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학교 복원)
9월17일, 등산을 가려고 집을 나섰다. 날씨가 찌부퉁하다. 계획대로라면 지신향과 삽합진사이에 있는 해발 천여메터되는 오랑캐령이 산행지이다. 그런데 8시가 될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인차 끊을 비가 아니였다. 그래서인지 등산을 약속한 울님들이 모두 나오지 않았다. 혼자라도 가려고 표를 끊으려고 하는데 나유미가 나타났다. 나유미는 “ 비가 와서 산이 미끄러울테니 가까운 곳에 어떤가”고 했다.
이리하여 오랑캐령을 포기하고 명동촌을 택했다. 등산이 아니라 산책이였다. 하지만 성스런 민족의 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명동촌이기에 등산의 의미보다 더 크 소득을 안고 돌아왔다.
룡정에서 륙도하를 거슬러 남으로 약7키로쯤 가노라면 길옆에 날카로운 벼랑이 나타난다. 모두들 선바위라고 한다. 선바위를 지나 또 2키로쯤 가면 길 오른편에 명동이라는 표시판이 있다. 표시판 아래에 있는 오붓한 마을이 바로 명동촌이다. 명동촌이란 이름은 김약연 등이 어라캐령을 넘어 장재촌에 터를 잡은후 명동소학교를 꾸리면서부터 불리여진 이름이다. 그전에는 명동일대를 룡암촌이라고 불렀다. 이는 일본인들의 자료에서 밝혀진것이다. 일본인들의 자료에는 명동학교가 달라자 룡암촌에 있다고 섰다. 또 선바위도 그 원래의 이름이 뚱거라즈인데 벙역하면 즉 비둘기바위이다. 라즈는 깎아지를듯한 벼랑 혹은 드레바위를 의미한다. 연변에는 <<라즈>>라는 단어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명동촌은 연변에서 비교적 일찍 개척된 마을이다. 김약연 등에 앞서 조선의 이주민들이 이미 들어와 있었고 또 중국인 지주가 있어 이 일대의 땅을 많이 점유학고 있었다. 김약연이 그 지주를 여러차례나 찾아가서 설복한끝에 지주의 땅을 모두 사들였다. 지주는 떼돈을 쥐고 흥이나서 고향 산동으로 돌아갔다. 김약연은 워낙 조선 회령에서 살았다. 가세가 좋아 여덟살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1899년 그는 문병규, 김하규, 남도천 등 친척과 스승을 이끌고 함께 두만강을 건넜다. 수십명이 장사진을 이루며 정착한곳이 바로 화룡현 지신사 장재촌이다. 그때 장채촌은 화룡현에 속했다. 김약연이 이끈 이주민들이 대부분 힘꼴이나 쓰는 장정들인지라 오자부터 봇짐을 풀어놓고 화전을 일구었다. 그들은 물푸레나무, 버드나무 개암나무들이 울창한 산등성이와 습지들에 불을 놓고 돌들을 주어내면서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을 했다. 한해가 지나자 넓은 밭이 펼쳐졌다. 산등성이에 조와 수수며 옥수수를 싶고 시내물 가까이에는 감자를 싶고 습한 개울가에는 삼을 심었다. <<봄에 파종을 하면 여름동안에 곡식 싹들이 청청히 커오르다가 가을이면 고량과 조이삭들이 탐스럽게 모개미를 숙이였다. 그것은 지난날에는 볼수 없던 곡창이 한곳 새로 생기게 하였다.>>(이기영의 소설 <<두만강>>에서)
(김약연의 장례식장면)
(장재촌에 있는 김약연의 묘소)
김약연은 품성이 온화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말수가 적고 씀씀이가 시원시원했다. 그런데다 신학을 공부하고 신식교육을 받아들였으며 짙은 애국심을 갖고있었다. 그는 시대를 읽을줄 알았고 원견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사를 온지 얼마되지 않아 즉 1901년에 장재촌에 규암재라고 하는 서당을 꾸려 장재촌일대의 어린아이들에게 직접 <<지, 호, 자, 야,,,>>를 가르쳤다. 규암은 김약연의 호이다.
