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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도들의 '기도의 향연'
하나님이나, 하나님아버지라고 불러버릇하고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글을 쓸때도
그 단어로 썼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창조주신'이시다.
하나님이나 하나님아버지는 기독교에서
작명해드린 이름이다.
하나님은 본인을 향해
'I am who I am' 이라고 하셨다.
스스로 있는자.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가르쳐 주신
하나님 자신의 이름(출 3:13-14).
이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지존하시고 영존하시며
완전하신 본질, 그리고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성품이 담겨 있다.
곧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변함 없으시며
타인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그 뜻하신 바를 성취하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자이심을 나타낸다
글짓기도 제일 못했던 내가 글을 쓰게 되면서
창조주 신께서는 처음부터 완벽한 자료를
쓰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을 보고 남편은 그랬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 몸 안에 계신다면서
처음부터 완벽하게 쫘악 쓰게하시지 초벌로
쓰고 계속 수정해서 완결을 보게하시냐고.
잘못된 글 아니냐고.
누가 뭐라해도 믿던지 말던지 창조주 신께서는
단번에 한번에 하시지 않는다.
영의세계는 한번에 단번에 그냥 쫘악이지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육의세계는 절대 그렇지 않다.
내가 합창단을 다니다가 가정 경제가 어려워져서
합창단을 다니면서 알바를 하려고 찾고 있었는데
연습이 주중에 있는 관계로 그런 알바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신문사 총무과로 들어가서
편집을 배우면 되지 않겠니?" 라는 감동을 주셔서
주간지 총무과로 들어가서 얼마안돼 편집을
배우게 되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다.
실제로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신문사를 들어갔지만
하나님께서 한번에 쫘악 편집을 할 수 있도록
번뜩이는 지혜나 기능을 자동으로 익히도록 하시지
않으셨다.
그때 당시는 세로편집시대였으며, 바로 가로편집으로
바뀌는데다가 수작업에서 컴퓨터 화상편집으로 바뀌게
되었을 때여서 내 앞에서 나를 가르쳐 줄 편집선배가
없었다.
그래서 편집 할 수 있는 매킨토시 컴퓨터를 혼자 터득하다시피
배우게 하시고, 회사며 인쇄소며 경기도 바닥을 장돌뱅이처럼
굴리시며 밤을 새며 실수를 연발하며 일하면서 배우게 하셨지
그냥 머리속에 편집기능을 넣어주시지 않으셨다.
하지만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는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배운 것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영의세계나
영적인 깨달음은 그냥 일방적으로 내 머리 속에 넣어주셨다.
지금 성경에 대해서나 영의세계에 대해서 계속 쓰고 있는
글들도 내가 어디가서 배워서 필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머리 속에 넣어주신다.
하나님의 지식 일부를 단어 단어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공유 한다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냥 알게 된다.
어느 과학자의 머리와 내 머리가 공유를 하게 되면
나는 그 과학자의 지식을 그냥 알게 되는 것이다.
"왜 신학자나 목사한테 하시지 나한테 그러세요!"
라고 따지듯이 덤비고 글 쓰는 것을 실행하지 않으면
잠을 안재우신다.
남편은 자기도 그런 경험을 하고 싶다고 한다.
몇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다 귀찮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던 말던 생활되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무슨 특혜가 있어야 재미있지!
그리고 무언가 잘못하고 말을 안들으면 기침이 나온다.
목구멍이 톡톡 간지러운 기침.
감기가 아닌 그냥 마른 기침이 나오는데 짜증난다 증말!
나에게서 제발 떠나시라고 빈다. ㅠㅠ
써야 하는 곳을 쓰지 않고 개기면 머리속에서
단어들이 마구 마구 돌아다닌다. 곤혹스럽다.
나의 정신과 생각 머리끄댕이를 묶어가지고
공중에서 끌어올리는거 같다.
머리가 탱탱하니 잠이 안온다.
전에는 나도 성경공부를 좋아해서 성경을 많이
알고싶어했지만, 지금은 힘들어서 관심이 없다고
외쳐도 소용이 없다. 이쪽길로 몰고 가신다.
옛날의 모르고 믿었던 종교생활이 더 좋다.
아주 일방적이시다. 나의 주장은 없다.
그런데 가르쳐 주실수록 더 모르겠다.
너무 광범위하니 머리가 터질라고 한다.
☞육의세계법은 갱신
육의세계는 모든 것이 갱신되는데 물건들도 계속
업그레이드 되어서 새제품이 나오는데 성능도 좋고
오래쓰고 가격도 처음에는 비싸다가 갈수록 착해지고
제품도 가지가지로 많고
신제품이 계속 쏟아져 나오고, 신약도 계속 쏟아져 나오고,
먹을 것도 계속 쏟아져 나오는 현재의 살기 좋은 세상도,
이런 갱신의 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계속 구석기 시대를
살게 되는 것이다.
나라법도 계속 갱신된다.
이 나라법이 갱신되기 위해서는 누군가 손해를 보았다든지,
누가 죽었다는지 하면서 필요성에 의해 갱신되고 있다.
소를 잃어봐야 외양간을 고친다. 소를 잃은 사람이 멍청하고
잘못하고 해서 잃은 줄 알았더니 아니다 그냥 인생이 그렇다.
소의 잘못이나 소를 잃은 사람의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소 당사자와 소를 잃은 사람은 무척 슬프고 괴롭다.
처음에는 힘이 센 자가 법이었다가, 왕의 법으로 갱신 됐고,
각 나라법도 형성됐고, 국제법도 생겼다.
이런 법들은 상황에 따라 계속 갱신된다.
국회에서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
영의세계에서는 창조주 신께서 하시고 계신다.
이런 법은 세계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도 있고
우리나라만 해당되고 저 나라만 해당되는 법이 있다.
헌법이 그렇다.
그 나라 사람 성품에 따라, 그 나라 기후에 따라,
그 나라 지형에 따라, 그 나라 생산물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선배의 인생법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자연에서 무언가를 먹고
죽는 자가 있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먹으면 죽는다는 자연법이 형성되며
구전으로 전달된다.
그 법을 무시하고 그것을 먹으면 내가
죽기밖에 더하지 않는다.
(잠언 5:11~14) "두렵건대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
네 육체가 쇠약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큰 악에 빠지게 되었노라
하게 될까 염려하노라" 아멘.
누군가 무언가를 먹고 건강하게 되었거나
무엇을 하면서 죽다가 살아났다거나 했다.
우리의 인생 선배들은 그렇게 실험도구로 사용되고
약을 써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했다.
그런데 가만보니 먹는 것을 가지고는 이렇다 저렇다
딱부러지게 말을 못하겠다. 똑 같은 것이라도
누구에게는 괜찮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기 때문이다.
☞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법
담배를 엄청 많이 피우는데 죽기도 하고 그냥 살기도 하고,
담배를 하나도 안피우는데 폐암으로 죽기도 하고 그냥 살기도 한다.
