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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디베이트코치협회 창립에 얽힌 이야기
"대한민국의 미래인재양성"이라는 꿈을 가지고 출발한 한국디베이트 코치협회는 현재 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본인에 의해
2011년 7월 16일에 창립된 단체입니다.
본인은 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평생을 청소년지도에 몸을 담고 살아왔습니다. 직업자체를 청소년교육에 몸담기도 했지만
다른 직업을 갖고 있을때에도 자원봉사활동으로 청소년관련단체에서 일하면서 한시라도 "미래인재양성"이라는 단어를
삶속에서 배제한 적이 없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본인이 디베이트와 연관을 맺게 된 인연도 역시 이러한 배경이 작용된 것입니다.
청소년들에게 토론교육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인성교육과 토론교육을 겸한 "말엔맘 스쿨"이라는 청소년 교육프로그램으로 비영리 교육활동으로 진행하고 있을때에 한겨레 신문을 통해 디베이트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경훈씨가 퍼블릭포럼디베이트라는 토론형식을 미국에서 가져와 한겨레교육센터를 통해 반포하기 시작한지 6개월즘 되었을때의 일입니다. 투게더디베이트클럽이라는 회사를 만들어 토론교육사업을 시작한 이경훈씨(케빈리)는
"대한민국 모든 학생이 매주 토요일 디베이트하는 그날까지"라는 멋진 슬로건을 내걸고 토론교육사업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저는슬로건 자체가 너무나 멋있어 곧바로 투게더측에 전화를 걸었고 이러한 "교육운동에 동참하려면 어떻게 할수 있느냐?, 케빈리 씨와 통화를 하고싶다"고 물어본 결과 한겨레교육센터에서 디베이트코치과정을 이수하면 상담을 할수 있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로인해 케빈리씨를 만나고자 한겨레 디베이트교육과정을 수강 신청하였고 입문과 심화과정 모두를 수료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원했던 토론교육확산운동에 관하여는 케빈리씨와 딘 한마디도 나눌수 없었고 본인은 실망감속에 교육과정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실망감은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디베이트교육을 받았지만 당시의 교육내용은 퍼블릭포럼이라는 형식에 대한 소개를 받은것뿐이지 코칭노하우에 대하여는 개발된것이 없었습니다. 이때에 함께 수료한 이십여명의 선생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앞으로 어떻게 하란말이냐?"라는 표현이었습니다. 결국 2011년 7월 9일 입문과정을 수료하고 함께 고민하던 십여명의 코치들은 일주일 후인 7월 16일 부터 부터 3개월간 매주 토요일에 연구모임을 갖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장소는 제가 경영하던 마포구 연남동 소재 힌국아동청소년성격지도연구소 사무실에서 갖기로 하였고 다음주 토요일인 7월 16일에 첫번째 모임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수료생들중에 반장으로 선임된 제가 모든 분들께 문자와 메일을 보내어서 연구모임을 알렸고 첫 모임에 나온 인원은 저를 포함한 11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전부터 토론교육을 해 왔고 토론교육의 확산운동에 꿈을 갖고 있던 저는 이왕 이렇게 모이게 된것을 체계적으로 키워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투게더측과 함께 하고 싶었던 기대가 무너지면서 생긴 반작용이었습니다.
곧바로 이에 대한 구체적 행동을 결심한 저는 당시 함께 코치과정을 수강한 백종환 선생님을 첫모임 전날 제 사무실로 초청하여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이분과 둘이서 토론교육 확산운동의 동지가 되기로 확약을 하였습니다.
