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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극담(靑坡劇談).7
○ 창령(昌寧) 성간(成侃) 화중은 젊어서 문장으로 세상에 떨쳤으나, 사람됨이 못나서 집현전 수찬으로 대제학에게 아뢸 일이 있는데, 대제학이 의금부에 앉아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들어가 뵈려, 예를 끝내고 다시 들어가 무릎을 꿇으니, 모두 본부의 당상(堂上)이었다. 성이 쳐다보고는 부끄러워 창황히 물러나니, 만좌의 사람들이 웃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성 수찬의 청알(請謁)이라 하였다.
○ 상산(商山) 황효원(黃孝源)이 의금부 당상(義禁府堂上)이 되었을 때, 부자(父子)가 소송하는 일이 있어, 한 낭관(郞官)이 꿇어앉아 이 일을 아뢰니, 황은 말하기를,
“낭관은 혹 알 것이다. 이는 바로 누구의 아들인가.”하니 낭관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황효원의 아들입니다.”하였다. 황은 웃으며 말하기를,
“늙은 나는 아들이 없었는데, 이제 아들을 얻었으니 기쁘다.”
하니, 낭관이 부끄럽고 두려워, 땅에 엎드려 감히 쳐다보지를 못하였다.
○ 종실(宗室) 영순군(永順君)이 학문을 좋아하면서도 근신하고, 또 도량이 있어 대내(大內)에서 가까이 모시기를 10여 년이나 되었지만,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세조가 일찍이 말하기를“영순은 정통하기로 제일이다.”
하였다. 하루는, 내전에서 작은 연회를 베푸는데 여러 가지 기악(妓樂)이 울리니, 군이 주서(注書) 노분(盧肦)에게 묻기를,“오늘 당직 승지(承旨)는 누구인가.”하니,
“아무튼 계(啓)로써 올리겠습니다.”
하고는, 분이 여러 기생들 가운데서 소천금(笑千金)의 재모(才貌)가 있는 것을 보고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대답하기를,“소천금입니다.”하니 군이 깜짝 놀랐다.
○ 세조대왕(世祖大王)이 일찍이 서부(西部)에 거둥할 때 중도에서, 어떤 병사의 깃대를 바라보고는,
“저 몇 번째의 기를 가져오너라.”
하니,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대나무였다. 명하여 저[笛]를 만드니, 그 소리 또한 절묘하였다. 옛날 채백해(蔡伯諧)가 강남(江南)에 피난하다가 가정(柯亭)의 서까래 대[椽木]을 가지고, 저를 만들어 보배로서 역대를 전해 왔으니, 그 일이 같은 점은 있으나 채백해가 가까이서 본 것이, 세조가 멀리서 본 것만 못하리라 생각된다.
○ 민(閔)씨 성을 가진 조사(朝士)가 성질이 주밀(周密)하여, 나갈 때마다 물건을 싸는 버릇이 있었다. 일찍이 사복관(司僕官)이 되어 관동(關東)으로 호가(扈駕)할 적에, 동료가 종자(從者) 한 사람을 시켜 군사라 칭하고 여윈 말을 끌고, 민의 앞을 지나면서 팔겠다고 하는데 그 가격이 아주 헐하였다. 민이 매우 기뻐서 줄 것을 다 주고도 옷과 신을 벗어서 샀다. 민이 그 말을 사랑하여 특별히 열흘을 기르니 살이 쪄 건장해졌는데, 마침 말을 판 사람을 보니 거의 대부분 바로 앞에서 복종하고 섬기므로, 이상히 여겨 물어보니 본래 그 사람은 이 사복시의 종이요, 판 말은 바로 마구간에 세워 둔 말이었다. 그의 옷과 신을 찾으니 그가 이미 입고 신어 사용할 수가 없고, 그 말값을 찾으니 그의 친구와 마시고 먹은 값으로 돼버렸다 하니, 역시 일찍이 서로 마시기를 같이하였으나 민은 스스로 몰랐던 것이다.
○ 부마(附馬) 하성부원군(河城府院君)에게 양주(楊州)에서 부유하게 사는 종이 있는데, 딸을 낳아 아무라 하였다. 뛰어나게 아름다워 사인(士人) 안윤(安棆)이 보고 반하여 데려다 첩으로 삼으려 하니, 군이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어찌 종년을 마음대로 사인에게 시집을 보낼 수 있겠는가.”