예수는 "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 하셨는데 정말인가보다.
내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나보다.
기독교인 조차도 성경에 써 있어도 믿지 않지만.
(마태복음 15:17~20)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아멘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지금도 병원에서
어떤 병에 좋은 약을 개발하기 위해 임상실험 대상자를
모집하고 있다.
지금에야 병원이라는 곳이 있어서 임상실험을 하지
병원이나 의원이 없을 시절에는 누군가 무엇을 먹고,
누군가 생활습관이 어떻다는 것을 보고,
누군가 깨닳은 자가 알려주고 구전으로든 책으로든
적어서 후손들에게 전달해줬다.
너는 조심하고 건강하게 오래 잘 살으라고.
법은 또 이 가정만 해당되는 법도 있고 저 가정만
해당되는 법도 있다. 주권을 가진 아버지나 어머니나
남편의 법들이 다들 달라서 그렇다.
어떤 집은 자녀에게 밤 8시 통행금지, 9시 통행금지
시키고, 어떤 집은 밤새 놀다 들어와도 괜찮은 집이
있다. 부모의 법이 다르다.
어떤 집은 공부를 죽어라고 시키는 집이 있고
어떤 집은 성적표 확인도 안하는 집이 있다.
부모의 법이 다르다.
(잠언 6:20~23)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아멘.
☞두가지 '기도의 향연'
창조주신께서는 이런 것들도 꼭 양파 껍질을
하나하나 벗기듯이 하나씩 알려주시고 바꾸게
하신다.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으시다.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하고 눈치채지 못한다.
주께서 그렇게 몰아가신다. 정말 그냥 진화같다.
성경을 쓰게하실 때도 한시대에 한날에 한꺼번에
쓰게 하시지 않고 몇 천년이 지나면서 이사람
저사람에게 이렇게 쓰게 하시고 저렇게 쓰게 하시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두루마리 글을 모아 성경으로
집필하도록 하셨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다. 사도 요한을 통해서
쓰게하시고 돌아다니게 하시다가 성경속으로
들어가도록 하셨다.
그동안 성경이라는 것을 기독교 것인줄 알고 있었고,
성경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 자들만의 것이라고 알고
있어서 요한계시록도 기독교인들을 위한 책으로 알게
되었고, 기독교인들만 휴거당하고 모든 환란에서
무사통과하며, 죽어서 가는 천국까지 기독교인들만
해당된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기도의 향연'을 교회의 기도라고
믿게 됐다. 그리고 아무 생각이 없이 넘어갔다.
그냥 그 기도로 악인들에게 우레와 번개와 지진으로
사용했나 보다 했다.
그야말로 기독교인들의 기도로, 나쁜 사람들에게나
타 종파들에게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으로
사용됐다고 알고 있었다.
기도의 향연도 한 가지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도의 향연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상 받을 사람들의 기도의 향연이다.
(계 5: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
들이라" 아멘.
(계시록 5: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아멘.
또 하나는 징계 받을 사람들의 기도의 향연이다.
교회 교인들이나 종교인들을 성도라고 부르고
그들만 해당된다고 알면 안 된다. 누구나다.
살아있는 인생들 누구나.
(계시록 8:3~5)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아멘.
이렇게 두가지만 기록해서 그렇지 이런 기도의 향연은
인간들이 살아있는한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학교적으로, 직장적으로, 지역적으로, 사회적으로,
나라적으로 실시간 합산 되어 올라간다.
인간은 생각할 수 없을만큼 영의세계는 복잡하다.
기도의 향연이 주의 앞으로 올라갔다가
땅으로 다시 쏟아지는데 환란 풍파로 쏟아진다.
왜? 무슨 기도를 어떻게 드렸는데, 자기가 나쁘게 되게
해달라고 빌었을리는 없고, 누구 나쁘게 되게 해달라고
빌었나? 그래서 그 기도는 기도자의 상대방에게
환란 풍파로 떨어졌나? 궁금했어도 그냥 넘어갔다.
게다가 '기도의 향연'을 교회에서 손 모으고
무릅 꿇고 기도드리는 그 기도로 알고 있었다.
영의세계에서의 '기도'는 개나 소나 누구나의
'호흡'이다. 살아있다는 것. 생각 말 느낌 눈길
사고 관습 취미 동기 목적 등 선함 악함 미지근함
그야말로 인간이 살이있어서 행하고 말하고
척하고 상대에게 이렇게 저렇게 대하고 집에서
밖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나라에서
행하는 모든 삶을 말한다.
그 살아있는 인생 자체가 호흡이며 기도이다.
https://cafe.daum.net/mizzkwon/KdtU/158
☞구약 의인 인물
어린이 복음성가 중에서 "어린 사무엘 교회 갔어요,
나도 갈래요 나도 갈래요" "어린 사무엘 기도했어요,
나도 할래요 나도 할래요" 라는 노래가 있다.
구약시대의 사무엘까지 교회로 끌고 가서 기독교식으로
해석하려니 교회에 간다고 한다. 기도한다고 한다.
사무엘이 젖을 떼고 엘리제사장에게 가서
'작은 에봇'을 입고 제사장의 시중 드는 아이로 성장한다.
젖을 떼면 두 세살 정도 될텐데 이때 바로 들어갔을리가 없다.
그래도 뭔가 말귀를 알아듣고 심부름을 할 정도여야
어딘가 보낼 수가 있다.
그러려면 상식적으로도 4살 이상은 되야 한다.
불교에서는 '동자' 라는 말이 있다.
기독교에는 동자라는 말이 없다.
'동자'라는 뜻은 불교에서 4세 또는 8세 이상 20세
미만으로 아직 체발득도(剃髮得道)하지 않은,
즉 출가(出家)하지 않은 남자를 말한다.
여자의 경우에는 동녀(童女)라고 한다.
또한 보살은 부처의 아들이므로 동자라 하며,
또 부처·보살·제천(諸天) 등을 따라다니며 받드는 자도
동자·동지승 또는 천동(天童)이라고 한다고 되어 있다.
나도 불교에는 어린 아이가 머리 깎고 중 처럼 성장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하지만 교회에는 어린 아이가 목사의
시중을 드는 '동자'의 개념은 없다.
주일학교는 있지만 그런 것은 그냥 성경을 공부하고
율동을 배우고 하는 학년대 별 프로그램의 일종이지,
목사로 크기 위해 목사를 도울려고 아예 성전에 들어가
사는 아이들은 없다.
부모가 아무리 주의 종으로 하나님께 바친다고
서약기도를 해도 신학교를 나오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 부모가 뒷바라지 해주지 교회로 들어가서
목사들이 키워주는 거 없다.
사무엘을 지금 현재의 교회의 선배로 끌고 가려니까
그런 에러가 난다. 사무엘은 지금의 말로 하면
절 같은 곳에 스님을 돕기 위해 '동자' 로 들어간
것이다.
