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1
5부 부재 <죽음> 테마
8부 주요소재: 1877년 4월 발발 <러시아-투르크
전쟁>
#안나와 레빈: 구성의
두축 (병렬구조- 불륜의 파국과 결혼의 행복)
#스티바-돌리 : 등장인물들과 내외적인 ”접촉”
#카레닌(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안나-브론스키
#레빈-키티
#오블론스키-쉐르바츠키가
#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포크로프스코예
그 무수한 발견의 즐거움은 안나와 레빈이 살았던 시공간과 동일한 질료로 이루어진 우리의 시공간,
즉 지속성과 관계성을 띤 시공간 안에서 우리의 축적된 삶과 <안나
카레니나>의 등장인물의 삶을 끊임없이 연계하여 독서할 때 찾아 올 것이다
<저: 레프 톨스토이>
Leo Nikolayevich Tolstoy,Lev Nikolaevich
Tolstoi
1828년 남러시아 툴라 근처에 있는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명문 백작가의 4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을 후견인으로 성장했다. 카잔대학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자퇴했다. 1847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농장일에 전념했으나 실패하고 1851년에 카프카즈의 군대에 들어갔다.
1852년 처녀작 『유년시대』를 발표하여 투르게니에프로부터 문학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그 후 러시아 농민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뜬 그는 농민계몽을 위해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를 세우고
농노해방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다.
그후 1869년에 완성한 『전쟁과 평화』로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며, 러시아의 현실과 고통받는 러시아 민중의 삶을 여러 각도에서 포착하여 생동감 있게 그려내 오늘날까지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로 인정받고 있다.
1870년대 후반기에 수많은 정신적 갈등과 고뇌를 겪고 난 뒤 홀연히 농부로
변신하였으며 1885년에는 뽀스레드니끄(중개인이라는 뜻) 출판사를 만들어 러시아 민화와 복음서의 진리를 대중에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민 책들을 펴내기 시작했다.
1870년대 후반 『안나 카레리나』의 마지막 몇 장을 쓸 무렵 그는 모든 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죽음에의 공포에 사로잡혀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게 된다. 결국 삶의 의의는 과학이나 철학도
설명할 수 없고, 이성의 힘에 의지해서도 해결되지 않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민중의 태도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녀의 비극은 사회 가치에 대한 대안을 추구하는 레빈의 행위와 평행을
이루는데, 레빈은 자신의 영지에 있는 농부들 사이에서 해답을 찾는다.
『안나 카레리나』에서
정신적 위기와 극복이 이른바 톨스토이의 회심(回心)이며 『참회록』
속에 서술된 고백의 내용이다. 여기서부터 톨스토이는 현대의 타락한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원시 그리스도에 복귀하여 근로, 채식, 금주, 금연의 생활을 영위했다. 원시 기독교의 소박성을 지닌 포괄적인 비전에 부합된 삶을 살려고
노력함으로써 예언적인 현자가 되었다. 톨스토이는 그렇지 않으면 뒤얽혀버렸을 인생에서 자기 책의 핵심을
형성해 주는 인생의 의미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도덕적 필연성과 합리적
기독교 윤리에 바탕해 농민적 무정부주의, 악에 대한 무저항 정신으로 대변되는 그의 사상은 한때 전 서계로
퍼져 톨스토이즘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수많은 평론과 소책자, 교훈적인 단편소설 등을 통해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찬 삶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정부, 교회 등의 제도와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자신의 견해를 전파했다.
톨스토이의 걸작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침략 사건을 러시아의 여러 가정 문제를 통해 그려낸 거대한 서사시다. 이 작품에서는 특히 자신들의 삶 속에서 중요성과 의미를 찾고자 하는
두 사람, 즉 안드레이 볼콘스키 왕과 피에르 베주호프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톨스토이는 남은 생애를 자신의 원칙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한편, 자신의
철학을 책으로 구현하면서 보냈다. 종교적 전향 이후에는 비록 도덕주의자 톨스토이가 인생과 인간 경험의
활력 및 다양성을 뛰어나게 포착해 낸 예술가 톨스토이보다 우세할지라도, 그 시기에 나온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에 속한다. 특히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
『크로우처 소나타』(1891)가 그렇다.