"한국디베이트코치협회"의 출발은 이렇게 시작 되었습니다. 이날 백종환 선생님을 만나면서 저는 이미 "한국디베이트코치협회"라는 현재 운영하고 있는 협회 카페를 다음사이트에 개설하여 보여드리며 사무총장직을 맡아주실것을 요청하였고 수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토요일 첫 연구모임에서 모인분들께 디베이트교육 전문기관인 협회를 결성하자고 제안하였고 이러한 일에 전혀 경험과 관심이 없던 선생님들이었지만 저의 설득으로 인해 여러분이 동참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날 공식적으로 '한국디베이트 코치협회'는 탄생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두가지의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저희 모임이 투게더측에 알려지고나니 투게더에 온라인 우수회원으로 있던 저를 비롯한 몇명이 회원등급이 최저등급의 회원으로 강등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투게더측과 갈등구조를 갖지 말자고 하는 온건파와 이것은 투게더측의 잘못된 판단이기에 우리의 소신대로 모임을 이끌어가자는 강경파로 의견이 갈리게 되었습니다. 온건파에 계신분이 거론한 것은 투게더 측의 온라인에 '한국디베이터코치협회'라는 메뉴가 있으니 협회명칭을 변경하자는 의견이 나온것입니다.
저는 처음 카페개설을 할 당시 모든 사이트를 검색했지만 이러한 이름은 찾아 볼수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개설이 가능했다고 온건파 회원들에게 설명했으나 보았다고 말하는 분들이 여러분이 계심으로 협회이름을 짓는 것은 '한국디베이트코치협회'가 아닌 '한국디베이트협회'로 하자고 결정하였습니다.
저희 협회는 시작한지 한달후 어느정도 진용을 갖춘 후 8월 21일에 제가 대표자로 하여 '한국디베이협회'라는 이름의 임의단체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한국디베이트코치협회"라는 명칭이 꼭 필요하였기에 병행하여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사석에서 몇몇임원에게 의견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다행이었던 것은 다른분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카페상의 명칭변경은 6개월간 불가능하기에 오히려 두가지 명칭을 다 사용할수 있게된 것이엇습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한국디베이트협회'와 '한국디베이트코치협회'라는 이름이 병행하여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저희는 대외적으로는 한국디베이트협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고 온라인에서는 한국디베이트코치협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십여명의 초기 회원들이 매주 연구모임을 진행하였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가 계획한대로 회장직을 맡았고 협회의 외형성장을 위해 대외활동에 주력한바 짧은 기간에 커다란 공신력을 확보하는 일들을 엮어 내게 되었습니다.
첫번째는 투게더디베이트 클럽과 한겨레교육센터가 결별한 2011년 10월부터 한겨레의 디베이트코치양성과정 강의를 저희협회가 맡게 된것입니다. 이는 투게더측이 한겨레측과 결별한 사실을 알게된 제가 먼저 한겨레측에 제안하여 이루어진 사안으로 저희 협회가 한겨레8기부터 강의를 맡게 된 것입니다. 저와 백종환 사무총장님은 이십여년간의 강의경력이 있어왔고 특히 저는 이미 인성교육과 토론교 육을 해오던차에 디베이트를 알게 된 것이므로 별 무리없이 강의활동을 할수 있엇습니다.
그러나 함께 동참한 회원들은 전혀 일천한 경험자들이엇기에 저는 그들에게 경력을 쌓게 해 주고자 당시 연구소장으로 임명했던 김 ** 씨에게 신촌센터의 교육에 핵심을 맡겼고 사무총장을 맡고 계신 백종환 선생님을 중심으로 분당센터의 강의시간을 구성토록하였으며 최대한 많은 인원을 강의에 투입하도록 하였습니다. 순전한 저의 노력으로 인해 현재도 이들은 한겨레교육센터에 남아 디베이트관련 강사로 활동할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민주평통에서 진행하는 통일 디베이트대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저희 회원중에 한분이 민주평통 행사에 관련된 핵심인사를 알고 있는 인연으로 저희에게 대회진행의 기회가 왔습니다.
물론 다른 단체를 이미 소개했던 것인데 그쪽에서 확답을 주지 않게 되자 저희에게 연락이 오게 되었는데 이 행사에 대한 기획은 민주평통과 저희 협회 중간에 있던 행사기획 전문회사가 맡았고 저희는 대회 심판만을 맡기로 한 행사였습니다.
