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디카시의 모방은 외형이 아니라 생성 원리에 대한 사유로 심화된다
-성자의 유골에 새긴 상형문자
나무의 묘비명
바람과 구름과 태양과 달과 별
온 우주가
성자의 유골에 직접 새긴 상형문자
■ 연화산 등산길
고향집에서 8킬로 거리에 연화산이 있다. 연화산에는 명사찰 옥천사도 소재한다. 요즘은 잘 만나지도 못하지만 걷쓰유 클럽이 일주에 한 차례씩 연화산 등산을 했다. 걷쓰유 클럽은 창신대 같이 근무하던 교수 3명의 모임이다. 모두 갑장이라 친하게 지냈는데, 모두 퇴임했다. 퇴임하고 간간이 만나며 걷쓰유 클럽이라고 내가 이름을 붙였다. 걷고 쓰고 유튜브한다는 뜻이다. 걷쓰유 클럽의 연화산 등산길에서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에 이끼가 감싸고 있고 이름 모를 분홍색 버섯이 돋아나 있었다. 그것이 날시로 포착된 것이다.
이 디카시는 모방론적 관점에서 그대로 받아 쓴 것이다. 예술이란 무엇을 하는가. 모방론은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철학적 응답이다. 그러나 모방을 흔히 오해하듯 ‘베껴 그리기’나 ‘현실 복제’로 이해하는 순간, 그 예술적 가치를 잃는다. 주지하듯 플라톤은 예술을 불신했다. 현실에서 느끼는 감각 세계는 이미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고 예술은 그 그림자를 다시 그리는 것이니 진리와 거리가 멀다는 관점이다. 플라톤의 비판 속에서도 중요한 통찰이 숨어 있다. 예술은 결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나 대상과의 어떤 거리 위에서만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이 거리는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예술의 조건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이 거리는 결함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전환된다. 예술이 모방하는 것은 사건의 표면이 아니라, 그 안에 작동하는 질서와 필연성이다. 예술은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일어날 법한 당위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역사보다 더 실재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모방은 근대에 들어서면서 세계는 닮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객체가 된다. 칸트는 예술을 자연의 모방이라 부르면서도, 그것이 결과의 모사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예술은 자연이 만들어진 결과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를 산출하는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모방은 외형이 아니라 생성 원리에 대한 사유로 심화된다. 현대 철학에서 모방은 다시 태어난다. 현상학은 사물을 재현하지 않고, 사물이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주목한다. 예술은 대상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스스로 현현하도록 조건을 마련한다. 모방은 닮음이 아니라 드러남의 방식에 대한 충실성이 된다. 예술에서 모방은 세계를 그대로 옮기지 않지만 세계가 없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이 긴장 속에서 예술은 세계를 닮고, 그 닮음을 통해 세계와 거리를 만든다. 모방은 복제가 아니라, 관계 맺기의 형식이다.
바람과 구름과 태양과 달과 별
온 우주가
성자의 유골에 직접 새긴 상형문자
이 디카시는 그 단절된 그루터기에 새로운 생명이 아름답게 죽음을 딛고 이끼로 번지고, 분홍빛의 작은 버섯들이 돋아난다. 이것이 자연의 이법이고 질서이다. 이 오묘한 현현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감정도 절제되고 개인적 해석도 뒤로 물러난다. 이 작품은 모방론적 관점의 한 전형이 된다.
앞의 논의에서도 충분히 드러났듯이 모방론을 자연이나 사물의 외형을 그대로 베껴 옮기는 재현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디카시의 모방은 그런 차원의 모사가 아니다. 자연을 흉내 내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자연이 이미 이루어 놓은 형상과 질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에 가깝다. 베어진 나무는 인간의 폭력을 증언하지만, 그 단면 위에서 새로 시작된 생명은 자연 그대로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디카시는 그 사실을 말하려 하지 않고, 다만 보여준다. 이때 모방이란 자연의 결과를 다시 만드는 행위가 아니라, 자연의 작동을 감각적으로 목격하고 기록하는 태도다.
