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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클래식의 부활(15세기)
국제고딕 그리고 르네상스의 시작~~
본격적인 초기 르네상스에 진입하기전 아비뇽 유수등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본인들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르네상스를 대비하는 준비하는 척후병의 역할을 단단히한 국제 고딕 양식의 화가들 몇명을 더 언급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종교라는 틀에 사로잡혀 이름조차 남지 않은 분이 수두룩한데 이분들은 작품을 통해 이름은 남길수 있었으나 이후의 워낙 빵빵한 "예술인"들의 그늘에 묻힌 것 같으니 충분히 거론할 자격이 있다는 "망구 혼자 생각에"~~
'국제 고딕'양식을 곰브리치는 '국제적 양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양식적 특징은 자연에 대한 관찰력과 아름답고 섬세한 표현으로 주변 세계를 묘사하는 데 적용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라틴 교회의 지배를 받던 중세 유럽은 여전히 종교의 관리하에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14세기말 종교의 위세가 수그러지며 미술가들과 사상가들은 중심지에서 다른 중심지로 옮겨 다니며 다양성을 취득했으며 ‘다른 지방의 것’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업적이 배척당하는 사례가 없이 자연스럽게 교류하면서 자신의 이름도 남길수 있게 생겨난 경향이 ‘국제적 양식(국제 고딕)’이라고 보아야한다!
"양식의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의 대가인 궁정화가(이름은 검색되지 않네요..ㅠㅠ)가 영국 왕을 위해 그린 <월튼 두폭화>를 들 수 있다. 당시에 생존했던 역사적인 인물들을 기록한 것이 흥미로운 점인데 보헤미아의 앤 공주의 불행한 남편인 영국왕 리처드 2세가 그 주인공이다.
앞에서 논의한 작품들(마에스타/두초, 수태고지/시모네)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아름답게 흐르는 선과 우아하고 섬세한 주제를 어떤 묘사로 공유하고 있는지를 감상자들이 쉽게알 수 있다"고 언급한다.
<리처드 2세를 아기 예수에게 천거하는 세례자 요한> 월튼 두폭화 by 궁정예술가/ 1395년 경
영국의 '엘튼'이라는 마을에서 발견된 <월튼 두폭화>
리처드 2세는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올리고 세례 요한과 두 명의 왕실 수호 성인들이 그를 성모에게 천거하는 것같이 보인다.
성모는 천국의 꽃으로 덮인 초원에 서서 왕의 표시인 황금 뿔을 가진 하얀 숫사슴을 가슴에 단 아름다운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아기 예수는 왕에게 축복을 내리거나 환영하면서 그의 기도를 들어 줄 것을 확약하듯이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있다. 형상에 대한 고대의 주술적인 태도가 이러한 ‘헌납자들의 초상’의 관습속에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볼 때 우리는 미술의 초창기에 볼 수 있었던 신념의 강인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항상 성인 같은 생활만 할 수 없는 거칠고 혼란한 생활 속에서 미술가의 기교를 빌어 만든 자신의 초상을 조용한 교회나 예배당에 걸어 성자나 천사들과 친숙하게 지내며 기도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위안을 충분히 느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림보다 표현이 더 멋지게 생각이 드는건 왜죠?
*리처드 2세
작품의 주인공인 리처드 2세는 1380년 1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영국은 사회 정치적으로 참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영국은 프랑스와 벌린 백년 전쟁의 혼돈 속에 있었고 왕위 즉위 다음 해인 1381년엔 농민반란이 일어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신하들의 도움으로 농민 반란을 진압했으나 주도권의 결여로 정치 갈등에 시달리며 지내다 1399년 사촌의 반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감옥생활중 1410년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삶을 살았던 왕이었다.
오른쪽에 보이는 무릎을 끓고 있는 천사의 자세에서 단축법이 사용되고 있으며, 상상의 천국을 장식하는 수많은 꽃들은 자연으로부터 얻은 연구의 결과를 활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제적 양식의 미술가들은 관찰력과 아름답고 섬세한 사물에 대한 그들의 미술적 취향과 개성으로 주변세계를 묘사하는데 적용했다.
