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내전에 상처받은 아이들 마음에 반창고를
김태향 수녀(맨 왼쪽)가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아 이웃 아이들을 만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씨뿌리는 사람들
미얀마는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국가이며 방글라데시와 인도, 중국, 라오스, 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국토 면적은 남한의 약 6.7배. 인구는 약 5470만 명으로 한국보다 조금 더 많습니다. 미얀마에는 135개의 소수 민족이 삽니다. 공용어는 미얀마어이지만, 소수 민족들의 언어도 다양하고, 영국 식민지 영향으로 영어도 사용됩니다.
1960년대 초반까지 미얀마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쌀 생산으로 아시아에서 몇 번째 가는 부자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네 윈 정부의 독재, 버마식 사회주의경제의 실패, 쇄국으로 인한 국가 경쟁력 상실 등으로 지금은 세계 최빈곤 국가 중 하나로 전락했습니다.
김태향 수녀가 사찰을 방문해 코로나19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는 스님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있다.
이웃종교 불교와 함께
저희 골롬반 수녀들은 1947년 미얀마 카친주 미치나에 도착해 지역 사회에 필요한 기숙학교를 운영했습니다. 이후 바모교구 호웨 주교의 초대로 환자들을 치료하며 진료소를 운영하던 중 1962년 군부 쿠데타 발생으로 6개월 만에 진료소를 폐쇄했습니다. 1966년에는 미얀마 정부가 모든 선교사에게 추방 명령을 내려 미얀마를 떠나야 했습니다. 우리를 잊지 않고 기도해준 사람들의 염원으로 2003년 다시 미얀마로 돌아왔습니다. 수녀들이 일하던 카친의 미치나에서 공동체를 열어 지역민들과 다시 함께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2008년 미얀마로 발령받은 후 양곤에서 언어 공부를 마치고 만달레이에 있는 수녀원 공동체로 왔습니다. ‘미얀마 불멸의 심장’을 뜻하는 만달레이는 미얀마 제2의 도시이며 불교 중심지로, 승려들의 본고장이기도 합니다.
공동체의 주요 사도직이 ‘종교 간 대화’이기에 이곳에서 불교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습니다. 스님들의 초대로 불교 사원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유치부 아이들에게 영어와 미얀마어를 가르쳤고, 저 또한 불교문화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미얀마의 불교 사원과 절들은 도심 속 사람들 삶의 한복판에서 일상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남성들이 일정한 나이가 되면 군대에 가듯이 이들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몇 년간 스님이 되어 생활합니다. 불교는 자연스레 이들의 삶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라도 스님들에게 아침마다 공양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이 덕을 쌓는 것이라 여기며 기꺼이 가진 것을 내어놓습니다. 이는 자식에게 헌신하는 우리 부모님들이나, 생활비 아껴 가난한 이를 돕는 선교 후원자분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미얀마 난민촌에서 김태향 수녀가 트라우마 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제공
트라우마 치료 프로그램
종신서원 후에는 에이즈 환우들의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을 지역 수녀님과 함께 운영했습니다. 그때 불교, 힌두교, 무슬림과 많이 접했습니다. 처음엔 천주교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곳이라 ‘아이들을 개종시키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부모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안심하고 적극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수녀님의 친구 스님이 계신 사원을 방문해 묵상법을 나누기도 하고, 성탄절에는 타종교 친구들을 초대해 예수님 탄생의 의미도 나누고, 잔치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곳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이들에게 더 깊이 도움을 주고자 공부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원에서 아동심리치료학을 공부했습니다. 놀이치료와 모래치료도 배우며 자격증을 취득하고, 상담소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실무도 익혔습니다. 제가 배운 것들이 저를 기다리는 어린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3년간의 공부를 끝내고 다시 미얀마로 돌아와 배운 것을 아이들을 위해 썼습니다. 이 일의 필요성을 보신 교구에서 장소를 내줘 놀이치료센터를 열었습니다. 특수 아동들을 초대했고, 물리치료사를 구해 필요한 치료도 병행하며 놀이치료, 인지치료를 개별적으로 펼쳤습니다.