하고는, 본집에 잡아와서 작은 종에게 주어 처로 삼게 했는데, 여종이 몰래 알고 분하여 어떻게 할 바를 몰라 몸을 빼어 담을 넘어 윤에게 나아가 울면서 죽음으로써 맹세하니, 윤은 더 없이 기뻤지만 역시 어찌할 수 없었다. 수일 만에 군이 사람을 시켜 데려가니 이로 말미암아 얼굴 그림자도 아주 없었는데, 하루는 여종이 방안에 몰래 들어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후에 윤이 어둠을 타서 성균관으로부터 홀로 광효전(廣孝殿) 뒤 재를 넘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때마침 초가을이라 산달이 반쯤 나오고 주위는 고요하며 행인도 끊어졌었다. 윤은 죽은 여종이 그리워져서 애달프게 읊조리는데, 조그마한 발자취 소리가 소나무 사이에서 나오므로,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죽은 여종인 모였다. 윤이 그가 죽었음을 오래 전에 알았으므로, 분명 귀신이려니 하였지만 너무도 생각했던 탓으로 더 의심도 않고, 그의 손을 잡으면서 말하기를,“어찌 여기까지 왔소.”
하였는데, 바로 보이지 않으니 윤은 목놓아[失聲] 통곡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상심으로 병이 나서 여러 해 동안 먹지 못하다가 죽었다. 참판 김 세자는 나와 동갑인 벗이고, 윤과는 내종(內從) 형제여서 항상 이 일을 나에게 얘기해 주었고, 사문(斯文) 유효장(柳孝章)도 윤과 동서[姨婿]라 역시 이 일을 얘기하면서 무척 한탄하였다. 무릇 절개를 지키다가 생명까지 바쳤으니, 비록 사족(士族)의 부녀로 예법을 지키는 가문에서 생장하였더라도 능히 행하기 어려운 바인데, 이 여자는 천한 여종으로 처음 애당초 예의(禮義)와 정신(貞信)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다만 구구히 그의 남편을 위하는 마음으로, 한 남편만 좇고 다른 데는 가지 않기로 하여 죽어가면서까지 욕됨이 없었으니, 옛 열녀인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 정승(政丞) 최윤덕(崔潤德)이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말 한 필, 종 한 명과 영남으로 내려가는 도중 개녕(開寧)을 지나게 됐다. 마침 2,3명의 수령(守令)이 냇가에 천막을 치고 술을 흠뻑 마시며 윤덕을 보고 서로 말하기를,
“저 사람은 상복을 입고 말을 타고 가는 걸 보니, 이 부근 현(縣)의 시골 놈이 틀림없는데, 감히 수령에게 무례함이 이 같으니, 호되게 징계(懲戒)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하고는 사람을 시켜 윤덕의 종을 붙잡아 갔다.
“네 주인이 누구냐.”하니,“최고불(崔古佛)이라고 합니다.”하자,
“이름이 무엇이냐.”하니, 또“최고 불이라고 합니다.”
하자, 수령이 모두 화가 나서,
“너의 주인이 말에서 내리지 않아 이미 죄를 지었는데, 너까지 네 주인의 이름을 숨기고 있으니, 종이나 주인이나 똑같이 나쁘구나.”하며 이마를 때리니, 종이 천천히 입을 열어,
“최고불의 이름은 윤덕(潤德)이라고 합니다. 지금 창원(昌原)의 전장(田庄)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니, 이 말에 수령이 모두 크게 놀라 즉시 천막을 걷고 술자리를 치운 다음, 최 정승 숙소로 찾아가서 용서를 빌었다. 옛날 풍습에 노인을 고불(古佛)이라고 하였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말할 때에도 역시 그렇게 불렀었다.
