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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대 순조실록]
[1. 순조의 등극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1790-1834, 재위 기간 1800년 7월-1834년 11월, 34년 4개월)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시작된 순조 대는 17, 18세기를 통한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사회 의식이 성장하는 시기였다. 그런가 하면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정치의 기강이 문란해져서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각종 비기와 참설이 유행하는 등 일대 사회 혼란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순조 대의 정치적 사건의 대표적인 예는 후에 외교적인 분쟁으로까지 비화하는 천주교 박해를 들
수 있다. 벽파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으며 정적인 시파와 남인들을 치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박해, 순조의 친정 뒤에 이어진 을해박해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수만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이어졌다. 또한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민란들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였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아들이며, 수빈 박씨의 소생이다. 1790년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공, 자는 공보, 호는 순재였다. 정조와 선빈 성씨 사이에 난 문효세자가 일찍
죽자 1800년(정조 24년) 정월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이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하였던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벽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인물이었다. 옥새를 거머쥔 정순왕후는 우선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이조참판직에 앉히고 벽파들을 대거 등용한다. 권력을 잡은 김관주, 심환지 등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하였던 인물들을 대거 살육함으로써 벽파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즉시
왕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척사'를 표방했다. 이는 곧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탄압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첫째가 왕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군신간의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조선의 지배
윤리인 유교 윤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천주교의 위험성을 미연에 막는다는 것이요, 둘째가
천주교를 공부하거나 믿는 사람 중에 벽파의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천주교도를 잡아들이는 것은 곧 유교 윤리를 받든다는 명분도 얻을 뿐더러, 반대파인
정적을 제거하는 이중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실권을 잡자마자 척사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순조 1년에 들어서자마자 정순왕후는 곧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위해
오가작통법을 썼다. 이는 본래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서 서로 강도, 절도 같은 범법 행위가
일어나는지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치안 유지법이었다. 그 방법을 천주교도 색출에 동원하여 다섯
집끼리 서로 천주교도가 있는지 감시하고 고발하게 하였다. 그 중에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다섯 집이 모두 화를 입게 되는 악명 높은 오가작통법을 써서 전국을 피바다로
몰아 넣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전국적으로 수만 명이 넘었는데 이 중에는 진짜 천주교
신자도 있었지만 애매하게 연루되어 죽은 이도 많았다.
당시 잡혀 죽거나 귀양을 간 시파나 남인계 인물로는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등이 있었다. 신유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가리켜 '신유사옥'이라 하는데 이 사건으로
정순왕후는 완전한 벽파 중심의 조정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시파였던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맞아들인 일이었다. 1800년 정조 24년,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정조의 뜻이 결정되었으나 정조가 갑자기 죽어 삼간택이 연기되었다. 이때 정순왕후의 6촌
오라비인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가 있었으나 결국 1802년 순조 2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한편
왕의 친정 뒤에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 을해년에는 경상, 충청, 강원도의
신자들을 죽이고, 1827년에는 충청, 전라도의 교인들을 검거해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1804년 순조가 열다섯이 되던 해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둠으로써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곧 정조의 유탁을 받은 영안부원군 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김조순은 본래 정조 편에서 있던 시파계 일문이었으나,
규장각대교 당시 탕평을 건의하는 등 당색을 드러내지 않는 처신으로 벽파 세상이 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순왕후는 근 5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앉은
뒤 1년만에 죽는데, 벽파의 기둥이었던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동안 실권을 잡고 있던 김관주는 정조의 뜻을 배신한 죄와 왕비의 삼간택 방해를 방조한
죄목으로 귀양을 가다가 병사하고,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는 이미 죽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해치려 한 죄목으로 역적의 율로 다스려졌다.
이후로 국왕의 장인인 국구가 된 김조순은 나이 어린 왕을 곁에서 모시면서 세도 정치의 첫
장을 열게 된다. 후대 사가들은 김조순이 그런 대로 청류임을 표방하여 어떤 종류의 벼슬도
사양하며 오로지 국왕의 보필에 전념을 다했다고도 하지만 벽파가 물러난 조정의 자리를 채운
것은 바로 김이익, 김이도, 김달순, 김명순 등 안동 김씨 일문이었다.
