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 (37)
육영수, 포스코에 밀려나는 고아원의 이주비를 지원하다
2005년 가을이었다. 아흔한 살의 김벨라뎃다 수녀는 사십대 중반의 작가(이대환) 앞에서 저 아득한 37년 전에 포항종합제철을 위해 터전을 내줘야 했던 그때 그 희붐해진 기억을 더듬다 말고 문득 소녀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포철이 나라를 위해서는 크게 좋은 일을 했지만 우리한테는 애를 많이 먹였지.”
딱 한마디뿐이었다. 그러나 촌평(寸評)이 아니라 총평(總評) 같았다.
제철소 부지 232만7000여 평에는 ‘영일군 대송면 송정동’의 예수성심시녀회가 포함돼 있었다.
수녀원, 성당, 고아원, 양로원, 장애인의 집, 수도원, 수련관, 의무실, 운동장…. 솔숲에 에워싸인 이 성스러운 시설은 부지 18만 평에 건평 4000평으로, 더구나 초가 마을에서 유일한 현대식 건물이었다. 전기는 발전기를 썼다.
철거 전의 예수성심시녀회 전경(둘레를 에워싼 것은 솔숲이다). 그때 620여명 대식구의 살림살이를 이끄는 총원장이었던 김 수녀의 ‘짤막한 총평’을 그때 사무국장이었던 일흔한 살의 박마리요왕 수녀가 ‘구체적 사실’로 풀어냈다.
“나는 1956년에 송정동 수녀원으로 왔는데…. 십여 년쯤 더 지난 어느 날에 제철소 부지로 선정됐다는 보도를 접하고 급히 대구 매일신문으로 올라가 신부님을 만나고, 다른 사람들도 만났지요.”
대구를 다녀온 박 수녀는 한 가닥 위안도 얻어왔다.
제철소에는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기 때문에 국가에서 의욕을 앞세우고 있으나 무산될 수 있다는 견해를 들었던 것.
“돌아와서는 우리 수녀원을 창설하신 남 신부님을 뵈러 갔지요. 이미 은퇴하시고 갈평에 계셨는데, 그분이 충격 받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천주께서 더 좋게 해주려고 하는 모양인데 걱정할 것 있나?’라고 반문하셨어요.”
포항제철소 정문에서 경주시 감포읍 기림사 방면으로 삼십여 리 떨어진 갈평,
이 산골 피정소로 물러난 남루이베란드 신부. 프랑스 출신 벽안의 성직자가 한국에 귀화해 ‘남’씨 성을 얻고 영일만 모래벌판에서 ‘천주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첫 삽을 뜬 날은 1950년 3월 25일이었다. 석 달 뒤에 전쟁이 터졌다. 전선은 그해 늦여름에 영일만과 형산강까지 밀려났다 수많은 고아를 남 신부의 품에 맡기고 북으로 올라갔다.
박 수녀가 대구에서 들고 왔던, 한국정부가 돈이 없어서 종합제철을 무산시킬 것이라던 한 가닥 희망은 그러나 1967년 10월 3일 개천절에 포항에서 ‘종합제철 건설 기공식’이 열림으로써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물론 그로부터 꼬박 2년이나 더 지난 다음에야 ‘종합제철 무산 가능성’이 극적으로 해소되지만, 종합제철 건설 추진과정의 속내를 알지 못한 수녀원으로서는 기공식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967년 10월 4일, 드디어 김 총장수녀가 식구들에게 이주 결심을 밝히는 메시지를 띄웠다.
<어제 이곳에서 종합제철 기공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사를 가야 함은 결정되었다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걱정은 아직 좋은 부지를 구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수녀들은 공동방에 모여서 기도도 하고 그룹으로 나눠 논의도 했다. 620여 명 대가족을 이끌고 나설 일이 마치 약속의 땅을 찾아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대전 부산 대구 경산 하양 경주 포항 등 여러 후보지가 거론되었다. 그러나 한 곳을 찍기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막막한 어느 날이었다. 수녀원의 운전기사 이상원이 “효자 쪽은 어떨까요?”라는 의견을 냈다. 김 수녀와 박 수녀는 귀가 솔깃해졌다. 무엇보다도 형산강만 건너면 되니 이사하기가 쉬울 것이었다. 3만5000평쯤 된다는 부지도 괜찮아 보였다. 문제는 지주가 70명이나 된다는 점. 하지만 이상원의 친구 신욱현이 나서서 지주들을 설득해 줬다. 거기가 현재 위치한 포항시 대잠동 601번지. 수녀들은 두 형제를 ‘성 요셉이 보낸 사자’라고 생각했다.
“송정동 수녀원 18만 평 중에 67%가 솔숲이었어요. 남 신부님이 앞장서서 해송을 한 그루 한 그루씩 심어 나가 마침내 울창하게 가꾼 겁니다. 소나무 한 그루를 심을 때마다 반드시 모래구덩이에 찰흙 한 삽씩을 넣었고, 겨울에는 우리가 일일이 가지치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 솔숲이 임야로 분류됐어요. 임야는 보상가격이 제일 낮았는데, 우리는 경상북도, 그러니까 정부로부터 평당 50원밖에 못 받았어요.”