동자는 아예 성전에 들어가서 청소도 하고 밥도 하고
선배를 돕는 일을 하려고 세상을 끊고 들어간 것이다.
한나가 바쳤듯이 부모가 바치는 것이다.
뒷바라지 개념이 아니라 보내버리는 것이다.
엘리 제사장에게 사무엘을 보내버린 한나는 아이가
커가므로 해마다 '에봇'을 지어서 남편과 제사 드리러
올라갈 때마다 사무엘에게 주었다.
그 정도의 뒷바라지는 했다.
성전이라는 곳은 이스라엘이 정치도 하고 신께
제사도 드렸던 장소로 한 장소에서 두가지 일을
행하였던 곳이다.
지금 현재 한국 같은 경우는 '청와대'가 따로 있고
'헌법재판소'가 따로 있고, '국방부'가 따로 있고
'국립합창단'이 따로 있고, 각 행정처가 따로 있지만
옛날에 '궁궐'이라는 곳에서 정치와 제사가
다 행해졌다고 비유하면 된다.
이스라엘은 '단일신'이라서 이렇게 '성전' 안에서
정치, 제사, 국방부, 헌법재판소, 합창단 등 모든
것이 실행될 수 있었지만 한국은 많은 종교로
인해 이렇게 할 수가 없다.
종교가 전국적으로 퍼져있다.
이스라엘의 '성전' 이란 '궁궐' 같은 곳이다.
성경에 나오는 성전이 지금의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기독교의 것이 아니다.
성경은 기독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모두 해당된다.
하늘 땅 바다 우주 전인류 몽땅, 전부, All.
☞선배는 지옥 후배는 천국?
(요한복음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멘.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고,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다고
입으로 시인하는 기독교인들만 천국 가고 나머지들은
전부 지옥에 갔다고 하는데, 앞으로도 갈 것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데려가버리셨다고
하는 에녹이나, 홍수때 건짐 받은 노아나, 그의 자녀들이나
후손들이나, 그 유명한 예수의 조상 다윗왕이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창세기부터의 예수가 태어나기
전에 태어나서 죽은 모든 인류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안 믿고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들 지옥에
갔을텐데... 잘 보내드렸다 지옥에 기독교가.
뿌리(창세기인들)가 썩고 줄기(유대교인들)도 썩고 했는데
어떤 과실이 맺혀져서 그 과실(기독교)만 천국에 들어간다고
주장하는지 아이러니하다.
왜 성경 속의 모든 의인 같은 인물들이 기독교의 선배들로서
칭찬 받고 영웅대접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왜 기독교 설교 속의 의인예화로 들어와야 하는지 아이러니하다.
예수 탄생 이전의 창세기부터의 성경속 사람들은
지금의 기독교와 상관이 없다.
성경 속의 이방인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방인 조차도 지금은
기독교의 이방인처럼 치부하는 설교를 듣는다.
기독교인들도 이스라엘의 이방인들인데.
창세기 속 그들은 그냥 세계적인 일반 사람들이었으며,
대한민국의 원 조상이 '단군할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나라의 원 조상이 '아브라함'이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며,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였지만 나중에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졌다고 밝혀주는 것이며,
더 나중에는 유다인만 정통이라고 밝혀주는 것이다.
유대후손인 '에스라'가 자기네들이 정통 아담의 후손이라고
조상 대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조상들의 이름을 밝혀놓은 것이
성경 '역대상'이다.
그래서 에스라는 역대상에서 유다 나라 역사만 기록하고,
개 같이 섞인 민족인 북이스라엘의 역사는 기록에서 빼버렸다.
결국 유다족만 선민이라는 것이다.
☞유대인=기독교인?
우리나라 역사실록도 마찬가지다.
누가 어느 관점에서 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도 있다.
조선역사를 편찬할 때 자기 당이 유리한 쪽으로 기록하는 것과
비슷하다. 훌륭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상대쪽 당일 때는 짧게
기록하고(이이졸) 나중에 그 당이 정권을 잡을 때는 그 짧게
기록한 기록을 길게 재편(3장 분량)할 수도 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다. 기독교 원조도 아니다.
기독교적으로 보면 그 모든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어서
다들 지옥에 갔을텐데, 그들을 천국에 가야만 하는
기독교 선배들로 비유하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다.
그 선배들은 다들 그냥 지옥에 갔지만,
후배인 기독교인들은 천국에 그냥 간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은 족보를 중요시 여긴다.
그래서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 등
족보를 밝힌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는 족보도 없이 나온다.
엘리야는 기원전 9세기경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였던 예언자이다.
엘리야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나의 신은 야훼이시다’란 의미이다.
엘리야는 길앗의 티스베에 사는 ‘티스베 사람’으로 칭해진다.
에스라는 북이스라엘은 버린자식이라고
역대상 역사에서 빼버렸다.
하지만 창조주께서는 꼭 이스라엘 백성만 쓰시고,
꼭 유대인만 쓰시고, 꼭 기독교인만 쓰시는 분이 아니라
전 인류적으로 상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아무나
쓰신다.
성경은 창조주 신께서 유대교만 상대하시고 기독교만
상대하신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상대하신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유대족보가 아니어도 그냥 창조주 신을 알게 하시고 쓰신다.
성경을 믿거나 말거나 알거나 모르거나 다 상대하신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창조주 신을 '신'으로 부르면서
은혜를 받았던 것이고, 유대교인들은 창조주 신을 '여호와' 라고
부르면서 은혜를 받는 것이고, 기독교인들은 창조주 신을
'하나님'으로 '예수'로 부르면서 은혜를 받는 것이고,
타종파들은 타종파대로 창조주 신을 부르면서
은혜를 받는 것이고, 불신자들은 창조주 신을 모를지라도
창조주 신의 은혜를 받고 사는 것이다.
(요한복음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멘.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온다고 했는데 지금은 왜
기독교에서 나온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욥은 유대교인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니고 일반인이었다.
그가 제사를 지내면서 섬겼던 신은 여호와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예수도 아니다.
그냥 그시대의 그지역의 신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성경을 쓰시고 만들게 하신 분이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때 그 신도 나
여호와였다"라고 하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외에 중간 단위의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를 뿐이고 종교자들도 모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의 하는 말들
성경은 믿든지 말든지 전 인류, 온 인류적이다.
이 말씀의 '성도의 기도'라는 것은 기독교인 만의 기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말(좋은 말, 축복의 말, 희망의 말, 격려의 말,
긍정적인 말, 충고의 말, 권고의 말, 느낌의 말, 눈길의 말,
손짓의 말, 발짓의 말, 흉보는 말, 이간질, 남의 잘 된 것에
배아파 하는 말, 쓸데 없는 말, 불평 불만들, 악한 계교를
꾸미는 말들 등 모두가 포함된다)'들인 것이다.
창조주 신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방인이라고 불리는
'느부갓네살 왕'을 '내 종' '내 목자' 라고 하신다.
