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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원 박사의 周·人·工 四書三經] *—<제52강> (2017.03.06)
— <周·人·工 四書三經>은 ‘周易과 人性을 工夫하는 四書三經 강좌’를 말한다 —
맹자(孟子) (제16강)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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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공부> ; 1. <맹자 15강> [복습] ‖ 2. 오늘의 <맹자> 읽기
* [오늘의 맹자 읽기] (3)*— [이루장구·하](제29~33장)
* [이루장구·하](제29장) — [禹·稷·顔子] ; 성자(聖者)와 현자(賢者)의 처세 방법
08-29-01 禹稷 當平世 三過其門而不入 孔子賢之
02 顔子當亂世 居於陋巷 一簞食 一瓢飮
人不堪其憂 顔子不改其樂 孔子賢之
03 孟子曰禹稷顔回同道
04 禹思天下有溺者 由己溺之也
稷思天下有餓者 由己餓之也 是以 如是其急也
05 禹稷顔子 易地則皆然
06 今有同室之人 鬪者 救之 雖被髮纓冠而救之 可也
07 鄕鄰 有鬪者 被髮纓冠而往救之則惑也 雖閉戶 可也
01 우(禹)와 직(稷)이 평화로운 시대를 당하여 세 번 그 문 앞을 지나가면서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공자(孔子)께서 그들을 어질게 여기셨다. 02 안자(顔子)가 어지러운 세상을 당하여 누추한 길목에 거처하며 한 도시락의 밥을 먹고 한 그릇의 마실 것을 마시고 살았다. 남들은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하지만 안자(顔子)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았으므로, 공자께서 그를 어질게 여기셨다.
03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우(禹)와 직(稷)과 안자(顔子)는 도(道)가 같다. 04 우(禹)는 천하에 물에 빠진 자가 있으면 자기가 빠뜨린 것처럼 생각하며, 직(稷)은 천하에 굶주린 자가 있으면 자기가 굶주리게 만든 것처럼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와 같이 시급하게 여긴 것이다. 05 우(禹)와 직(稷)과 안자(顔子)는 처지를 바꾸면 다 그렇게 했을 것이다.
06 지금 한 집에 있는 사람 중에 다투는 자가 있는 경우가 있다면, 이를 말려야 하는데, 비록 머리를 풀어 흐트린 재 갓에 끈만 매고서 발리더라도 좋은 것이다. 그러나 시골이나 이웃에 다투는 자가 있다면, 멀리 풀어 흐트린 채 갓에 끈만 매고서 가서 말린다면 정신이 헛갈린 것이니, 비록 문을 닫더라도 좋은 것이다.”
* [강 설(講說)] ——————
· ‘禹稷’(우직)은 ‘우(禹)임금’과 ‘후직(后稷)’을 말한다. ‘후직(后稷)’은 주(周)왕조의 시조(始祖)이다.
… 우(禹)와 직(稷)은 매우 바쁘게 살았고, 안자(顔子)는 가난하면서도 느긋하게 살았으므로, 삶의 형태가 서로 달랐지만 진리(眞理)를 실천하였다는 점에서는 같다. 바빠야 할 때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진리이고 바쁘지 않아도 될 때에는 느긋하게 있는 것이 진리이므로 진리가 실현되는 모습은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한 방에 사는 사람이 다툴 때는 머리를 묶을 틈도 없을 정도로 재빨리 말리는 것이니, 급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우왕(禹王)과 후직(后稷)을 비유한 것이다. 이웃이나 시골의 먼 곳의 사람이 다툴 때는 가만히 있어도 된다. 이는 안자(顔子)를 비유한 것이다. 각자에게 일어난 문제는 각자가 해결해야 전체적으로 조화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모든 것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데서 독단과 독재가 생긴다.