○ 여흥(驪興) 민모(閔某)가 함흥 부사(咸興府使)로 있었는데, 권모와 술수가 많았다. 이때 덕원 부사(德源府使)가 상관(上官)에게 말린 포(脯)를 올릴 때마다 법식에 맞지 않는다 하여 감사(監司)에게 여러 번 퇴짜를 맞았었다. 그래서 덕원 부사는 매우 근심하고 있었는데, 한 아전이 좋은 방법을 말하기를,
“감사는 매양 함흥(咸興)의 편포(片脯)를 칭찬하니, 함흥에 가서 그 방법을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덕원도 그렇겠다고 여겨 사리에 밝은 늙은 아전을 시켜 폐물을 가지고 함흥에 가서 그 방법을 배워 오게 하였다. 민은 그 아전을 불러 자기 앞에 앉히고 술을 권하며 말하기를,
“그야 쉽지. 너의 부(府)에 대추나무가 있느냐.”하니,“있습니다.”하자, 민은,
“그러면 큼직한 대추가 열리는 커다란 대추나무 하나를 잘라, 그 가운데 토막으로 방망이를 만들어 가지고, 생사슴 고기를 얇게 썰어서 포대(布袋)에 담아 끓는 물에 넣고 절반쯤 익힌 다음, 다시 고기를 목판 위에 꺼내어놓고, 대추나무 방망이로 단단하게 다지면 꼬들꼬들하여 맛이 있을 것이다. 대추나무는 대추가 많이 열리는 것일수록 좋으니, 대추가 많이 열리면 더욱 그 나무의 질이 굳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래서 덕원 사람들은 민모가 말한 대로 만들어 보니, 만 번이나 방망이로 다졌지만 고기는 끝내 부스러지기만 하고 합쳐지지 않았다. 감사의 성화가 날로 더해지자, 온 부가 근심하여 다시 민모에게 묻게 되었다. 민은 웃으면서,“너의 방법이 매우 잘못되었다. 누가 익힌 고기가 합쳐진다고 하더냐.”
하였다. 크고 많이 열리는 대추나무 한 그루를 주인이 매우 아끼었던 까닭에, 민모는 이렇게 거짓으로 속인 것이다.
청파극담(靑坡劇談).8
○ 옛날엔 왼쪽 허리에 쇠 부싯돌을 차고, 오른 쪽에는 나무 부시를 찼었다. 맑은 날에는 쇠 부싯돌을 사용하여 불[火]를 얻었고, 흐린 날에는 나무 부시를 사용하여 불을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는 비록 그 방법이 없어 허리에 차지는 않지만 불을 얻는 방법은 예와 같다. 그러니 쇠를 돌에 쳐서 불을 취하는 방법보다는 편리하지 못하다.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사용하였으며, 행군(行軍)하는 데에 더욱 요긴하였으니, 그래서 부시[火金]라고 하는 것이다.
○ 상륙(商陸)은 일명(一名) 장류근(章柳根), 장륙(章陸)이라고도 하는데, 그 뿌리는 저주(詛呪)라는 병의 치료에 효력이 있다. 집에 한 종놈이 있었는데, 여러 사람들과 벗을 삼아 평안도(平安道)에 오가곤 하더니, 일행 10여 명이 어떤 절에서 식사하고는 모두 저주병을 앓게 되었다. 두 사람은 도중에 죽고, 남은 사람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 연이어 앓다가 죽었다. 우리집 종도 병에 걸리어 머지않아 죽게 되었다. 나는 위급하게 여겨 상륙 생뿌리 한 줄기를 찧어 소주(燒酒)에 담가 두었다가 한두 숟가락을 먹였더니, 곧 기절하였다가 한참 후에 다시 살아났는데, 항문에서 붉은 빛의 점액이 흘러나왔다. 지팡이로 헤쳐보니 조그마한 벌레가 나와 곧 날아가고 병은 나았다. 그런데 10일 후에 병이 재발했다. 나는 필시 남은 독이 모두 배출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상륙을 먹이려 했지만, 환자는 거절하고 먹지 않고는 말하기를,
“처음 먹을 때는 독이 없고 맛이 좋아 잘 넘어갔는데, 한참 있으니 천지(天地)가 빙빙 도는 것같이 어지럽다가 마침내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약을 먹지 않고 죽을지언정, 약을 먹고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였다. 아마 약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신수단(神授丹)을 술을 타서 먹였더니, 붉은 점액 속에서 역시 조그만 벌레가 나왔고, 이 뒤로 병은 마침내 나았다.