미술가들의 임무가 변한 것이다. 전에는 성경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을 묘사하는 고대의 방식을 배우고 습득한 지식을 당대에 유행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는 훈련으로 충분했다면, 이제는 미술가의 작업에는 다른 기술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니, 자연으로부터 스케치를
그릴 수 있어야 했고 그림에 옮겨 담을 수 있어야 했다. 그들은 스케치북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희귀하고 아름다운
동식물들의 스케치를 작품을 위해서 준비해야했다.
이른바 밑거름인 데생을 사용했다고 보아야하는데 당시 데생이라는 용어가 있었나요?
사물 동물등의 습작 예시~~
프랑스 베리 공작의 의뢰로 '랭부르 형제'가 그린 아래의 달력은 마치 15세기 초 프랑스의 생활상이 눈앞에서 펼쳐지듯 생생한 느낌을 준다.
그림은 매월의 농업 활동과 궁정 생활을 묘사한 12개의 삽화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전경, 중경, 원경을 평행적으로 배치해 원근법적인 느낌을 주는데 한 점으로 수렴되는 수학적 원근법이 아닌 경험적으로 터득한 유사 원근법으로, 과학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간감을 통한 사실적 표현이 인상적인작품이다. 특히, 희귀하고 값비싼 안료와 금박을 많이 쓰고, 많은 수의 삽화(약 130여 개)를 담고 있기에, 기도서는 중세시대 채색 필사본 중에서도 제일 호화로운 작품으로 손꼽히며 참신하면서도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랭부르 형제는 1409년 베리 공작의 주문을 받아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중인 기도서 한 권을 완성하였다.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호운 기도서>는 형제가 베리 공작에게서 두 번째로 주문 받은 것이지만 1416년, 베리 공작과 랭부르 형제가 급작스럽게 사망하여 미완성으로 남겨지게 된다. 네 사람의 사인은 흑사병으로 추정된다. 기도서는 미완성인 채로 베리 공작의 후손들에게 전해지다가 1480년대 장 콜롬브가 당시의 소유주였던 사보이 공작 샤를르의 주문을 받아 완성하였다. 랭부르 형제가 기도서를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한 후 1480년대 장 콜롬브가 이를 완성하였기 때문에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에는 장 콜롬브와 랭부르 형제등 최소 4인의 그림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랭부르 형제 세 명 간의 필치 차이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장 콜롬브와 랭부르 형제의 그림은 명확히 구분된다. 랭부르 형제의 그림이 플랑드르풍의 섬세한 묘사와 화려한 채색을 통해 15세기 초반 유행했던 ‘국제고딕양식’을 보여주는데 비해 장 콜롬브의 그림은 섬세함에 있어서 뒤떨어지며 색채 또한 번진 듯 덜 선명하며 어두운 느낌이지만 보다 발전한 원근법을 보여주고 있다. 12달의 달력 10월은 장 콜롬브가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는 중세시기 유행했던 시도서(時禱書)의 형태이다. 시도서는 일반 신도들이 개인적인 예배를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대개 앞 부분에 달력이 실려 있고 기도 시간과 계절에 어울리는 기도문들을 화려한 채색삽화와 함께 담고 있다. 기도서의 삽화 중에서는 특히 책의 가장 앞에 실린 달력 그림이 잘 알려져 있는데 그 달의 별자리와 달력이 반원형태로 그려져 있고 아래에는 각 달에 어울리는 귀족이나 농민들의 생활 모습이 베리 공작이 소유했거나 그와 관계가 있었던 성의 모습을 배경으로 묘사되었다.
베리 공작의 기도서 중 12개월 달력 by 랭부르 형제 / 1410년 경
베리공작의 기도서중 4월..
베리공작의 기도서중 10월..
