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527DUI10CNU&list=PLYl-sdCjrdZkHYZ8qW-epcuXalMbdTbSj&index=4
◉ 성경 : 아가서 2:10~14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2: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2:12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2: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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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구원-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랑의 노래 (이상욱 목사)
유대인들이 ‘하메쉬 메길롯트’(다섯권의 두루마리)라고 부르는 책이 있습니다. 이 다섯권의 책은 유대인의 명절에 낭독하는 책입니다. 오순절(맥추절)에는 룻기를 낭독하고, 초막절에는 전도서를 낭독하고, 에스더서는 부림절에 낭독하고,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된 날인 아브월 9일에 낭독합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가장 의미가 있고 큰 명절인 유월절에는 ‘아가서’를 낭독합니다.
‘아가서’는 ‘노래 중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노래 중의 노래’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는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만큼 아름답고 감미로운 노래가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아가서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서로 사랑의 노래를 주고받고 합창단이 함께 부르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라토리오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사랑의 노래인 아가서가 성경에 포함된 이유는 아가서가 단순히 남녀간의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사랑의 노래로서의 비유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곧 아가서의 솔로몬은 예수 그리스도, 술람미 여인은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 중에서 남자 주인공의 노래 부분입니다. 10절에서 남자 주인공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가서 2:10 …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남자 주인공은 술람미 여인을 향해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하고 부릅니다.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눈에는 자기 자식이 가장 귀하고 연인의 눈에는 자기 연인이 가장 사랑스러운 법입니다. “나한테는 당신이 김태희고 전도연입니다”하는 드라마 대사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세상에서 가장 예쁩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사랑 외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왜 나를 구원하셨느냐고 묻는다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구원하신 것은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가서의 남자 주인공은 그 사랑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가서 2:14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사랑하는 술람미 여인을 향해 “나의 비둘기”라고 부른 것은 일종의 애칭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비둘기라고 부르고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사슴이라고 부릅니다. 연인들이 서로 “자기야” “달링” “허니”하고 사랑스럽게 부르는 그런 느낌입니다.
술람미 여인이 있는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은 위태로운 곳입니다. 산비둘기는 그곳에 집을 짓습니다. 산비둘기가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집을 짓는 것은 독수리나 매와 같은 천적으로부터 피해서 숨을 수 있는 자기 나름의 피난처이기 때문입니다.
그 피난처에 숨어 있는 술람미 여인을 향해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단순히 얼굴을 보고 듣는 것이 아닙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경청하며 듣는 것입니다. 보고 또 보고 싶고, 듣고 또 듣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고 아무리 들어도 싫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비둘기가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숨어 있을지라도 찾아 부르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아시고 찾으십니다. 그리고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하고 사랑스럽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찾아내고, 왜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까?
아가서 2:11~12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지나고 비도 그친 계절은 10월부터 내리던 비(이른 비)가 그친 때입니다. 그 때는 팔레스틴의 우기가 끝난 계절, 3월~4월 경입니다. 이 때는 긴 겨울이 지나고 어둠의 시간,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꽃이 피기 시작하는 계절입니다. 밀과 보리가 싹이 나고 추수할 때가 가까운 계절입니다. 꽃들 사이로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하는 계절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에게는 사랑의 꽃이 피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계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나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계절은 어김이 없습니다. 자연이 계절을 느끼는 것은 정확합니다. 아무리 겨울이 길어도 때가 되면 새싹이 돋고 꽃이 핍니다. 철새가 돌아와 노래를 부릅니다. 팔레스틴은 3월이 되면 갑자기 광야가 푸르게 바뀌고 수선화, 아네모네와 같은 꽃들이 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들의 백합화들이 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에 싹이 돋고 포도나무도 꽃을 피웁니다.
아가서 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무화과 나무에 푸른 열매가 익었다는 것은 원문을 보면 ‘무화과 나무에 싹이 돋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싹이 돋았다는 것은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포도나무가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한다는 것 역시 포도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피어나는 꽃들과 노래하는 새들을 통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음을 알게 되듯이, 무화과 나무의 싹과 포도나무 꽃의 향기를 통해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었듯이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언약하신 것들이 성취되면서 구원의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가서의 두 주인공 솔로몬과 술람미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샬롬의 남성형, 여성형입니다. 평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의 평화는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서 겨우 지키는 위태로운 평화였습니다.
바위틈 낭떠라지 은밀한 곳이 아무리 자기를 지켜주는 피난처였다 할지라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평화롭지 못합니다. 불안한 평화, 위태로운 안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숨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이제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서 나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솔로몬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이 참된 안식과 영원한 평화의 피난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자 주인공은 술람미 여인을 향해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랑하는 우리를 향해 노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내가 피하고 있는 곳, 내가 안식처라고 생각하고 있는 곳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안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곳은 참된 피난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주님께서 예비하고 영접하시는 곳이 참된 피난처요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그곳으로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주님은 위태로운 평화가 아니라 완전한 평화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모든 일들을 십자가에서 다 마치셨으니 이제 내 음성을 듣고 일어나 나와 함께 그곳으로 함께 가자고 부르십니다.
술람미 여인이 자기를 향한 사랑의 노래를 듣고 일어나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을 떠나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가듯이 성도들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노래를 듣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예루살렘, 하나님 나라로 향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주님과 함께 가는 길입니다. 구원은 이 길을 함께 가자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노래인 것입니다.
월드컵 경기는 준결승과 결승만 남았습니다. 우리나라는 16강전에서 아쉽게 멈추었습니다.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은 열심히 경기를 뛰었습니다. 저는 손흥민 선수가 포르투갈 전을 마치고 했던 인터뷰가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그 전 경기에서 퇴장을 당해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봐야 했던 벤투 감독이 벤치에서 함께 다음 경기를 하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던 인터뷰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손흥민 선수의 모습에서 간절함과 진심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손흥민 선수의 그 마음이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고 하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우리를 향한 간절함과 진심입니다. 벤투 감독이 있어야 할 곳이 벤치이듯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진정한 평화의 성 예루살렘이기에 영원한 예루살렘 하나님 나라로 함께 가자고 간절하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을 때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를 끊고 참된 안식과 영원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구원의 노래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나와 함께 가자”하고 부르십니다. 이 하나님의 노래를 듣고 그 노래에 화답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함께 갑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