○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이 30년간이나 수상(首相)으로 재직하였지만, 시종(始終)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나이 90에 가까워서는 그 아들 활(佸)이 또한 아상(亞相 찬성(贊成))에 임명되어, 부자(父子)가 같이 당세에 유명하였으므로 임금까지도 매우 예우하였다. 봉원의 집에 요사스러운 귀신이 갑자기 나타나서, 작은 벼슬아치가 오기만 하면 귀신이 대낮에도 덤벼들어, 모자를 벗기어 부수며 돌을 던지곤 하였으므로, 온 조정에서도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부원군(府院君)이 다른 집으로 피신하고, 살귀환(殺鬼丸)을 불에 태워 재앙을 물리치니, 그 요사스러운 일이 없어졌으며, 그 후 5,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 일 없고, 부원군도 건강하고 별일이 없다.
○ 무술(武術)이 뛰어난 김덕생(金德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태종조(太宗朝)에 공이 있어 여러 번 벼슬하여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김덕생에게는 친구 모씨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일찍이 김덕생을 따라 종군하다가 잘 알려지게 된 사람이다. 김덕생이 죽은 지 10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어느 날 김덕생의 친구 모씨는 저녁 잠자리에서 갑자기 놀라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다가 다시 잠들더니, 조금 있다가 또다시 놀라 일어나 큰 소리를 질렀다. 이 때 모씨의 부인이 이상히 여겨 물으니, 모가 말하기를,
“마침 김 장군을 만났는데 흰 말을 타고 활과 화살을 메고는 나를 불러 말하기를, ‘우리집에 도둑이 들어왔기에, 그래서 쏘아 죽이려고 왔소.’ 하고는 김장군은 갔다가 다시 왔는데, 피 묻은 화살 한 개를 빼어 보이면서, ‘이미 도둑을 쏘아 죽였노라.’고 하잖겠어.”
하였다. 부부는 서로 괴상하게 여기어 날이 새자 김 장군의 본집으로 즉시 가보았다. 김 장군 집에는 나이 어린 후실(後室)이 있었는데, 그날 밤에 개가(改嫁)를 하였던바, 낭군이 들어와서는 갑자기 복통(腹痛)을 일으켜 날이 새기도 전에 죽었던 것이다.
○ 파성군(坡城君)의 집이 흥인문(興仁門 동대문) 안에 있었는데, 집 앞에 큰 홰나무가 있었다. 남편 모씨가 밤에 사청(射廳) 앞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보니 수를 알 수 없는 많은 무사(武士)들이 사청 위에서 궁술을 겨루다간, 다시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혹은 격구(擊毬)도 하고 혹은 말을 타고 활을 쏘기도 하니, 사청(射廳) 앞길이 막혀 버렸다. 그리고는 모씨를 무례하다 하여 묶어놓고 구타를 했다. 애걸하였지만 듣지 않으니,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런데 한 장부(丈夫)가 흔연히 여러 사람들 속에서 나와 여러 사람들에게 노하여,
“이 분은 나의 주인이신데, 어찌 이토록 괴롭히느냐.”
고 말하면서, 결박을 풀어주고 잘 부축하여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문 안으로 들어와서 뒤를 돌아보니, 그 장부는 홰나무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사청 앞에 나타난 무사들은 모두 귀신이었으며, 붙들고 집으로 보내준 장부도 역시 홰나무에 의탁하여 화신(化身)한 귀신이었는가 한다.
○ 고려 문성공(文成公)이 학교(學校)를 수리하여 유학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고, 데리고 있던 노비(奴婢)까지 성균관에 바쳤으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며 흠모하고 있다. 문성공의 자손이 입학하니, 노비는,
“우리 주인이시다.”
하고, 성균관의 관원(官員)들도 다른 학생들보다는 달리 대우해 주었으나 노비를 바친 사실이 사책(史策)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상세한 일은 알 길이 없었다. 그 후 두 계집종이 대궐의 시녀(侍女)로 들어왔다. 태종(太宗)이 본관(本貫)을 물으니, 그 시녀들은 성균관에 있었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태종은,
“옛사람은 성균관에 노비를 바치기도 했는데, 나는 그렇게 하진 못할망정 빼앗을 수야 있겠느냐.”