기도서의 앞 부분에 실려있는 달력 중 10월의 모습으로 농작물을 모두 수확한 밭을 갈고 있는 농민들이 그려져 있다. 그 뒤로는 당시의 왕궁이었던 루브르성, 센느 강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리고 강에 떠 있는 배의 모습 등이 보인다. 루브르의 섬세한 묘사와 한층 자연스러운 인물들의 움직임, 그리고 인물과 건축물, 동물과의 크기 대비가 랭부르 형제의 그림에 비해 사실적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랭부르 형제
Les frères de Limbourg
랭부르 형제는 14세기 네이메헌에서 태어나 15세기 초 프랑스 궁정에서 활동한 화가들이다. 랭부르 형제는 주로 필사본 채식 삽화를 제작했는데, 그중에서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는 국제 고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로 주목된다.
에르만, 폴, 그리고 장 랭부르는 플랑드르 출신으로 1400년대 초반 프랑스로 와서 베리 공작의 형인 부르고뉴 공작 필립의 궁정에서 일하다가 필립이 사망하자 베리 공작의 궁정으로 옮겨 일하게 되었다.
*베리 공작
베리 공작(1340~1416)은 프랑스의 장 2세의 아들이자 샤를 5세의 남동생으로 막대한 영토를 비롯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예술품 수집으로 유명하였는데 특히 당시 중요한 예술품이자 귀중품으로 인정받았던 채색필사본을 여러 권 주문하였다.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는 베리 공작이 소유했던 수많은 채색필사본 중에도 특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국제 고딕이후 미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반 사람들도 자연을 묘사한 화가의 기교나 그의 그림 속에 얼마나 많은 양의 뛰어난 세부 묘사가 들어 있는가에 따라 미술가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미술가들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했다. 묘사의 기술에만 만족한 것이 아닌 시각의 법칙을 개발하고 로마, 그리스의 미술가들이 했듯이 인체에 관한 충분한 지식을 얻어 그것을 토대로 조각과 그림을 제작하려 하였다. 미술가들의 관심이 이러한 방향으로 변하자 중세 미술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르네상스에 진입하는 저자의 서술을 마지막으로 이제 르네상스로 미술사 여행을 떠납시다.
클래식이란, '고전'이라는 뜻으로 일류의, 최고 수준의 대표적인 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며, 시대를 초월하여 지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을 우리는 흔히 '클래식하다'라고 표현한다.
회화보다는 우리에게는 음악으로 친숙한 표현~~
미술사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기'라 불리는 기원전5~4세기의 미술과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을 지칭하는데, 중세 이탈리아의 15세기 미술의 지향점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이었고 결국
원초적 지향점을 상회한 르네상스 미술은 진정한 클래식의 부활을 이뤄내었다고 평하며 저 역시 그렇게 인정합니다.
"이탈리안들의 마음속에 품은 부흥이라는 관념은 그들의 시발점이었던 로마'의 재생이라는 생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하겠죠!
현실이 어려울수록 과거의 영광에
연연하는 것이 사람이겠죠!
그들의 화려한 자부심인 고전시대와 태동하는 재생의 새로운 시대 사이에 놓인 기간은 단지 하나의 슬프게 단절된 막간(중간 시대)에 불과했다고 인식했으며 르네상스라는 관념은 중간의 시대가 '중세'라는 시대적 관념을 탄생하게 했으며 미술사가들에 의해 여전히 "사조"의 용어를 시대와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면 "자뻑"에 가까운 이탈리안들의 생각은 그다지 근거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르만족의 일족인 고트족의 로마 침입부터 고딕 양식이라고 부르는 미술이 생기기까지 약700년이라는 시간을 전반부에
심도있게 살펴보았으며, 미술의 부활은 암흑시대의 혼돈을 거치면서 여러가지 요인이 중첩되어 사실은 고딕시대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주지했는데 고딕이라는 사조가 없이 르네상스가 시작된것은 절대 아니올씨다이겠죠!
피렌체 대성당과 피렌체 시내~~
피렌체 대성당의 두오모와 종탑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단테와 조토의 고향이자 부유한 상업 도시로 15세기 초, 의기투합한 미술가들이 계획적으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면서 과거의 미술 개념을 탈피하고자 시도했다.
