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앙쥐,순대국밥에 빠진 날
참 겁이 많은 사나이였다.
한 열흘이 지난 것 같은데,폭염이 사그라드는 오후 다섯 시 경에 불현 듯 산길을 걷고 싶어서 물 한병 꿰어차고 촐랑대며 길을 나섰다.

자주 오르는 산 중턱 쯤 갔을까,시커먼 먹장 구름이 하늘을 덮고,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게
사위를 압도하는데,이거 내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멈칫거리며 서 있는데 다른 몇몇 사람들은 부랴부랴 달음박질로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겁 많은 사내는 이왕 마음 먹고 온 길이니 조금 더 올라가야지 하며 발걸음을 떼는데,
우당탕탕하고 또 낙뢰치는 소리에 질겁을 하고 만다.
"이러다가 벼락 맞아 뒈지는거 아닌가?"하는 소심함이 들어나는 나약한 사내.
발길을 돌려 산 아래로 길을 잡는, 겁 많은 사내. 바로, 나 였다.허허허.
산을 다 내려와 오솔길을 접어드는데도 비는 내리지 않고,어랍쇼! 하늘이 맑게 개이는 것이
아닌가!천둥 번개는 멀찌감치 산너머로 가버리고 나는, 낙동강 오리알 되었었다.

그 며칠 뒤,다시 같은 시간에 산을 오르는데,역시 하늘은 장마철을 알아보는지 구름을 몰고
다니며 시위를 한다.겁 많은 사내는 내려가라!내려가라!그러나~
겁이 많은 사내는, 한 번 속지 두 번 안 속는다며 이를 앙다물고 기어코 산 정상에 오르고 만다.만세~만쉐이~천둥도 번개도,비바람도 무섭지 않아!
나는 해냈어!의기양양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내리막길을 더듬대며 내려온다.
天時를 이겨버린 겁이 없는 사내,바로 나 였다.또 허허허.
그런데,이게 아니다.이게 아니다.막 내리막길을 내려 가는데 우당탕 쿵탕하며 번개가 치고
엄청난 비가 내린다.피할래야 피할 곳도 없고,쭈그려 숨을 곳도 없다.
아~내 인생 여기서 벼락 맞아 종 치는구나~그랬다.완전히 물에 빠진 새앙쥐가 되어
엉금엉금 기다시피 산길을 내려왔다.다행히 벼락은 나를 지나 먼 산에 내려 앉았다.
아직,벼락 맞아 뒈질, 아주 나쁜 놈은 아닌 모양이다.아니면 벼락이 좋은 벼락이었거나~

여하튼,모자,신발은 물론 속옷까지
넉넉 하게 젖어들고,초상집 개 떨 듯이,
뜨거운 물에 데친 시금치 같이,
푹 퍼져서 덜덜 떨며 큰 도로를 겨우
찿아 내려 서는데,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 왔다.그래서 찾은 곳이 산행 때
마다 찾는 허름한 순대국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호호 할머니께서
토끼눈으로 쳐다보신다.무려 45년
전통의 순대국밥집인데,가게라야
테이블 서너개와 큰 방에 밥상 대여섯개
놓인 아주 작고 볼품없는 구멍가게
수준이다.켜켜히 배어든 돼지 누린내가
진동하고,비키니 차림의 소주광고
달력이 그나마 인테리어인데 도심에서
잘 볼 수 없는,그러나 정겨운 곳이다.
`철퍼덕`하고 젖은 옷 채로 나무의자에 앉으니 호호 할매는 배꼽을 잡고 웃으신다.
"어케 된거여? 하루 천기도 못 보는 사람이 산은 무슨 산이여?" 하시며...
"일단 뜨신 국물이나 좀 주시고 국밥하나 말아 주세요~"하기도 전에 뜨거운 국물을 건네
주시는데,아울러 대폿잔에 소주를 반 병이나 부어 같이 주신다.허허, 소주라..
산행을 마치고 오는 길에 들러, 순대국밥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을 늘 시키는데,언제나 반 병만 마시고, 제 값은 다 치루는지라, 호호할매는 그것을 아시고 공짜로 소주를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공짜가 맞나?글세 그건 모르겠다.
보글보글 뚝배기에 순대국밥이 나오는데 돼지 특유의 누린내가 진동을 한다.
여타 다른 가게들은 돼지 누린내를 내지 않으려 온갖 비법을 개발하여 손님을 끄는데 호호할매는 아무런 대책없이 45년을 꾸려 오시는 중이시다.그러나 이 집만의 특이한 비법이 있으니
그것은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대파를 큼직하게 썰어, 비법 양념에 무치는데
이것으로 간을 맞추고,돼지 누린내를 잡는다.신기하게도 국밥이 식어 갈수록 누린내는
없어지고,구수하고 칼칼한 맛이 우러 나오는 거다.물론,들깨도 듬뿍 넣고.

