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 (廣開土太王) 1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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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1 부 · 동방의 알렉산더, 고담덕 |
역사스페셜 · 광개토태왕 2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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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동방의 알렉산더, 고담덕 · 高談德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제19대 태왕으로 AD 391년 17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고구려 제18대 고국양왕의 아들로 12세(386년)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한 왕, 광개토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재위 기간: 391년~412년) 그의 진정한 꿈은 무엇이었나?
동으로는 연해주, 서로는 중원에 육박하고 남으로는 김해에 이르렀던 고구려대제국을 이룬 왕. 그가 꿈 꾼 것은 고구려가 이끄는 삼국의 대통합, 나아가 삼국의 힘으로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역사스페셜>에서는 총2부에 걸쳐 ‘정복군주’ 광개토대왕이 넓은 영토를 개척해, 이루고 싶었던 꿈과 비전이 무엇이었는지를 조명한다. 이름은 담덕(高談德), 고국양왕의 아들, 고구려 제19대 임금. 생몰연대는 374~412, 소수림왕의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영토를 넓혔던 왕.
1.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영락’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2. 백제를 공격하여 당시 백제의 58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북쪽의 땅을 차지했다. 3. 신라 내물마립간 요청으로 신라에 쳐들어온 왜·백제·가야연합군을 대신 물리침. 4. 동예를 통합하였다. 5. 중국 연나라의 모용희를 반격하여 700여리의 땅을 탈취하였다. 6. 동부여를 정벌했다. 7. 후연의 요동 땅을 점령했다. 8. 거란을 정벌했다. 9. 평양에서 9사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했다. 10. 숙신을 정벌했다. 11. 대방에 침입한 백제·왜 연합군을 섬멸했다. 12. 만주지역으로 영토를 확대했다. 13. 연해주 지역으로 영토를 확대했다. 14. 말갈을 정벌했다. 15. 성왕과 태왕의 호칭을 사용했다.
371년 10월(고국원왕 40년) -백제 근초고왕 고구려 침공, 고국원태왕 붕어
371년 10월(소수림왕 1년) -고구려 소수림태왕 즉위, <유기留記> 편찬 시작
384년 (소수림왕 14년) -소수림태왕 붕어, - 王弟 (소수림왕의 아우) 이련, 고국양태왕 즉위
391년 (고국양왕 8년) -고국양태왕이 병이나서 붕어함
391년 (호태왕 영락1년, 17세) -광개토태왕 즉위 -연호를 ‘영락(永樂) ’이라 정함
413년 (호태왕 영락23년, 39세) -광개토태왕이 붕어함, 장수태왕 즉위
414년(장수왕 2년) -광개토태왕릉비 건립
▲ 중국과 고구려의 역사 연대기 비교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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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지린성[吉林省(길림성)] 지안현[輯安縣(집안현)] 퉁거우[通溝(통구)] 지방에 있는 고구려 19대 광개토 대왕의 비석. 높이 6.39m, 너비 1.35m∼2m로 414년(장수왕 2) 광개토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건립하였다. 14∼15㎝ 정도 크기의 문자가 4면에 총 44행(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 1775자가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1534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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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청년 왕 고담덕! 즉위 이듬해 백제와 거란을 모두 공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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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이대(高麗二隊) (左) ▲ 고려 강(高麗河) (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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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란(契丹) 공격으로 백성의 신임을 얻다
옛 거란의 땅, 내몽고 자치구에는 ‘대영자’라는 지명의 마을이 있다. 마을을 끼고 흐르는 강의 이름은 ‘까오리’, 바로 고려강이다. 1,600여 년 전 이곳에 즉위 2년을 맞은 고구려왕 담덕이 이끄는 군대가 나타났다. 그들은 거란족을 공격, 정벌하고 포로로 잡혀있던 고구려인들을 해방시켰다. 그것은 국경을 침범해 약탈을 일삼던 거란에 대한 경고이자 백성들의 지지와 신뢰가 필요했던 새로운 군주 담덕의 신고식이었다.
※ 거란(契丹) : 몽고와 만주에 걸쳐 요나라(遼)를 세운 유목 민족.
▲ 임진강 (경기도 연천군) (DMZ, 연천군 군남면 임진강 남쪽에서 본 호로고로성지) 옛날에 임진강의 이름은 '호로하', '표하' 라고 불리우며, 삼국시대에는 상당히 중요한 전략적 요점이었다. | - 백제의 대동맥을 막다
4세기 백제는 황해를 건너 중국과 해상 무역을 주도하는 동아시아 최강의 국가였다. 고구려는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대립했고, 급기야 371년엔 평양성을 기습한 근초고왕의 군대에 담덕의 증조부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사망했다.
