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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조씨(昌寧曺氏)
성의 하나. 본관은 창녕(昌寧)·능성(陵城)·남평(南平)·옥주(玉州)·장흥(長興)·안동(安東)·청도(淸道)·수성(壽城)·가흥(嘉興)·창평(昌平)·영암(靈巖)·인산(仁山) 등 10여 본이 전하나 창녕조씨의 분파라는 것이 통설이어서 현재는 사실상 '창녕' 단본으로 통한다. 시조는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사위라는 조계룡(曺繼龍)으로 전하는데, 조씨세보에는 그의 5대손인 겸(謙)을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있다. 겸은 신라 말기에 아한시중(阿干侍中)을 지내고 시문에도 뛰어났던 흠(欽)의 아들로서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덕공공주(德恭公主)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고 한다.{창녕조씨세보}에 의하면, 고려시대 겸의 손자 연우(延祐)로부터 15세 자기(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배출하였는데, 이것은 광산김씨(光山金氏)가 10대에 걸쳐 평장사를 배출한 것과 함께 기록적이라 하겠다.
창녕조씨는 삼남(三南 : 충청,전라,경상도)의 명족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말기의 주요 인물로는 문하시중(門下侍中 : 오늘날의 국무총리)을 지내고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진 민수(敏修)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 창녕조씨 후손으로는 유일한 정승인 석문(錫文)은 민수의 아우 경수(敬修)의 손자이며, 성종 때 성리학의 대가이며 서예에 뛰어난 위(偉), 명역관인 신(伸), 시·서·화의 삼절로 불린 효창(孝昌)은 모두 경수의 직계손들이다.
조선 중기의 인물로는 대석학인 식(植)이 있다. 그의 저술은 남명집(南冥集)에 모아 편찬되어 있으며, 그의 문하에는 임진왜란 때의 영남 3대 의병장으로 불리는 곽재우, 정인홍, 김면을 비롯하여 김우옹, 김효원, 정구, 최영경, 정탁 등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조선 초기의 명신 상치(尙治)의 후손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나왔는데, 중종 때 우참찬을 지낸 계상(繼商), 인조 때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문수(文秀), 현종 때 예조참판을 역임한 한영(漢英),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낸 하망(夏望), 영조 때 이조참판·예문관제학을 지낸 명교(命敎)와 초서와 예서에 뛰어나 서예에 일가견을 이루었던 윤형(允亨)을 들 수 있다.
그 밖에 연산군 때 대사헌을 지내고 주역에 조예가 깊었던 숙기(淑沂), 중종 때 무신으로 왜구와 야인 토벌에 공을 세워 병조판서·우찬성 등을 역임한 윤손(潤孫), 중종 때 반정 공신으로 알려진 계형(繼衡), 인조 때 시·서·화의 삼절로 뛰어난 우인(友仁) 등이 있다. 창녕조씨는 조선시대에 113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3만 2,605가구에 인구 18만 4,822명으로 성별순위는 285성 중 제28위였고, 75년도 국세조사에서도 가구수 4만 5,751가구, 전국 가구구성비 0.7%로 249성 중 역시 제28위였다. 1985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가구수 73,206호에 인구 304,837명이었다. 조경환(曺京煥) 1877 - 1909(고종14-융희3)
항일의병장. 광주(光州) 출신. 1907(융희 1)년 군대가 해산하자 이원오(李元五), 김동수(金東洙), 양상기(梁相基) 등과 광주(光州), 함평(咸平)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태원(金泰元)의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학포마병대(鶴浦馬兵隊)를 기습하였다. 이어 부하 20명을 이끌고 장성(長城) 근방에서 일본 헌병대와 싸우고 영광군(靈光郡) 사창(社倉)을 습격하여 군량을 차지했다. 이듬해 호남창의대장으로 향교에 독립격문을 보내고, 일본 요시다〔吉田〕 부대와 싸워 부대장 요시다를 비롯하여 적군 수십 명을 살해하였으며, 광주·나주·함평 등지에서 수차 교전하였다. 후에 전해산(全海山) ·전효군(全孝軍)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워 수십 명을 사살하고, 1909년 광주군(光州郡) 소지면(所旨面) 어등산(魚登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전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조계상(曺繼商) 1466 - 1543(세조 12-중종 38)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종성(宗聖), 시호는 충정(忠貞). 1495년(연산군 1)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1506년 중종반정에 가담한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으로 창녕군(昌寧郡)에 봉해지고 대사헌이 되었다. 1512년(중종7) 이조참판 때 신진사류(新進士類)의 등용을 반대하여 정광필(鄭光弼)에 의해 파직되었다가, 그 후 재기용되어 공조판서에 승진했다. 1531년 김안로(金安老)와의 불화로 부처(付處?)되었다가, 1537년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우찬성으로 등용되고 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조계현(曺繼鉉) 1908 - 1937