창조주 신 앞에는 누구만 따로 특별히 그런거 없다.
그냥 그렇게 사용될 뿐이다.
창조주 신께서 앞으로 올 기독교 성도들을 위해
계시록을 쓰셨다면 '모든 성도'가 기독교 교인이라는
말이 맞다.
그래도 나쁜 것은 기독교인들의 기도 덕분에 본인들이
'우레'와 '번개'와 '지진'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꼭 손을 모으고 무릎 꿇고 '기도' 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 물론 교회에서는 새벽이나 밤이나 교회에
와서 기도하라고 요구하지만, 그런 것 빼고는 모든
사람들은 그냥 있는 자리에서 주저리 주저리 한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가정에서 위정자들이나 누구든지
어디에서건 업무적으로나 필요한 말도 하지만
그냥 쓸데없는 말들을 더 많이 한다.
☞유머·농담·쓸데없는 말
그런 말들에는 '유머'가 있고 '농담'도 있다.
서로가 재미있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유머나 위트지만
'농담'은 상대방이 상처를 입을 수 있거나 기분이 나빠진다.
나중에 아무리 "농담이었어~!" 라고 돌려대도 끝났다.
진심을 이야기하고 농담이라고 둘러댄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다.
그 농담은 진실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퍼붓는 욕이 있다.
연예인에게, 위정자들에게, 이웃사람들에게, 아무 의미 없이
퍼붓는 말들이 있다. 그런 말을 하는 나는 좀 잘난 거 같은
늬앙스를 풍기면서.
그런 말들이 복에 관련된 말만 같으면
'우레'와 '번개'와 '지진'일리가 없다.
이런 쓸데없는 말들, 불평불만의 말들이
다 징계거리로 떨어진다.
(잠언 13:3)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잠언 14:3)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
(잠언 14:23)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도'
기도라는 것이 꼭 교회에 와서 무릎을 꿇고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고 크게 외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출발한 것인데 지금 같은 건물 교회가
없을 옛날에는 어디를 교회라고 풀 것이냐 말이다.
창조주 신께서 지금 같은 교회 건물이 생기고 부터
사람들을 다스리고 기독인만을 다스리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이전부터 계셨고, 그때부터 끝까지
계속 관리하시고 다스리신다. 미래에도 쭉.
창조주 신께는 우주 아무 곳이나가 성전이고,
동굴이나 초막이나 천막이나 집이나가 성전이고,
사람 자체가 성전이고, 어느 곳에 있든지 사람들의
주절거리는 말이 기도이고, 동물들의 울부짖는
소리도 기도이다.
피조물들이 탄식하고 있는데 이것도 기도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말'이고 '울부짖음'이지
신의 입장에서는 '기도'이다.
육의세계에서 사람들의 숨소리, 말소리, 느낌의 소리,
눈길의 소리, 마음의 소리, 동물의 소리 등 모든 소리를
영의세계에서 듣는다는 용어가 '기도' 이다.
서로 사랑하면서 내뿜는 호흡, 나쁜 생각을 하면서
내뿜는 호흡, 서로 싸우면서 격하게 내뿜는 호흡,
편한하게 자면서 내뿜는 호흡, 즐거워 웃으면서
내뿜는 호흡 등 이런 호흡의 삶 자체가 기도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나 살아 있는 동물들의
모든 것들이 기도인 것이다.
죽으면 호흡이 없다. 곧 기도도 없다.
이런 삶의 기도가 끊어지면 신의 재판도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이 기도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신의 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죽으면 성경의 재판은 끝이고 영의세계법이 적용된다.
☞교회 내와 교회 밖
새 조차도 새 스스로 떨어져 죽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신의 뜻에 의하여 죽는다고 하신다.
그들의 소리를 듣고 헤아리시고 관리하신다.
성전과 기도를 자꾸 기독교적 건물 교회와,
교회에 와서 격식을 갖추고 주절거리는 것이라고
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뭐라고 뭐라고 신께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쁜 말도 안하고 나쁜 생각도
거의 안하고 자기의 바램을 간절하게 주절거린다.
게다가 온갖 젊잔과 품위와 체면을 지키느라고
나쁜 이미지를 풍기지 않게 최대한 조심한다.
천성이 원래 그런 사람은 원래대로 하겠지만.
하지만 일단 집에 가거나, 학교를 가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직장과 사업장에 가거나,
사회로 나가면 다 달라진다.
물론 안 그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기독교의 신인 하나님 빽 믿고 안하무인으로 산다.
내가 장본인이었다.
사회에서는 잘 안 된다.
문제는 이 안 되는 것들이 문제다.
이런 안 되는 것들이 영의세계에 계시는
창조주 신의 법에 다 걸리는 것들이다.
이런 모든 나쁜 것들을 다 기도로 들으시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것도 들으시고 재판하신다.
☞어떤 호흡인지
누군가 듣지 않은 말이나 보지 않은 행동들도,
들리지 않는 생각의 소리나, 뜻이나 눈길이나
마음이나, 목적이나 동기나 과정들도 주께서
직접 헤아리시고 아신다.
연극이나 성극 같은데서도 보면 '독백' 이라는
것이 있다. 연극자는 생각하는 것이지만 생각의
소리를 대사로 표현한다. 관객이 들을 수 있게.
눈이 돌아가는 소리, 손짓 발짓의 소리가
영의세계에서는 다 형상으로 표현이 된다.
주께서는 그렇게 다 형상화로 보고 계신다.
그리고 재판하신다.
육의세계는 들리지 않고 보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법으로 나중에 소문을 들을 수는 있다.
지구 땅덩어리들이 주께 보고 드리고, 바람들이 보고 드리고,
담벼락도 돌들도 주께 보고 드리고, 집을 관리하는 존재가
보고 드리고, 주의 두루마리가 돌아 다니면서 걸러내신다.
성경 하박국이나 스가랴서에서 잘 말씀해 주시고 있다.
https://cafe.daum.net/mizzkwon/KdtU/175
성경에 이렇게 무엇인가 보고 드린다고 쓰신 것은
육의세계법으로 표현하시려고 이렇게 저렇게 한다고
쓰셨지만,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신은 그냥 퍼펙트하게
다 아신다.
보고 안해도 정말 다 아신다.
일부가 아닌 전부를 정말 다 아신다.
전지전능하게 아신다.
사람인 나는 하나님께서 하나를 가르쳐 주시면
그 광대하심에 눌려서 10을 모르고 100을 모른다.
기독교인들이 이 부분을 놓쳐서 교회에서는 의인인척
하고 살지만, 밖에 나가면 그렇게 가정에서도 기독교인을
싫다고 하고, 사회에서도 기독교인을 싫다고 하고,
기독교인 때문에 사업을 접어야 한다고 하고,
목사도 목사들의 세계는 다 그렇고 그렇다고
싫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자기도 목사라서
어쩔수 없이 그들과 어울려서 산다고 한다.