톨스토이의 신비주의와
금욕주의는 헌신적인 추종자들을 매혹시킨 반면, 아내와 가족으로부터는 그를 소외시켰다. 82살 되던 해 그는 그의 가르침과 그의 개인적 부유함의 부등으로 괴로워하던 중, 그의 아내와 말다툼 한 후 집을 나왔다. 3일 후, 1910년 11월 20일
빈촌의 정거장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러시아 민화에 기반을
둔 『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등과 같은 짧지만 진정한 교훈을 주며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하는 작품들을 써내기도 했다. 그 외의 작품으로 『교의신학비판』,『참회록』,『나의 신앙』,『부활』,『유년시대』,『소년시대』,『청년시대』,『세바스토폴
이야기』, 『카자흐 사람들』,『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 』,『어떻게 전쟁을 끝낼 것인가』등 다수가 있다
#작가 한마디: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며,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출판사
리뷰>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Анна Каренина)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219?220?221)으로
출간되었다. 동시대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로부터 “완벽한 예술
작품”이라는 평가와, 역시 러시아 출신 소설가인 나보코프로부터 “톨스토이 스타일의 정점”이라는 극찬을 받은 바 있는 작품이다.
2007년 《타임》지에서 현대 작가 12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을 통해 “지금까지 쓰인 가장 훌륭한 소설”로
뽑히기도 했다. 톨스토이 자신도 『안나 카레니나』를 “나의
진정한 첫 소설”로 여겼다고 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젊은 번역자 연진희가 21세기의 감수성에 맞는 새로운 번역을
선보인다.
톨스토이의 사상과 고민이 집결된 대작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와 레빈이라는 주요
인물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그들의 생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안나는 유능한 고위 관리인 알렉세이
카레닌의 아내로, 둘 사이에는 귀여운 아들이 하나 있다. 정숙한
귀부인으로 사교계와 가정생활만이 자신의 세계였던 그녀는 어느 날 젊은 백작과 사랑에 빠지고 사교계에서도 가족에게서도 외면당한다.
한편 레빈은 대도시의
삶을 뒤로하고 시골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후에는 더욱
시골 생활에 몰두하면서 농촌의 현실과 종교에 대해 고민한다. 삶의 방식과 태도, 가치관 등 모든 것에서 상반돼 보이는 이 두 인물을 통해 톨스토이는 전쟁, 농민, 부정부패 등 당시 러시아가 직면해 있던 문제와, 종교, 신념, 결혼 제도 등 그 자신이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인류에게 주어진 철학적, 사상적 문제를 추상적인 사고 속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세계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즉,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시공간과 인물을 창조하여, 그 속에서 여러 인물들을 통해 실직적인 해답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그들 나름의 사연과 생각을
지닌 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그 가운데에서 작가와 나아가 독자들은 삶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의 인물들 가운데는 톨스토이 자신의 모습이 특히 많이 반영돼 있다고 평가되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바로 레빈이다. 레빈의 영지는 톨스토이의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와 유사하며, 형의 죽음이나 키티에게 청혼하는 장면 등도 톨스토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 중요한 점으로는
레빈이 가진 러시아 농민들에 대한 애정과 신에 대한 태도를 들 수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는 톨스토이가
자신의 사상을 레빈에게 그대로 반영한 듯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톨스토이는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그의
생각과 고민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는 수없이 많은 내적 고리를 품고 있고, 그 고리를 연결할 때마다 형체를 갖추게 될 테마 역시
무한하게 존재한다. 그 무수한 발견의 ‘즐거움’은 안나와 레빈이 살았던 시공간과 동일한 질료로 이루어진 우리의 시공간, 즉
지속성과 관계성을 띤 시공간 안에서 우리의 축적된 삶과 『안나 카레니나』의 등장인물의 삶을 끊임없이 연계하여 독서할 때 찾아올 것이다.(「작품 해설」 중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사회 제도와 구조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간 군상들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진실, 사랑의 본질 나아가 인간 존재의 문제를 파헤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스테판
오블론스키 공작이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운 사실이 발각되어 부부 사이에 위기가 닥친다. 페테르부르크에 살던 스테판의 여동생 안나 카레니나가 이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모스크바로 온다. 안나는 유능한 관리의 아내로 한 아이의 어머니로 정숙하고 우아하게 살아왔다.