* [제29장 장하주(障下註)] ——————
이 장(章)은, 성현(聖賢)의 마음은 똑 같지 않음이 없고, 일은 만나는 바가 혹 다르나 대처함이 각기 그 이치에 맞게 하니, 이것이 똑같음이 된 이유임을 밝힌 것이다.(聖賢之道 進則救民 退則修己 其心 一而已矣) 윤씨[尹焞]가 말하였다. “그 가(可)함에 맞게 함을 ‘시중(時中)’이라 하니, 앞의 성현과 뒤의 성현이 그 마음이 똑같다. 그러므로 만나는 바에 모두 극진히 선하게 하신 것이다.(此章 言聖賢 心無不同 事則所遭或異 然 處之 各當其理 是乃所以爲同也 尹氏曰 當其可之謂時 前聖後聖 其心 一也 故 所遇皆盡善 )”
* [주나라 건국의 내력] — 주(周) 왕조의 시조 후직(后稷)과 주(周)의 건국의 과정
후직(后稷)은 문왕과 무왕이 세운 주왕조(周王朝)의 시조(始祖)이다. 농경신(農耕神)으로, 또는 오곡(五穀)의 신(神)으로 추앙한다. 성(姓)은 희(姬)씨고, 이름은 기(棄)다.『사기(史記)』<주본기(周本記)>에 따르면 유태씨(有邰氏)의 딸로 제곡(帝嚳)의 아내가 된 강원(姜原)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감생설화(感生說話)]고 한다. 그것이 불길하다 하여 세 차례나 내다버렸지만 그때마다 구조되었다[기자설화(棄子說話)]고 한다. 나중에 요제(堯帝)의 농사(農師)이 되고 태(邰, 陝西省 武功縣 부근)에 책봉되어 후직(后稷)이 되었다.
후직으로부터 3대인 공유(公劉)는 후직의 사업을 다시 닦아 논밭을 갈아 씨를 뿌리는데 힘쓰고 토지의 적당함을 가려 이를 시행했으며 칠수(漆水)와 저수(沮水)에서부터 위수(渭水)를 건너 목재를 채취하여 사용하니 돌아다니는 사람에게도 재물이 생기게 되었고 정착해 사는 사람은 재산이 쌓였으므로 백성들이 그의 선정에 의지하게 되었다. 생산력이 높아지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되니 주변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주나라의 도가 이때부터 흥성하기 시작했다. 공유가 죽자 아들 경절(庚節)이 빈(豳, 섬서 순읍)으로 도읍을 정했다. 빈(豳)은 관중평원의 북쪽 황토고원에 인접한 지역이다.
관중(關中, 지금의 西安)은 동쪽에 함곡관(函谷關), 남쪽에 무관(武關), 서쪽에 대산관(大散關), 북쪽에 소관(蕭關)이 있는데, 이처럼 4개의 관(關) 안에 있어 관중(關中)이라 불렀다. 특히 함곡관을 두고 서쪽을 관중(關中)이라 했고 동쪽을 관동(關東)이라 한다. 전국시대에 관중은 진(秦)나라의 도읍인 함양(咸陽)이 있었고 한(漢)나라의 장안(長安)이 있었고 12개 왕조가 도읍을 두었던 곳이 관중이다. 시기적으로 관중평원에 가장 먼저 도읍을 정한 나라가 주(周)나라일 것이다.
고공단보(告公亶父)는 후직(后稷)으로부터 13대이다. 후에 태왕(太王)으로 추존되었다. 고공단보가 후직과 공유의 사업을 다시 다스려 덕을 쌓고 의를 행하자 온 나라 들이 모두 그를 받아들였다. 살기가 좋아지자 북방의 훈육(薰育)과 융적(戎狄)이 공격하여 재물을 얻으려 하고 그들의 땅과 백성을 차지하려고 했다. 이에 고공단보(告公亶父)는 싸움으로 백성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을 피하여 빈(豳)을 떠나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 기산(岐山) 아래 주원(周原)에 정착했다. 주(周)나라의 명칭은 고공단보가 정착한 땅인 주원(周原)에서 유래한다. 기산(岐山)은 관중(關中)평원의 서쪽에 있다. 빈(豳)에 살던 백성들이 모두 기산아래 고공단보에게 몰려갔다. 고공단보(告公亶父)는 성과 집을 짓고 읍을 나누어 그들을 살게 하였고 오관(五官)이란 벼슬아치들을 두었다. 오관은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사토(司土), 사구(司寇)를 말하는데 사도는 교육을, 사마는 군사를, 사공은 토목을, 사토는 토지를, 사구는 법률을 담당했다.