독립운동가. 전라남도 화순(和順) 출신. 1927년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시 비밀로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선두에서 활약하다 검거되었다. 1930년 독서회 사건으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조광원(曺光遠) 1492 - 1573(성종 23-선조 6)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회보(晦甫), 시호는 충경(忠景). 1522년(중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2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28년 전적(典籍)등을 지내고, 1535년 개성부도사(開城府都事) 때 왕을 영접하지 않은 죄로 파직되었다. 1538년 장령(掌令)에 기용된 후 예조참의를 거쳐 1540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좌승지·도승지·판결사(判決使)·병조참의를 역임했다. 1545년 명종 즉위 후 공조참의·함경도관찰사 등을 거쳐 1548년(명종 3) 호조참판이 된 후, 대사헌 ·개성부유수 등을 지냈다. 1555년 을묘왜변 때 경상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활약하고 좌참찬·호조판서 등을 거쳐 1558년 우찬성에 올랐다. 판중추부사로 1561년 70세 때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조만식(曺晩植) 1882 -1950?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고당(古堂). 평남 강서(江西) 출신. 1905년(광무 9)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 재학중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하였는데, 그 때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감동되어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한 후,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를 거쳐 1919년 동교 교장이 되었다. 이 해 교장을 사직하고 3·1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잡혀 1년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1921년 평양기독교 청년회 총무와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長老)가 되었다. 이듬해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 장려운동을 펼쳤다. 1923년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 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그 후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이 되었으나 1926년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했으나 역시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關西) 체육회장이 되었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언론 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주의운동을 지도하였다. 1943년 일제의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正四郞〕의 면담 요청을 거절하고 극력 반대하다가 구금당하였으나 곧 석방되었다. 산정현교회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쇄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소련 군정청에서는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유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이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내세우고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소련 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민주당을 접수하고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하고 협박·회유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월남(越南)을 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에도 동포를 남겨두고 홀로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 뒤 6·25동란 때 공산당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당 조만식 선생상 동상 전면 제자 대통령 박정희 서 고당 조만식 선생은 1883년 2월 1일 평남 강서군에 나시어 나라와 겨레를 위해 일생을 바치셨다. 독실한 신앙과 숭고한 인격, 투철한 의지와 실천 궁행하는 자력 갱생 정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비폭력저항과 자유 민주 통일을 위한 투쟁은 살아 있는 교훈이다. 업적으로는 평양 산정재교회와 기독교청년회 또는 오산 숭실중학교와 관서체육회 및 조선일보 등, 교육, 언론, 문화 사업 등에 미쳤다. 해방 후 북한 정치 수반과 조선민주당 당수로 추대되어 민주 통일 국가 건설에 몸바쳤으며, 공산 세력의 박해와 맞서 이북 동포들과 운명을 같이하고자 끝내 순교적 사랑으로 스스로를 희생하셨으니, 민족 중흥을 지향하는 우리 겨레의 영원한 사표이며 자랑이시다. 주요섭 찬, 김기승 서 1976년 12월 7일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건립 서울 어린이대공원 내 조민수(曺敏修) ? - 1390( ?-공양왕 2)
고려시대 무신. 1361년(공민왕 10) 순주부사(順州府使)로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쳐 2등공신이 되고, 이듬해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를 거쳐 전리판서(典理判書)·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등을 지냈다. 1368년 명나라가 원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포위하자 좌상시(左常侍)로 의주등처안무사(義靜州等處安撫使)가 되어 명나라의 위협에 대처하였고, 충근보리공신(忠勤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우왕 초 경상도도순문사(都巡問使)로 왜구를 격퇴하였고,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 1379년(우왕 5) 문하평리(門下評理), 1383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거쳐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다음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전라도 조전원수(助戰元帥)를 겸하고, 1385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군의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출정한 뒤, 위화도에서 이성계와 회군하여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공으로 충근양절선위동덕안사공신(忠勤亮節宣威同德安社功臣)에 봉해지고,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西海交州道都統使)를 지냈다. 1389년(창왕 1) 이성계 일파의 전제 개혁을 반대하자 조준(趙浚) 등의 탄핵으로 창녕에 유배된 후, 창왕의 생일에 특사로 풀려났으나 우왕의 혈통을 에워싼 논쟁으로 이성계 일파에 대항하다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고, 이듬해 다시 창녕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조봉암(曺奉岩) 1898 -1959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죽산(竹山). 