☞ 착각하고 사는 것
이렇게 손가락질 당하고 욕을 배터지게 먹고 사는데도
이것을 예수를 위해 받는 의인들의 거룩한 고난이라고
배우고 믿고 나름 참고 사는 것이 문제다.
아! 이 착각이 정말 문제다.
창조주 신께서 모든 사람들의 모든 것을 들으시고
판단하시고 재판하신 결과로 아프고, 사고 나고,
떨어지고, 일도 안 되고, 정신도 사납고, 미치고,
설상가상의 화도 당하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싸우고, 매 맞고, 다치고, 자녀도 안되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죽을 병에 걸리고,
고생고생하고, 죽기도 하고, 쓰나미 해일도 당하고,
지진도 당하고, 전쟁이 터지고, 포로로 잡히고,
한다는데도 의로운 고난이라 여기니 문제다.
그러니 자기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지를 못한다.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무슨 행실이 나빴는지,
무슨 생각을 나쁘게 했는지, 무슨 나쁜 눈길을 보냈는지
무슨 뜻을 나쁘게 세웠는지, 무슨 동기가 나빴는지,
무슨 목적이 잘못됐는지, 무슨 마음이 잘못된건지,
속과 겉이 어떻게 다른지 다른 것이 왜 안 되는건지,
전혀 알아채지를 못하고 사니 참으로 문제다.
그냥 우연히 재수가 좋고 재수가 나빠서이다.
'자기 죄가 자기를 때리는 시스템'인데도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죄를 지어야 법으로 나를 잡으러 오지, 내가 죄도
안 지었는데 나를 잡으러 오진 않는다.
육의세계의 죄는 육의세계법으로 걸러내고
영의세계의 죄는 영의세계법으로 걸러낸다.
영의세계의 죄라는 것은 종교적 행위의 죄가 아니라
양심의 세계에서 걸리는 죄들이다.
☞올바른 행실
(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아멘.
계시록에서 말씀하시는 예수의 신부라고 하는 것이
'성도의 옳은 행실' 이라고 하는데,
성도가 기독교에서 쓰는 말이라고, 기독교인들만의
옳은 행실이라고 읽을 거 같으면 성경은 없어도 된다.
어짜피 기독교인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것은
'제로'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그래도 믿음을 가져야 한다면
천주교를 갖겠다고 꼽고 있으며,
그래도 거지가 얻어 먹을 수 있는 곳은 절이라고
손꼽고 있지만,
제일 이기적이고 폐쇄적이고 가기 싫은 종교 중
하나로 기독교를 손 꼽고 있다.
창조주 신께서 성도들만 관리하신다는 것인지,
성도 소리만 들으면 모두 '옳은행실' 이라고
쳐주시는건지, 그러면 성경속의 창조주 신을
기독교신이라고 읽어야겠지.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은 유대인 것인데 말이다.
성경 속의 복은 너도 나도 이 종교도 저 종교도 해당되고
성경 속의 저주는 너도 나도 이 종교도 저 종교도 해당된다.
기독교인이 그냥 하나님, 예수 신을 믿기만 하면
천국 갈 정도로 의롭다고 교육을 얼마나 받았는지...
선행이나 옳은행실을 얘기하면 기독교를 불교 정도로
비하시킨다고 기분나빠 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고차원적인 것을 말해줘야 한다.
기도만 하면 무조건 응답받는다거나, 기도만 하면 하나님도
꼼짝 못한다거나, 교회 와서 살면 무조건 복을 받는다거나,
무조건 휴거당한다거나, 무조건 7년 환란도 무사통과한다거나,
무조건 천국간다고 해야 그나마 기독교적이라고 좋아한다.
그런 선행 필요없이 믿기만 하면 복을 받고 병고침도 받고
천국까지 가는 티켓을 따논 당상이라고들 알고 있으니
문제다.
물론 '선행' 이라는 것도 천국가는 티켓은 아니다.
그냥 사람인 내가 이 땅에서 그나마 몸 편히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한편의 건덕지 일 뿐이다.
그것도 오고 가는 '품앗이' 말고, 나한테 다시 갚을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선행'을 말하는 것이다.
나에게 다시 갚을 수 없는 불쌍한 고아나 과부에게
선행을 베풀면 창조주 신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이다.
이런 선행은 영의세계에서 '하나님의 법'으로 계산되어
땅으로 쏟아진다. 내 머리위에 복으로.
☞타버리는 '수목'
나도 김치국을 잔뜩 마시면서 우리 기독교 교회 성도들의
기도의 향연이 올라가서 축복으로 오리라 믿었지만
살아보니 개나 소나 다 똑 같은 것이었다.
우레와 번개와 지진으로 말이다.
(계시록 8: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아멘.
수목이나 각종 푸른 풀들은 기독교인을 말하는 걸까?
각종 '푸른 풀'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 좋은 것 같은데.
아니면 불신자나 타종파인들을 말하는 걸까?
어쨌든 수목이든 각종 푸른 풀들이 삼분의 일씩
타 버린다는 것은 수를 셀 수 없이 많은 숫자라는
것이다. 도진개진으로.
지금도 초 단위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초 단위로 태어나고 있기도 하다.
수목과 각종 푸른 풀은 좋은 것인데 왜 타 버릴까?
사람들 입장에서 볼때 착한 것 같고, 의로운 것 같고,
정직한 것 같고, 신실한 것 같고, 진실한 것 같고,
멋있는 것 같고, 사랑이 많은 것 같아도,
창조주 신 앞에서는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난다.
속 깊이 뼈속까지.
(잠언 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아멘.
타 버린다는 것이 꼭 죽는다는 것인지, 많이 다치고
사고나고 아프고 슬프고 싸우고 맞고 경제가 바닥을
치고 울고 불고 고생을 한다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각 개인적으로 판단해 볼 때 복이 아닌 것은
다들 이렇게 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창조주 신께서는 느낌, 눈길, 표정, 눈짓, 손짓, 발짓,
동기, 과정, 뜻, 속 마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속과 겉이
다른지 다 아시는데, 그 '다 아신다'는 말 자체를
사람들은 상상할 수 가 없다. 전혀 모른다.
먼지 한개가 죄의 한 단위, 악의 한 단위라면
그 먼지 한개부터 다 살피시고 계산하신다.
그리고 '복'으로 '징계'로 내려온다
성경을 믿고 싶고, 쓰고 싶고, 알고 싶고, 외우고 싶고,
골든벨에서 1등하고 싶고, 통달하고 싶어도 '행함'으로
실천하지 않는 암기식은 성경을 몰라서 못 지켰던
자들보다 더 혼난다.
☞'수목'은 해하지 말라
(계시록 9:4) "그들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아멘.
창조주 신께서 먼저는 수목이나 푸른 풀을 다 태우라고
하시더니, 이제는 수목이나 푸른 것들은 해하지 말라고
하신다. 게다가 인 받지 않은 사람만 해하라 하신다.