고공단보(告公亶父)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태백(太伯), 우중(虞中), 계력(季歷)이다. 계력이 아들 창(昌)을 낳을 때에 성스러운 징조가 있어 고공단보는 창(昌)에게 왕위를 전하고자 했다. 이에 태백과 우중은 머리를 깎고 문신을 한 뒤에 왕이 될 의사 없음을 밝히고 형만(荊蠻)으로 피신하였다. 막내아들 계력(季歷)이 뒤를 잇도록 했는데 이 사람이 공계(公季)이다.
계력이 죽자 아들 창(昌)이 자리에 올랐는데 나중에 문왕(文王)으로 추존되는 서백(西伯)이다. 서백(西伯)이란 서쪽의 우두머리란 뜻으로 창(昌)의 별칭이다. 서백은 후직과 공유의 사업을 따르고 고공과 공계의 법도를 본받아 행했는데 선비들과 제후들이 서백에게 모여들었답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이 무렵 서백에게 귀의했다.
숭후호(崇侯虎)가 서백(西伯)이 선(善)을 쌓고 덕(德)을 늘려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은(殷)나라 주(紂)왕에게 고하여 제왕에게 이롭지 않다 하니 주왕은 서백을 유리(羑里)에 가두었다. 서백이 유리에 갇혔을 때 역(易)의 팔괘를 육십사괘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서백(西伯)에게 귀의한 굉요 등이 유신씨(有莘氏)의 미녀와 여융(驪戎)의 말, 유웅(有熊)의 네 마리 말이 끄는 아홉 대의 수레, 그밖에 진귀한 보물 등을 비중(費仲)을 통해 주왕(紂王)에게 바치고 그를 풀어주게 하였다.
문왕(文王) 서백(西伯)과 태공망(太公望)
유리(羑里)에서 풀려난 서백(西伯)은 위수(渭水) 강가에서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을 만났다. 본명은 강상(姜尙)이고 그의 조상이 여(呂)에 봉해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고도 하며 서백이 그를 만나 선조인 “태공(太公) 때부터 당신을 기다린지 오래도다.”라고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고도 부른다. 서백은 태공망을 군사(軍師)로 모신다. 그리고 은나라 정벌을 위한 전략을 실행하게 된다.
서백(西伯)은 은(殷) 정벌을 앞두고 기산 아래에서 풍(豊)으로 도읍을 옮겼다. 각지에서 여러 제후들이 서백에게 귀의해 들어왔다. 그리고 은나라의 법도를 고쳐 새로 달력을 만들었고 고공(告公亶父)을 태왕(太王)으로, 아버지 공계(公季)를 왕계(王季)로 추존했다. 그러나 오십 년 간의 재위 끝에 은나라 정벌을 앞두고 서백은 세상을 떠났다. 서백은 문왕(文王)이란 시호로 불린다. 태자 발(發)이 그의 자리를 이었고 이 사람이 무왕(武王)이다.
무왕(武王)의 은(殷, 商)나라 정벌과 주(周)나라 창건
무왕은 즉위하여 태공망(太公望)을 군사(軍師)로 삼고 동생인 주공 단(周公旦)과 왕족인 소공 석(召公奭)으로 하여금 좌우에서 태공망을 돕게 했다. 무왕 9년,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에 맹진(盟津)에서 약속하지도 않았던 팔백 명의 제후가 모여들었다. 그러나 아직 정벌할 때가 아니라 판단하여 되돌아갔다. 1차 정벌은 무위로 끝났다. 무왕 11년, 은나라 주왕이 비간(比干)을 죽이고 기자(箕子)를 감금했다는 소문이 들리고 태사[樂工] 자(疵)와 소사 강(疆)이 그들의 악기를 품고 주나라 도망쳐 왔다. 이에 무왕은 은나라가 무거운 죄를 지었으니 끝내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며 다시 군사를 일켰다. 그 명분은 하늘의 벌을 받들어 행한다는 것이었다.
주 무왕(武王)이 목야(牧野)의 전투에서 상(商, 殷)왕조를 멸망시키고 봉건제(封建制) 국가인 주(周)왕조를 세웠다. 주왕조는 31대 38왕이 있었는데 대략 791년 동안 왕조가 존속하였다. 주(周)왕조는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로 나뉜다. 서주(西周)는 주 무왕[姬發]이 호경(鎬京)[지금의 西安]에 도읍을 정할 때부터 시작되고, 동주(東周)은 13대 평왕이 동쪽의 낙읍[洛陽]으로 수도를 옮긴 기원전 770년을 기점으로 삼는다.