이들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해 버리니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견제 세력이 없는
정권은 부패하게 마련이다. 안동 김씨 일문이 요직에 앉아 한 가문의 영달을 위해 갖가지 전횡과
뇌물 수수를 일삼으니 공평한 인사의 기본인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고 매관 매직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신분 질서의 급속한 와해와 함께 왕조 사회의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탐관오리 등이 횡행하고 농민층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자 농민층의
항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도 정권의 성립 초기부터 시작된 농민들의 민란이 전국
각지에서 5차례에 걸쳐 크게 일어났으며, 마침내 1811년(순조 11년) 홍경래의 난으로 발전했다.
서북인 차별 대우 철폐와 세도 정권의 가렴주구 혁파, 정도령의 출현 등을 기치로 내세운 이
반란은 몰락 양반과 유랑 지식인, 서민 지주층의 재력과 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난 대규모
반란으로서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체제 변혁까지를 도모하는 정치적 반란이기도 했다. 광산
노동자, 빈농, 유민들을 봉기군의 중심 부대로 삼고서 홍경래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각지에
격문을 띄워 출병했다. 그리하여 거병한 지 열흘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 정주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곧 관군의 추격을 받은 봉기군은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해 들어간다.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보급로가 끊긴 채
무려 4개월 동안 관군과 대치하다가 1812년 4월 마침내 관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 제를 기치로 내걸었던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자못 큰 것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농민층의 자각을
가져왔고 조선 후기 사회의 붕괴를 가속화시킨 사건이었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민란과 역모 사건이 끊이지 않았으며, 1821년(순조 21년)에는 서부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10만여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목숨을 잃었다. 또한 순조의 34년 재위 기간
중 19년에 걸쳐 수재가 일어나는 등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았다. 순조는 집권 초기에는
정순왕후를 둘러싼 경주 김씨 일문 아래 있었고, 친정을 하게 된 15세 이후로는 장인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 아래 있었다. 순조 역시 세도 정권의 전횡을 모를 리 없었기에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서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외척 세력인
풍양 조씨 일문의 세도 정권을 만들어 냈을 뿐, 균형과 견제가 이루어지는 정계 개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처럼 당시의 세도 정권은 당쟁이 없는 대신에 반대파가 없는 독
정권으로서 민생과 사회 문제는 도외시하고 일문의 영달과 영예에만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한편 학문을 좋아한 순조는 20권 20책에 달하는 개인 문집인 '순재고'를 남기기도 하였으며,
학문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 '양현전심록', '대학유의', '정조어정홍재전서', '서운관지',
'동문휘고'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순조는 34년 간의 치적을 남기고 1834년 11월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순원황후 김씨에게서 1남 4녀를 두었으나 효명세자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손자인
환으로 하여금 왕통을 잇게 한다. 그의 능호는 인릉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2. 순조의 가족들]
순조는 순원황후 김씨 외에 숙의 박씨가 있을 뿐이다. 순원왕후 김씨가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를 비롯하여 4녀를 낳고, 숙의 박씨가 1녀를 낳았다.
순원황후 김씨(1789-1857)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창조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다. 1800년(정조 24년)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을 앞두었을 때 갑자기 정조가 죽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외척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로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1802년(순조 2년) 10월에 왕비로
책봉된다.
순원왕후 김씨는 아버지 김조순과 오라비 김좌근으로 이어지는 안동 김씨 일문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한때 세자비의 외척인 풍양 조씨 일문에게 정권의 주도권을 빼앗기다가
헌종 대에 이르러 다시 회복하지만 헌종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자손이 없는 헌종의 왕통을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났다.
제23대 순조 가계도
정조와 수빈 박씨의 차남이 제23대 순조(1790-1834, 재위 기간 : 1800년 7월에서 1834년
11월까지 34년 4개월이며 2명의 부인과 1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순원왕후 김씨에게서 1남
4녀(효명세자인 익종, 명온공주, 복온공주, 덕온공주, 일찍 죽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명의
공주), 숙의 박씨에게서 1녀(영온옹주)를 두었다.
이때 순원왕후 김씨는 조대비 일문이 미처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원상에 권돈인을 지명하고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강화도령 원범(철종)을 지목하여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에 책봉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절정기를 맞게 한다.
순조와의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1857년 창덕궁에서 죽었다. 능호는 인릉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효명세자(1809-1830)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났으며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다. 1812년 순조 12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이때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했으나 대리청정 4년만인
22세에 죽는다. 이때 그의 외척인 조씨 일파가 대거 등용되어 안동 김씨 일파와 정치적 세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아들 헌종이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익종에 추존되었으며 1899년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3. 천주교 박해를 통한 벽파의 정권 장악]
조선의 천주교는 숙종 이후 거의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 소장 학자들을 중심으로
지식층에 전파되었다. 16세기에도 소현세자나 홍대용 등이 들여온 천주학 서적들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 종교로 받아들여 정식으로 신자가 생긴 것은 18세기에 들어와서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승훈이었으며, 다산 정약용 형제들과 이가환, 권철신 등 재야 남인 세력들 사이에서
천주교는 조심스럽게 퍼져 나갔다.