안나의 노력으로 부부는 화해를 하지만, 오히려 안나는 그곳에서 젊은 백작인 브론스키에게 한눈에 사로잡히고 만다. 브론스키는
스테판의 처제 키티에게 구애하던 중이었으나 그 역시 안나에게 빠져든다. 키티는 브론스키가 청혼할 것으로 굳게 믿으며 점잖은 귀족 레빈의 청혼을 거절해 버린다. 그러나 안나와 브론스키가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함께 있는 모습에 키티는 절망한다. 레빈 역시 키티에게 거절당한 후 낙담하여 시골로 돌아가 그곳에 파묻혀 지내면서, 농촌과 농민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간다.
한편 안나는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남편에게 숨기며 그와 밀회를 계속한다. 그러나 남편은 물론이고 사교계의 모든 사람이 둘의 사이를
눈치 챈다. 마침내 안나는 남편에게 사실을 대담하게 고백하고 이혼을 요구한다. 하지만 남편은 이혼을 거절하면서 표면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안나는
그럴수록 더욱 그에 대한 증오심이 커져 감을 느낀다. 결국 안나는 브론스키의 딸을 낳고, 가족은 물론 사교계에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다. 둘은 사회에서 싸늘하게
외면당한 채 외국으로 떠난다.
키티는 마음의 병을 얻어 외국으로 휴양을 떠났다가 마음의 변화를
느끼며 돌아오는데, 레빈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변치 않았음을 확인하고, 마침내 둘은 결혼하게 된다. 한편 안나와 브론스키는 딸과 함께 외국을
전전하며 살아간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 출세의 길이 막히자 브론스키의 어머니는 안나를 더욱 미워하며
둘 사이를 반대한다. 여전히 남편과의 이혼은 요원하고, 첫
아이인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 가자, 안나는 점점 더 브론스키에게 집착하게 된다. 다시 러시아에 돌아오지만 사교계를 비롯한 그 어느 곳에서도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안나는 브론스키에 대한 사랑을 지독하게 갈구하고 그럴수록 브론스키는 그녀에 대한 마음이 식어 가는 것을 느낀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등 20세기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 소설
영화, TV 드라마, 발레,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 각종 예술 장르로 재탄생하고 있는 영원한 고전
『안나 카레니나』는 여러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한편으로는 ‘전지적 작가 시점’을
사용해 그 인물들의 행동과 생각을 샅샅이 읽어 낸다. 각각의 인물들이 자신의 내면 심리를 생생하게 내비칠
때는, 독자들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의 변화를 실감하게 되는 동시에, 인물들은 더욱 생명력 있는 인물로 거듭나게 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작가 자신의 가치관과 문제의식이 드러나기도 한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에서 보여 준 이러한 ‘의식의 흐름’ 기법은 이후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등
20세기 작가들에게로 계승되어 발전했다.
‘저
남자는 날 안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날 알지 못하듯, 저 남자도 날 몰라. 나 자신도 날 모르겠는걸. 프랑스인들이 말하듯, 내가 아는 건 나 자신의 욕구야.
저 아이들은 저런 더러운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 하네. 분명 저 애들이 아는 것도 자신의 욕구겠지.’ 그녀는 아이스크림 장수를 불러 세운 두 소년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아이스크림
장수는 머리에서 나무통을 내려놓고 수건의 끝자락으로 땀에 젖은 얼굴을 훔치고 있었다. ‘우리 모두 달콤하고
맛있는 것을 원하지. 당과가 없으면 더러운 아이스크림이라도. 키티도
똑같아. 브론스키를 갖지 못하면 레빈이라도 갖겠다는 거야. 그래서
날 질투하고 있어. 그리고 날 증오해. 우리 모두 서로를
증오해. 난 키티를, 키티는 나를. 그것이야말로 진실이야.’(본문 중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1935년
그레타 가르보를 주연으로 할리우드에서 영화화된 이후 비비안 리, 소피 마르소가 주인공 ‘안나’ 역을 맡는 등 계속해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소설은 1878년 처음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후, 영화와 TV 드라마, 발레,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 여러 예술 장르로 재탄생하면서 영원한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계속해서 입증되고 있다
<독자 리뷰>
2013년도 영화를 보면서 가졌던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가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머리와 가슴의 거리이고, 그보다 더 먼 거리가 가슴과 발까지의 거리라고.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원작으로
만나본 『안나 카레리나』는 내가 알고 생각했던 단순히 한 여인의 일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그렸다. 그 속에서 삶에 대한 진중한 물음을 던진다. 물론 작품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소재는 안나라는 가정을 가진 여자와 브론스키라는 젊은 귀족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다. 하지만 그건 이 작품의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한 하나의 소재일 뿐이다. 그 이야기에 가려 더 큰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그건 삶에 관한
이야기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열정적이고 정염적인 사랑 -영화에서도 이 부분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다른 이야기는 가려졌다 –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그 주위에는 얽히고설킨 수많은 관계로 엮어진 인드라망의 거대한 구성을 그려내고 있다.