1908년에 명동학교를 세우게 될 사연이 생기였다. 룡정에 있던 서전서숙이 일본인들의 무리한 관섭과 탄압에 페교가 되였다. 그런데다 서전서숙의 주인공들이였던 리상설등이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에 참가하느라 서전서숙을 떠났다. 서전서숙의 교원들과 학생들이 김약연을 찾아와서 크게 학교를 꾸려보자고 제의했다. 워낙 꿈이 큰 김약연인지라 흔쾌히 대답했다. 1908년 4월 27일 김약연은 규암재를 버리고 명동서숙을 세웠다. 한 시대를 풍미한 수많은 인물들이 명동서숙에서 태여났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어여삐 여기사 하나님의 몸된 학교를 세우도록 인도하시고 그 이름을 동녘에 밝아오는 희망이라는 뜻에서 명동이라 칭하심에…”
명동서숙에서는 김약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나왔다. 1년후 명동서숙은 명동학교로 개칭되고 서울 상청동청년학관출신의 정재면을 교원으로 받아들이면서 학교에 성경과를 설치하고 기독교를 신앙하게 되였다. 후에 마을에도 교회가 생겨나고 김약연이 목사로 되였다.
당시에 연변에는 기독교가 빠르게 전파되였다. 명동에서 기독교를 신안하게 된데는 김약연의 원견에서 비롯된것이다. 당시 제국주의 렬강들은 모두 천주고와 기독교를 신봉하기에 하나님의 백성과 성직자. 그리고 몸된 교회가 탄압을 받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일제의 마수로부터 명동학교와 마을을 보호하는 보호벽역활을 할수가 있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는 해마다 4원80전의 학비를 받았고 4학년은 4원80전외에 좁살 6말을 냈다. 학비는 학교의 확대, 교과서, 공책, 교학도구구입에 썼으며 교원은 봉급이 없었다. 가정을 이룬 교원에게는 학교밭을 떼주어 부치게 했고 홀로 있는 교원들은 학부형들의 집을 돌면서 끼니를 해결했다. 그런데도 4원80전이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한 사랍들이 있었다.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던지 식솔들이 정주방뿐인 씨그러져 가는 집에서 올리거꾸로 누워지내였고 그 당시 삼촌은 마을에 있는 허부자네 집에 달머슴을 살았고 또 끝에 삼촌은 중학교공부를 하겠다고 울며불며 하다가 끝내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개똥밭 다문 며칠갈이라도 제것이 있었으면…’
이것이 아버지의 평생소원이였고 유일의 소원이였다. 그렇지만 아직 그런 행운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끼니도 밥은 못하고 죽으로만 에우는데 그것도 겨울에는 괜찮지만 한창 일철에는 정말 배고파 허리띠로 주린배를 달래는판이다. 이른 봄부터 씀바귀를 캐여서는 좁쌀알을 몇줌씩 집어넣고 푸대죽을 끓여먹였다.”(김창걸의 단편소설<<해방전쟁>>에서)
아무튼 4월80전이 큰 돈이였다.
명동학교는 워낙 일본돈 800여원을 들여 단촐하게 지었었는데 경신년에 일본군인들이 불을 놓아 태워버렸다. 그후 임술년과 계해년에(1922년과 23년)에 일본돈 1만4천여원을 들여 다시 남녀교실 각기 6섯칸을 지었다. 그후 학교는 점차 크게 확대되였는데 학과는 소학부에 국어, 한문, 산술, 주산, 리과, 작문습작, 창가, 체조, 지리, 력사과를 설치하고 중학부에는 력사, 지지, 수신, 생리, 법학, 박물, 농림학, 광물학, 외국어번역, 대학문전 신약전서 한어등 과목을 설치했다. 오늘의 대학과 맞먹는 수준의 교육이였다.
명동학교는 1924년의 보기드믄 <<갑자년흉년>>과 일제의 탄압, 그리고 맑스레닌주의 사조에 젖은 김사국, 송산우등의 반종교적 활동에 의해 점차 그 운을 마치게 되였다. 1928년 김약연은 손수 일떠세운 학교를 뒤로하고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김약연은 학교를 떠나 룡정 은진학교와 명신학교의 리사로 명동교회의 목사로 두루 일하다가 1942년 10월29일 75세를 일기로 룡정에서 사망했다. 그의 묘는 장재촌에 모시였다.