정조 대에 급격하게 불어난 천주교도는 정조 말년에는 교인이 1만여 명에 달하는 등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러한 천주교의 확대에 대해 보수 지배층은 큰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군신 관계와 상하 관계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성리학적 지배 원리는 조선 왕조를 지탱해 주는
중요한 사상적, 통치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인 의례를
거부했으며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 사상과 유일신 사상을 주장했으니, 그것은 유교 사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또한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 양반층과 수탈과 횡포에 시달리던
서민층이 천주교 신앙을 통해 결합되는 것도 지배 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이에 심환지를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에 의한 상소와 박해 운동이 일어났다. 그에 대해 정조는
'사교는 얼마 가지 않아 자멸할 것이며, 이는 유학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는 논리를 폄으로써
박해를 피하였다. 또한 당시 남인 시파의 실권자이자 삼정승을 두루 거친 채제공의 묵인도
천주교의 보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고 정순왕후를 둘러싼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일대 박해가
벌어진다. 정순왕후 김씨가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조 대에 수세에 몰렸던
벽파는 정적이었던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해 즉각 정치적 대공세를 펼쳤고, 벽파의 충실한
후견인이었던 정순왕후는 1801년 언문 교지를 내려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전국의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였다.
오가작통법으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고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이 중에는 초기
교회의 지도자였던 남인 시파 학자들이 많았는데 이승훈, 정약종, 이가환, 이벽, 권철신 등이
그들이었다. 또한 단지 연구를 목적으로 한 학자들도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정약용, 정약전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으며,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던 실학자 박지원,
박제가 등도 이때 관직에서 쫓겨난다.
1801년 순조 1년에 일어나 500여 명의 크고 작은 희생자를 낸 신유박해는 인륜을 무시하는
사교를 뿌리뽑아 나라의 기강과 윤리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 아래 정적인 남인 시파와 진보적인
사상가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대 정치적 숙청이었다.
신유박해 이후 남인 시파는 완전히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졌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일당
독재인 외척 세도 정치가 시작된다.
[4.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성립]
세도는 본래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뜻으로서 중종조에 조광조 등의 사림들이
표방했던 통치 원리였다. 그것이 정조초에 이르러 세도의 책임을 부여받은 홍국영이 조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독재를 하기 시작한 데서 변질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나 외척들이
독단으로 정권을 휘두르는 것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정조 대는 실학 사상가들에 의해 북학적인 정책이 건의되고, 천주교와 서양 문명에 호의적인
진보적 지식인의 역할이 높아져 갔기 때문에 보수적 정치 세력들은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안으로부터의 변화와 도전에 불안해진 보수 정치 세력은 정조의 죽음과 어린
순조의 즉위를 계기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진보 세력인 실학 사상가 및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 숙청과 탄압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부터 당파에 의한 시대가 종식되고 집권자의 일족만이 정권을 독점하는 세도 정권이
형성된다.
순조, 헌종, 철종에 걸친 60여 년 간의 정권을 독점한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은 정조로부터
순조를 잘 부탁한다는 유탁을 받은 김조순으로부터 시작된다. 정조가 죽고 1800년 11세의 어린
나이로 순조가 즉위하자 그때까지 당색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김조순은 시파계임에도 불구하고
벽파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협조함으로써 그의 딸을 왕비로 삼는 데 성공한다. 대비의
수렴청정 기간에는 대비의 외척인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벽파계가 정권을 잡는다. 그러나 1804년,
순조가 15세가 되던 해 김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다음 해에 죽자 순조의 외척이 된 안동 김씨
일문이 세력을 잡는 데 성공한다.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일파는 시파의 대가인 풍양 조씨, 남양 홍씨,
나주 박씨, 여흥 민씨, 동래 정씨 등과 제휴해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빈으로 조만영의 딸을 간택한다. 이 때문에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잠시 풍양
조씨 일문에게 권력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효명세자가 일찍 죽고 그의 아들이 즉위하자 순조의
왕비이자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어 다시금 안동 김씨 일문이 정권을 잡게
된다. 또한 철종의 비까지 안동 김씨 일문에서 냄으로써 안동 김씨의 외척세도 정권은 대원군이
등장하기까지 60여 년 간 이어진다.