하지만 기획사는 디베이트대회에 대한 노하우는 없었기에 전체적인 내용을 제가 기획하게 되었고 그 내용은 기획회사를 통해 민주평통에 전달되었습니다. 이를 준비하는과정은 매우 분주하였지만 함께 활동하기로 하여 모여든 코치들은 당일 현장에서 심사만 맡으면 되었고 저와 백종환 사무총장님은 대회를 총괄지휘를 하느라 허리가 휠정도 고된 행사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행사자체는 성공적으로 마쳤기에 이것이 저희협회에는 커다란 경력이 된 것입니다.
세번째는 국회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디베이트를 통한 교육혁신 세미나"를 연것입니다.
이 또한 저희 회원중에 한분 가족이 국회의원으로 계셔서 진행된 행사입니다.
협회가 대외적으로 더 큰 공신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저는 사회각계인사들을 고문으로 모시자고 제안하였고
회원중 한분 가족이 국회의원으로 계시다 하기에 인사를 드릴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분의 소개로 국회의원 회관을 방문하여 고문직 수락을 요청하면서 디베이트교육의 필요성을 설명한 결과 그분이 흔쾌하게 수락하셨고 국회세미나까지 연결하게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세가지의 행사외에도 몇가지 알찬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결과 저희 협회는 토론교육의 중심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작한지 불과 5개월 만에 저희 협회는 저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저의 독선적인 업무집행스타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결과라고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저는 협회를 성장시키고자 협회 이사진으로 저 외에 6분을 선임하여 협회의 일들을 의논하고 이끌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90% 이상의 업무를 저의 제안과 기획, 저의 시간적 투자로 진행하게 되었고 제가 전적으로 움직임으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져 가고 있었기에 특별히 중요한 사안이 아니고서는 저와 사무총장이신 백종환 선생님이 의논하여 결정하고 집행하는 형식으로 일을 진행해 왔습니다.
불과 열한 명 밖에 되지 않는 회원들이 모여 협회라는 이름으로 단시간에 이렇게 커다란 단체로 성장하기까지는 저와 백종환 선생님이 투여한 에너지가 말로 표현할수 없었습니다. 물론 몇몇 분들도 각자에게 역할이 주어지면 충실하게 협력하였기에 이루어진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방향과 정책, 컨텐츠 부분에 있어서 기획자와 집행책임자의 판단력과 책임은 막중하였고 이것에 대하여 회장인 저와 백종환 사무총장님이 전적으로 책임을 안고 진행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디베이트 교육의 향방이 디베이트자체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음을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디베이트교육의 컨텐츠 개발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이었기에 독서디베이트, 역사디베이트, 디베이트학습법 등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으며 연구모임을 결성시키게 되었습니다.
첫번째로는 2011년 9월에 독서디베이트 연구모임을 결성하여 교재를 연구를 시작하였고 곧바로 역사디베이트 연구모임도 결성시켜 교재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연구된 콘텐츠는 한겨레 교육센터에서 디베이트코치양성 심화과정에 독서디베이트와 역사디베이트라는 과목을 집어넣기 위한것이었고 2011년 12월 17일에 았을 심화과정에 독서디베이트 강사로는 개발에 참여했던 이** 선생, 역사디베이트는 최은희 선생이 하는 것으로 커리큘럼을 작성하였습니다.