영의세계에서 창조주 신께서 인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배우기는 우리 하나님은
기독교인만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인치셨단다.
누가 창조주 신인지 모르겠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창조주 신이 아니라
기독교 종교의 신이다. 예수도 기독교의 창시자일뿐이다.
창조주 신의 뜻을, 심판대 앞에 서 있어야 할
인간들이 어떻게 안다고 떠들고 있는지.
기독교인들만 창조주 신의 인침을 받았다고 하면서.
누구든 상관없이 복과 징계의 대상임을 명심하자.
☞성경은 세계 인류 역사
성경은 창조주 신께서 기독교인들만의 천국 구원을 위해
창세기부터 정해 놓으신 뜻이 아니다.
그냥 아담에게 형벌을 내리신 것을 기록한 것이며,
아담에게 흙으로 살다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신 말씀이며, 아담의 후손들도 아담같이 살 것이지만
하나님의 다양성에 의해 후손들은 아주 다양하게 살 것을
아주 간략하게 말씀해 주신 것이다.
지금도 여러 나라에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서
백인, 황인, 흑인, 원주민, 노예, 짚시, 인디언족, 식인종,
해가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만큼 아주 다양하게,
TV가 아니면 전혀 알 수도 없고, 알아도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을 만큼 정말 다양하게 살고 있다.
그러니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나, 문명이 들어가지 못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나랑 다르게 생기고, 색깔이 다른
사람들을 귀신, 미개인, 원시인, 동물 해가면서 그냥 막
죽여도 괜찮은 존재들로 알기도 한다.
특히 종교가 다르면 다 죽여버려도 되는 존재로.
요한계시록을 정히 풀고 싶으면,
어느 특정 종교에 해당된다고 주장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이 해당된다고 다시 풀어야 하며,
세계사에 해당된다고 다시 풀어야 하며,
살아서 영의세계를 보고 온 것이나, 죽다가 살아나면서
영의세계를 보고 온 것들은, 완전 죽어서 가는 영의세계가
아니라, 자기의 육의세계와 맞물려 보여지는 대칭형상인
영의세계일 뿐이라 다들 다르다. 같은 경우도 있겠지만.
그러므로 영의세계에 관련한 것은 내 것이 맞다고,
우리 종교의 것이 맞다고 주장하지 말아야 하며,
죽어서 완전 영의세계로 들어갔을 때는
성경의 법 적용이 끝나는 것이므로
창조주 신의 뜻에 따르면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어떻게 써 있어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풀어버리면 완전 아전인수식의 해석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서로 손가락 질하면서
"저 녀석은 지옥에 갈 녀석이야"
"저 녀석은 두번째 사망도 당할 녀석이야"
"저 녀석은 무저갱에 영원히 갇힐 녀석이야"
"저 녀석은 이단에 삼단에 오단이야" 한다.
☞종말의 기대감
육의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창조주 신께서 특별히 하신 일이
코 앞의 일을 모르게 하셨다.
사람들은 1초 후에 일어날 일들도 모르며,
1분 후에 일어날 일들은 더더욱 모르며,
자기의 종말인 '죽음'은 더더욱 모르지만,
병으로 죽을 때는 대충 알 수도 있다.
그런 자는 자기종말의 기대감이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외치는 기독교인만
휴거 당한다고, 7년 환란도 무사통과 한다고
떠드는 지구의 종말, 우주의 종말은 정말 모르는
일이므로 함부로 떠들지 말아야 하며,
다른 사람까지 술렁이게 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아버지라고 하는 예수도 모르는 시간을
안다고 떠들지 말아야 하며,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런 곳에 휩쓸려 다니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사기도 당할 자들이 당하는 것이라서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옳은 행실들은 제켜두고,
영양가 없고 신비적이고 쓸데없는 영의세계를 찾아
쫓아다니면 신비의 올무나 함정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몸과 마음과 경제가 시달리게 된다.
☞이마의 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면 일어 날 것이고, 안 일어난다고 하면
안 일어날 것이고, 수목이나 푸른 풀들이 3분의 1씩이나
태워진다고 하면 태워질 것이고, 수목이나 푸른 풀들이
안탄다고 하면 안탈 것이고, 이마에 인맞지 않은 사람들만
혼난다고 하면 혼날 것이다.
이마에 인을 맞는 자가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도
창조주께서 정하실 것이다. 당사자인 나는 모른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들 스스로가 나는 인을 맞았다
하고 착각하고 있으면 안 된다. 그야말로 월권이다.
이마에 인을 맞는 것은 계시록에서만이 아니라
과거부터 있었던 것으로 에스겔이 환상을 보는 중에
이마에 표를 받냐 안받냐가 있다.
(겔 9:1) "또 그가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쳐 이르시되
이 성읍을 관할하는 자들이 각기 죽이는 무기를
손에 들고 나아오게 하라 하시더라" 아멘.
(겔 9:2) "내가 보니 여섯 사람이 북향한 윗문 길로부터
오는데 각 사람의 손에 죽이는 무기를 잡았고 그 중의
한 사람은 가는 베 옷을 입고 허리에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와서 놋 제단 곁에 서더라" 아멘.
(겔 9: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아멘.
(겔 9: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아멘.
(겔 9: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아멘.
(계시록 13: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아멘.
물가가 하늘을 치솟는다고 하면 치솟을 것이고,
바다가 핏빛으로 변한다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고,
배가 깨진다고 하면 깨질 것이고 모두 성경대로
될 것이다.
죽어서 심판 받고 다시 지옥에 떨어진다고 알지말고
지금 현 시대에 나에 대해서 나타나는 징계이니
몸조심해야 한다.
이때에 나는 어떤 지역에 있을 것이냐가 관건이다.
누구든 내가 잘 살아서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인지,
내가 잘 못 살아서 환란지역으로 들어가고 죽음의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모든 것을 내가 골라 잡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든 창조주 신의 뜻에 의해 좋은 밭으로,
돌짝밭으로, 길가밭으로, 가시덤불 밭으로 가야만
하는 인생인지는 잘 모르겠다.
본인들이 살면서 잘 체크해 볼일이다.
교회에서나, 종교에서 아무리 우리는 잘 될 거라고,
들림 받을 거라고, 환란이 비껴갈거라고, 오래 잘
살거라고, 이마에 인 침을 받을 것이라고 위로를
받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모든 것은 창조주 신의 뜻으로 된다.
그야말로 창주주 맘대로다.
어찌됐든 누구든지 죽을 자들은 죽고, 살 자들은 살고
하면서 자기의 인생을 마친다.
힘들게 고생고생하다 죽을 것이냐,
호상을 누리고 죽을 것이냐가 문제다.
☞성경의 예언
성경은 창세기부터 아님 그 이전부터 창조주의 계획하심을
말씀하신 것인데, 기록은 사람들이 글을 쓰기 시작부터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 때에 저 때에 쓰게 하신 것이라
이제야 말씀으로 알려주시는 것 같고 현재 이때에 태어나서
성경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창세기에 시나리오가 아예
다 돼있었던 것이다.