강화(江華) 출신. 강화에서 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農業補習學校)를 졸업, 군청에서 일하다가 상경하여 YMCA중학부에서 1년간 수학한 후,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1년 동안 복역하였다. 일본 중앙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인 흑도회(黑濤會)에 참여하여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고,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이 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상하이를 거쳐 모스크바에 가서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노동총연맹조선총동맹(勞動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여 문화부책(文化部責)으로 활약하다가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조선대표에 임명되고, 엠엘당(ML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피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 출옥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가 다시 검지되었으나 8.15광복으로 출감, 인천에서 치안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民戰議長)에 취임하였다. 1946년 박헌영(朴憲永)에게 충고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하여 우익(右翼)진영에 급선회했다. 1948년 제헌의원·초대 농림부장관이 되고, 1950년 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52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1956년 다시 제3대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낙선되었다. 이 해 진보당(進步黨)을 창당, 위원장이 지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58년 1월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위반으로 체포되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조붕구(曺鵬九) 1700 - 1735(숙종 26-영조 11)
조선시대의 학자. 자는 능만(能萬), 호는 옥여재(玉余齋). 신동으로서 18세에 주역에 통달하고, 항상 책을 지어 감추어 두었다. 죽은 뒤 200여 권의 책이 발견되었으나, 빗물이 스며들어 대부분 못보게 되어 있었다. 저서로 {경서질의(經書質疑)}, {문학통요(問學通要)}, {홍범질의(洪範質疑)}, {서의삼해(書疑三解)}, {역의집설(易義集說)}, {역학지요(易學指要)}, {역언질의(易諺質疑)} 등 다수가 남아 있다.
조상치(曺尙治) ? - ?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자경(子景), 호는 단고(丹皐)·정재(靜齋), 시호는 충정공(忠正公). 1419년(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이 되고, 이어 집현전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세종·문종·단종의 세 왕을 섬겨 성삼문·박팽년과 함께 총애를 받고 1455년(단종 3) 집현전 부제학에 발탁되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 후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적극 사양하고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고 지냈다. 임종 때에는 자기의 시문(詩文)을 모두 불태워 버려 남긴 작품이 전혀 없다.
조석문(曺錫文) 1413 - 1477(태종 13- 성종 8)
조선시대의 문신. 초명 석문(碩門), 자는 순보(順甫), 시호는 공간(恭簡).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정자(正字)·집현전부수찬(集賢殿副修撰)·정언(正言)을 지내고 이조·형조·예조의 정랑을 거쳐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홍주목사(洪州牧使)·상호군(上護軍)·지형조사(知刑曹事)를 역임하였다. 동부승지가 되어 세조의 즉위를 도와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도승지에 승진된 후 1459년(세조 5)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조참판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후 호조참판을 거쳐 1466년(세조 12) 우찬성 겸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병마부총사(兵馬副摠使)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이 되고,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승진하였다. 1468년 왕명으로 노사신(盧思愼)과 함께 {북정록(北征錄)}을 편찬한 후 예종 즉위 초 남이(南怡)·강순(康純)의 옥사를 처리하여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이 되고,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이 되었다. 1476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이듬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조세걸(曺世杰, 世傑) ? - ?