젊은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는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였다.
피렌체 사람들은 1296년부터
지어진 <피렌체 대성당>의 주교좌 공간의 지붕을 거다한 돔으로 덮기를 원했으나 이 시도는 50년 넘게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도전은 1436년에야 실현되었는데 성공시킨 이가 바로 '브루넬레스키'였다.
그의 건축이후 500년 가까이 유럽과 미국의 건축가들은 그의 발자취를 따를 수밖에 없었으며, 이 돔은 역사상 최초의 팔각형 돔으로 목재 지지구조 없이 지어졌고 당시 가장 거대한 돔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으로 르네상스의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피렌체를 모르는 사람도알고 있는 일본작가의 소설이며 영화로도 성공한 "냉정과 열정사이"의 말미에 등장하는 두오모의 돔이 그 장소입니다!
*주교좌 : 지역 교구를 관할하는 주교가 공적으로 앉는의자.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년~1446년 4월 15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선구자적 건축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만든 주요 작품은 모두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다.
브루넬레스키의 생애 초기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안토니오 마네티와 조르조 바사리의 저작이 유일한 기록이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필리포의 아버지는 브루넬레스키 디 리포(Brunellesco di Lippo)이고, 어머니는 줄리아나 스피니(Giuliana Spini)이다.
필리포는 세 자녀들 중 둘째였다.
젊은 필리포는 공무원인 그의 아버지의 뒤를 잇게 할 의도로 문학과 수학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예술에 마음을 둔 필리포는 금 세공사, 금속 세공사, 청동 세공사가 포함된 비단업자 길드인 아르테 델라 세타(Arte della Seta)에 등록하게 된다.
1398년 금 세공 장인이 된다. 속해있던 길드와 같은 길드에서 지은 처음으로 중요한 작품인 고아원과 브루넬레스키가 금 세공 장인이 된 것은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중략)1296년 착공된 피렌체 대성당의 돔은 1418년까지 시작도 하지 못했다. 문제는 이전 세기에 건물이 설계되었을 때, 아무도 로마에있는 판테온의 돔보다 규모가 큰 이 돔을 어떻게 지을지 의견을 내지 못하였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 이래로 이러한 크기의 돔은 없었다.) 도시 신부들이 버트레스를 금지했기 때문에 길고 강한 (그리고 충분한 양의) 비계로써 작업을 하기 위한 서까래를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했다. 이 크기의 돔이 어떻게 지어질 수 있을지 또는 붕괴를 막을 수 있을지는 불확실했다. 압축응력이 이 시대에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것과, 또 이 시기에 사용된 모르타르가 꽤 오랜 시간 비계 위에서 변형을 유지하면서 장시간 기다려야 자리를 잡는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1419년 양모 상인 조합,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Lana)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설계 경기를 연다. 두명의 주요 경쟁자,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중 브루넬레스키가 우승하여 돔 짓는 의뢰를 맡게 된다.
설계 경기의 문제는 계란을 대리석위에 세우는 것이였다. 경기에 참가한 유명한 건축가들 중 오직 브루넬레스키만이 해냈는데, 조르조 바사리의 의하면 "...그는 계란 한 쪽을 대리석에 쳐서 계란을 바로 세웠다... 다른 건축가들이 자신들도 그런식으로는 세울수 있다고 항의하자, 브루넬레스키는 웃으면서 자신의 디자인을 보면 다른 건축가들도 돔을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설계 경기에서 브루넬레스키의 답은 콜럼버스의 달걀이라고도 알려져있다.)
돔, 랜턴(1436년-1450년경 지어짐)과 엑세드라(1439년-1445년 지어짐)는 브루넬레스키의 생애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건축학적인 설명은 생략합니다!)