* 주나라의 십이제후(十二諸侯) ;『사기』, <주본기(周本紀)>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주(周)나라를 건국한 무왕(武王)은 선대의 성군들을 추념하여 신농(神農)의 후손을 초(焦)에, 황제(黃帝)의 후손을 축(祝)에, 요(堯)의 후손을 계(薊)에, 순(舜)의 후손을 진(陳)에, 우(禹)의 후손을 기(杞)에 포상하여 봉했다. 그리고 공신과 모사를 봉했는데 사상보(師尙父, 강태공)가 가장 먼저 봉해졌다. 사상(師尙)을 영구(營丘)에 봉하고 제(齊)라고 했다.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周公 旦)을 곡부(曲阜)에 봉하고 노(魯)라고 했다. 소공 석(召公奭)을 연(燕)에 봉했다. 동생 숙선(叔鮮)을 관(管)에 봉했고, 동생 숙탁(叔度)을 채(蔡)에 봉했다.이들이 주나라 봉건국가 제후들의 시조이다.
낙읍을 도읍지로 한 동주(東周)시대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눈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접어들면서 주왕조의 세력은 점점 약해지고 강력한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된다. 이리하여 춘추시대 초기의 1,000여 개에 이르던 제후국이 점점 줄어들어 마침내는 10여 개 국만 남게 된다. 기원전 651년 경 강력했던 진(晉)나라가 한(韓)·위(衛)·조(趙) 세 나라로 분리되면서 전국시대(戰國時代)가 펼쳐진다. 이때부터 전국 칠웅(七雄)들이 약육강식의 힘의 대결을 펼친 결과 법가사상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도모한 진(秦)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게 된다.
* [이루장구·하](제30장) — [不孝者五] ; 장자(章子)의 부모에 대한 책선(責善)
08-30-01 公都子曰 匡章通國 皆稱不孝焉
夫子與之遊 又從而禮貌之 敢問何也
02 孟子曰 世俗所謂不孝者五
惰其四肢 不顧父母之養 一不孝也
博奕好飮酒 不顧父母之養 二不孝也
好貨財私妻子 不顧父母之養 三不孝也
從耳目之欲 以爲父母戮 四不孝也
好勇鬪狼 以危父母 五不孝也 章子有一於是乎
03 夫章子子父責善而不相遇也
04 責善朋友之道也 父子責善 賊恩之大者
05 夫章子豈不欲有夫妻子母之屬哉 爲得罪於父 不得近
出妻屛子 終身不養焉 其設心以爲不若是
是則罪之大者 是則章子已矣
01 공도자(公都子)가 말했다. “광장(匡章)은, 온 나라 사람들이 불효자라고 칭하는데, 선생님께서는 그와 함께 놀러 다니시고, 또 게다가 예모까지 갖추시니, 감히 무슨 까닭인지 묻겠습니다.”
02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세속에서 이른바 불효(不孝)라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그 사지(四肢)를 게을리 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보지 않는 것이 그 첫 번째 불효이고, 장기두고 바둑 두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두 번째 불효이고, 재물을 좋아하여 처자만을 사랑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세 번째 불효이고, 귀와 눈의 욕구를 따름으로써 부모를 욕되게 하는 것이 네 번째 불효이고, 용기를 좋아하며 잘 다투며 사나위서 부모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다섯 번째 불효인데, 장자(章子)는 이 중에서 하나라도 있는가?
03 장자(章子)는 아들과 아버지가 착하게 되기를 요구하다가 서로 뜻이 맞지 않은 것이다. 04 착하게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친구간의 도리(道理)이니 부자간에 착하게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은혜로움을 해치는 것 중에서 큰 것이다.
05 장자(章子)는 어찌 부처(夫妻)와 자모(子母) 등의 가속(家屬)이 있기를 바라지 않았겠는가마는 아버지에게 죄를 얻었기 때문에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아내를 내보내고 아들을 물리쳐서 종신토록 봉양받지 않았으니 마음에 설정하기를, ‘이처럼 하지 아니하면 아는 죄 중에서 큰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으니, 이렇게 하는 것이 장자인 것이다.”