이 디카시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점은 시인도 후경화되고 그와 함께 슬픔도, 연민도, 도덕적 판단도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오직 잘린 나무의 질감과 그 위에 퍼진 생명의 미세한 흔적들만이 전경화된다. 시인은 세계를 해석하는 주체가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한 발 물러서는 존재다. 사진기호는 시인의 시선을 과시하는 장치가 아니라, 자연이 이미 써 놓은 한 장의 상형문자처럼 기능한다.
날시는 분명하다. 죽음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다시 시작되는 생의 장면, 이 날시는 시적 충동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충동은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인식의 정지 상태에 가깝다. 그래서 문자기호는 절제된다. 바람과 구름, 태양과 달, 별과 우주라는 거대한 어휘들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의미의 과잉이 아니라 이 작은 단면이 이미 우주 전체의 질서를 내포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최소한의 지시다. 그러니까 이 디카시는 베껴온 것이 아니라 대상이 말하는 우주적 질서와 자연의 이법을 드러낸다. 모방론적 디카시에서 문자기호는 해석이 아니라 표식이며, 자연이 먼저 써 놓은 문장을 인간 언어로 조심스럽게 옮겨 적는 행위다.
이러한 창작 태도는 인간 중심적 서정에 대한 근본적인 이탈을 보여준다. 자연은 인간의 감정을 반영하는 배경도, 교훈을 제공하는 대상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개입 이후에도 자기 질서로 세계를 다시 조직하는 자율적 존재다. 모방론적 디카시 창작의 의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자연을 의미화하지 않고, 자연을 설명하지 않으며, 자연이 이미 말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것, 디카시는 그 통로가 된다.
이 디카시는 인간이 자연을 모방한 결과물이 아니다. 자연이 인간의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잠시 빌려 자기 자신을 기록한 하나의 사건에 가깝다. 베어진 나무의 단면 위에 새겨진 이끼와 버섯은 이미 완성된 문장이고, 디카시는 그 문장을 발견하고 결합한 극순간의 기록이다. 모방론적 디카시 창작이란 새로 쓰는 일이 아니라, 이미 쓰여 있는 세계를 정확히 보고, 찍고, 최소한으로 언술하는 일임을 이 작품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증언한다.
모방론적 관점에서 디카시를 쓸 때는 대상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렇다고 대상을 그대로 베끼기를 해서는 작품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을 다시 강조해 둔다. 디카시 창작은 모방론의 관점에서도 매우 유효하다. 자연이나 사물에서 날시를 포착하고 그걸 찍고 그 말을 받아 적는 방식이니, 극순간 멀티언어예술로서의 정체성을 잘 확보할 수 있다. 디카시의 출발점은 대상이면서도 대상을 넘어 선다. 날시는 대상의 단순 물질적 모습이 아니라, 그 대상이 지금-여기에서 잠시 취하는 존재의 형상이다. 그것은 오래 머무르지 않고, 해석을 기다려 주지도 않는다. 베끼기의 태도는 이 순간성을 파괴한다. 외형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는 대신, 날시는 이미 사라지고 만다. 남는 것은 사물의 정보일 뿐이다. 이때 디카시는 극순간 예술이기를 포기한다. 디카시의 본질은 세계를 따라가는 데 있지 않고, 세계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 동시에 발생하는 사건이 되는 데 있다. 그러나 대상을 그대로 옮겨 오겠다는 태도는 항상 사후적이다. 이미 지나간 순간을 붙잡아 두고, 그 위에 의미를 덧씌우는 것은 기록으로 바뀌고, 그 기록이 예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디카시와 사진시의 차이도 여기서도 확인된다. 사진시는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하는 날시를 전제하지 않는다. 사진을 대상으로 시를 쓰는 사진시는 사진은 시를 만들기 위한 매개물이고 보조자료이다. 디카시는 사진의 설명이 아니다.