브루넬레스키의 성공은 그의 기술적 수학적 천재성의 출중함 덕분이었다.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두 교회들, 산 로렌초 디 피렌체 성당 (1419년-1480년대)과 산토 스피리토 성당 (1441년-1481년)은 르네상스 건축의 역사적 건조물로 평가되며 후자는 그의 생각에 보다 더 밀접하게 따라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두오모 돔의 일부 도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브루넬레스키의 돔 by 브루넬레스키 / 1420~36년
'그는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미술의 영역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견으로 지금까지도 수백 년 간 미술학도와 예술가를 통하여 미술을 지배했던 원근법의 과학적인 발견 또한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전자에 인용했던 단축법을 이해했던 그리스 미술가들이나 공간의 깊이를 능숙하게 표현했던 헬레니즘 미술가들조차도 물체가 뒤로 물러갈수록 수학적인 법칙에 따라 그 크기가 작아진다는 논리적인 사실은 명확히 알지 못했다."
기하학적인 수학의 법칙에 의거해서 그려진 최초의 그림이 '마사초'의 <성삼위일체>이다. 동시대에 피렌체에서 활동한 브루넬레스키와 마사초는 친밀한 관계였고 브루넬레스키의 획기적인 발견이 자연스럽게 마사초에게도 전수가 되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27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마사초'는 많은 그림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르네상스의 천재 중 한 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추앙자 중 한 명이었다.
"조토 이후 마사초가 등장할 때까지 미술은 쇠퇴일로를 걸었다. 마사초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거장의 진정한 스승은 자연이며, 그 외에 다른 방식을 추구하는 작가들의 작품은 덧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마사초(Masaccio, 1401년 12월 21일 ~ 1428년)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마사초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산조반니발다르노에서 1401년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의 어머니는 늙은 약방 주인과 재혼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후의 마사초의 성장 과정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남아 있는 문서상의 기록으로는 1422년 마사초는 당시 피렌체 화풍을 이끄는 메디치 화가조합(Medici e speziali)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미술에 대한 정열이 지나쳐 외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지저분한 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1423년에서 1425년 사이에 마사초는 많은 인물화와 프레스코, 그리고 성당의 제단화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마사초의 프레스코, 특히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의 브란카치 기도소(Cappella Brancacci)에 마솔리노와 함께 구약 및 신약성서의 내용을 주제로한 프레스코는 르네상스 미술의 효시라고 미술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복원도인지 아리송~~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성삼위일체 by 마사초 / 1427~1428년
대좌위에 하나님이 좌정하고 (성부) 예수께서 십자가 박해중으로 묘사되고(성자)사이를 잇는 하얀비둘기(성령)를 표현하여 삼위일체를 그림으로 표현
아래쪽의 왼쪽은 성모마리아 오른쪽 성 요한이 앉아있다. 측면에는 작품제작의 기부자로 추정 되는 인물들이 있다
벽화는 르네상스 시대 회화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높이 6미터에 달하는 벽화를 통해 한번도 예술가들이 구현하지 없는 완벽한 환영illusion을 구현했다
실제 관람자의 눈높이에 맞춰진 원근법의 소실점
회화에 최초로 적용된 마사초의 '1점 투시원근법'은 그림에 공간감과 입체감을 불어넣었고 자연광을 이용한 빛의 효과로 양감과 질감을 살렸다. 원근법은 실제 관람자의 눈의 시점으로 그려져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깊이감을 극대화시켜 실제 풍경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을 유발하는 마법으로 당시 피렌체 사람들은 충격과
놀라움에 휩싸였다고 한다.
실제 풍경처럼 보이는 착시실점을 그림의 아래 180cm정도에 위치하여 그림에서 관객의 키에 맞추어 눈높이의 위치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기 위함 이었다.
기계나 건축물을 설계하듯이 소실점의 정 중앙에 못을 박아 선을 그어가며 정확한 수학적 계산을 통해 환영을 구축하여 만들어진 마법과 같은 그의 그림에 모두들 경탄했다. 르네상스 회화의 판도는 마사초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
마사초는 그후 로마로 여행갔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전염병 페스트로 죽은 듯 한다. 마사초가 죽고 나서 원근법이 이론적으로 완전히 정립 되었고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들
은 그의 작품을 찾았다.