마파람 게 눈 감추듯, 소주 반병과 국밥을 비워내니 조선 최부자 눈 아래로 보이고 너덜너덜한 욕심도 근심도 사라진다.배 고팠던 동물의 포만감,최고의 행복이 아니든가!
"빤쮸는 입었제? 바지라도 좀 말려줄까?"호호할매는 물에 빠진 새앙쥐가 무지하게 불쌍해
보였나보다. "아니요,그냥 체온으로 말리렵니다" 마침 손님은 나 혼자였다.
몸이 차츰 따뜻해지고 술기가 올라 게슴츠레 눈이 풀린다.나를 피해 간 벼락을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는데,갑자기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시키!언제나 말이 없던 그 시키!~~"호호할매였다.
"아니,할매,그런 노래도 아세요?"하니 "늙었다고 무시하들 말어,나 왕년에 가수여"하시며
"소주 한 잔 더 줄까?'하신다.이왕지사 버린 몸,마다할 수 있으랴.
소주 한 병이 두병이 되어, 내 위장에 침투하고,늙은 전등불은 돼지 누린내에 몸을 맡긴채,
뿌옇게 제 할일을 하고 있다.비는 더욱 거세지고 나는 취해 간다.

'어이,노래 한자락 혀봐~"...
"저 기타 없으면 노래 안해요~"
취한 김에 내 뱉었는데...
"기타?잠시 지달려봐~"하시며
옆 집 자동차 수리점에서 기타를
가지고 오셨다.어이쿠~클 났다.
오늘 새앙쥐 꼬리 제대로 밟혔
부렸네..그래,이왕 펴논 돗자리,
퍼질러 노래라도 부르리라...
비는 청승맞게도 나를 들쑤신다.비만 오면 도지는 중병인가...
`구월이 오는 소리~다시 들으면, 꽃잎이 지는 소리~꽃잎이 피는 소리~"쿵작작,쿵작작
왈츠로 흐르는 그리움과 비의 외로움,그리고 나부끼는 서러움....
"가로수의 나뭇잎은 무성해도~우리들의 마음엔 낙엽은 지고~쓸쓸한 거리를 지나노라면
어디선가 부르는 듯, 당신 생각뿐~"짝짝..호호할매는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다.
'내가 젤로 좋아 하던 노래여..어떻게 알았누?" "저도 18번 입니다~허허" "참 잘하누만~"

호호할매의 신랑은, 일찍 세상이 싫어 가시고,홀로 자식들 거두며 살아온 세월.
"늙어서 눈물도 말랐나벼~"그러시며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신다.
"뜨신 국물에 소주 한 잔 더하고 가~" "그냥 갈랍니다."
얼큰한 김에, 몇 자락 노래 더 부르면 호호할매가 정말 우실 것 같아 문을 나선다.
쩌릿쩌릿 가슴이 시리다. 이왕 젖은 몸,이왕 찢어진 가슴,철퍼덕이며 길을 간다.
'어이~새앙쥐! 조심해 가!"호호할매의 목소리는 금방 밝아 지셨고,빗줄기도 잦아 들었다.
낙엽이 지면,또 눈이 내리면, 여름날의 새앙쥐는 낙엽을 들고,또 눈을 뒤집어 쓰고,
순대국밥에 빠져 호호할매의 그렁그렁하던 눈물을 보고 말 것이다.
"할매! 못다 우신 눈물이라도 다 흘리시고 가셔야 한이라도 안맺히지요"
사랑은 가도 추억은 남는 답니다.추억은 살아있는 과거라지요.할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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