조선후기의 화가. 호는 패주(浿州)·수천(須川). 평양 출신. 김명국(金明國)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첨절제사를 지냈다. 집안이 부유하여 중국의 유명한 그림과 글씨를 많이 소장했으며, 정교하고 섬세한 필치로 산수·인물 등에 뛰어났다. 특히 단채(丹彩)를 잘 써서 일반화가의 수묵도말(水墨塗抹)과는 다른 특색을 보여 주었다. 김명국의 화법을 후세에 전하였다. 작품으로는 {선인위기도(仙人圍棋圖)}(덕수궁 미술관 소장)가 있다.
조숙기(曺淑沂) 1434 -1509(세종 16 - 중종 4)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문위(文緯). 1474년(성종 5) 생원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사어(射御)에 능해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79년 이조좌랑(吏曹佐郞) 때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건주(建州) 정벌에 공을 세워 3관등이 특전되었다. 후에 교리(校理)·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의주목사·경상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연산군 초에 대사간·대사헌을 역임하고 1500년(연산군 6)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문무를 겸하고,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
조식(曺植) 1501 - 1572(연산군 7 - 선조 5)
조선시대의 학자. 자는 건중(楗中), 호는 남명(南冥), 시호는 문정(文貞). 합천 삼가 출신. 지리산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을 이루었다. 성명(性命)을 닦은 후의 실행을 주창하고, 경의(敬義)를 신조로 하여 반궁체험(反躬體驗)과 지경실행(持敬實行)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중종 때 이언적(李彦迪)의 천거로 헌릉참봉(獻陵參奉), 1552년(명종 7) 이몽량(李夢亮)의 천거로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 1555년 단성현감(丹城縣監), 1566년 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566년 명종으로 부름으로 임금과 독대하여 치국의 도리와 학문의 방법을 표하고 재차 산으로 들어갔다. 두류산 덕산동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고, 조정에서 수차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했다. 그의 학행은 당대의 사표가 되었으며, 이황(李滉)과 더불어 영남의 양대 학맥을 형성하였다. 문하에는 오건(吳健),최영경(崔永慶), 김우옹(金宇옹), 정구(鄭逑), 김효원(金孝元), 정탁(鄭琢) 등의 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 조종도(趙宗道), 곽준(郭준), 전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등도 모두 문하생들이다. 선조 때 대사간에 추증되고, 광해군 때 영의정에 추증됨과 아울러 시호가 네려졌다. 산청의 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선생의 저술과 선생과 관계되는 글은 {남명집(南冥集)}에 수록되어 있다.
조신(曺伸) ? - ?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숙분(叔奮), 호는 적암(適庵). 문장이 뛰어나고 특히 시를 잘 지었으며, 어학에도 능해 1479년(성종 10) 통신사 신숙주를 따라 일본에 건너가 문명(文名)을 날렸다. 왕이 친히 글을 지어 시험하고, 시를 지으라고 하자 그 글이 아주 뛰어나 사역원정(司譯院正)에 특선되었다. 중종의 명으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하고, 역관으로 명나라에 7회, 일본에 3회 왕래하였고, 명나라에 갔을 때 안남국(安南國) 사신과 수십 편의 시를 지어 수창(酬唱)하여 이름을 날렸다. 만년에는 금산(金山)에 은거하여 풍류로 세월을 보냈다. 저서로는 {적암시고(適庵詩稿)}, {수문쇄록(수 聞쇄錄)} {백년록(百年錄)} 등이 있다.