담덕은 즉위 이듬해 즉시 임진강 인근의 백제성 10여개를 함락했고 이후 경기만과 서해로 가는 백제의 관문이었던 관미성을 함락해 임진강 수계의 내륙 수로와 중국에 이르는 서해 항로의 요지를 장악했다.
전쟁을 할수록 강해졌던 나라,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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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비 (好太王碑) (左) ▲호태왕비에 새겨진 ‘염수’(鹽水) (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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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려(碑麗) 정벌, 군비를 확충하다
담덕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거란족(契丹)의 8부 중 하나인 ‘비려’(稗麗)를 공격했다. 그들의 본거지는 ‘염수’(鹽水), 즉 ‘짠 물의 땅’이었다. 담덕은 시라무렌강 중상류에 위치하고 있던 소금호수 ‘염수’(鹽水)로 진격해 유목 민족이었던 거란을 치고 그들의 가축을 전리품으로 가져왔다. 특히 말은 기마전투에 능한 고구려에는 필수적인 존재. 고구려는 염수를 정복함으로써 엄청난 양의 가축을 확보했다. 그는 정복한 집단의 자원과 힘을 활용해 다음 전쟁에 투입했고, 그로 인해 고구려는 잦은 전쟁에도 경제적으로 피폐해지지 않았다. 담덕은 전쟁에 빠진 정복군주가 아니라 합리를 추구하는 경영형 군주였다.
고구려 판 인천 상륙작전, 백제, 무릎을 꿇다
관미성 함락으로 서해 항로를 잃은 백제 아신왕은 계속해서 반격해왔다. 수세로 일관하던 담덕은 백제의 공세가 끊이지 않자 결단을 내린다. 고구려 판 인천상륙작전, 담덕은 한강, 미추홀, 남양만 3가지 진로로 수륙양공을 펼쳐 백제의 도성인 ‘한성’을 포위했다. 끝까지 저항하던 백제 아신왕(阿莘王)은 결국 담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담덕은 그러나 백제를 점령하지 않았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단 것입니다. 소탐대실이 아니고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것을 희생하고 또 상대방 나라들을 포용해 줬단 것입니다. 그러니까 광개토대왕은 궁극적으로 포용과 자비심을 발휘함으로써 시간이 해결해준다. 언젠가는 고구려 안에 다 포용되고 한 가족이 된다는 그런 마스터플랜을 갖고 있었단 것이죠. -이도학 교수
그는 즉위 5년 간 남으로는 아리수의 백제를 치고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였으며 한반도에서 중국에 이르는 서해 중부 항로를 장악했다. 담덕은 고구려제국을 거느린 새로운 통치자이자 동아시아 최고의 정복자였다. - KBS 역사스페셜 특별기획 제1부 동방의 알렉산더, 고담덕 201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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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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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황성신문이 광개토대왕비 발견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광개토대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되기 시작했다. 눈이 내린 산야를 배경으로 한 조선인이 광개토대왕비 옆에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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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은 고구려 19대 왕으로서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소수림왕 (재위371-384년)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고국양왕(재위384-391년)의 아들이다.
A.D. 391에 즉위하여 A.D. 413년에 40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23년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였다. 고구려 역사상 가장 방대한 영토를 확장한 왕으로써 광개토왕의 업적을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은 풍성하게 익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다' 라고 그의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하였다. 연호로 영락을 사용하여 생존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약칭이고, 그가 쓴 영락(永樂)이란 연호는 한국에 알려진 최초의 연호이다.
광개토대왕의 요하 도하. 서울대학교 이종상 교수가 그린 민족 기록화의 최고 걸작. 2.9m × 세로 2.18m의 장대한 화폭에 상당한 고증(70년대 그림)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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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廣開土太王) 2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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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2 부 · 팍스 코리아나, 고구려에 의한 평화 |
역사스페셜 · 광개토태왕 2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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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팍스 코리아나(Pax Koreana) · 고구려에 의한 평화
그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은 어디인가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대 제국 고구려의 ‘태왕(太王)’ 고구려의 하늘 아래 모든 나라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을 만든 광개토태왕. 대륙의 정복자를 넘어 민족의 미래를 개척한 광개토태왕의 비전을 확인한다.