레오나르도 ..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등...
고작 6년 동안 활동하며 전성기는 3년에 불과 하지만 피렌체 예술가들은 입소문으로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 몰려 왔다
그림의 주제와 표현방식도 대단했지만 사람들은 착시현상에 경탄했다.
그림을 보다가 공간 뒤쪽이 진짜가
아니라 그림이었다는 것을 알고 놀랬다. 제단 뒤쪽이 모두 그림으로 사람들은 그것을 확인하려 몰려들었고 마사초는 역사에 한번도 존재 하지 않았던 그림을 그려냈다.
브란카치 예배당 프레스코화, 성 베드로의 헌금(성전세) by 마사초 / 1425~1427년
마사초가 브란카치 예배당에 그린 ‘성전세’다. 신성과 관계없는 장면이지만 교황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차원에서 포함됐다.
*베드로 성금(Peter's pence)은 가톨릭 전례력에 따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사도 대축일에 접하거나 포함된 주간인 교황 주일(Dominica Papalis)에 국제적으로 거둬들여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지는 특별 헌금이다. 교황에게 바치는 기부금이나 세금은 영국에서 알프레도 왕 시절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이 노르만족에게 정복된 이후에도 영국의 왕들은 계속해서 베드로 성금을 부과하여 교황에게 바쳤다. 그러나 정국의 혼란으로 인해 징수상의 어려움을 느끼자 가정에게 부과되었던 것이 각 주교 관구에 일정한 세액을 할당하여 채우는 형식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각 관구 주교에게 성금 징수의 의무가 부과되자 주교들의 범법행위가 만연했다.
1213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영국 주교들이 징수된 베드로 성금에서 상당 부분을 빼돌린 후 교황청으로 보낸다고 질타하였다. 이 이후에도 영국의 주교들은 그 후에도 횡령을 멈추지 않았다. 13세기 이후 징수된 베드로 성금의 가치가 16세기 종교개혁기 이후 확연히 떨어지면서 그 중요성을 잃어버렸다. 영국은 영국국교회가 로마가톨릭에서 분열된 이후 베드로 성금의 징수를 전면 중단하였다. 그 후 3세기가 지난 1860년대 비오 9세에 의해 다시 부활되었는데, 오늘날에는 가톨릭 주교 관구가 교황에게 자발적으로 바치는 헌금의 성격을 띈다.
브란카치 예배당은 성 베드로를 기리기 위한 교회로 중앙에 예수를 배치하긴 했지만 이 그림의 주인공은 성 베드로임.
연속 서사 방식의 그림으로 성경의 마태복음 17장 27절을 표현하고 있다. 위의 세 장면을 통해 성 베드로는 3번 등장하는데 파란색의 상의와 오렌지색의 토가를 걸치고 있는 인물로 특히, 장면 2에서 물고기 입에서 돈을 꺼내는 인물 또한 성 베드로이니 잊지 말기 바란다
"우리가 그들을 화나게 하지 않도록 호수로 가서 낚싯줄을 던져라. 첫 번째로 잡은 물고기를 잡아 입을 열면 4드라크마 동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져다가 내 세금과 당신의 세금으로 그들에게 주어라"_마태복음 17:27
발을 주의 깊게 보면 빛과 함께 그림자의 표현을 볼 수있는데, 고대 이후로 그림자를 이렇게 일관성 있고 과학적으로 사용한 예술가는 없었다. 이러한 그림자의 표현
으로 인물은 풍경 속에서 실제로 돋보이고, 빛은 한 방향에서 오고, 하늘에 있는 태양은 같은 쪽에서 모든 인물을 비추고 땅에 그림자를 드리워 역사상 처음으로 그림에서
날씨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예수의 얼굴이 소실점이 되는 선형 원근법과 멀리 있는 산을 흐릿하게 표현한 공기원근법
고딕의 절정기에 '조토'가 르네상스의 문을 열었다면 '마사초'는 그 문 뒤의 르네상스가 나가야 할 길을 닦은 작가로, 혁신적인 공간의 창조와 인간과 자연의 생동감 있는 표현으로 '최초의 르네상스 화가'로 평가받는다.
