왕가의 골짜기에서 발굴되었는데, 왕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는 자는 죽음의 날개가 찾아가리라는 파라오의 저주로 수많은 이들이 이들이 죽어갔다는데
지하 무덤은 입구를 봉하고, 주검으로 가는 계단마저 감추고 꼭꼭 숨겨두었던 것 그토록 많은 낮과 밤이 서로 몸 바꾸어 흘러가면서 길들였을 야생의 유전자는 비밀이다 다만 물 한 방울 없는 차가운 석관 같은, 오래 무릎 꿇은 제의祭儀의 시간이 끔찍하다 만지면 먼지처럼 폭삭 내려앉을 것 같은 주검 냄새가 고 작은 몸의 갈증 속으로 스며 스스로 사막이 되게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파피루스 두루마기에 쓴 *마법의 주문이 관 속에서 흘러나와 감히 불멸을 꿈꾸었던 것
황금 가면을 벗은 미라는 눈도 코도 없다 움푹 파인 흔적만 있다 쩍쩍 금이 간 몸에 홍조가 돌아, 싹이 트고 푸른 넝쿨을 뻗고 올라가 보랏빛 꽃을 피우고 허공에 깊고 푸른 방을 차렸다
오늘 밤 왕의 식탁에 올려도 되겠다
*티벳<사자의書>
눈 감으면 보인다
강 해 림
반 고흐, 니진스키,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상화가 나란히 실린 표지, 눈동자들은 왼쪽 사선을 향해 불안하게 열려 있다 허공에 매달린 시계추처럼 고집스러웠으나 구레나룻 콧수염이 그들의 표정을 다소 익살스럽게 만들었다 무게의 중심을 향한, 정 대칭의 슬픈 상징
고흐는 빨강머리 사내, 태양의 아들, 태양이 딸깍딸깍 숨넘어가는 순간의 고통으로 눈멀어 스스로 태양이 되었다 문득, 악마처럼 미친 피가 돌아 질긴 말고기를 씹으며 지중해산 포도주가 먹고 싶다 고흐처럼 고통이 따라주는 포도주를 아무 불평 없이 마시고, 고흐처럼 요절을 꿈꾸었으나 탕탕! 총성이 울려 퍼지는 순간 검붉은 포도주 빛으로 변해 버릴 태양이 나는 ㅁ ㅜ ㅅ ㅓ ㅇ ㅜ ㅓ
올림픽 경기장 트랙에 금이 그어져 있다 어린 시절 나는 달리기만 하면 눈을 감았다 출발은 좋았으나 늘 꼴찌였다 '실패는 신이 인간에게 인정한 자유다' 그 말의 매혹이 내 눈을 찔렀다 나는 눈멀었다 연애나 종교적인 이해나 반성도 골인지점의 목전에서 나를 이탈시켰다 나는 저주받은 변종의 씨앗, 세상 풍경 밖으로 날아갔다
너무 오래 된 책
강 해 림
반월당 하늘북 서점 앞 나무의자에 노인이 잠들어 있다
환한 대낮
수거하다 만 폐휴지를 실은 손수레에 엎드려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듯 꽁꽁 묶은 잠의 입구는 단호하다
임시휴업 안내문이 붙은 유리창 너머 책들이 바리케이드 치는 동안 뛰뛰빵빵 도시의 소음이 잠의 영역을 업그레이드 시키고 있다
중얼중얼잠꼬대같은잠의문장들이걸어나와손수레에실려가고 꿈결인듯생시인듯잠의풍경들이스쳐지나가고미처건너지못한행과행문장사이졸음겨워라깜박깜박신호등은빨간불켜놓은채 졸며서있고 그가 수거하러 다니느라 누볐을 거리 쩌억 들러붙은 추잉검처럼 요지부동인 잠의 주소 잠의 행방이 묘연하다
문득 그는 없고 금서로 낙인찍힌 지 오래인 듯 깊고 깊은 잠 첫 페이지에 꽂히는 햇살, 햇살!