어떤 하나의 삶의 모습에는 반드시 그 반대되는 삶을
살아가는 이의 삶의 모습을 대비하며 독자로 하여금 어떠한 삶이 참된 삶인지, 어떠한 삶을 선택할 것인지를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크게는
같은 귀족이면서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브론스키와 레빈의 삶의 대비를 통해 삶의 방식과 사랑의 방정식에 대해 애기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안나의 입장에서 브론스키와 남편과의 사랑의 방식. 키티의 입장에서 결혼을 위한 배우자로 브론스키와 레빈을 놓고, 화려한
삶을 사는 브론스키와 삶의 소소함과 의미에 치중하는 레빈을 비교하며 결혼에 있어 배우자 선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외도의 입장에서는 안나의 오빠인 스티바와 안나의 모습, 외도하는
배우자를 대하는 입장에서는 둘리와 안나의 남편 알렉세이, 사랑의 방정식에 있어서는 안나와 키티를, 사랑에 있어서는 형식에 치중하는 알렉세이와 브론스키의 저돌적인 사랑을, 귀족의
삶의 모습은 정치에 뜻을 둔 레빈의 형과 그저 소일거리로 삶을 사는 귀족들의 삶을, 공장을 운영하며
지내는 귀족과 농노를 소유한 귀족,
여자의 외도에 대해서는 안나와 벳시의 비교, 그 외도를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시선, 도시의 공장노동자와 농촌의 농노에서 생활하는 농부들의 삶에 대한 대비, 낙관적인 삶과 치밀한 삶과 의미없는 삶, 비교하는 삶의 모습을 또한
보여준다.
그것만이 아니다. 안나의 자식에 대한 편애, 안나와 키티의
출산의 모습과 대비되는 죽음, 작품의 초기에 열차에
치여 죽는 한 노동자의 죽음과 작품의 말미에 기차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는 안나의 죽음 또한 같은 죽음의 모습을 놓고 극적인 대비의 묘미를 선사한다. 생명이 탄생되는 출산의 순간에는 출산의 기쁨과 더불어 대비되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이란 것이 어떤 하나의
감정만을 지속할수 없음과 삶에서 우리가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비례해 우리가 감수해야 할 그 무엇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다양한 대비와 다양한 이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의 선택을 통해 달라지는 인생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서 삶의
진실함이 어디에 있는지를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를 향해 묻는다. 그 물음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하는 의문이다.
『안나카레리나』는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은 성찰이 보인다. 자신의 대변자인
레빈의 대사나 그의 삶을 통해 작가 자신의 삶을 반추해 낸다.
삶의 다양성에 대한 병렬적 구조의 이야기 전개를 통해 출생과 죽음, 사랑과
증오, 애정과 애증의 관계를 보여준다. 수없는 인과관계로 얽히고설킨 병렬적
서사구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레빈과 브론스키. 안나와 키티, 귀족과 평민, 도시노동자와 농부의 삶의 비교를 통해 관계와 관계로
이어져 끊임없는 순환구조에 이루어진 인드라망의 다양함으로 이야기는 구성되어있다.