이때 최은희 선생님은 이미 독서논술과 독서토론계에서 유명한 강사진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저희가 개발하는 독서디베이트과정에 이 * * 선생과 다른 두분을 포함하여 연구개발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분은 독서뿐만 아니라 역사지도에 관하여도 전문가자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저는 곧바로 최은희 선생님께 몇몇분을 모아 역사디베이트의 콘텐츠개발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의 결정은 두분의 욕심에 의해 제동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독서디베이트를 함께 개발한 이 * * 선생과 연구소장을 맡고 있던 김 * * 씨가 이사회의결을 거치지 않은 연구활동이었기에 역사디베이트는 강의과목에 넣을수 없다는 것과 연구모임을 이사회의결없이 진행한것은 위법이라며 이 연구모임을 인정할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협회차원의 연구가 아니라도 좋은 컨텐츠가 개발되었다면 그것을 협회를 위해 사용하는 것은 무방하지 않느냐는 저의 설명에 이 두분은 무조건적인 부당함을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김 ** 전임 연구소장에게는 "이런 연구활동은 당신을 연구소장이기에 당신이 해야할일인데 당신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으니 마음급한 나라도 나서서 하게 된것 아니냐?" 라고
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미 개발된 콘텐츠는 심화과정에 사용하기로 하고 만일 이사회의 의결문제를 걸고 넘어질것이라면 독서디베이트도 이사회의결을 거치지 않은 것이니 둘다 넣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강의를 뺄려면 이 * * 선생의 독서디베이트 강의도 빼라고 지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회의 의결을 운운 한것은 이 * * 선생이 역사디베이트까지 본인이 하고싶어한것을 빼앗겼다는 생각에서 나온 어거지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몇차례 역사디베이트도 본인이 연구에 관여하고 싶어하는 의사를 제게 말한 적이 있었고 만일 이사회의결문제가 있다면 독서디베이트도 이사회의결을 거치지 않은것이니 이 * * 선생도 독서디베이트를 포기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제 질문에 제 지시로 연구를 시작한것은 맞지만 자신은 독서디베이트 강의를 포기할수 없다고 강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김 * * 전 연구소장과 독서디베이트 강의를 맡은 이 * * 선생은 다른 이사회원에게 동의를 구하여 제가 집행하는 한겨레 강의 커리큘럼에 제동을 걸었고 역사디베이트는 빼버린채 독서디베이트만을 넣어서 강의를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더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연구소장이었던 김 ** 씨는 협회의 운영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교묘한 술수를 쓰기 시작하였고 결국 지난해 12월에 있었던 심화과정 강의에서는 엄연히 회장자격으로 강의 계획서에는 제 강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란의 소지가 싫어서 강의시간 편성을 그 사람에게 맡겨 놓으니 제 강의를 빼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사실에 대하여 엄중히 항의를 하고 문책성 발언을 하였으나 김 * * 씨의 야심을 알게된 터라 더이상 이들과 함께 협회활동을 할수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 이전부터 저는 김 * * 씨가 저를 견제하며 몇명 안 되는 협회 회원들 가운데 나름 세력화를 시도한것을 감지하였시에 제가 이분들과는 더이상 함께 활동 할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버린 이 사건으로 인해 저는 곧바로 김 * * 씨에게 한국디베이트협회 회장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통보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거취에 대하여는 시간의 말미를 달라고 하였고 제가 발표할 때 까지는 발표를 보류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발표보류를 요청한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저로서는 모든 열정을 다해 협회를 키워 왔기에 이분들과 좋은 관계로 헤어져 서로 각자 자신들의 역량껏 디베이트교육활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새로 구성된 운영진들이 협회 홈페에 제가 회장직을 사임하였다는 공지를 사전에 저와 의논없이 올려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제 노력에 대한 배려는 하나도 하지않고 회장 사임공고를 올려놓은 새로운 운영진에 대하여 저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읍니다. 특히 김 ** 연구소장에게는 "당신은 협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세워주었는지 잘 알텐데 이제 당신이 회장이 될수 있는 기회가 왔다. 나는 조용히 물러날 테니 이제 당신은 내가 잘 마무리 할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 하였습니다. 