바다도 고약한 버릇이 있다 이빨을 갈면서 낮잠을 잤다 모래톱엔 선명한 이빨자국들 계단식 천수답의 논둑길처럼 또박또박 낙인을 찍어 놓았다 가윗꿈을 꾸었다 잠결에 놀라 혓바닥을 깨물었다 검푸른 입술에도 피멍이 들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누군가,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지우려는 것이다 외딴 섬과 섬 사이에 굵은 손금을 그어놓고 운명선 같은 손금을 그어놓고 물결무늬들이 그물처럼 수평선에 걸렸다 저녁놀이 붉었다 내 삶의 파편들도 죄인처럼 갇혔다 그물에 갇힌 것들은 답답할 뿐이다 삶의 이빨자국도 누렇게 바랬다 파도는 쉬지 않고 칫솔질을 했다 하얀 치약 거품이 모래톱에 쓰러졌다 물결무늬 위에 어둠이 어룽거렸다 집어등 몇 개가 탐스럽게 익었다 모래톱에 각인된 촘촘한 이빨자국들 깨물린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간밤에도 밤새 이빨을 갈았다 이빨 가는 버릇 때문에 충혈된 물결무늬들 해가 떴다 또, 고약한 낮잠을 청하는 것이다
자전거
김 환 식
페달을 밟았다 한 번도 앞바퀴를 앞서보지 못했다 뒷바퀴의 삶은 그런 것이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언덕길을 올라갔다 온갖 핑계로 쉽게는 따라오지 않으려는 페달을 밟으면서 내 삶의 궤적을 검증해 보았다 남보다 앞서보지 못했다 체인처럼 손발이 묶여 있었다 돌아가지 않는 바퀴를 끌고 나는 누구의 삶과 해후하려고 지구의 낯선 오솔길을 달려가는 것일까길이 언제나 깊고 멀었다 살아온 바퀴자국들 더러는 비온 뒤 황톳길에도 찍혀있을 것이다 지워지지 않으려는 이름 몇 개와 가끔은 꿈속을 헤매는 풍경화 몇 점을 남겨두고 나는 오늘도 치열하게 페달을 밟았다 삶의 무게가 무거운 것일까 오늘도 안장은 삐딱해진 것이다
신발장
김 환 식
좁은 신발장 속에는 온갖 신발들이 허기진 몸을 옹더글시고 칸칸이 제 자리에 앉아 쉬는 것이다 한 때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써 가족의 몸무게 전부를 가볍게 짊어진 적도 있었는데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너덜너덜 파열된 입술만 허공에 절절하게 던져 놓은 것이다 그 육중한 근심도 그저 삶의 덫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낯선 신작로를 수없이 헤매고 다녔을 낡은 신발들의 화려한 추상화 이제는 고독의 끈을 풀어놓고 한 생을 다소곳이 갈무리하고 있을 낡은 신발장속의 퀘퀘한 속삭임들 그리고, 아둥바둥 지나쳐온 내 삶의 흔적 몇 켤레
<약력>
▲1958년 경북 영천 출생. ▲계간『시와 반시』에 「歸鄕」을 발표하며 文壇에 나옴. ▲시집, 『산다는 것』,『낯선 손바닥 하나를 뒤집어 놓고』,『烙印』,『물결무늬』 ▲칼럼집『每日春秋-嶺南CEO칼럼』등 있음. ▲(社)中小企業 異業種 大邱.慶北聯合會長 ▲大邱.慶北 産學連繫網構築事業團長 ▲주식회사 韓中 대표이사. ▲대구문인협회 부회장
[연변시총서]『 시향만리』(2010.5호)<한국시 특집>최광임 시-'담쟁이' 외2편
담쟁이
최 광 임
이제 나는 더 이상 벽이 아니다 내 살 속 뿌리를 내리고 키돋움하며 오르는 일 처음엔 나의 알맞은 집은 아니었다 어느날 달그락거리는 뼈만 모여 살던 삶 떡잎의 네 사다리가 되어도 좋을 듯 했다 옆에는 흐드러진 능소화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산다는 것은 내가 너를 만났다는 것이다 다족류의 곤충처럼 셀 수 없는 네 손길은 갈비뼈를 어루만지며 살을 붙이기도 하고 뼈와 뼈를 맞추기도 하고 살과 뼈 사이 아귀틀림을 다듬기도 하며 나를 지워갔다 미처 허공에 줄을 긋지 못한 거미들이 너와 나 사이를 지나쳐 가기도 하였으나 벌레들이 네 몸을 뒤집어 집을 짓고 얼크러진 꿈들을 채우는 일 보며 나 없이 너의 뼈가 되어 살아도 좋았다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계절풍처럼 일정하게 떠나기도 하지만 이내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그길 지워지지 않도록 검게 야윈 금들을 붙잡은 축원 끝나고도 식지 않는 사랑이다