최근에 명동에서는 자금을 모아 명동학교 옛터에다 원 명동하교의 모양대로 학교를 지었다. 벽돌이며 기와며 내부의 마루며 모두 옛날의 모습 그대로이다. 하지만 학교는 있으되 옛날처럼 학생은 없다. 현재 명동촌에는 소학교에 입학할 년령의 학생들이 없다. 지신촌에 있는 소학교와 중학교의 학생들을 합쳐도 50여명밖에 되지 않는다. 80년대초만해도 명동소학교와 륙도하 건너편에 있는 중학교에 명동, 장재, 신동 등촌의 학생들이 다니여 쾌나 벅적거렸다. 지금은 이 두학교가 페교된지 오래다. 중학교교실은 개인이 사들여 창고로 쓰고 있다. 명동촌에는 이젠 몇세대밖에 남지않았다. 연변의 농촌들이 모두 이런 실정이다. 조선족인구가 마이나스증장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최근에 룡정시 개산툰진, 삼합진과 백금향을 조사한 결과 2008년의 신생인구는 37명밖에 안되였는데 그것마저도 대부분이 한족(중국인)이였다. 이는 1980년도의 710명에 비해 673명이나 줄어든 셈이다. 즉 94.79%나 줄었다. 또 3개향진의 가임년령(정상생육)의 47%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농촌의 청년을 혼인대상으로 선호하지 않는다. 결혼한 녀성의 생육욕망도 아주 약한데 원인은 도시화의 절주에 있다. 이는 사회발전의 필연적추세이다. 발달한 나라들에서도 모두 이런 과정을 겪었다. 농촌에 여성이 없고 어린애가 없다고 농촌이 더욱 빈곤헤진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구가 많을때보다 더욱 부유해졌다. 생산력의 발전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산관계는 장애물이다.
조선족이 줄어든다고 아우성칠 리유가 없다. 조선족들이 나라의 보배라도 되는가? 멸종위기에 처한 중점보호대상이라도 되는가? 조선족들이 호풍환우하며 중국사회를 떠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잖는가? 순리를 받아들이여야 한다. 어느때에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생육을 제한하지 않았는가? 독신자녀를 두면 달마다 2원씩 크나큰 배려를 베풀지 않았는가? 아이가 둘이면 앓아도 병원치료비마저 보상을 해주지 않아 고통을 받던 때가 어제같은데 그때는 왜 오늘을 생각지 않고 그리도 철저하게 산하제한을 집행했는가?...
명동촌뿐만아니라 연변의 거의 모든 조선족집거구농촌들에 처녀들이 없다. 30대의 여성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출가전 여성과 총각들의 비례가 1:150이다. 150명의 젊은이들이 살고있는 농촌마을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 여성은 더욱 없다. 문제는 어디에 있던 잘사면 되는것이지 잘 살게해주지 못하면서도 가라오라 할수가 없다는 것이다.
(명동촌의 개인 잎담배건조실)
농촌도 과거와는 달리 시장화, 전업화궤도에 들어서고 있다. 대면적에 호박을 심는 농민이 있고 땅꽈리를 심는 마을이 있으며 고추만을 심는 촌이 있고 양파만을 심는 향이 있다. 담배를 전문 건조하여 파는 농민이 있고 소와 돼지 그리고 기타 가축 및 짐승사육을 업으로 하는 전업호가 육속 태여난다. 30년전에 대대(촌)사무실이나 백양나무밑에 모여앉아 시국을 담론하던 구두혁명의 나날이 사라지고 며칠에 한번씩 벌리던 데놀이가 사라져 사는 모습이 조금은 흥미롭지는 못하지만 실속을 따지며 사는 요즘 농민들이다.
명동이라는 마을이 생겨난지도 이젠 102년이 된다. 당신이라면 명동에서 무엇을 읽겠는가?
첫댓글 조선에서 일제 침략자들의 망국노가 되지 않으려고 중국 만주국에 와서 개간지를 일구고 화전을 뚜져서 농사짓고 ...ㅎㅎ 교육을 중시하는 우리민족인지라 김약연 등 선진적인 인물들이 학교도 세우고... 소를팔아 자식 공부 시킨다는속담이 있듯이 말입니다 , ㅎㅎ
비가오는날 산책아 유적지 답사도 하시고 거운 산책이었을갔습니다, 시인의 고향을 거니는 두분 ,시향이 도도히 비속을 거니는 유적지의 산책 또한 다른 멋일것 같은데요 , 수많은날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