하고는, 곧 성균관으로 다시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 영남(嶺南)에 어떤 만호(萬戶)가 있었는데 이름은 알 수 없다. 그가 군법(軍法)을 범하자 세종(世宗)은 본도(本道)의 감사(監司)에게 명하여 왜인(倭人)이 보는 앞에서 베어 죽이라고 하였다. 부인 홍씨가 죽은 남편의 시체 위에 엎드려 무려 3일 동안이나 서러워하다 손으로 동강난 몸을 이어 놓고는, 절차에 따라 염습(斂襲)하여 좋은 곳을 가려 장례를 치르고, 그 묘를 3년이나 지키며 슬퍼한 끝에 몸은 뼈만 앙상했다. 이 사실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불쌍히 여기던 터라,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이 감사로 부임하자 이 사실을 듣고는 슬퍼하고 감탄하여 임금님에게 아뢰어 포상하려고 했으나, 부인 홍씨는 이미 재가(再嫁)한 몸이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창산이 나에게 이 일을 말하기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설사 홍씨가 개가하여서도 역시 어진 사람이 아닌가. 장부(丈夫)에 비교하면, 예양(豫讓)의 유이다. 예양은 범(范)ㆍ중행(中行) 씨(氏)를 위해서는 죽지 않았지만, 지백(智伯)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쳤다. 군자가 충절을 바치기를 허락한 것은 하는 바가 없이 착한 것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즉 홍씨도 예양보다 못한 사람이 아니다."
○ 광주(廣州)에는 전에 관기(官妓)가 있었는데 중간에 없앴다. 다시 두었다가 또 없앤 지가 20여 년이나 된다. 목사(牧使) 최운해(崔雲海)에게 후실(後室)이 있었는데, 그 여자는 질투심이 강하고 매우 사나워서, 온 집안 사람들이 후실의 이목(耳目)이 되어 최운해의 동정(動靜)을 살피며 후실에게 알려 주었다. 하루는 누런 옷을 입은 소리(小吏)가 최운해의 책상 앞에 엎드리고 있는 것을 집안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고는, 누런 옷 입은 아전을 기생으로 잘못 알고 후실한테 달려가 알려 주었다. 후실은 매우 노하여 문틈에 숨어 칼을 쥐고 살피고 있는데, 최운해가 어두워질 무렵이 되어 관아(官衙)에 들렀다. 문에 들어서자 기분이 이상하여 곧 돌아 나오는데, 그의 처가 칼을 빼어 최의 옷자락을 베었다. 이때 최는 매우 놀라서 객사로 돌아가니 그의 처는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늙은 놈의 머리를 베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하고, 마구간에 들어가 남편이 아끼는 큰 말을 베어 죽였다. 며칠 후에 최는 후실의 분노가 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관아에 들어가 기물(器物)을 장부에 기록하고 떠날 것을 계획하니, 처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최는 거짓말로,
“먼젓번의 일을 이미 조정에서 알고 나의 벼슬을 다른 사람과 교체했기 때문에 행장을 꾸리는 것이오.”
하고는 광나루를 건너 서울로 가니, 그의 처는 홀로 강둑에 서서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부처(夫妻)가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 월천군(越川君) 김길통(金吉通)은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어효첨(魚孝瞻)은 집현 교리(集賢校理)가 되었다. 이때 한 조사(朝事)가 술자리를 베풀고 이조 정랑을 맞이하였다. 어효첨은 이것을 모르고 먼저 그 집으로 갔는데, 잠시 후에 작은 술상이 차려졌는데 초초하여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것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김길통이 오자 주인이 준비한 음식을 가져오라고 재촉하였다. 이때 들어온 음식은 노루 간[獐肝] 등, 여러 가지의 맛이 아주 일미였다. 어효첨은 거동이 아주 느긋하고 가볍게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하도 사람됨이 비루하다고 생각되어 젓가락으로 간을 집으며 천천히 말하기를,
“나도 이조(吏曹)의 간을 먹는다.”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또 벼슬을 구하는 자가 이랑을 맞아 술자리를 베풀었다. 이랑이 매우 취해서 구토하니, 주인이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소인이 손님을 공경하기 때문에 음식을 조금 준비한 것인데, 손님께서 드시자마자 바로 토하시니, 소인의 마음이 송구스럽습니다. 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 공정왕(恭靖王)의 궁(宮)에 환관(宦官)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과 나이는 모르겠다. 2월 그믐에 우연히 정원 안에 들어가니, 그 정원 안에 두세 사람의 무리가 풀이 쌓인 옆에서 복숭아를 주워 먹고 있었다. 다가서서 보니, 복숭아의 빛이 아주 붉어서 마치 9,10월에 서리 맞은 복숭아 같았다. 풀섶을 헤치고 수백 개의 복숭아를 주워 임금에게 드리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였고 곧 문소전(文昭殿)에 천신(薦新)했다. 다시 태종(太宗)에게 보내면서,
“선도(仙桃)를 얻었기에 감히 올립니다.”