모용 선비족과의 대결, 요동(遼東)을 확보하라
- 고구려의 원수, 모용 선비족을 치다
▲ 요동과 요서의 경계인 요하(遼河) ▲ 무덤 가운데가 파헤쳐진 서대묘(西大墓). | 중국 동북지방의 남부 평원을 관통하는 요하, 중원으로 통하는 길목인 이 강을 두고 고구려와 모용 선비족 간의 치열한 쟁패전이 벌어졌다. 수준 높은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연(燕)을 건국하고 북방의 강자로 군림했던 모용 선비족. 고구려의 성장을 경계하던 연은 고구려의 환도성을 공격, 광개토태왕의 고조부인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져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선조들의 원수이자 고구려 성장의 걸림돌, 모용 선비족. 광개토태왕은 정벌에 나섰다. 목표는 요하의 동쪽을 확보하는 것!
- 대륙과 바닷길의 길목, 요동반도를 확보하다
▲ 요동성총에 그려진 요동성도(遼東城圖) ▲ 장산군도의 대장산도(大長山島). | 대대적인 군 조직의 정비로 전력을 상승시킨 광개토태왕은 요하 일대의 요충인 요동성과 숙군성을 공격하여 요동을 확보하고 요서로 진출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 했다. 고구려는 철광석 등 풍부한 자원을 가진 요동을 대 제국의 기반으로 삼는다. 또한 요동반도의 비사성과 장산군도(長山群島)를 중심으로 해안 방어기지를 구축, 중국 대륙에서 한반도에 이르는 서해의 바닷길을 장악했다. 요동과 서해를 지배한 광개토태왕은 동아시아 최고의 강자였다.
한반도 종단 작전, 대한해협을 확보하라!
- 백제, 가야, 왜(倭) 연합군을 굴복시키다
▲ 찰갑으로 무장한 고구려 병사 ▲ 쪽샘지구 출토 마갑(馬甲). | 한성 점령으로 고구려에 무릎을 꿇었던 백제는 고구려의 서해 장악으로 선진 문물 수입에 지장을 받게 된 왜(倭)를 사주하여 신라를 공격했다. 고구려와 교류관계에 있던 신라를 쳐서 저항하고자 한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철갑으로 무장한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고, 왜군의 완전 섬멸을 위해 가야까지 추격했다. 신라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가야 역시 백제, 왜와 함께 고구려에 맞선 상태. 고구려는 가야마저 정복하고 요동에서 한반도의 남쪽 끝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동아시아 해양 항로를 장악했다.
팍스 코리아나, 고구려에 의한 평화
- 백제, 가야, 왜(倭) 연합군을 굴복시키다
▲ 유주자사 진의 모습(덕흥리 고분) ▲ 중원 고구려비 비문 중. | 후연은 오늘날 푸순(撫順)의 신성(新城)을 습격했다. 반격에 나선 광개토태왕은 후연의 수도로 진격, 모용 선비족을 격파하고 오늘날의 북경 부근의 연군(燕郡)을 공격했다. 또한 일련의 무력시위를 통해 유주자사 진을 비롯한 후연의 지배계급을 포섭, 후연의 자체 붕괴를 유도했다. 결국 고구려의 숙적이었던 후연은 쿠데타로 멸망하고, 고구려인 고운(高雲)이 새로운 북연의 황제가 되었다. 한반도 남단에서 요서에 이르는 광활한 대 제국 고구려를 완성한 광개토태왕, 그의 마지막 소원은 평화로운 공존이었다.
‘세세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한다 (世世爲願如兄如弟)’ - 중원 고구려비 비문 中
- KBS 역사스페셜 제2부 팍스 코리아나 · 고구려에 의한 평화 2011-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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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은 왜 삼국통일을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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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5년 황성신문이 광개토대왕비 발견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광개토대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되기 시작했다. 눈이 내린 산야를 배경으로 한 조선인이 광개토대왕비 옆에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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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은 고구려 19대 왕으로서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소수림왕 (재위371-384년)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고국양왕(재위384-391년)의 아들이다.
A.D. 391에 즉위하여 A.D. 413년에 40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23년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였다. 고구려 역사상 가장 방대한 영토를 확장한 왕으로써 광개토왕의 업적을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은 풍성하게 익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다' 라고 그의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하였다. 연호로 영락을 사용하여 생존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약칭이고, 그가 쓴 영락(永樂)이란 연호는 한국에 알려진 최초의 연호이다.