눈물의 배후
최 광 임
한 계절에 닿고자하는 새는 몸피를 줄인다 허공의 심장을 관통하여 가기 위함이다 그때 베란다의 늦은 칸나곷송이 쇠북처럼 매달려 있기도 하는데 그대여 울음의 눈동자를 토끼눈으로 여기지 마시라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는 고목일수록 어린잎들 틔워내는 혼신의 힘은 매운 것이니 지루한 가뭄 끝 입술의 심혈관이 터진 곷무릇 같은 것이니 턱을 치켜세운 식욕 왕성한 새끼들에게 공갈빵이나 뜯어 먹게 하는 무색한 시절을 두고 부엌으로 달려가 양푼에 밥을 비빈다 어떻게든 허방으로 떠밀리지 않기 위하여 뙤약벝 같은 고추장 비빔밥을 쑤셔 넣어 보신 적 있는가 막무가내로 뒤집어지는 매운 밥의 본능이 한 세월로 건너가는 새가 되는 것일 뿐, 천둥벌거숭이 나는 이 새벽 가슴 골짜기에서 솟구치는 눈물의 거룩한 밥을 짓고 국을 끓일 것이니 그대여 울음의 배후에 대하여 숙고하지 마시라 삶이 풍장 아닌 다음에야 칸나꽃 피고지고 또 필 것이므로 먼동 트기 전 세상 한 복판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내 발굽에 편자나 박아주시라
개 같은 사랑
최 광 임
대로를 가로지르던 수캐 덤프트럭 밑에 섰다 휘청 앞발 꺾였다 일어서서 맞은편 내 자동차 쪽 앞서 건넌 암캐를 향하고 있다, 급정거하며 경적 울리다 유리창 밖 개의 눈과 마주쳤다 저런 눈빛의 사내라면 나를 통째로 걸어도 좋으리라 거리의 차들 줄줄 밀리며 큼큼거리는데 죄라고는 사랑한 일밖에 없는 눈빛, 필사적이다 폭우의 들녘 묵묵히 견뎌 선 야생화거나 급물살 위 둥둥 떠내려가는 꽃잎 같은, 지금 내게 무서운 건 사랑인지 세상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간의 생을 더듬어 보아도 보지 못한 것 같은 눈 단 한 번 어렴풋이 닮은 눈빛 하나 있었는데 그만 나쁜 여자가 되기로 했다
그 밤, 젖무덤 출렁출렁한 암캐의 젖을 물리며 개 같은 사내의 여자를 오래도록 꿈 꾸었다
<약력>
▲1967년 전북 부안 변산 출생. ▲대전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2년 《시문학》으로 등단. ▲1987년 <진주개천예술제>연극부분 치우수 연출상 수상 ▲시집으로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가 있음. ▲ 〈빈터〉,〈다층〉동인. 《디카시》편집위원, ▲현재,《시와 경계》편집장. 창신대 겸임교수.
[연변시총서]『 시향만리』(2010.5호)<한국시 특집>백자인 시-'초생달' 외2편
초생달
백 자 인
명월이 눈썹 황진이 눈썹 섹시한 초생달
잃어버린 버선코 한 짝 잘려나간 조각달
삼매경 빠진 관세음 화신
누가 빗다 버린 얼레빗
석류
백 자 인
붉어라 붉어라 키 낮은 담벼락 홀로 붉었어라
행인들 지나가는 발자국소리 동무 되어 토닥거리는 소리
매달려 있는 고통 서러워 몸부림치는 바람소리 천년 두고 흘렀나
꼭꼭 안으로 잠그는 자물쇠 귀머거리 벙어리 눈뜬 장님 임금님 귀 당나귀 귀
붉어라 잔뜩 붉어라 이글거리는 지옥문 활짝 열어 젖히고
속내 탈탈 털고 튀어나오는 에메랄드 자수정 루비 산호 홍보석 쏟아내는 붉은 석류
동 백
백 자 인
한 세월 무서리 진저리 치는 독을 품었더란 말이냐 가슴에 품은 열정 붉게 물들고 싶었더냐
요염한 자태 뜨거운 유혹 아픔이었더냐
끝끝내 속마음 벌려 낙화로 돌아서는 이별이었더냐
붉디 붉은 눈물 뚝뚝 혼불로 주저앉아버린 恨
동백꽃 지면 사랑도 진다는데
<약력>