수녀들은 모래사장에 기적을 일으키듯 푸르게 가꿔놓은 약 12만 평의 곰솔(해송) 숲이 단순 행정에 의해 임야로 취급당한 것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억지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프랑스 출신으로 창설자의 뒤를 이어 역시 한국에 귀화해 ‘길’씨 성을 받은 길수다니 신부는 ‘수녀원 시설의 이주 문제’로 찾아온 포스코 사람들을 몇 번이나 쌀쌀맞게 대해야 했지만, 모든 성직자들이 ‘국가대업’을 위해 정든 터전을 떠나야 한다는 결정에 동의했다. 보상비는 부지에 대해 2200만 원, 은행의 감정을 거친 건물들에 대해 1억500만 원.
밀려나는 마을 지킴이 당산고목.수녀원은 예산 걱정을 앞세운 채 1968년 3월 대잠동 새 부지에서 토목공사를 시작하고, 그해 11월부터 이주에 들어갔다. 해를 넘겨야 할 만큼 긴 이주, 다시 문제는 엄청난 이주비용이었다. 길 신부와 박 수녀는 청와대로 찾아갔다. 2200만 원이 더 필요하다는 두 성직자의 하소연을 경청해준 이는 청와대 안주인 육영수 여사였다. 박 수녀는 그때 어느 날의 전화 한 통을 회상하며 마치 먼 허공의 작은 새를 포착한 것처럼 밝은 미소를 머금었다.
“청와대에서 육 여사님을 뵙고 내려온 뒤였는데, 김수환 추기경님이 전화로 이사비용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셨어요. 그날 청와대에서 김 추기경님이 다른 분들과 같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는데, 박 대통령이 먼저 포항 수녀원 말을 꺼내서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다고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예수성심시녀회는 추가로 2200만 원을 더 받을 수 있었다. 부지 보상비와 맞먹는 큰돈이었다. 아마도 그 돈에는 통치자의 ‘감사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담겼을 것이다. 가난한 나라가 챙기지 못한 ‘고아들과 무의탁 노인들과 장애인들’을 수녀원이 대신 돌봐왔으니…….
길 신부와 박 수녀는 몰랐지만, 큰돈이 추가로 나오는 과정에는 김학렬 부총리와 박태준 사장이 다음과 같은 대화도 나눠야 했다.
“수녀원에 이사비용 명목으로 2200만 원을 더 지급해 주시오.”
박태준이 요청했다.
“좋은 결정입니다. 저도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산을 잘 알지 않습니까?
현재는 방법이 없습니다.”
일단 난색부터 표한 김학렬이 대안을 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년 예산에 그만큼 더 얹어드릴 테니, 집행을 미리 하는 겁니다.”
박태준은 두말없이 받았다.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이주를 시작한 수녀원의 또 다른 걱정거리는 ‘어린 고아들’이었다. 수녀원에 남은 고아 460명 중 4세부터 6세까지가 절반이 넘는데, 평소와 달리 돌봐줄 손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다치기 쉬운 아이들’을 어떻게 안전하게 보호할 것인가?
1963년 송정동 수녀원으로 들어와 그때 사무담당이었던 일흔네 살의 최 안칠라 수녀가 기억의 한 갈피를 펼쳤다.
“총원장 수녀님이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간호사 출신으로 아이들에게 정말 자상하셨는데, 200명 넘는 아이들을 솔숲으로 데려가서는 ‘솔방울 줍기 놀이’를 시키셨어요. 바닥은 모래밭이니까 넘어져도 다칠 리 없고, 또 고만한 아이들은 솔방울 줍기를 참 재밌어 하잖아요?”
솔숲 모래밭에다 솔방울놀이 하는 노천 임시유치원을 꾸리고 두어 달포도 더 걸릴 긴 이주에 돌입한 수녀들.
최후 철거대상 건물은 가장 늦게 지은, 그래서 가장 반질반질한 수녀원이었다. 너무 견고해서 곡괭이는 씨도 먹히지 않는 건물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가?
다이너마이트 폭파. 이 결정을 내린 길 신부가 도화선에 직접 불을 당겼다.
수녀들은 이삿짐을 정말 알뜰하게 챙겼다.
박 수녀가 증언했다.
“나무토막이든 블록이든 재활용이 가능한 모든 것을 차에 실었어요.
포항시내에는 ‘정말 지독하게 알뜰한 사람들’이란 소문이 퍼지기도 했지요.”
이주 현장을 방문한 박준무 영일군수도 감탄했다.
“너무 놀랐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모두 이렇게 한다면 다 잘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성심시녀회 이주가 가장 대대적으로 이뤄진 날은 1969년 1월 6일.
눈이 드문 포항에 그날따라 눈이 펑펑 쏟아졌다.
무너진 수녀원의 쓸쓸한 폐허를 폭설이 하얗게 덮었다.
수녀들은 몰랐으나 그때 신생아 포스코는 KISA에게 버림받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다시 한 해가 더 가서 1970년 새봄이 오고 여름이 오면, 그 터전엔 조국 근대화의 기둥 같은 거대한 설비들이 들어서서 수녀원의 품을 떠난 고아들이 드디어 ‘독립 나이’에 닿는 미래에는 숱한 일자리를 만들어놓고 기다릴 것이었다.
그리고 더 먼 뒷날에 그들은 자녀의 손을 잡고 한 번쯤 추억의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털어놓을 것이었다.
“저 포철 부지에는 나를 키워준 엄청 큰 수녀원이 있었는데….”
(2014년 11월 17일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