조위(曺偉) 1454 - 1503(단종 2-연산군 9)
조선시대의 문신, 학자.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시호는 문장(文莊). 1474년(성종 5)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검열(檢閱)이 되고 1476년부터 사가독서를 한 뒤 1479년 영안도경차관(永安道敬差官)이 되었다. 수차에 걸쳐 시제(詩製)에서 장원하여 명성을 떨쳐, 성종의 총애를 받아 경연에 나갔다. 1485년 함양군수로 나가 선정하여 표리(表裏)·녹비(鹿皮) 등을 하사받았다. 그 후 도승지(都承旨)·호조참판·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95년(연산군 1) 대사성(大司成)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사관 김일손(金馹孫)이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수록하여 올리자 그대로 편찬케 하였다. 후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부총관(副摠管)을 겸직하였다. 1498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오는 도중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의주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이극균(李克均)의 극간으로 의주에 장류(杖流)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당시 사림간에 대학자로 추앙되었고, 김종직과 함께 신진사류의 기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황간(黃澗)의 송계서원(松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는 {매계집(梅溪集)}, 글씨로는 {조계문묘비(曺繼門墓碑)}가 있다 . 조윤손(曺潤孫) 1468 -1547(세조14-명종2)
조선시대의 무신. 시호는 장호(莊胡). 1502년(연산군 8) 무과에 급제한 후, 다음해 선전관이 되고, 1506년 류빈(柳濱) 등과 함께 연산군을 폐하려 하였으나, 성희안·박원종 등의 반정이 먼저 성공하여 공신녹권(功臣錄券)만 받았다. 1509년(중종 4) 웅천현감 때 남해안 일대의 왜구를 격파하고, 1492년 갑산부사로 야인을 토벌하고, 이듬해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특진, 여연(閭延)·무창(茂昌)에 들어와 정착하려는 야인을 몰아냈다.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재차 야인의 침입을 물리쳤다. 1533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1536년 병조판서가 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조윤형(曺允亨) 1725 - 1799(영조 1 - 정조 23)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치행(穉行), 호는 송하옹(松下翁).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1781년(정조 5)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가 되고, 1884년 예조좌랑을 거쳐 보덕 겸책례도감상례(輔德兼冊禮都監相禮)를 지냈다. 후에 안악군수(安岳郡守)·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고 1791년 호조참의(戶曹參議)를 거쳐 1797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使)를 역임했다. 서화에 능하고 특히 초예의 필법은 송나라 미원장(米元章)을 방불케 했다. 천성이 고결하고 검소하였으며 늘 필묵으로 초(草)·석(石)·죽(竹)·나무를 그렸다. 글씨로는 {이보혁무신기공비(李普赫戊申紀功碑)}, {유점사풍악당대사비(楡岾寺楓嶽堂大師碑)},{용흥잠저고정기(龍興潛邸古井記)} 등이 있다.
조익청(曺益淸) ? -1353(? - 공민왕 2)
고려시대의 문신. 시호는 양평(襄平). 충숙왕 때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충혜왕 때 충숙왕·충혜왕 부자간의 불화를 해소하려고 진력했으며, 대호군(大護軍)이 되어 간신 송팔랑(宋八郞)·홍장(洪莊) 등을 잡아 문초하다가 오히려 무고로 1332년(충혜왕 2) 제주안무사(濟州按撫使)로 좌천되었다. 1343년(충혜왕 복위4) 기철(奇轍)·이운(李芸) 등과 원나라에 있으면서 충혜왕의 탐학을 비난하고, 고려를 원나라 영토의 일부로서 성(省)을 두어 백성을 편안하게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1352년 1등공신으로 책록되고, 좌정승(左政丞)에 올라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공민왕의 사당에 배향되어 있다.