마치 인간세상의 나비효과를보는 것 같다. 한사람의 선택은 누군가의 삶에 그만큼의 영향을 미쳐 그 누군가의 삶의 방향을 바꿔버린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그 관계와 관계로 구성된 그물망안의 몸부림이다. 그
관계란 나의 선택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럼 그 선택이란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 자신의 의지일까. 아니면 신의 섭리일까. 그 선택의 영향으로 바뀐 타인의 삶은 그럼 누구의 의지인가. 나의
의지의 발로라고 생각한 그 선택 또한 타인의 선택에 대한 영향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아는 신은 그 관계는 아닐까. 그 관계라는 것이 신의 의지의 표현은 아닐까. 우리가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했던 그 관계의 인드라망이 어쩌면 바로 신은 아닐까. 이 작품은 이렇듯 끊임없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작품에는 격식과 허례에 갇힌 러시아
상류층에 대한 풍자가 가득하다. 형식에 치중하고 명예를 존중하며 외적인 치장에만 추구하는 귀족들의
삶. 먹고사는 것에 걱정이 없는 귀족들의 지루한 삶과 매일 밤 계속되는 화려한 파티문화, 삶 자체의 지루함이 주는 일탈에의 끝없는 충동,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탈이 그들의 삶에 자양분이다.
타인의 일탈은 지탄의 대상이 되고, 나의 일탈은 삶의 활력소인 이중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삶의 긴장감이 해소됨으로 인한 삶의 무기력함과 나약함. 살아있음에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그들의 형식적인 삶,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에
가장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귀족들의 모습, 그 속에서 착취당하고 생의 영위를 위해 생존의 유지에도 어려운
보수와 지대를 납부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도시근로자와 농부들의 삶을 보여준다.
귀족들의 지루한 삶과 대비하여 노동의 신성함과 땀 흘림의 귀함을 자신의 대변자로 내세운 레빈의 삶을 통해 보여줌으로
작가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지향점에 대한 무언의 압력을 행사한다. 삶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이 작품은 총 8부로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이 원작이 써진 그 시절 출판사에서는 7부까지는 출간하고 8부는 출간을 거절했다. 이야기의 구성상 맞지 않는다는 것이 출판사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8부는 톨스토이가 자비로 출간했다고 한다. 7부에서 안나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하지만 그걸로 이 작품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리나』를 통해 하고픈 이야 기를 마지막 장인 8부에
모았다.
8부는 기존의 이야기 전개방식과는 이질적이다. 레빈의
독백으로 엮어진 8부에서 삶에 대한 톨스토이의 성찰이 레빈의 입을 빌어 묘사된다. –
참고로 이 작품속의 레빈은 톨스토이 바로 자신이다. - 작가는 묻는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그리고 레빈의 입을 통해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레빈의 독백을 빌어 고백한다.
하지만 난 톨스토이의 결론에 동의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 결론이 인격적인 신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나는 동조할 수 없다. 물론 작가의 그런 생각은 마지막 8부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으로 몸을 섞을 때, 안나가 달려오는 열차바퀴에
몸을 던져 자살을 선택할 때 안나는 신에게 용서를 빈다.
안나의 남편인 알렉세이가 자신을
배반한 안나에게 복수의 마음을 품다가 용서를 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도 신앙의 이유였다. 신앙심이 전혀
없는 그였는데 말이다. 만약 레빈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는 신이 삶이라는 영역 속에서 마주치는 관계의
일환이며, 외부의 공기를 호흡하고 외부의 음식을 섭취함으로 생명을 지속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삶이라는
필연적인 관계의 인드라망 속에서의 맺어지는 수없는 인연, 필연, 운명의
역동성속에서 선택이 빚어낸 관계의 역학구도로 엮어지는 그 미지의 것이 신이라면 나는 그 섭리에는 동조할 수 있다.
그녀의 주된 걱정거리는 여전히
자기 자신, 즉 자신이 브론스키에게 어느 정도 소중한지, 자신이
그가 포기한 것들을 어느 정도 대신할 수 있을지 였다. 브론스키는 그녀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버린
그 갈망, 즉 그에게 사랑받고자 할 뿐 아니라 그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갈망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녀가 그를 사랑의 올가미로 얽매려 애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했다.(3권.199쪽)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은 ‘나를 포기하고 너를 인정하는 것이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안나의 사랑은 달랐다. 안나는 끝가지 나를 포기하지 않고 너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우리라는
새로운 구성체로 거듭나지 않는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너를 위한 삶. 너를 인정하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 그것이 사랑에
대한 자각이다. 이런 자각이 없으면 사랑은 지속되지 않는다. 안나는
브론스키를 사랑하면서도 기존에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지 못했다. 자신의 기반을 버리지 못했다. 모든 것을 다 갖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한 미련이
역설적이게 그들의 사랑의 종말과 더불어 안나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랑
또한 그려져 있다. 협의로는 다양한 가정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만 광의로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사랑의 모습을
통해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여정도 함께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첫 문장인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1권. 13쪽) “가 오히려 다양한 사고의 확대를
방해하는 요인이다.
