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여행10 - 공자 사당 푸츠먀오 夫子廟(부자묘)에서 비림 비공 운동을 생각하다!
난징 (南京 남경) 의 남문인 중화먼 中华门(중화문) 을 구경하고는 북쪽으로 작은
길을 10여분을 걸어 공자의 사당인 푸츠먀오 夫子廟 (부자묘) 에 도착합니다.
부자묘 는 공자의 사당 인데 주변에 옛날풍 번화가 가 조성되었으며
파란 벽돌 기와와 창이 진회하에 그림자를 비추니
운치있는 거리로 文德橋(문덕교) 에서 바라보는 야경 이 좋다나요?
진회하 운하에 정박중인 유람선이며 건너편 벽에 조각된 큰 용 두 마리 그림들을
구경하고는 부자묘 로 들어가는데 여기도 학생과 60세 이상은 50% 할인이네요?
안으로 들어가니 우선 양쪽 벽에 仁(인)과 禮(예) 라는 글씨가 선명하고 마당에는 공자의
제자 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가운데 大成展(대성전) 앞에는 공자의 동상 이 보입니다.
사당에는 萬世師表(만세사표) 라는 글귀 아래 공자의 초상화 가 그려져 있는데
중국 사람 들이 초상화에 엎드려 절하며 기원을 드리는 모습을 봅니다.
벽에는 공자의 일대기를 자개 같은걸로 표현한 그림이 있으니 세상을 주유 하며 뜻을 펼치려고
애쓰던 모습으로 보이는데 80세 노모를 부축하고 참배한 50대 여인의 정성이 돋보이네요?
중국에서는 산동성의 공자묘 외에 아마도 가장 큰 공자 사당이지 싶은데 외국에 공자학원
까지 성행하지만...... 내겐 엣날에 “비림비공” 운동이 떠올라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모택동은 대약진운동 을 개시하였으나 대기근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아사하자 1959년에
열린 루샨 회의에서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마오를 비판하지만 도리어 해임당합니다.
그러나 마오의 뒤를 이어 국가주석에 취임한 류소기 는 대약진운동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이후 등소평과 함께 경제개혁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류소기와 등소평이 국가주석과 당서기 를 맡아 파멸적인 대약진운동의 뒷수습을
하면서 점점 마오(모택동) 를 제치고 실권자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네요?
그러자 마오(모택동)는 1966년 문화대혁명 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으니
전국에서 마오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홍위병들이 일어났고 중국은 대혼란에 빠집니다.
이러한 혼란속에 류소기와 등소평은 실각하여 다시 한번 마오는 권력의 전면에 나서니
류소기에 맞서 마오를 지지한 국방부장 린뱌오(임표) 는 마오의 후계자로 떠오르는데....
하지만 마오는 린뱌오를 신뢰하지 않았고 1971년 마오가 남중국을 시찰하면서 돌연
린뱌오를 비난하자 린뱌오(임표) 는 쿠데타 시도에 실패하고 망명하다가 죽습니다.
임표가 사망한후 노쇠한 마오를 대신하여 정치실권은 혁명원로들을 제치고 처 강청과
사인방이 장악해 임표(린뱌오) 와 공자를 비난하는 "비공 비림" 운동을 전개합니다.
임표는 공자를 존경하여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공산당내에 끌어들여 자본주의 부활을
꿈꾸고 있으며 반혁명 수정주의자라 못박으니 "공자와 유학도 수난" 을 당했던 것이라?
공자의 아버지는 송나라 미자의 후손으로 노나라 추읍의 대부이며 무예가 뛰어난 숙량흘
叔梁紇 인데... 70세에 안씨의 딸인 16세 징재와 야합하여 공자 를 낳았다고 합니다.
"야합" 이라는 말은 산에서 관계 했다는건지 정식 결혼관계가 아니라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
숙량흘의 본부인은 시씨로 딸 아홉에, 둘째 부인은 다리를 저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는데
남편이 죽자 본부인 시씨는 사망 사실 을 안씨에게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시씨는 안징재를 남편의 첩 으로 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니 그럼 공자는 사생아 라?
때문에 공자는 아버지 묘소 위치 조차 모르고 성장했다는데....
훗날 어머니 안씨가 죽자 묘소 위치를 모르니 거리에 빈소 를 차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일이 벌어졌으니....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꽃그림으로도 유명한 천경자 씨가 죽은후 장남과 차녀
그리고 배우자들이 "무덤 위치" 를 알려달라고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천경자씨는 74세 때인 19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그림 93점을 기증하고 뉴욕 으로 건너가
장녀인 이혜선 씨와 살다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져 12년만에 91세로 죽었습니다.
장녀는 뉴욕의 성당에서 혼자 장례식 을 치른후 유골을 들고 한국 을 다녀가기도 했다는데
장남과 차녀는 은행의 예금계좌 해지 동의 전화를 받고 엄마가 죽은줄 알았다나요?
그러니까 장녀는 엄마가 치매에다가 뇌출혈 로 쓰러져 12년간 투병 하는 중에 형제들이
나몰라라 했으니 혼자 간호의 수고를 감당한지라 형제들이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고....
다른 형제들은 누나가 엄마와 작품 을 독점해 차단막 을 치는 고집을 피우다가 이제 사망사실과
무덤 위치 까지 알려주지 않으니 기자회견에 법적 조치 까지 하겠다나요? 하기사 뭐
오늘 한국에서 저런 콩가루 집안이 어디 하나둘 이겠습니까? 돌 던질수 있는자 누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