뿐 만아니라 그분은 제게 메일을 보내어 "우리에게 한번 회장님은 영원한 회장님입니다"이라는 표현을 해가며 자신이 앞으로 협회를 이끌어 갈때에 도와 달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분들과는 결별하고 이분들은 한겨레교육센터를 중심으로 디베이트교육활동을 해가도록 하고 저는 제가 이끌어온 협회의 업적이기에 협회카페만을 가지고 독립된 활동을 하고자 마음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 헤어지는 방법으로 모든것은 새로 구성된 임원진에게 넘겨주고 저는 협회 카페를 가지고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는 한국디베이트코치협회 카페는 한국디베이트협회와 이름도 다르고 아무도 디베이트관련 협회를 만들 상상도 못하고 있을때 때 제가 만든 카페이며 등록권이 제게 있고 카페지기로 운영도 제가 해왔기에 제가 계속 운영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가능한것은 이미 협회를 만들자 마자 한국디베이트협회의 홈페이지 제작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역설하여 300만원을 들여 한국디베이트협회라는 이름의 홈페이지는 만들어진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앞으로는 홈페이지 만을 가지고 활동하기로 이야기가 된부분이었고 한국디베이트협회라는 명칭으로 가지고 있던 재정과 명칭사용, 홈페이지등 모든 것을 새로운 운영진에게 양도한 상황이기에 저는 협회를 창립한 자로서 카페운영권은 제가 가지고 가도 전혀 문제 될것이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어차피 서로 결별 할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협회를 만들어 디베이트교육 활동을 하자고 주창한 제가 제가 만든 카페를 가지고 서로 다른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가장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결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협회 회장직은 사임했지만 이런저런 준비 할 말미를 달라고 요청한것었습니다. 그러나 김 * * 씨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운영진은 제가 활동 할 발판을 모조리 없애려고 했는지 다음의 협회 카페에 제가 회장직을 사임했다는 내용을 공지하여 저를 너무 당혹스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쥐잡는 고양이 마저도 못한 배려였습니다. 결국 이런 행동은 서로가 협의 할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나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이전투구가 시작된 관계라고 판단 된 저희들의 관계는 좋은 관계로 헤어질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에 저는 곧바로 협회카페에서 새로운 운영진을 퇴출 시키고 백종환 사무총장님, 최은희 부회장님과 함께 "한국디베이트코치협회"라는 이름으로 계속 활동을 지속하기로 결정하여 지금까지 발전해 온 것입니다.
저와 백종환 사무총장님, 최은희 부회장님은 분명한 교육철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보다 사람을 중요시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미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준비된 20%의 상위권 학생보다 준비되지 못한 80%의 학생들을 위해 교육활동을 하자는 것에 뜻을 같이 하고 잇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의 진심을 가지고 누가 무엇이라 평가하든지 공식적인 반응을 하지 않고 저희가 가야 할 길만을 달려 왔으며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교육활동을 전개해 나가려 합니다. 현재 저희가 개발한 RND 독서디베이트와 토론식 학습법은 현재 공교육 현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으며 "공부의 달인이 되는 디베이트 학습법" 또한 사교육현장에서 놀라운 교육적 효과를 얻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꿈은 진정 대한민국의 미래가 저희 코치님들이 가르친 학생들로 인해 멋진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간 저의 부족함을 덮어주고 채워주신 모든 코치님들과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디베이트코치협회 회장 유담 올림
첫댓글 한국디베이트코치협회 회장님을 비롯한 임직원분들의 확실한 교육철학을 지지하며 어떠한 주변의 외풍이나 음해에도 꿋꿋하게 헤쳐나가 진정한 디베이트계의 선봉이 되시길 바랍니다. 새로운 분야의 선봉은 많은 시련이 있지만 모든것을 품고 이겨내었을때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있다고 봅니다. 한국디베이트코치협회 홧팅!
회장님의 교육철학을 진심으로 지지합니다.
협회의 알찬 콘텐츠로 분명 정상에서 항상 이끌어가시는 모습으로 영원할 것입니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끊임없이 우겨대는 일본과도 같이
특정 단체 또한 계속해서,
선의의 경쟁으로써 디베이트 교육을 발전시키고 확산시키는데 힘을 쏟기 보다는,
상대편의 힘을 빼고 독주하기 위하여 끈질기게 그러한 문제를 물고 늘어질 것 같습니다.
눈이 내릴 때는 아름다웠지만 녹은 후의 산길을 걷다보면 끈적끈적 진흙이 신발에 붙듯이..!
과거야 어찌되었건 미래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땅에 쩍쩍 붙어 걸음을 힘들게 하는 진흙을 떨구어 내고
협회의 비전이 순조롭게 실현되도록 할 수 있는 어떤 묘안이 필요할 듯 합니다...^^;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고 말하기 보다는 각자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대한민국의 토론교육에 힘써야 할 것 같습니다. 남을 음해할 시간이나 정력이 있으면 앞으로 토론교육의 활성화를 깊이 고민하고 생각해 보는 것 또한 괜챦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아무말 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인정한 것은 아니겠지요. 재고할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회장님, 그 분의 도우심을 믿습니다~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