이제야 이해가 된다. 2013년도 영화에서 왜 감독이 모든 장면을 연극무대처럼 구성했는지. 그건
영화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를 관객의 자리에 앉혔다. 그리곤 그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삶을 보면서 자신이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했다. 그 선택은
바로 당신에게 있다고 감독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영화의 싱크로율이 원작과는
거의 맞지 않는다고 해도 모든 장면을 무대 위에서 연출한 감독은 톨스토이가 이 작품에 담고 싶어 하는 의도를 가장 정확하게 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물질의 무한성 속에서, 무한한 공간속에서 거품같은 유기체가 분리되어
나온다. 그리고 그 거품은 잠시 버티나 터져 버린다. 그리고
그 거품은, 바로 나.(3권. 503쪽)
만일 선이 이유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야. 만일 그것이 결가를, 즉 보상을 갖는다면, 그것 역시 선이 아니야. 따라서 선은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초월해 있어 (3권. 518쪽)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것은
늦은 밤 텅 빈 사무실에서였다. 마지막 장을 넘긴 그 순간의 감동을 책을 읽은 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만큼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이다. 왜
『안나 카레리나』가 위대한 작품인지를 가슴 절절히 느끼게 했다. 기차역에서의 한 번의 마주침으로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의도치 않은 만남은 의도치 않은 삶을 그려냈고, 그 삶은 또 다른 이들의 삶으로 이어져 당사자들과 더불어 그들과 관계된 타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삶의 무한함, 하지만 생의 유한함.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삶속에서 한없이 이어지는 관계의 인연 속에서 인간의 삶은 끝없이 이어진다. 때로는 의도치 않은 인연으로 강요된
선택의 순간, 그 속에서 어떠한 삶의 길을 택하느냐는 바로 자신의 문제이다. 안나의 죽음이후 누군가는 그 죽음의 영향으로 변화된 삶을, 누군가는
그 죽음으로부터 멀어져 일상적인 삶의 수레바퀴를 계속 돌리며 산다. 그 일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처럼. 하지만 한 여인의 죽음은 알게 모르게 많은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바로 관계의 인드라망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그 인연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마지막 장을 덮은 후 가슴 가득 쏟아나는 뜨거움을 동반한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가슴의 들 뜬 열기를 달래기 위해 늦은 밤 한적한 도시의 길을 걸었다. 끝없이 떠오르는 상념을
규격화된 도시의 교통수단에 가둘 수는 없었다. 도시의 밤, 술에
취해 몸을 못가는 사람들, 늦은 밤 귀가 길을 서두르는 사람들, 어딘가를
향해 여유로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누군가와 끝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모두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과 난 무슨 인연으로 같은
시간대에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공기를 나눠마시며 살고 있는 것일까. 지금 이 순간 이 시간에 존재하는
인연은 무엇으로 인함일까. 같은 공간에 머물렀다는 이 인연은 서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마주치는 낯모르는 이들이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를. 그리고 ‘나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를. 이 작품은 스스로의 삶에 그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톨스토이는 레빈의 입을 통해 이 질문에 답을 했다. 난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할수 있을까. 아니 답이 있기는 한 걸까?
세월은 멈출 줄 모르는 바퀴를 타고 구르고 또 구른다.
단지 인간의 목숨만이 세월보다 더 가볍게 그 종말을 향해 치닫는다. (열린책들. 2014. 돈키호테 2권. 655쪽)
첫댓글 근 일여년만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로 북리뷰의 공간을 채워본다.
불륜의 파국으로 끝나는<안나>와
결혼의 행복으로 마무리되는 <레빈>의 삶이
우리의 시공간과 연결된 고리를 발견한다.
그 발견의 기쁨을 맛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