391년 7월에 왕은 대방(帶方) 탈환전을 개시하여 백제의 북쪽을 진격하여서 석현(石峴) 등 10성을 함락하였고, 9월에 북으로 거란(契丹;선비족)을 정벌하여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본국에서 흩어진 백성 1만 명을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 10월에 다시 백제의 관미성(關彌城;강화교동도江華 喬桐島)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사방이 바다에 에워싸인 채 우뚝 솟아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왕은 군사를 일곱 군데로 나누어 공격케 하여 20일 만에야 성을 빼앗았다. 392년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였다. 394년 7월에 백제군이 쳐들어와 왕은 날랜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싸워 물리쳤다. 8월 백제와 패수(浿水;예성강) 가에서 싸워 격파하고 8천을 포로로 잡았다. 왕은 비려(碑麗)가 고구려인을 돌려 주지 않기 때문에 몸소 토벌에 나섰다. 부산(富山)을 넘어 산을 등에 지고 염수(鹽水)에 이르러 비려의 3부락 6∼7백 령(營)을 파하고 소, 말, 양떼를 가지고 돌아왔다. 395년 8월에 왕은 패수에서 백제군을 크게 무너뜨리고, 적 8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396년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여 여러 성을 치고 백제 왕성을 점령하였으나, 백제왕은 탈출하여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왕이 진노하여 아리수(阿利水)를 건너고, 장수를 보내어 백제 임시수도인 성횡 (城橫) -혹은 악성(岳城)-을 핍박하니 마침내 백제왕(아신왕)이 항복하고 영원히 노객(奴客)이 될 것을 맹세하였으며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398년 원수를 보내어 숙신(肅愼)의 터전을 돌아보게 하였는데, 가태라곡(加太羅谷) 남녀 삼백 명의 포로를 얻어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숙신(여진족)도 조공하고 고구려를 섬겼다. 399년 백제가 서약을 배반하고 왜구과 사통하여 신라(新羅)를 공격하니 신라왕이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400년 왕께서 보기병 5만 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토록 하였는데 종남거성 (從男居城)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러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발성(拔城)까지 쫓아가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 이후 고구려 본토 출신 안라인(安羅人) 사람으로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2월에 중국 북방의 연왕 모용성(慕容盛)이 3만 명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연나라 장수 모용 희(慕容熙)가 선봉에 서서 신성, 남소 두 성을 함락시켰다. 적군은 7백여 리의 땅을 개척하여 민가 5천여 호를 옮겨 놓고 돌아갔다. 즉, 396년 모용보(慕容寶)가 후연왕으로 즉위하여 대왕을 ‘평주목요동대방이국왕 (平州牧遼東帶方二國王)’에 책봉하는가 하면 400년에는 후연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400년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 (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南蘇城)과 신성(新城)을 침공해옴으로써 양국관계는 파탄에 이른다. 401~2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숙군성(宿軍城)을 공격 하자 연나라의 평주 자사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망했다. 404년에 다시 왕은 군사를 일으키어 연나라를 침공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는 대방고지(帶方故地)를 백제가 침공해왔지만, 이 또한 5만의 병력을 파견하여 신라에서 몰아냄은 물론 가야지역까지 추격했으며, 대방고지에 침입한 왜구도 궤멸시켰고, 나아가서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한다. 405년 정월에 연나라 왕 모용 희(慕容熙)가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406년12월에 모용희(慕容熙)가 다시 요동의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와 함께 대왕이 산둥성에 중심을 둔 남연(南燕)의 왕 모용초(慕容超)에 대하여 천리마 등을 보내면서 접근을 꾀한 것도 후연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인 것 같다. 407년 3월 북연에 사신을 보내어 종족의 은의를 배풀자 북연왕(北燕王) 고운(高雲)은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보답했다.
408년 왕자 거련(巨連; 장수왕)을 태자에 봉하고 7월 동쪽지방에 독산성(禿山城)등 6성을 축조하고 평양 민가를 옮겼다. 410년 동예(東濊)를 통합하고(410), 신라와는 하슬라(何瑟羅)를 경계로 삼았다. 또 그 해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철령(鐵嶺: 安邊) 이북의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이렇듯 정력적인 정복사업의 결과, 재위기간 중 64성과 1,400촌락을 공파하였다. 413년 10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니, 호를 광개토왕이라 하였다. 아들 거련(巨連)이 장수왕이 되었다.
한편, 내정에도 힘을 기울려 장사(長史)·사마(司馬)·참군(參軍) 등의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 393년에는 평양에 9사(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다음 장수왕 때 단행되는 평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한다. 〈광개토왕릉비〉에 광개토왕 때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내정정비의 결과라고 하겠다
광개토대왕의 요하 도하. 서울대학교 이종상 교수가 그린 민족 기록화의 최고 걸작. 2.9m × 세로 2.18m의 장대한 화폭에 상당한 고증(70년대 그림)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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