디카시의 모방론을 그대로 베끼는 것으로 한정하면 그것은 대상과의 미적 거리를 확보하지도 못하는 동일화다. 모방은 거리 위에서만 성립하지만, 동일화는 거리를 지운다. 대상과 예술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는 순간, 예술은 대상을 비추는 창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의 복사본이 된다. 이때 예술은 세계를 드러내지 못하고, 세계에 흡수된다. 디카시의 미학은 바로 이 거리를 유지하는 데서 발생한다.
디카시는 닮기 위해서 베끼지 않는다. 오히려 베끼지 않음으로써 닮는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대상이 자기 자신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시인이 물러설 때,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는 비로소 긴장을 형성하며 하나의 사건이 된다. 디카시의 작품성은 얼마나 정확히 찍었는가에 있지 않다. 그것은 세계 앞에서 얼마나 침묵할 수 있었는가, 얼마나 빨리 응답했는가에 달려 있다.
베끼기의 유혹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디카시는 사진기호라는 이미지에 붙은 문장에 머문다.그 유혹을 넘어설 때, 디카시는 세계가 잠시 말을 걸어 온 흔적이 된다. 그리고 바로 그 흔적이, 디카시를 예술로 성립하게 한다.
■ 베끼기만 해도 작품이 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베끼기만 해도 작품이 되는 경우가 있다. 디카시에서 대상을 그대로 베껴 오는 방식은 대체로 실패로 귀결된다. 그것은 닮음이 아니라 동일화이며, 사건을 예술로 전환하기보다는 정보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의 역사에서 언제나 그러하듯, 예외는 규칙을 무너뜨리지 않고 규칙의 본질을 드러낸다. 어떤 순간에는, 어떤 대상 앞에서는, 그대로 베끼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사라진다. 경천동지할 사건이나 정말 특별한 대상은 그것 자체로 이미 하나의 완결된 날시인 경우가 많다. 이때 날시는 더 이상 잠재된 시적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스스로를 전면에 내세운 상태이며, 시인의 감각이나 해석을 기다리지 않는다. 세계가 먼저 말을 걸고, 시인은 그 호출 앞에 잠시 멈춰 선다. 이때 창작은 덧붙임이 아니라 응답의 정확성이 된다.
예컨대 대형 참사 직후의 무너진 구조물, 뒤엉킨 사물들, 침묵 속에 놓인 일상의 잔해들은 이미 어떤 은유보다 강력한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 장면 앞에서 시인이 의미를 구성하려 하거나, 언어로 감정을 정리하려 드는 순간, 디카시는 오히려 대상의 힘을 훼손한다. 이때의 사진기호는 미적 조형물이 아니라 증언의 흔적이며, 문자기호는 해석이 아니라 침묵에 가까운 최소한의 언술이어야 한다. 그대로 베껴 오는 방식은 빈곤이 아니라 에이전트로서의 시인의 최소한의 역할이다. 자연은 이미 모든 형식을 선점했고, 시인은 다만 목격자로 남는다. 사진기호는 자연의 흔적을 그대로 받아 적고, 문자기호는 날짜나 장소, 혹은 한 단어로 충분해진다. 그 단순함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앞에서의 절제다.
또 어떤 대상은 역사적 단독성을 지닌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사건, 다시는 같은 의미로 재현될 수 없는 장면은, 미적 변주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때 디카시의 작품성은 ‘어떻게 찍었는가’에 있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는가에 달려 있다. 그대로 베껴 온 디카시는 창작이라기보다 기록에 가깝지만, 바로 그 기록성이 디카시를 예술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 기록은 사후적 설명이 아니라, 사건과 거의 동시에 발생한 극순간의 응답이기 때문이다. 대상이 이미 완성된 날시이거나 사건의 충격이 해석을 초과하는 경우, 그리고 시인의 개입이 오히려 의미를 훼손하거나 침묵이 언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경우에는 그대로 베끼는 방식은 모방의 실패가 아니라 모방의 완성이 된다. 세계가 너무 강력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 시인은 창작자가 아니라 증인으로 호출된다. 그때 디카시는 현존의 예술이 된다.
첫댓글 꼭꼭 씹어 내 것으로 만들어봅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건강 잘 돌보십시오 교수님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