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세 번째 면담을 앞두고 자신보다 연배가 높은 광양 현감 어영담, 낙안 군수 신호, 순천 부사 권준, 녹도 만호 정운을 먼저 만났다. 네 사람은 불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채 좌수영으로 왔다. 진해루 안을 오가면서 고심에 빠져 있던 이순신은 네 사람이 각각 망해루(전라좌수영성 정문 앞 누각)를 통과했다는 보고가 들어올 때마다 즉각 버선발로 달려 나가 그를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허리도 먼저 굽혔다.
“공무도 바쁘실 터에 오시라 하여 송구스럽소이다.”
나이는 손아래이지만 수사로서 지휘권자인 이순신이 공손히 인사까지 앞서 하자 네 사람은 모두들 황망해 했다.
“영감, 어찌 이러십니까? 장졸들 보기 민망하오이다.”
다섯 사람은 술상을 놓고 둘러앉았다. 두어 잔 권하거니 받거니 한 끝에 이순신이 부드러운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주지하시다시피 우리 수영에 조방장이 공석이오이다. 하루빨리 좋은 분을 보내주십사 조정에 장계를 올려야겠습니다. 네 분의 고견을 듣고자 오늘 이렇게 모셨습니다.”
몇 잔 술에 얼굴이 불콰해진 어영담이 최연장자로서 맨 먼저 발언을 했다.
“그야 영감 고유 권한인데 우리들에게 물을 일도 없지요.”
그러자 정운도 거들었다.
“대신들은 왜 조방장을 보내주지 않는 게요? 낮밤으로 연회를 즐기느라 너무 공사다망하신가? 수사 영감께서는 조정의 고관들과 두루 잘 통하신다 들었는데 뭘 망설이시오? 독촉을 하든가, 아니면 적당한 인물을 천거하시구랴.”
이순신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는 것을 본 권준이 좌중을 둘러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허, 수사께서 우리를 이렇게 부른 것은 무슨 의중이 있어서가 아니겠소. 말씀부터 들어본 후 논의를 하십니다.”
이순신과 동급인 정3품 순천 부사 권준은 문과 출신답게 성품이 온화하고 이치에 밝았다. 권준은 박학다식하고 문장력도 뛰어난 이순신에 대해 처음부터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말투가 부드러워 여러 사람이 모여앉은 자리의 분위기를 잘 조정해내었다.
조금 마음이 누그러진 이순신이,
“정걸 장군께서 길두마을에 계십니다. 그 사실을 알고 ….”
하고 말을 꺼내자 신호가 끊으면서,
“두 번 찾아뵈었다, 그 말씀 아니오이까?”
하였다. 이순신이 놀란 눈으로
“그걸 어찌 아시는지요?”
하자, 네 사람이 동시에 껄껄 박장대소를 하였다.
“수사 영감! 우리가 누구요? 전라도 바다를 지키는 수문장들이오.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고 있소. 마땅히 그래야 왜적을 물리칠 수 있지 않겠소이까?”
웃음을 터뜨려대는 좌중을 둘러보며 이순신이 진중한 음성으로 말을 꺼내었다.
“정걸 장군께 조방장을 맡아 주십사 청을 드릴까 하는데, 우리들이 함께 찾아뵙고 말씀 올리면 좋지 않으려나 싶어서 ….”
이순신의 말은 다른 수령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정걸은 아득한 19년 전(1572년)에 경상 우수사를 역임했을 뿐만 아니라, 14년 전(1577년)에 전라 좌수사, 4년 전(1587년)에 전라 병사를 지냈다. 오늘날 남해안 일대에서 군인으로 생활하고 있는 장졸들은 모두가 수군으로서든 육병으로서든 정걸 휘하에서 복무한 바가 있다.
게다가 전라 좌수영 산하 5관 5포 중 1관 4포가 흥양에 위치하는데, 정걸의 고향이 바로 흥양이다. 그런 까닭에 정걸은 자연스레 흥양이 배출한 전설적 인물로 숭앙받고 있다. 실현가능성은 거의 없다 싶지만, 정걸 장군이 전라 좌수영 조방장 취임을 승낙하는 경우 어느 누구도 감히 그의 지시와 명령에 절대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말이 없다. 정걸이 싫어서가 아니라 뭐라고 말을 꺼내기가 어렵다. 정걸 장군이 조방장을 맡아야 한다고 말하기에는 여든 다 된 선배에게 인간적 예의가 아닌 듯하고, 맡으면 안 된다 하기에는 천하 몹쓸 비인간적 결례를 저지르는 것처럼 여겨진 까닭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아무도 입을 떼지 못하는 채 하릴없이 시간만 강물처럼 지나간다. 한참 침묵이 흐른 뒤 권준이 참다못해,
“부임 인사를 다녀오셨소이까? 그렇다면 한 번 찾아뵈었을 텐데 … 길두마을에 두 번 가셨다는 것은 이미 청을 드렸고, 허락을 받지 못하셨다는 말씀 ….”
하고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이순신이,
“…그렇소이다.”
하고, 다시 권준이,
“이미 경상 우수사(정3품), 전라 좌수사(정3품), 전라 병마사(종2품)를 두루 역임하신 분 … 이제 와서 4∼3 품계나 낮은 조방장(종4품)을 … 그것도 그렇지만, 팔순이 다 되신 고령에 ….”
하며 중얼거리듯이 말을 이어간다.
“고향에 돌아오신 뒤로 혹시 후배들이 어려워할까 염려하여 전혀 바깥출입도 아니 하시는 분인데, 우리들이 아무리 마음을 모아 함께 찾아뵙고 ‘조방장을 맡아 현역으로 복무해 주십사!’ 한다 해서, 과연 성사가 될는지 …? 정 장군께서는 자신이 조방장을 맡으면 거의 손자 항렬 되는 수사 영감의 지휘권에 큰 장애가 발생한다고 여기실 텐데 … 허락을 아니 하실 듯 ….”
이때 성정이 화끈한 정운이 나서서 마무리를 지었다.
“아고, 온갖 걱정들은 우리 몫이 아니오. 그것은 정 장군께서 조방장을 맡으시면 그때부터 수사 영감이랑 두 분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일이고, 우리는 정 장군께 청을 드려보고, 만약 안 되더라도 대규모 전란에 대비해 훌륭한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충분히 보람을 찾을 수 있지 않겠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