미얀마에서 아이들의 심리치료를 돕는 전문가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미얀마 수도자들의 모임인 장상연합회에서 교육분야 수녀들을 위한 특별 워크숍을 열도록 허락해줬습니다. 교육에 참석한 수녀님들에게 특수 아동교육을 소개하고, 직원들에게 트라우마 치료 프로그램도 강의했습니다. 또 정치적 상황으로 힘든 일을 겪은 아이들을 위해 집단으로 트라우마 치료를 했는데, 밝아지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코로나 그리고 쿠데타
지난 3년간 미얀마 정부의 강도 높은 거리 두기 정책으로 외출이 제한되고, 회사와 상점들이 문을 닫아 많은 이가 직장을 잃고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열었던 놀이치료센터도 문을 닫고 상황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일용직으로 근근이 생활하던 특수 아동의 가족들, 생활이 어려운 가족들과 어떻게 어려움을 나눌지 고민했습니다. 그들에게 쌀과 식용유, 감자 등 식료품과 마스크, 그리고 특수 아동들이 가정에서 할 수 있는 활동들을 준비했습니다. 짧게 끝나리라 여겼던 팬데믹이 길어져 지쳐갈 즈음, 정책이 완화돼 상점들이 다시 문을 열고, 조금씩 괜찮아지리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쿠데타로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모든 미디어가 중단돼 고립 상태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정전으로 인한 암흑 세상에서 외부로의 통신도 모두 끊기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거리행진을 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표출했고, 가톨릭교회도 묵주기도를 하면서 행진했습니다. 수녀들도 이웃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바람과 열정은 무력 앞에 점점 작아지고, 지쳐갔습니다. 이웃과 가족들이 하나둘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검문검색이 강화되고, 밤에는 성당을 포함해 주거지 검문이 이어졌고, 군용기가 쉴새 없이 밤하늘을 가르며 다녔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속에서도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보여주셨습니다. 두렵고 불안한 상황에도 밤새 우리가 괜찮았는지 찾아오는 친구들, 음식을 챙겨주며 걱정해주는 이웃의 따스함을 받으며 선교사의 삶이 더불어 살아가는 삶임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한국으로 들어가 비자가 갱신되면 다시 오기로 결정되어 잠시 귀국한 때가 있었습니다.
미얀마로 가는 비행기 운항이 중단되고, 비자 발급이 어려워져 휴가가 길어졌습니다. 함께 살았던 이웃들이 어려움을 겪는데, 저만 떨어져 나와 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전화하거나 메시지를 할 때면 ‘언제 만달레이로 돌아오느냐?’고 묻거나, 아이들이 ‘수녀님 언제 오시냐’며 기다린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조바심도 나고 미안했습니다.
사랑의 씨앗이 열매 맺길
이후 비자를 갱신하고, 미얀마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사는 이곳 미얀마 만달레이 사람들은 힘든 정치적 상황에서도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간간이 멀리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총성이 들릴 때나, 정찰 다니는 군인들을 만나면 잊고 있던 상황을 인지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한국에서 오랜 기간 선교사로 계시는 선배 골롬반 수녀님들과 신부님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제주도 출신인 저는 지역 사회와 교회 안에서 그분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수녀회에 입회해 선교 수녀가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뿌린 씨앗의 열매인 저는 이곳에서 다시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씨뿌리는 사람’이 됐습니다. 제가 뿌리는 씨앗들이 만나는 아이와 가족들에게 사랑으로 뿌리내리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이끄심에 저를 맡기고 그분이 저를 통해 일하시리라 믿습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8)
후원 계좌 : 국민은행 016701-04-028749
예금주 : (재)천주교성골롬반외방선교수녀회(미얀마선교)
김태향(데레사) 수녀 / 성골롬반외방선교수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