성경을 주운 사람이 임자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주운 사람에게만 적용되라고 해라.
성경에 "육의세계는 이렇다" 라는 것을 밝혀주신 것이다.
자녀가 태어남도 "무작정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 가정의 앞 일에 대한 예언의 씨앗이다.
그 자녀가 가난의 저주를 갖고 태어나든 복을 갖고 태어나든.
호세아서에서도 창조주께서 고멜과 결혼하라고 명하시고,
자녀를 낳고 이름을 이렇게 지으라고 하셨고,
그 이름의 뜻이 있고 그 뜻대로 삶이 펼쳐진다.
모든 자녀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호세아 1: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아멘.
(호세아 1:4)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아멘.
(호세아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아멘.
창조주께서 '자녀'라는 예언을 주시고 뜻을 이루신다.
그 자녀를 나의 가정에 뜻을 세우시고 주시는 분이 창조주시다.
복이든 징계든.
기독교에서는 특히 자녀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물론 내 자녀에게 거는 기대가 커야지 작아서야 쓰겠냐.
"'대통령'이 되고 싶어요" 해야 기분이 좋지,
우리도 기피하는 직업을 갖고 싶다고 하면 좋겠나,
하지만 내 자녀들은 부모와 아주 상관없이 흘러가지는 않는다.
물론 부모는 의사를 만들고 싶었는데 가수가 될 수는 있다.
이 아이는 가수가 될 아이였는데 부모의 욕심은 의사였다.
조상대에서 어느 점이 후손으로 건너 뛰었는지는 모른다.
부모에게 있었던 질병이 후손들에게 유전이 된다는 것은
부모의 값이 자녀에게 후손에게 물려져 왔기 때문이다.
나 따로 자녀 따로가 아니라 내가 나를 낳은 것이다.
다윗하고 동맹을 맺은 아브넬을 '요압'이 동생의 원수를
갚겠다고 몰래 뒤쫓아가 죽인 죄로 인해 후손들에게
'백탁병자'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다윗이 저주를 했다. (사무엘하 3:29).
백탁병자: 오줌의 빛깔이 뿌옇고 걸쭉한 병을 앓는 자.
성경에서는 성기를 통해 불순한 분비물이 흘러나오는
모든 유출병자를 통틀어 일컫는다. 이런 병은 기운을
소진시켜 생명을 잃게 하는 특징이 있어 매우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다윗은 무죄한 자를 살해한 요압의
집안에 이런 병자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저주했다
그 저주를 요압의 후손들만의 것이라고 읽을 것이면
성경을 기독교 것이라고도 하지 말라.
부모는 아무 잘못도 없는 것 같은데 갑자기 내 후손에서
희귀병이 생기는 이유가 성경법에 있다.
불신자나 믿는자나 누구든지 다 똑 같다.
☞예수-아담
예수의 탄생은 영의세계에서 발생했던 창세기 불순종의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뜻일 뿐이다.
그 불순종의 죄는 창세기 시절 아담과 하와가 저질렀던 것인데
이제 영의세계에서 용서하시겠다는 창조주 신의 뜻이다.
'용서의 제물'이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 요셉과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오셨다가 짧은 인생을 사시고 제물되어
돌아가신 것일 뿐.
이 사실은 이사야서에 예언됐고 주께서 이루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밝혀놓은 예언서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아멘.
예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아담을 위해 죽으러 오셨다.
그런데 예수 이름만을 믿고 추종하는 자들만 그의 백성이라고
하고 그런 자들만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그는 창조주
신은 아니고 그냥 사람일 뿐이다.
☞창조주신의 뜻
(창세기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성령)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아멘.
기독교 찬양 중에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 성령이 오셨네"
가 있다. 성경에 써있다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 해가면서
성령을 기독교의 것으로 치부하는 것을 본다.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마가는 유대인이다.
그러니 성령은 유대교 것이라고 해야 맞다.
하지만 성령은 이제서야 유대교나 기독교에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창조주 신의 성품 중 한 분으로서 창세기 천지장조 이전이나 그때나
창조주 신으로서 알파와 오메가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쭉 수면을 운행하신다.
기독교 교회위만 운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신에 관련된 성령이나 성경이나 예수나, 온 우주 만물
(해 달 별 지구 등)이나, 공기나 햇볕이나 비나 눈이나 이런
신의 계획이나 뜻이나 작품들은 어느 사람 어느 종교에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적으로 해당되는 것이다.
유대교가 그런 것을 먼저 알았다고 유대교 것이 아니며,
이제와서 기독교나 천주교가 알았다고 해서 기독교나
천주교 것이 아니다.
알든 모르든 전 인류의 것이며 전 인류가 다 해당된다.
성령은 구약시대 창세기 사람들이나 지금 현재의
어느 나라 사람이든 다 상대하시고 관리하시고 다스리신다.
각자 깨닫는 신의 존재성이나 느낌이나 이름이나 뜻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성령이 과거에는 하늘에만 계셨는데, 기독교가 형성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기독교인만 다스리시고, 지옥에들 갈까봐 안타까워
하시고, 하나라도 천국에 데려가기 위해서 우시고 계시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오산 중의 오산이다.
성경의 나쁜 것은 빼고 모든 좋은 것만 기독교 것으로 끌고
가려고 해서 이런 불상사가 펼쳐지는 것이다.
성경을 주은 사람이 임자라는 것이다.
☞홍수와 안위
'므두셀라' 의 이름의 뜻은
'내가 죽으면 물이 쏟아지리라' 라고 한다.
므두셀라 이후에 노아홍수 사건이 일어났다.
'노아' 라는 이름의 뜻은 '안위' 라고 한다.
창세기 5장에도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고 말씀하신다.
'노아시절 홍수'가 하나님의 저주라고 하시고는
먹고 살기 위해 '수고롭게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안위'라고 하신다.
왜 안위일까? 노아만 구원받아서? 아니다.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들' 이라고 한다.
이 '우리' 라는 사람들은 홍수 때 멸절된 사람들을 말한다.
홍수로 사람들이 다 멸절됐는데 그들이 '안위' 받는다고 한다.
'안위' 라는 뜻은 몸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위로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이땅에서 호위호식을 하며 몸 편하게 맘 편안하게 산 것이
아니다.
함부로 죽을 수도 없는 긴 수명을 다 살기 위해 땅을 갈며
먹을 것을 위해서 힘들게 살았던 것이다.
지금도 혹독스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땅을 파든 돌을 나르든 소금을 만들든 물고기를 잡든
정말 먹고 살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TV에서 '극한 직업' 이라는 프로가 있다.
이것도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데
옛날에는 몇 배로 더 힘들었다.
과거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으며 구석기시대는 더 심했을 것이다.
오죽하면 원숭이가 조상이라고 했을까.