끝으로 "카르미네 수도원의 브란카치 예배당과 마사초"를 소개하며 르네상스 입문을 마감하고 다음편으로 총총~~
카르미네 수도원의 브란카치 예배당 앞에서 화가 지망생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후에 가장 많은 제자를 둔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화가 마사초(Masaccio, 1401~1428년)를 꼽는다. 후대 르네상스 화가들이 이 화가의 작품을 베끼기 위해 카르미네(Santa Maria del Carmine) 수도원의 조그마한 예배당으로 몰려들었다. 미켈란젤로도 수시로 이곳 예배당을 방문했다고 한다.
후원자를 내세우기 좋아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예배당을 후원자의 이름을 빌려 ‘브란카치 예배당(Cappella di Brancacci)’이라 부르지만, 당시에는 ‘시민을 위한 성모 마리아 예배당’으로 불렸다. 선조들이 영혼을 기리는 개인 소유 예배당이라기보다, 시민 공동체를 위한 신앙적 공간이란 느낌이 든다. 이렇게 작품이 남겨진 공간이 기존에 사용해오던 것처럼 망자(亡子)들의 영혼을 기리는 예배당이 아닐 경우, 먼저 예배당의 용도부터 정확히 해두는 것이 또 다른 작품 감상법이다.
카르미네 수도원이 세워진 아르노강 남쪽 지역은 당시에 대장장이, 목공 등과 같이 가난한 서민들이 살고 있었다. 당연히 신도들도 그리 부유하지 않았다. 다른 수도원처럼 부유한 상인들로부터 후원을 받지도 못했다. 또한 이곳 수도사들은 가난과 노동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며 장례나 치러주고 겨우 은화 몇 닢을 받는 정도였다. 정 어려울 때는 미사에 사용하는 십자가를 저당 잡혀 사용하기도 했다(실제로 은십자가를 18피렌체금화에 저당 잡힌 적도 있다).
수도사들이 장례미사를 드려주고 곡물과 사용하다 남은 양초를 탁발로 가져오면 신도들은 곡물로 빵을 굽고, 몽당 양초를 모아 새로운 양초를 만들어 판매했다. 다른 수도원들이 부자들의 시신을 수도원 지하에 안장하고 이들에게 예배당을 분양해 수익을 얻는 경제구조와는 사뭇 달랐던 셈이다. 그러나 가난했던 수도원은 이 같은 방식을 통해 점차 자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신도들 중 성공한 중소상인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낸 상인이 ‘펠리체 브란카치(Felice Brancacci)’다. 이 상인은 1200년대 후반 펜을 만드는 조그만 수공업자에서 출발하여 비단 장사로 부자가 된 가문 출신이다. 브란카치는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후 당대 피렌체 최고의 명문 가문(Palla Strozzi)의 딸과 결혼하는 행운(?)을 얻는다. 이 부인이 갖고 온 막대한 지참금 덕택에 한때 피렌체에서 516번째 부자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이 행운아에게 겹행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피렌체가 마침 밀라노와 전쟁 중에 있었는데, 전쟁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는 책임자로 임명됐다. 가난한 수공업자 출신이 정부 고위직까지 오른 셈이다. 이어 이 수도원의 평신도회(Compania di Disciplina) 회장으로 임명됐는데, 그러자 이 평신도회는 수도원과 정계를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자리매김한다.
당연히 그 핵심에 브란카치 가문이 있었다. 이 상인이 정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오던 평신도회에 자신의 예배당까지 모임 장소로 내어주면서 이 예배당은 공적인 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브란카치 예배당’이라 부르지 않고, ‘시민을 위한 성모 마리아 예배당’으로 불렸던 것이다.
이 장소를 장황하게 언급한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작품 "성전세"가 이곳에 있기때물~~
마사초가 브란카치 예배당에 그린 ‘성전세’다. 신성과 관계없는 장면이지만 교황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차원에서 포함됐다.