순조 시대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전단하다가 헌종대에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에게로 넘어가고,
그것이 철종 대에 와서는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에게로 넘어간다. 세도 정권의 특징이라면 당쟁
시대와는 달리 견제 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 어린 왕을 정권에서
배제시켜버리는 세도 정권의 전횡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관료 사회의 부패와 백성을
상대로 한 수탈, 민생의 피폐가 나타났다.
이러한 독재 정권에 맞선 것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보게 되는 농민층이었다. 막바지에 몰린
농민들의 불만은 순조 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비롯, 19세기 중엽 이후 전국적인 민란으로
폭발했다. 이러한 민란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 한편, 그에 불만을 품고 있던
조대비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밀약으로 고종의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막을 내리게
한다.
[5. 조선왕조와 세도 정권을 부정한 홍경래의 난]
조선 사회는 19세기에 들어와 더욱 급격하게 변화되어갔다. 광범위하게 진행된 토지 겸병과
농사법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었고,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일당 전제로 삼정이
문란해져 농토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금 노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일부 농민들은 농업 기술과 상업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여 부농이나 지주가 되는 등 양극화
현상이 일어났다.
신분 질서가 급격하게 와해되어가던 당시에 이렇게 성장한 부농들은 지방의 유지로 활동하면서
사회 변동의 변수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상업에서도 봉건적인 특권 상인에게 도전하는
사상인들이 등장하여 대상인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홍경래의 난에서도 지도층 가운데는
이렇게 성장한 부농층과 대상인이 다수 끼어 있었다.
세도 정권에 의한 과거 제도와 국가 기강의 문란, 삼정을 통한 관리들의 횡포 등에 대항하여,
몰락한 양반과 지식인 등이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새로 등장한 부농과 사상인들의 물력과
조직력 등을 결합하여 10여 년 간의 준비 끝에 일어난 것이 홍경래의 난이다.
평안도 용강 출신인 홍경래는 본디 양반 출신으로 과거에서 수차례 떨어지면서 그것이
서북인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 대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과거를 포기한다. 당대의 제도적
모순에 눈을 뜬 그는 평안도 가산에서 서자 출신 지식인 우군칙과 만나게 된다. 현실에 대한 두
사람의 불만은 곧 변혁 의지로 바뀌어 봉기를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이들은 우선
평안도 내의 부농층에게 접근하여 그들과 제휴하였고 자금 마련을 위해 상인들과 자주
접촉하였다. 사상인들은 평소에 중앙 정부에 불만이 많은 계층이었다. 그들은 또 가산 다복동의
부호 이희저를 포섭하여 봉기를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풍수적으로도 천혜의 요새인 그곳을
근거지로 삼는다. 또 봉기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운산 촛대봉에 광산을 열어 유민층을 흡수하여
군대로 삼는다. 이 밖에도 당시 세도 정권에 대하여 불만이 깊었던 재상 출신의 김재찬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평안도 일대의 지역 실력자 및 지방 관속들, 그리고 유랑 지식인과 유민
계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포섭하여 봉기 세력으로 조직했다.
1811년 12월 20일을 거병일로 잡고 홍경래는 자신을 평서대원수라 칭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사전에 새어나가자 거사일을 12월 18일로 앞당겨 출병한다.
그들이 출병에 앞서 내건 격문은 크게 세 가지로 첫째가 서북인에 대한 차별 철폐, 둘째가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타도, 셋째가 신인 정씨가 출현했으니 그를 참임금으로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남진군, 북진군으로 나뉜 봉기군은 거병한 지 열흘 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가산,
곽산, 정주, 선천, 철산 등 청천강 이북의 10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는 특히 각 지역의 내응
세력들이 적극 호응해 준 결과였다. 내응 세력은 좌수, 별감, 풍헌 등 관리와 별장, 천총, 별무사
등 무장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부농이나 사상인들로 돈을 내고 신분 상승을 이룬 계층들이었다.
그러나 곧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의 추격이 시작된다. 관군의 추격을 받은 봉기군은 박천, 송림,
곽산 전투에서 패배하고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된다. 봉기군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세력이
약화된 것은 봉기군 자체의 취약성 때문이었다. 붕기군은 대다수가 급여를 받는 임금 노동자 및
유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해 관계와, 봉기 지도층인 부호, 상인,
지식인층이 가지고 있는 이해 관계가 달랐기 때문이다.
