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하고 가장 흔한 사고는 척수가 손상돼 사지를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척수손상은 대부분 외상이 원인이다. 대한재활의학회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척수손상 원인은 교통사고 45.4%, 추락 16.8%, 스포츠(스키, 다이빙, 승마 등) 손상 16.3%, 폭행 14.6% 였다. 외상이 전체 척수 손상의 90% 정도며, 척수결핵이나 척수염 등 병으로 인한 척수손상은 10% 정도에 불과하다.
흔히 ‘등골’이라 부르는 척수는 굵기가 손가락 정도이며, 머리카락보다 몇십배 가는 무수히 많은 신경들이 모여 척수를 구성하고 있다. 척수는 목에서부터 내려오며 팔-몸통-다리-항문의 운동과 감각을 통제하는데, 척추가 부러지거나 탈골 되면서 척수가 끊어지거나 짓이겨 지면 손상된 부위 아래쪽 신경의 지배를 받는 부위가 완전히 마비되고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아울러 방광기능, 대장기능, 성 기능 등도 지장을 받게 된다.
따라서 척수 손상 부위가 목 근처인 경우 팔 다리가 모두 마비되며, 가슴이나 허리 부위 척수가 손상되면 하반신만 마비된다. 뇌졸중 등 뇌손상으로 인한 마비가 감각은 남아있는데 반해 척수 척수손상으로 인한 마비는 감각까지 상실된다는 게 다른 점이다.
뇌나 척수같은 중추신경은 한번 손상되면 회복이 불가능하다. 말초신경은 끊어지더라도 이어주면 대부분 기능이 회복되지만 척수가 손상 당하면 그 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미세한 신경을 일일이 이어 줄 수가 없다. 따라서 척수손상에 대한 최선의 대책은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다치고 안다치고가 어디 제 뜻대로 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어느 정도 자기 의지로 좌우할 수 있다. 자동차 안전벨트를 매고, 방어 운전을 하며, 추락 위험이 있는 행위나 장소를 피하는 등 안전의식을 가지면 척수 손상 가능성이 크게 줄어든다. 예를 들어 겨울철 장갑을 끼고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걷는 일, 횡단보도 신호등을 기다릴 때 너무 차도에 바짝 다가서지 않는 일, 육체적 접촉이 많고 격렬한 운동을 삼가는 일, 운동 전 충분한 스트레칭으로 관절과 근육을 풀어주는 일, 술에 취해 의식을 잃지 않는 일 등이 모두 척수 손상을 예방하는 안전의식들이다.
안전의식이 철저하다고 척수손상을 입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안전의식이 없는 사람과도 비교할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척수손상 확률이 낮다. 미국 시카고 프리츠크의대 마이클 로이젠 교수에 따르면 차를 탈 때 안전벨트를 매는 것과 같은 안전의식을 갖는 것만으로도 수명이 3.4년 연장되는 효과가 있었다.
그 밖에 평소 척추 주변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을 꾸준히 하면 척수 손상의 가능성과 손상 정도가 크게 줄어든다. 척추를 보호하고 있는 근육이 외부적인 충격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한편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엔 절대 환자를 업고 뛰거나 팔다리를 붙잡고 들어 올리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척수 손상이 더욱 심해진다. 가급적 환자에게 손대지 말고 119에 연락해야 하며, 불가피하게 환자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라면 여러 사람이 몸 전체를 수평으로 들어 올려야 한다.
일단 척수손상을 입어 감각이나 운동능력이 상실된 경우엔 즉각 재활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미국 척수손상협회(ASIA)는 척수 손상으로 인한 장애를 다섯 등급으로 구분한다. A등급은 감각과 운동기능이 완전히 손상된 경우, B등급은 감각은 있지만 운동기능이 없는 경우, C등급은 운동기능이 있지만 근육의 힘이 중력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약한 경우, D등급은 근육의 힘으로 중력의 힘을 지탱할 수 있는 경우, E등급은 감각과 운동기능이 정상인 경우다.
이 중 A등급 환자는 입원해서 재활치료를 하더라도 90% 정도가 그대로 A등급으로 남는다. 이 말은 10% 정도는 B등급 이하로 좋아진다는 뜻이다. 또 B 등급 환자의 20% 정도는 퇴원시 D등급 상태로 좋아지며, C등급 환자는 절반 정도가 퇴원시 D등급으로 좋아진다. D등급인 경우 목발 등을 이용해 독립적인 보행도 가능하다.
따라서 척수손상을 당해 감각-운동기능이 상실된 경우라도 절망하지 말고 재활의지를 가다듬는 게 중요하다. 척수손상으로 감각-운동신경이 마비되면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절망하며 재활치료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하반신의 감각-운동기능이 완전히 마비된 경우라도 재활치료를 받으면 호스를 요도에 넣어 소변을 혼자서 뽑아낼 수 있고, 항문 주위에 자극을 주는 방법으로 대변도 볼 수 있다. 또 상체의 힘을 이용해 휠체어에 앉아 이동할 수도 있으며, 혼자 운전을 할 수도 있다.
하반신이 완전 마비된 가수 강원래씨도 요즘 승용차를 개조해 운전을 하고 다닌다고 한다. 그러나 재활치료를 받지 않으면 혼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대소변을 혼자서 처리할 수도, 밥을 먹기 위해 식탁에 옮겨 앉을 수도, 밖으로 외출할 수도 없다. 그 때 마다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야 한다. 삶의 질 재활치료를 받은 사람과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편 척수손상을 입으면 초기에 폐합병증, 심혈관계 합병증, 위장계 합병증, 욕창, 열 등의 합병증이 나타난다. 조금 지나면 관절에 칼슘이 달라붙는 이소성 골화증, 방광기능이 상실되는 신경인성 방광, 척수 안에 물집이 생겨 척수 손상 범위가 넓어지는 척수공동증, 자율신경 반사장애, 경직, 통증 등의 합병증도 나타난다. 이같은 합병증을 방치하면 운동-감각 장애가 심해질 뿐 아니라 사망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한다.
헬스조선 임호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