화가 마사초가 브란카치 예배당을 장식하는 주문을 맡게 되는 시기는 서로들 교황이라고 우기는 3명의 교황이 혼재하던 시기를 막 지나, 새로운 교황(마르티누스 5세)이 선출된 시점이었다. 하지만 로마 교황청은 로마의 토착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은 로마로 곧바로 돌아갈 수 없었다. 교황은 피렌체에 2년 동안이나 머물게 된다.
교황의 권위가 말이 아니었다. 제2의 교황청이 됐다고 여긴 피렌체 정부는 교황을 위해 교황권의 신성(교황 무류성)과 위엄을 다시 세우는 과업을 급선무로 여겼다. 정부는 정부 요직에 있던 브란카치 가문 소유의 예배당을 초대 교황이었던 사도 베드로가 행한 기적적인 장면들로 장식하기로 결정한다. 위상이 추락한 교황권의 신성을 회복하는 작품의 주제로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로마로 돌아간 교황은 브란카치 가문의 예배당을 후원한 신도들에게 40일간의 면죄부를 줄 정도로 감사의 표시를 했다.
화가가 예수가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는 장면에서 시작해,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치료하고, 그림자로 환자를 치료하는 장면들로 예배당의 벽면을 장식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런데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사도 베드로가 행한 기적과 관계없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그 장면이 바로 예수도 로마의 세리(稅吏)들에게 세금을 냈다는 ‘성전세·Tribute Money’라는 작품이다. 아마 교황과 피렌체 정부 사이에 불편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작품이 그려질 당시 피렌체는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전쟁 비용 조달의 책임을 맡았던 책임자가 예배당의 소유자인 브란카치였는데 시민들로부터 원성을 샀다.
교황에게 밀라노와의 전쟁에 대한 중재를 요청했지만, 교황은 “평화를 유지하시오!”라는 단 한마디를 할 뿐이었다. 한때 극진하게 모셨던 교황에게 피렌체 정부는 배신감을 느꼈다. 피렌체 정부는 또 한 번 다짐했다. “국가는 교회의 종소리나, 성직자의 주기도문으로 통치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그래서 피렌체 정부는 당시 가장 재산이 많았던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목표 모금액이 무려 12만5000플로린, 우리 돈으로 1000억원이나 되는 거금이다. 현금이 없는 교회는 성구용품이나 토지를 저당 잡히기도 하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성직자를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당연히 교황은 반발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 초대 교황인 사도 베드로의 기적적인 장면에 ‘성전세’라는 한 장면이 끼워 넣어지게 됐다. 이 그림의 정중앙을 보면, 예수가 12제자들과 함께 사도 베드로의 고향(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성문에서 로마의 세리가 통행세를 내라고 길을 막아선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 중 으뜸인 사도 베드로에게 “저기 연못으로 가 고기의 입을 벌려보면, 입 속에 은화 한 닢이 있을 것이니 그걸 세리에게 주라”고 신호한다.
이 그림 왼쪽을 보면, 회색 옷을 입고 흰 곱슬머리를 한 베드로가 고기의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으로 그려져 있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베드로가 힘겹게 보였는지, 화가는 사도 베드로의 얼굴을 불그스레 홍조를 띤 모습으로 표현해놨다. 이런 섬세함으로 화가 마사초는 후대 예술가들로부터 “인간과 자연에 생명을 불어넣는 위대한 예술가”로 칭송받게 된다.
이후 마사초는 갑자기 예술에 대한 열정과 충동에 못 이겨 로마로 떠나지만, 곧바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후에 마사초가 끝내지 못한 예배당을 다시 장식하게 된 화가 필리포 리피(Filippo Lippi)는 ‘죽은 어린아이를 살리는 베드로’라는 장면에 검은 모자를 쓰고 발이 없는 한 사람을 그려놨다. 그 자가 바로 화가 마사초를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받는 인물이다.
그림 한점 제대로 감상하기가 쉽지 않죠?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