하니, 태종도 복숭아를 얻고 크게 기뻐하여 문소전에 천신하라 명했지만, 상왕이 이미 올리었다 해서 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임금의 옷을 벗어 복숭아를 올린 환관에게 주고, 곧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계엄(戒嚴)하라 하고는, 상왕의 궁(宮)에 거둥하여 선도를 존소(尊所)에 놓고 함께 구경하면서 큰 잔치를 밤이 깊도록 베풀었는데, 그 기쁨이 극치에 이르러서야 잔치를 파했다. 가을이 되어 복숭아가 소담스럽게 익자 상왕은 좌우 신하들에게 복숭아 위에 풀숲을 덮으라고 명했다. 다음해 봄에 이르러 다시 풀섶을 헤쳐 보았더니, 복숭아는 모두 썩어 문드러져 마침내 먼젓번의 맛있고 보기 좋은 복숭아와는 같지 않았다.
○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절에서 법회(法會)를 베풀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맞아 동행하게 되었다. 양녕이 동복(僮僕) 10여 명과 매를 팔위에 얹고 개를 끌고 가니, 방울 소리가 계곡에 울리었다. 절에 도착하여 불상이 있는 옆자리에 매를 놓아두고, 꿩을 잡아 불에 구워 절간에서 술을 마시니, 그의 방자하고 꺼림이 없음을 효령은 몹시 못마땅히 여기고 안색을 변하여 말하기를,
“형님은 어찌 절에서 이렇게 무례하십니까. 앞으로 있을 화복(禍福)이 두렵지도 않습니까.”
하니, 양녕 대군은 크게 웃으며,
“태어나서는 임금의 형이 되어 온 나라가 존경하고,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이 되어 세상이 받들 것이니, 살아서나 죽어서나 복이 있는데 내가 어찌 두려워할 게 있으리오.”
하니, 효령은 아무 말도 못했다.
○ 정렬공(貞烈公) 최윤덕(崔潤德)이 이상(二相)으로서 평안도 도절제사(都節制使)와 판안주목사(判安州牧使)를 겸하였을 때,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청사(廳舍) 뒤의 빈 땅을 갈고 참외를 심어 손수 김을 매고 있었다. 어떤 소송(訴訟)하러 온 사람이 정렬공인 줄을 모르고 묻기를,
“상공(相公)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
하니, 공이 속여,
“어디어디 계십니다.”
라고 말하고는, 들어와 관복으로 갈아입고 소송을 판결하였다 한다.
어떤 시골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기를,
“호랑이가 저의 남편을 물어 죽였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내 너를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
하고는, 호랑이의 자취를 밟아 찾아가서 손수 쏘아 죽이고, 그 배를 갈라 남편의 뼈와 살과 사지를 끌어내어 옷에 싸고 관을 준비하여 매장하니, 그 부인은 감격하여 눈물을 그칠 줄 몰랐고, 온 고을 사람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을 부모와 같이 사모하고 있다.
○ 어떤 예조(禮曹) 당상관이 일찍이 서울 기생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 낭청(郞廳)더러 말하기를,
“예조의 관리가 서울 기생을 사통하면, 세상의 물의(物議)가 어떻겠소.”
하니, 그 낭청도 역시 서울 기생을 사통하였던 자라,
“외방(外方) 관리에 비교하면 예조의 당상관은 감사(監司)와 마찬가지고, 낭청은 수령관(首領官)과 마찬가지입니다. 감사와 수령관한테는 스스로 잠자리를 바치는[薦枕] 기생이 있는데, 무슨 물의가 있겠습니까. 다만 관습(慣習)에 도감(都監)의 관리는 수령(守令)과 같아서 기생을 사통할 수 없는 줄로 압니다.”