소농, 빈민층이 삼정의 문란을 혁파하고 다시 정착 농민으로서 안정된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바랐다면, 지도부는 단순한 제도 개혁 차원이 아닌 정권 전복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세도 정권의 횡포에 대해 일어선다는 공동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표가 각기 달랐기에
하층민의 자발적인 유도를 얻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정주성에 들어간 봉기군은 이제까지의 소극적 참여자나 돈받고 고용된 군사들로
이루어진 군대와는 다른 적극적이고 사나운 군대로 변모하게 된다.
소극적이던 봉기군이 이렇게 강인한 군대로 변화된 것은 관군의 잔혹한 초토화 전술로 정주성
일대의 양민이나 농민들이 인적, 물적 피해를 입게 된 것에서 기인한다. 관군의 횡포와 무자비한
살육을 피해 정주성으로 들어온 농민들이 적극적인 반군 세력이 되어 싸웠고 봉기군 지휘부도
부자들의 재산에 대한 징발을 단행하여 농민 각자에게 평등한 분배를 제공했기 때문에 지휘부에
대한 농민들의 신뢰가 형성된 것이다. 비자발적 참여자로 이루어진 봉기군의 사기가 낮아지고
하나둘 정주성을 빠져나갈 때에 이렇게 주변 농민들이 합세하자 정주성의 봉기군은 순식간에
자발적 농민 봉기군으로 전환되었다.
여기서부터 홍경래의 난은 불만 세력의 정권 전복 기도가 아니라 자발적 농민 항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렇게 결속된 농민 봉기군은 보급로가 끊기면서도 군비나 숫자면에서 몇 배나
우세한 관군을 맞아 4개월간이나 밀고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관군의 화약 매설로
1812년 4월 19일 성이 폭파되고 1917명의 농민군과 홍경래 등 주모자가 모두 잡혀 처형당했다.
이리하여 그 해 1월초부터 시작된 정주성 전투는 3개월 15일로 마감되고 말았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
체제를 표방함으로써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하여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가 죽은
뒤에도 전국 각지에서 난들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는가 하면, 홍경래의 난에서는 소극적 입장을
취했던 소농, 빈민층들이 철종조에 일어나는 임술민란에서는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난에 대한 평가는 시기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1950년 이전에는 당쟁사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서북인의 푸대접에 대한 반발이라든가 홍경래 일파의 정권 탈취 기도로
평가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는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생긴 향촌 부호, 경영형 부농, 서민
지주, 사상인, 몰락 양반 및 지식인 등의 지도층이 임금 노동자와 빈농을 동원하여 일으킨 반봉건
농민전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6. '순조실록' 편찬 경위]
'순조실록'은 전 32권 부록 2권 총36책으로 되어 있으며, 1800년 7월 4일에서 1834년 11월
13일까지 재위 34년 4개월간의 역사적 사실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부록에는 왕의 행록,
시책문, 애책문, 비문, 지문, 행장, 천릉지문 등을 수록했다.
편찬 작업은 1835년 헌종 1년 5월에 시작하여 1838년 윤4월에 완성되었다. '순조실록'은 첫
부분에 '순종대왕실록'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순조의 원묘호가 순종이기 때문이다. 1857년 철종
8년에 그 묘호를 순조로 추존한 까닭에 '순조실록'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본래는 부록이
1책이었으나 1865년 '철종실록' 편찬 때 추가 편찬하여 2권이 되었다.
이상황, 심상규, 홍석주, 박종훈, 이지연 등을 총재관으로 하여 만 3년에 걸쳐 완성되고 각
사고에 봉안되었다.
순조 시대의 세계 약사
순조 시대엔 동아시아의 청과 일본은 밀려오는 서양 세력의 문호 개방 요구에 직면해 있었던
반면에, 유럽은 한동안 나폴레옹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 17, 18세기에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나라들은 각자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느라 분주했으며, 남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이때 독립한다.
문화 예술면에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를 거친다. 음악에서는 베토벤, 슈베르트 등이
활약했고, 문학에서는 괴테와 실러 등의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한편 산업혁명의 여파로 과학 문명이 발달하여 증기기선과 증기기관차가 발명되었고, 운송의
혁신을 가져오는 교통수단인 철도가 놓여 본격적인 자본주의 상공업 체제로 돌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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