* [자구(字句)의 해석] —————
· ‘匡章通國’에서 ‘匡章’(광장)은 제나라 사람. ‘通國’은 ‘나라를 통털어서’의 뜻이다.
· ‘又從而禮貌之’에서 ‘從’의 목적어인 ‘之’가 생략되어 있다. ‘之’는 ‘與之遊’이다.
· ‘博奕好飮酒’에서 ‘博’(박)은 ‘장기’. ‘奕’(혁)은 ‘바둑’.
· ‘好貨財私妻子’에서 ‘私’는 ‘사사로이 사랑하는 것’. ‘제 처자만 아끼고 사랑하는 것’.
· ‘以爲父母戮’에서 ‘爲’는 ‘~하게 하다’. ‘戮’(륙)은 ‘치욕을 당하는 것’
‘以A爲B’의 형태이므로 원래는 ‘以從耳目之欲爲父母戮’이다.
· ‘其設心以爲不若是’에서 ‘以爲’는 ‘~라고 여기다. ~라고 생각하다’
* [강 설(講說)] ——————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 서로 착해지기를 요구하다가[相責以善]통하지 않으면 서로간의 사랑에 흠집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책선(責善)하지 않는 것이 도리이다. 그러나 친구는 원래부터 맺어져 있는 관계가 아니고 필요에 따라 맺어진 관계이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인 친구관계는, 인격의 향상을 위해 서로 격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하고 충고하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친구에게는 책선을 해야 하며,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에는 친구관계를 청산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착하지 않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그 친구를 이용하기 위한 것일 뿐 순수한 것은 아니다.
* [장하주(障下註)] ——————
이 장(章)의 뜻은 여러 사람들이 미워하는 바에 있어서도 반드시 살펴야 하니, 성현의 지공지인(至公至仁)하신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양씨[楊時]가 말하였다. “맹자께서 장자(章子)의 행실을 취한 것이 아니요, 다만 그의 뜻을 가엽게 여겨 그와 절교하지 않으셨을 뿐이다.(此章之旨 於衆所惡而必察焉 可以見聖賢至公至仁之心矣 楊氏曰 章子之行 孟子 非取之也 特哀其志 而不與之絶耳)”
* [이루장구·하](제31장) — [曾子·子思] ; 증자(曾子)와 자사(子思)의 역할
08-31-01 曾子居武城 有越寇 或曰寇至 盍去諸
曰無寓人於我室 毀傷其薪木 寇退則曰 修我牆屋 我將反
寇退 曾子反 左右曰 待先生如此其忠且敬也
寇至則先去 以爲民望 寇退則反 殆於不可 沈猶行
曰是非汝所知也 昔沈猶有負芻之禍 從先生者七十人 未有與焉
02 子思居於衛 有齊寇 或曰寇至 盍去諸 子思曰 如伋去 君誰與守
03 孟子曰 曾子子思同道 曾子師也父兄也
子思臣也微也 曾子子思易地則皆然
01 증자(曾子)가 무성(武城)에 거처할 적에 월(越)나라 침략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침략군이 도착하는데 어찌 떠나지 않으십니까?” 하자, 증자가 말하기를, “내 집에 사람을 살게 함으로써 섶이나 나무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고, 침략군이 물러간다고 하자, “나의 담장과 건물을 수선하라. 내 장차 돌아갈 것이다.” 하였다.
침략군이 물러가자 증자가 돌아왔는데, 좌우에 있는 자들이 말하기를 “(무성의 대부가) 선생님을 대접하기를 이처럼 충성스럽고 공경스럽게 하였는데, 침략군이 이르자 먼저 떠나가시어 백성들이 우러러 따르게 하시고 침략군이 물러가자 돌아오시니, 아마도 불가한 듯합니다.”라고 하자, 심유행(沈猶行)이 말했다.
“이는 너희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 우리 심유씨 집에 부추의 화(禍)가 있었는데, 선생님을 따르는 자 70인이 그 화를 입은 자가 있지 않았다.”
