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 갈리아와 로마(이탈리아)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 강,
로마의 입구에 해당하는 강
'루비콘강'은 고대에 갈리아와 로마(이탈리아)의 경계를 이루는 강으로, 로마의 입구에 해당하는 강을 지칭하며,
'루비콘강을 건넜다'라는 말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뜻이다.
해당 뜻의 유래를 살펴보려면,
과거 고대 로마의 기세가 등등하던 시절을 살펴봐야 한다.
고대 로마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공화정 체제로 통치되고 있었다.
로마는 로마공화정체제의 지배를 받았지만,
로마 외의 지역은 각 지역마다 총독을 임명해 로마의 지시를 받는 총독의 지배하였다.
하지만 총독들은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기때문에,
원로원은 총독들이 로마를 지배하고 통치할까 우려했고
이 때문에 총독이 로마에 들어오고자할 때는 군대를 로마 밖 주둔지에 둔 채 수행원 몇 명만을 데리고 들어오도록 했다.
만일 원로원의 허가없이 군대를 거느리고 루비콘강을 건넌다면
이를 반란으로 간주하고 응징을 했습니다.
즉, 루비콘강을 군대를 거느리고 건넌다는 것은 반란에 성공하지 못하면 죽음을 감내해야 하는 목숨을 건 행위였다.
구체적으로는
폼페이우스의 사주를 받은 원로원이 갈리아에 있던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BC 49년 1월 카이사르(BC 100∼BC 44)는
이미 루비콘 강을 무장상태에서 건넌 이상 이를 물릴 수는 없었기에,
폼페이우스를 추대한 원로원의 보수파(保守派)에 대항하여
내란(內亂)을 일으켜 로마로 진격하기 위해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외치고 루비콘강을 건넌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다.
이 일화에서 유래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려 사태에 대처하는 것을 <루비콘 강을 건너다>라고 하는 것이다.
주로 어떤 모험적인, 위험요소가 많은 일을 시작할 때 곧잘 쓰이며,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유래돼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는
본래 30대까지는 그리 유명하지는 않은 일개 원로원 의원이었다.
(유명한 것이 있다면 그의 바람기와 멋부리는 것 정도??)
하지만 그는 40대가 될 무렵 크게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1차 삼두정치라는 것을 계기로,
그는 북이탈리아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이후 8년동안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를 정벌하면서
크게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원로원을 등에 업은 폼페이우스와 대립하면서,
그는 내전을 개시했다.
(이 때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말한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는 말은 매우 유명하다.)
여러번의 전투 끝에 폼페이우스를 무찌른 끝에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된 그는
BC 44년 3월 15일 여러명의 원로원 의원들에게 암살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
앞서 말했듯이 카이사르는 최고 권력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죽었다.
이후 그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가장 세력이 막강했던 안토니우스와 저명한 원로원 의원인 레피두스와 2차 삼두정치를 맺었다.
(이는 1차 삼두정치와는 달리
원로원의 승인을 받은 합법적인 통치 방식이었다.)
세력을 점점 키운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가까워진 안토니우스와 대립했다.
급기야 안토니우스는 조국 로마를 배신할 정도의 행위를 저지르고, 분노한 그와 로마 시민들은 둘을 응징하기로 했다.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는 그들을 물리치고 이집트를 합병했다.
이후 그는 '존엄자(Augustus)'라는 호칭을 받고
로마의 제정을 열었다.
이 제정은 겉으로는 공화정을 표방했지만 안으로는
1인의 황제에게 막강한 권한을 돌림으로서
이후 로마 제국의 기본적인 정치 체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크리스토교 공인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 제국은 오현제(五賢帝) 시대에
그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혼란은 군인 황제 시대에 들어 더욱 가중되었고,
제국은 그 존속이 의문시될 정도였다.
이 혼란은 284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함으로서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는 기존의 원수정 대신 전제적인 절대군주정을 도입했다.
이로서 제국의 안정을 이룩했지만,
305년 제위에서 물러난뒤 제국은 다시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틈바구니 속에서 한때 5명이나 되었던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제국을 다시 세웠다.
그는 이 사이에 동부 황제인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라노 칙령』을 선포했다.
이 『밀라노 칙령』은 로마 제국에서
최초로 크리스토교인의 권리를 보장한 것이기에
그 의미가 대단한 것이다.
그동안 크리스토교는 로마 제국 안에서
이교(異敎)란 이름으로 탄압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다른 종교와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았습니다.
이후 크리스토교도는 큰 성장을 거듭했고,
급기야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치세에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이후에는 기존의 국교가 이교로 바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