조진탁(曺振鐸) ? - 1922
독립운동가. 평남 강서(江西) 출신. 1919년 3·1운동 때 평남 대동군(大東郡) 김제면(金祭面) 원장(院場) 장날을 기해 3,000명의 주민을 모아 교회당과 공립보통학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시위 군중을 이끌고 사천시장(沙川市場)으로 향했다. 이 때 사천헌병대 파견대장 사토〔佐藤〕와 보조원 강병일(姜炳一)·김성규(金聖奎)·박요섭(朴堯燮) 등이 발포하자, 결사대 20명을 선두로 행진하여 헌병파견대장과 보조원 2명을 타살하고 헌병파견대를 불질렀다. 1921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해 평양감옥에서 처형되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조탁(曺倬) 1552 - 1621(명종 7-광해군 13)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대이(大而), 호는 이양당(二養堂)·치재(치齋). 1588년(선조2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였으며, 만여언(萬餘言)에 달하는 부흥책 10조를 올려 왕의 동의를 얻었다. 1599년 세자익위사위솔(世子翊衛司衛率)로 별시문과(別詩文科)에 장원, 예조·호조·병조의 좌랑을 지내고, 정언(正言)을 거쳐 1603년 강원도암행어사가 되었다. 후에 필선(弼善)·사예(司藝)·장령(掌令)·사옹원정(司甕院正)을 역임하고, 1610년(광해군 2)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형조참판·경기도관찰사에 승진했다. 1618년 공조참판으로 이이첨(李爾瞻) 등과 폐모론을 주장했다.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하망(曺夏望) 1682 - 1747(숙종 8-영조 23)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아중(雅中), 호는 서주(西州). 1711년(숙종 37) 사마시(司馬詩)에 합격, 1722년(경종 2) 장릉참봉(章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그 후 동몽교관(童蒙敎官)·공조좌랑·의령현령 등을 역임했다. 1736년(영조 12) 정시문과(庭詩文科)에 장원,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1742년 강릉부사로 부임하여 경포대를 중수하고 상량문을 지어 그 문장으로 격찬을 받았다. 1746년 영월부사로 전임했다가 병으로 사퇴했다. 경사(經史)에 밝고 시부(詩賦)가 뛰어났으며, 저서로 {서천집(西川集)}이 있다.
조한영(曺漢英) 1608 - 1670(선조 41-현종 11)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수이(守而), 호는 회곡(晦谷), 시호는 문충(文忠). 이식(李植)·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7년(인조 5) 생원(生員)이 되고 1637년 정시문과에 장원했다. 1640년 청나라가 명나라 공격을 위해 원병 파견과 원손(元孫)을 볼모로 선양〔瀋陽〕에 보내라고 요청하자 지평으로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 이에 배청파(排淸派)로서 김상헌(金尙憲)·채이항(蔡以恒) 등과 함께 청나라 선양에 잡혀가서 심한 고문을 받고 투옥, 이때 김상헌과 《설고집(雪고集)》을 지었으며 1642년 의주(義州)에 이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효종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서 남인(南人)인 윤휴(尹휴)의 등용을 적극 반대하다가 면직되고, 현종 때 한성부윤에 이르렀다. 문장이 뛰어났고 시조 2수가 전하며,여주의 고산서원(孤山書院)에 제향되고, 저서로 《회곡집 (晦谷集)》이 있다.
조호익(曺好益) 1545 - 1609(인종 1-광해군 1)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첫 시호는 정간(貞簡), 나중 시호는 문간(文簡). 이이(李珥)의 문인. 1576년(선조 9)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 최황(崔滉)에게 반항한 죄로 강동(江東)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592년 힘진왜란 때 풀려나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중화(中和)·상원(祥原)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비(鹿皮)를 하사받았다. 후에 성주(星州)목사를 거쳐 1595년 안주목사가 되고 이어 성천(成川)·정주(定州)의 목사를 지낸 뒤 사직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2재차 강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후 선산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永川)의 지봉서원(芝峰書院)과 도잠서원(道岑書院), 성천의 학령서원(鶴翎書院), 강동(江東)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지산집(芝山集)}, {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 {가례고증(家禮考證)}, {제서질의(諸書質疑)}, {주역석해(周易釋解)}, {역상추설(易象推說)}, {대학동자문답 (大學童子問答)}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