02 자사(子思)가 위(衛)나라에 있을 적에 제(齊)나라의 침략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침략군이 이르렀는데 어찌 떠나지 않으십니까?” 하자, 자사가 말하기를, “만약 내가 가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지키겠는가?” 하였다. 03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증자와 자사는 도가 같다. 증자는 스승이며 부형이었고, 자사는 신하였고 미천하였기 때문이다. 증자와 자사가 처지를 바꾼다면 다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 [자구(字句)의 해석] —————
· ‘盍去諸’에서 ‘盍’(합)은 ‘何不~’의 축약형. ‘諸’(저)는 ‘~之乎?의 축약형’
· ‘昔沈猶有負芻之禍’에서 ‘負芻’(부추)는 난을 일으킨 사람이다. 증자(曾子)가 심유씨(沈猶氏) 집에 머물고 있는데, 부추(負芻)라는 자가 난리를 일으키자, 증자(曾子)는 제자들을 모두 이끌고 피하여 아무도 난리를 수습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曾子嘗舍於沈猶氏 時有負芻者 作亂 來攻沈猶氏 曾子 率其弟子去之 不與其難)
· ‘如伋去’에서 ‘伋’(급)은 자사(子思)의 이름이다.
· ‘君誰與守’에서 ‘誰’는 ‘與’의 목적어. ‘君誰與守’은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지키겠는가?’
* [강 설(講說)] ——————
남의 나라에 스승으로 초빙되어 가 있을 때는, 그 나라의 혼란한 사태에 대한 책임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말려들어 희생될 필요가 없다. 또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 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어떤 나라의 신하로 있을 때는 그 나라의 안전에 대한 책임이 있으므로, 그 나라에 문제가 있을 때는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
증자(曾子)가 무성(武城)에 있을 때는 스승으로 초빙되어 가 있었고, 심유씨(沈猶氏) 집에 있을 때는 제자인 심유행(沈猶行)의 학부형 자격으로 있었다. 그러나 자사(子思)가 위(衛)나라에 있을 때는 신하(臣下)로 있었다. 각각의 입장에서 행동양식은 서로 달랐지만 행동원리른 같은 것이다.
* [이루장구·하](제32장) — [堯舜與人同] ; 성현(聖賢)과 일반인의 차이는?
08-32-01 儲子曰 王使人瞷夫子 果有以異於人乎
孟子曰 何以異於人哉 堯舜與人同耳
저자(儲子)가 물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선생님을 엿보게 하였는데, 과연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이 있으십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다르겠는가? 요순도 또한 다른 사람들과 같으시다.”
* [자구(字句)의 해석] —————
· ‘儲子’(저자) ; 제나라 사람
· ‘王使人瞷夫子’에서 ‘瞷’(간)은 ‘엿보다’ <감?>
· ‘何以異於人哉’에서 ‘何’는 ‘以’의 목적어. ‘何以異於人哉’은 ‘무엇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 [강 설(講說)] ——————
사람들은, 성인(聖人)은 일반 사람과 다른, 특이하고 기이한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보편적으로 다 같은 사람이다.
* [이루장구·하](제32장) — [所以求富貴利達] ; 부귀영화를 구하는 방법
08-33-01 齊人有一妻一妾而處室者 其良人出則必饜酒肉而後反
其妻問所與飮食者則盡富貴也 其妻告其妾曰
良人出則必饜酒肉而後反 問其與飮食者 盡富貴也
而未嘗有顯者來 吾將瞷良人之所之也
蚤起施從良人之所之 徧國中 無與立談者
卒之東郭墦間之祭者 乞其餘不足 又顧而之他 此其爲饜足之道也
其妻歸告其妾曰 良人者所仰望而終身也 今若此
與其妾訕其良人 而相泣於中庭
而良人未之知也 施施從外來 驕其妻妾
02 由君子觀之 則人之所以求富貴利達者
其妻妾不羞也 而不相泣者幾希矣
01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제나라 사람 중에 아내 하나와 첩 하나를 데리고 함께 거처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 남편이 밖에 나가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실컷 먹은 뒤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 아내가 함께 마시고 먹는 자들에 대해서 물었더니 모두 부귀한 사람들이었다. 그 아내가 그 첩에게 말하기를,
‘남편이 밖에 나가서 반드시 술과 고기를 실컷 드신 뒤에 돌아오기에 그 함께 마시고 먹는 사람에 대해서 물었더니 모두 부귀한 사람들이었는데, 일찍이 유명인사가 찾아온 일이 없었으니 내 장차 남편이 가는 곳을 엿보겠다’ 하고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이 가는 곳을 미행하여 보니, 시내를 두루 다니는데 함께 서서 이야기하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동쪽 성곽 밖의 무덤 사이에서 제사 지내는 자에게 가서 남은 음식을 빌어먹고 모자라면 또 돌아보고 딴 곳으로 가니, 이것이 그가 실컷 먹고 만족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 아내가 돌아와 그 첩에게 말하기를, ‘남편이란 우러러 바라보면서 평생을 바치는 사람인데, 지금 이와 같다’ 하고는, 첩과 함께 남편을 헐뜯으며 뜰 가운데서 서로 붙들고 울고 있었는데, 남편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의기양양해서 밖으로부터 돌아와서 그 아내와 첩에게교만하게 굴었다.
