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도 존스목사가 쓴
로마서 강해글에서
"병아리를 놀라게도 하고 꽃도 피고"
(내용 요약 임명락 선교사)
1).경건한 두려움과
무서운 두려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우리는 구원의 확신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확신 이라는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고 도움을 주는 구절입니다.
저는 에써서 어떤 사람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다는 단순한 사실 자체만 으로도 아들됨을 시험하는 매우 훌륭한 시금석이 됨을 증명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양자의 영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기에 대해 적용시킬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시금석입니다.
왜냐하면 종의 영은 양자의 영을 언제나 선행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종의 영을 받지도 않고 양자의 영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종의 영을 느 끼는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다양함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어 느 정도로든지 어떤 형태로나 모양으로든지 그 영은 나타나기 마련입니 다.
나는 그 의도를 지원하기 위해서 위대한 청교도였던 존 프리스톤 (John Preston)의 말을 인용한 바 있습니다.
저는 위대한 복음주의자인 휫펄드(G. Whitefield)의 말을 하나 인용 하려고 합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먼저 우리는 모세의 목소리를 들으며 율법의 목소리를 들습니다. 시내산을 거치지 않고 시온산에 가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곧바로 뚫린 길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이 언제 희심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나에게 돌아오라
거룩한 성령이여(비둘기여)
안식의 복된 소식을 가지고 오너라
나는 주님을 슬프게 한
죄를 미워하노라
내 가슴 속 깊이
주님을 사모하노라.
2).우리가 양자라는 의식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 15)
우리는 지금까지 이 진술의 처음 부분인 부정적인 측면에 관심을 기울 여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서 우리 가 벗어났음을 상기케 하는 두 번째 부분을 숙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세 번째 증거이 기도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는 종의 영 아래 있지 아니합니 다. 우리는 그곳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가 종의 영에서 벗어났으며 더 이상 그런 조건에 머물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의 아들들이라는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두 번째 부분이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주는 사실 은 우리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해주는 양자의 영을 우리 가 또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계속해서 옛 감정이 남아있음 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자 비와 축복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지점에 머물 러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가 지는 이 적극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 각해 온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아들됨을 훨씬 더 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3).양자의 영을 받는 방식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우리는 이처럼 중요하고 위대한 구절에 대한 해석을 실제로는 마친 셈 입니다. 우리가 알았듯이 그 구절은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아들들이라는 사실을 제공해 주는 증거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받 은 영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 이 아니요, 우리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 게 하는 '양자의 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도의 진술을 떠나기 전에 긴급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 는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다시 한번 양 자의 영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님을 상기(想起)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양자의 영에 대해서 조금밖에 또는 아 무것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것 을 말할 때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대부분은 나의 진술에 동조하지 않 았을 것임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의 확신이 구원의 필수적 인 것이었다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칼빈이나 루터의 경우 는 특별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구원 자체와 구원 의 확신 사이를 구별짓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이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을 알지 못하는 한, 구원받지 못했다고 기르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4).성령의 주권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8:15)
우리는 계속해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어떻게 받는가 하는 문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받다' (receive)로 번역된 여러 다른 말들을 상세하게 점검해 보았습니다. 새 로운 문제를 시작함에 있어서 이 점을 우리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은 중 요합니다. 원어에 있어서 여러 가지 다른 말들이 '받다' 라는 말로 번역 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또한 실제적으로 그 모든 발들은 이 로마서 8:15에서 사용된 말과는 달리 매우 능동적인 의미와 감각을 전달하고 있 음도 알았습니다. 여기서 '받다' 로 번역된 말의 원어에 관해서 권위자들 은, 그 말이 능동적으로도 수동적으로도 사용되는 말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두 용법에 대한 실례와 예중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의 수동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모든 예증들은 직접적으로 성령을 받는 이 문제와는 하등의 관계를 가지지 않은 경우들이었습니다. 제가 일부러 성령받는 문제를 뒤로 미룬 것은 그 문제를 전체로 다루기 위해서입니 다. 저는 다만 그 말이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수동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고 보여주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또한 수동적인 의미로 쓰여질 때 그 말 은 "주어진 것을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주어진 것을 얻고 획득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
5). 세례와 충만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우리가 이 구절에 대한 강해를 계속해 나가지만 이 설교들을 통해서 성령의 사역에 관한 전부를 다루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드립니 다. 우리는 특별히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엉"을 받는 정 확한 방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 양자의 영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근거 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알았듯이 이 확신이 없이도 그리스도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시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 다. 아무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죄를 깨달을 수 없으며, 성령이 아니고는 참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절대적인 진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 문제를 다루지 않고 구원의 확신을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양자의 영' 을 받는 것은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형태요. 유형입니다. 저는 감히 그것을 구원의 확신의 제2유형이라고 부르렵니 다. 첫번째 유형은 14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만일 스스로를 시험해 보고서 자기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다고 만족한다면, 그 사람은 자 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의 확신에 대 한 첫번째 유형입니다. 그러나 이 15절에 또 다른 유형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고차원적인 구원의 확신의 유형이라고 묘사하려합니다.
윌리암 월리암스(William Williams)의 찬송가들 중에
한 구절을 소개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찬송은 전형적인 경우입니다.
오. 주여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을 알게 하소서
내 모든 어두운 의심 염려 사라지게 하시고
내 모든 의심과 내 두려움 다 씻으시고
내게 더 분명한 확신을 주소서
여러분은 기도에 이와 같은 말들을 사용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찰스 웨슬레(Charles Wesley)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단지요
언제 주님으로 채워진
내 기쁨을 얻으리요
그 구속하신 위대한 사랑,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목말라 나 쇠약하였고
나 죽기까지 그것을 알기 바라오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이 사모하는 것이라고
하나님께 이르십시오! 또 는 다시,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시나이다
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내 돌 같은 마음에 부어졌네
사랑이 그리워 탄식하고 수척해졌네
주여! 이 사랑의 몫이 내 것이요
이 더 훌륭한 몫이 내 것일세
찰스 웨슬레는 알미니안(Arminian)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제 요 한은 "믿음으로 그를 취하라" 는 교훈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찰스 웨슬 레는 자기가 믿음으로 그것을 취할 수 없었음을 알았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간절히 탄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 그리워 나 탄 식하고 수척해졌네." 다른 교훈은 1873년쯤에서 가르쳐지기 시작했습니 다.
그 이후 그 교훈은 대중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레와 웨 슬레를 따르는 감리교도들은 그것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 들이 그 축복을 취할 수 없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임에 틀림없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요구하고 그것을 위해 울부짖고 그것을 탄식하며 바라는 것뿐임을 알았습니다. 마루에 데굴데굴 구를 필오가 없었습니다.
만일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내가 자식의 자리에 있다면
비둘기 같은 아버지의 영으로
내려보내사
내 마음 위에 안착하게 하소서
그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 논리를 주목하십시오.
"만일 아버지의 사 랑 안에서 내가 자식의 자리에 있다면"
저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 습니다.
저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작은 몫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기도가 계속됩니다.
"비둘 기 같은 아버지의 영으로 내려보내사 내 마음에 안착하게 하소서." 우리 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로 하여금 우리가 그것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십시오. 우리의 갈망을 아시게 하십시오.
시편 42편의 기자와 같이 말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 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시 42:1).
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원합니다. 저는 그를 알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한 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정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것을 믿는 것이 아니며 또한 스 스로를 설득시키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다른 어떤 것 보다도 더 확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