▲1955년 대구 출생. 본명 백명자. 필명 백련화 ▲대구신문에 시「귀촉도 」발표로 문단에 나옴. ▲중국「장백산 」등으로 작품활동. ▲한민족시링문화인협회 회원. ▲「사림시」 동인.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만의 문자가 있었다 어머니만의 상형문자는 자식들을 십이지(十二支) 띠를 그리고 있고 그 옆에 전화번호를 숫자로 그린 고대 이집트 음가문자이다 종종 전화선 타고 안겨오는 어머니의 분홍 꽃돼지 내 전화번호 적힌 목걸이를 하고 있다 그래서 내 어머니 상형문자는 갑골문자가 아닌 아메리카의 단순한 그림문자를 뛰어넘은 그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이다 어머니의 돼지그림을 보면 “자식들” 소리가 난다
꼬깃꼬깃한 메모지에 그려진 때로는 둘째딸 유실이의 목소리도 들린다 유실아 서울 아이들은 잘 있냐? 첫마디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외손자 걱정에 숨겨놓은 어머니 마음 내 걱정 어머니 걱정 서로 닮았다
내 어머니만의 문자는 거북 등딱지도, 숫소 견갑골도 아닌 더더구나 동굴 속 바위벽도 아닌 여러 날 궁금증에 침샘 말리다 어머니 가슴팍에 새기는 뜻글자이다
다알리아
임 유 화
내 어릴 적 마당가를 빙 둘러 화단이 있었다 해마다 겨울이면 아버지는 항아리에 흙 담아와 알뿌리를 묻었다
신기하게 골방 흙속에서 잠자다가 봄날이 기지개를 켜면 마당가 화단에서 다시 통실통실 꽃을 피웠다 다섯 살 내 머리통 만하던 꽃송이가 하늘마당에 연등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한 번은 홀로 낮잠에서 깨어나 그 꽃잎 뜯어 푸닥거리하듯 온 마당 가득 흩뿌리며 놀다가 해질녘 아버지께 벌을 서기도 했다
꽃밭 앞에 꿇어앉아 고사리 두 손으로 다알리아 받쳐 들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산밭 가에 봄이 오면 강당골 아버지 잠깨어 다시 기침할 수 없는가 세월이 발등에 뚝뚝 떨어진다
봄마다 아버지 소식 없어도 다알리아 뿌리는 새싹 내고 꽃을 피웠다
국화차
임 유 화
이슬 마신 구절초 긴 겨울밤 홀로 노란 속삭임으로 피어나 세 번을 목욕재개해도 향기 여전한 찻잔 속 꽃송이 동동동 온몸 풀고 앉아 명상 중이다
바짝 마른 몸, 입술 열어 꿈을 꾸듯 강물에 출렁출렁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바람과 물, 새소리가 찻잔 속에서 자연으로 돌아간다
<약력>
▲1959년 경남 의령 출생. ▲본명 임정희. ▲<수필문학>으로 등단. ▲한국낭송문학회 시낭송가로 활동. ▲한국문인협회, 대구문인협회 회원.
[연변시총서]<시향만리>(2010 한국시특집)계동균 시-'천추(千秋)의 사랑' 외2편
천추(千秋)의 사랑
계 동 균
청계산 흐르는 물에 낙엽 하나 떨어졌을 뿐인데 세상은 온통 달라져 있고
청계산 흐르는 물에 눈물 한방울 떨어졌을 뿐인데 내 모습은 온통 달라져 있네
아, 얼마나 더 많은 날을 기다려야 그대 만날 수 있나
아, 얼마나 더 많은 눈물을 흘려야 그대를 만날 수 있나
천년을 기다려야 한다면 기다리리라 구름되어, 바람되어, 돌이되어,
청계산 흐르는 물에 낙엽 하나 떨어졌을 뿐인데
[연변시총서]『 시향만리』(2010.5호)<한국시 특집>계동균 시-'꿩바람 분다'외2편
꿩바람 분다
계 동 균
빨주노초파남보 백두대간 젖줄 따라 무궁화꽃이 피였습니다 어절씨구 저절씨구 동방불패 달빛 타고 아리아리 꿩바람 분다
모두 다 함께 손벽을 모두다 함께 노래를 무지개 타고 강강수월래를
슬퍼 괜히 아퍼 괜히 손대지 말아 주세요 손대면 터질 것 같아 낮달에 걸린 빨간풍선처럼
태극기 휘날리며 보여주고 싶었는데 날아보고 싶었는데 뛰여봐도 끝이 없고 날아봐도 끝이 없고 상처로만 채워진 날개 그대의 사랑 어쩌나 그대의 눈물 어쩌나 어둠을 뚫고 아침해는 뜬다
슬퍼 괜히 아퍼 괜히 손대지 말아 주세요 손대면 터질 것 같아 낮달에 걸린 빨간풍선처럼
양재천
계 동 균
빌딩 숲 사이로 길게 뻗은 양재천은 꿈과 소망을 안고 바다로 바다로 간다
개구쟁이 철이와 말괄량이 순이는 왕자와 공주의 자리 버리고 눈이 부신 물보라와 함께 인어가 되고 어부가 되고
숲속에 숲이 있는 양재천 따라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미래의 발자욱을 그리며 한 폭의 수채화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