02 군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람의 부귀·이로움·출세 등을 구하는 방법은 그 아내와 첩이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붙들고 울지 않을 것이 없을 것이다.”
* [자구(字句)의 해석] —————
· 이 장(章)의 첫머리에 ‘맹자왈’이라는 글자가 있어야 하니, 글자가 빠진 것이다.
· ‘處室’에서 ‘室’은 아내의 바이므로 ‘處室’은 ‘아내와 함께 거처하다’. ‘良人’은 ‘남편’.
· ‘必饜酒肉而後反’에서 ‘饜’은 ‘염(厭)’과 ‘식(食)’의 합체어로, ‘실컷 먹다’
· ‘盡富貴也’에서 ‘盡’은 ‘모두’
· ‘而未嘗有顯者來’에서 ‘顯者’(현자)는 ‘세상에 드러난 사람, 유명인사’
· ‘吾將瞷良人之所之也’에서 앞의 ‘之’는 주격조사. 뒤의 ‘之’는 ‘가다’. ‘所之’는 ‘가는 곳’
· ‘蚤起施從良人之所之’에서 ‘施’(이)는 ‘질러가다’. ‘施從’(이종)은 ‘미행하다’
· ‘徧國中’에서 ‘徧’(편)은 ‘두루 돌아다니다’. ‘國’은 ‘도시’ 특히 ‘도읍지’를 지칭한다.
· ‘卒之東郭墦間之祭者’에서 ‘卒’은 ‘마침내’. 앞의 ‘之’는 ‘가다’. ‘墦’(번)은 ‘무덤’. 뒤의 ‘之’는 ‘東郭墦間’과 ‘祭’가 도치되었음을 나타낸다. ‘卒之祭於東郭墦間者’로 놓고 해석한다.
· ‘此其爲饜足之道也’에서 ‘爲~’는 ‘~을 하는’, 여기서는 ‘饜足(실컷 먹고 만족)을 하는’
· ‘良人者所仰望而終身也’에서 ‘所~’는 ‘~하는 사람’
· ‘與其妾訕其良人’에서 ‘訕’(산)은 ‘헐뜯다’
· ‘施施從外來’에서 ‘施施’(시시)는 ‘의기양양한 모습’
· ‘則人之所以求富貴利達者’에서 ‘所以~’는 ‘~하는 방법’
* [강 설(講說)] ——————
이 장(章)의 남편처럼, 남자들이 대체로 밖에 나가서는 출세하고 돈 벌기 위해서 아부하거나 비굴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는 내색을 하지 않거나 그것을 감추고 의젓하게 행동한다.
조씨[趙岐]가 말하였다. “지금 부귀(富貴)를 구하는 자들이 모두 부정한 방법으로 어두운 밤중에 애걸하여 부귀를 구하고 한낮에는 사람들에게 교만을 떨고 있으니, 이 사람과 어찌 다르겠느냐고 말씀한 것이다.(趙氏曰 言今之求富貴者 皆以枉曲之道 昏夜乞哀以求之 而以驕人於白日 與斯人 何以異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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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孟子)』 제52강 <이루장구·하> (제19~33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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