지금의 환경을 생각하면 완전 오산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떨어져서 그 시대법으로
살아봐야 알 것이다.
현재는 컴퓨터를 똑딱거리며, 펜대를 굴리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은 편하게 살고 있다. 그래서 그런 혹독한 삶을
이해 못할 수도 있다. 구석기시대를 이해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아담의 후손으로, 아담에게 지구 땅덩어리에서 살다가
죽으면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라고 형벌을 내리신 창조주의 명령대로
이렇게 사는 것이다.
이 지구에서 살다가 영의세계에 계시는 창조주 신께 돌아가려면
이 지구에서 죽어서 육은 썩어서 없어져야 한다.
고생하면서 천년 가까이 살았다는 것을 시물레이션을 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땅 파고 농사짓고, 가축을 치고, 어업을 하고,
산을 다니고 하면서 천년 가까이 산다는게 과연 신나고 재미있었을까?
천년 가까이 해산의 고통을 당한다는게 과연 신나고 재미있을까?
일찍 죽는 것이 복이다. 태어나지 않은 것이 복이다.
☞시뮬레이션 해보라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냥 동화책 읽듯이, 소설책 읽듯이 한다.
정말 그 속에 나를 대입해서 읽지를 않는다.
그러나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그가 나' 라고 생각하고
읽으라고 하신다. "니가 그때 태어났으면 그가 너"라고.
노아가 방주를 지었단다. 많은 사람들이 비웃었단다.
그거야 노아 근처에서 살던 사람들이야 방주를 짓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도 했겠지, 내가 노아가 아닌 이상 나도 비웃었지.
하지만 그런 것을 알지도 못했던 다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그냥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노아 근처에 살던 사람들은 비가 온다는, 심판이 임한다는
소식이나 들었지, 멀리 살아서 심판 소리 듣지도 못했던
나는 뭐냐 이거다. 그런 복음을 못 들은 내 잘못일까?
창조주 신께서는 홍수로 인류를 다 멸하시고
무지개법을 주시면서 더 이상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창조주 자신께 약속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수명을 120살로 다운시켜주신다.
천년형이라면 120년형으로 감해졌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창조주 재판관 스스로 하시는 일이지
인간이 간절히 구하고 상소를 올린 것이 아니다.
지금 어떤 나라 어떤 지역의 쓰나미도 아비귀환 이라고
난리를 치고, 지진이 나거나, 태풍이 지나가도 아비귀환이고,
어떤 나라끼리 전쟁이 터져도 아비귀환인데
하물며 전세계적으로 40일 동안 홍수가 났는데,
첫날이야 이 정도 비 하면서 넘어갔을 것이다.
글쎄 첫날부터 땅에서 솟고 하늘에서 치고 하는
비가 온 것인지, 갈수록 비가 거세지고 했는지는 모른다.
그래 몇일 정도의 비도 그냥 집에서 안 나오고 있었을 것이다.
곧 그치려니 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고 40일동안 비가 왔다. 다 죽었다.
이런 비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소낙비가 아니었다.
하늘과 땅이 진동을 하는 비였다.
아주 하늘에서 퍼부었다. 누가 퍼부었을까?
마귀가? 아니다 창조주 신이었다.
그런 신이 멋있다고 아름답다고 하나?
이런 것을 시뮬레이션 해보면, 너도 나도 살 수 있을 곳을
찾아 도망다니다, 점점 높은 곳으로 도망다니다,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고 하면서, 너도 죽고 나도 죽고 가족도 죽고
친구도 죽고 친척도 죽고 이웃도 죽고, 죽어서 물에 떠다니든
휩쓸려 다니든 땅 속으로 들어가든 했을텐데,
그게 나 였다는 생각으로 읽으면 아무리 공의로우신
창조주 신의 심판이었다고 해도 죽으면서
"하나님의 심판은 마땅하십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죽었을리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대 홍수를 기독교적으로 읽으면서
"나는 그때 없었으니까 다행이다" 하면서
"신의 심판은 마땅하십니다 ㅎㅎ"
하면서 읽으면 안 된다.
너도 그때 무서워 치를 떨면서 죽었다.
성경속의 어부들의 삶도 글로는 간단하게 표현되어서
그 때 당시 살아보지 않은 우리 현세대들은 잘 모른다.
하지만 '열린다 성경'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설명해
놓았다.
'우기'인 겨울에 물고기가 많이 잡혔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우비가 없던 시대에 갈릴리 어부들은 늘상 비로 흠뻑 젖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어부들은 물 속에 던진 그물이 엉키지 않도록 수시로
물속으로 다이빙해 들어가 그물을 정리해야 했다.
낮과 밤의 온도차가 극심한 광야의 날씨에 온몸이 비에 흠뻑
젖은 것도 모자라 수시로 물속에 들어가야 했으니 어부들은
밤새 몸을 떨어야 했을 것이다.
성서 시대 갈릴리 어부들의 생활은 오늘날 낚시광들이 생각하는
밤 낚시의 여흥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혹독한 삶의 현장이었다.
당시 세마포로 만들어진 그물은 바로 씻어서 말리지 않으면
금방 썩었기 때문에 항상 그물을 깨끗이 씻고 말려야했다
☞너의 종말
죽음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섭고 싫지만 죽어야 창조주가
계시는 영의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창조주 신께서 형벌을
내리시면서 옵션으로 붙히신 것이 영원을 살고 싶어하는
마음을 주신 것이다.
가족하고 헤어지기 싫고 친한 사람들하고 헤어지기 싫도록
하셔서 그렇지 그런 마음이 사라지고 세상에 나 혼자 있다고
느낄 때는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새 같은 미물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자해 해가면서 죽음을 선택한다.
지구라는 감옥에서 안위 받기 위한 방편이 출옥하는 것이다.
지구에서 죽는다는 것은 출옥하는 것이다. 그 뒤는 '안위'다
일단 지구에서 죽으면 영의세계로 들어가는데
그것을 '안위'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성경에 써 있어도 안 믿겠지만.
왜? 냐고 깊이 물어보면 대답해줄 사람은 없다.
창조주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들어진 것도 신의 뜻이고,
이렇게 사는 것도 신의 뜻이다.
너는 너의 종말이, 온 우주의 종말보다,
지구의 종말보다, 예수의 재림보다 굉장히 빨리,
초단위적으로 온다는 것을 골수에 새기고,
지금 살고 있는 처지(나라, 지역, 가문, 종교 등)에서
"실시간 창조주 신의 재판에 의해 제가 현재
이렇게 삽니다" 라고 인정하면서,
그래서 초단위적으로 펼쳐지는 모든 상황을
범사에 감사하면서(신의 심판은 마땅하십니다),
즐거워 하면서 가족과 이웃과 사회와 나라에 대하여
정말 정직하고, 정말 바르고, 정말 신실하고,
정말 성실하고, 정말 사랑하고, 정말 본이 되면서
오늘 하루 초단위로 최선을 다하면서 살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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