하니, 그 말을 듣고 당상은, “그대의 말이 옳소.”하였다.
○ 유(柳)씨라는 한 늙은 조관(朝官)이 임천(林川) 군수가 되어 한 기생을 사랑했다. 일찍이 관아(官衙)에 불러들여 내보내지도 않고 자못 사랑했다. 재상(宰相) 성(成)씨가 때마침 본도의 수사(水使)가 되어 유씨의 행위를 듣고 이것을 빼앗아 보리라 마음먹고 바로 임천으로 갔다. 동헌(東軒)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그 기생 소식을 물으니,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모두들 대답하였다. 공이 강요하여 들어오게 하고 형장(刑杖)으로 위협하니, 아전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뜰 앞에 나아가 애걸하자 군수 유는 마지못하여 기생을 내어 놓았다. 기생이 풀어헤친 머리와 더러운 얼굴을 하고 남루(襤螻)한 옷에 맨발로 나와 성(成) 수사를 뵈었다. 성이 방 안으로 불러들여 늙은 기생을 시키어 낯을 씻기고 머리를 빗겨서 옷을 갈아입게 하니, 용모가 여러 기생 가운데 으뜸이었다. 곧 마음에 들어 말에 싣고 수영(水營)으로 돌아왔다. 유씨는 뜻밖에 기생을 빼앗기고 다시 찾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관노[急唱]를 시켜 도중에 불러,“아무개야, 너의 어머니가 죽었다.”라고 전하게 했다. 성(成)이 기생더러,
“네 어미가 죽었다는데 돌아가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지만 기생은 웃으면서,
“저의 어머니는 죽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느 날 기생은 성(成)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제가 비록 관아 안에 있었으나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습니다. 조관이 군(郡)에 들어오실 때마다 마음이 놀랍고 끔찍하여 날이 지날수록 더하던 차에, 다행히 오늘 상국(相國)과 인연을 맺어 형장 맞는 고통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재생(再生)의 은인이십니다.”하였다.
청파극담(靑坡劇談).9
○ 정승(政丞) 맹사성(孟思誠)이 상복(喪服) 차림으로 남행(南行)하다가, 길에서 비를 만나 잠깐 동안 원루(院樓)에서 쉰 적이 있다. 사인(士人) 황의헌(黃義軒)이라는 사람이 먼저 원루에 올라가 두 손을 뒷짐 지고, 바야흐로 현판에 씌어 있는 시(詩)를 보며 얼마간 읊조리더니, 오만한 태도를 공을 돌아보면서,
“영감이 어찌 이 흥취를 알겠소.”하였다. 공은 황의헌을 존경하는 척하면서 일어나 대답하기를,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 시골뜨기가 어떻게 알겠습니까.”하고 다시 묻기를,“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자, 황은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선현들이 눈으로 보고 흥에 겨워 강산의 뛰어난 경치를 묘사한 것으로, 아마도 시 가운데 살아 있는 그림이 아닌가 하오.”하자, 맹공은,
“그렇습니까. 참 좋습니다. 하지만 선생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을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얼마 아니 되어 짐바리가 모여들고 하인들이 몰려와 공장(供帳)이 앞뒤로 연달았다. 황이 그때서야 이상하게 여기고 하인에게 물어 이 늙은이가 바로 맹 정승인 줄을 알자, 저도 모르게 엎드려 사죄하니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사람은 귀천(貴賤)에 관계 없이 의지가 가장 소중하오. 그대한테는 사람에게 오만하게 대하는 마음이 있어 틀림없이 보통 사람이 아닌 줄로 알았는데, 조금 전에는 그렇게 도도하던 사람이 어찌하여 지금 와서는 그렇게도 비굴하단 말이오.”하고는, 끌어 당겨 같이 앉아 위로하여 보내었다.
○ 처사(處士) 성담수(成聃壽) 미수(眉叟)는 동생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담년(聃年) 인수(仁叟)와 함께, 시문(詩文)에 풍치가 있기로 같이 이름이 높았는데, 형제자매가 10여 명이나 되었다. 부모가 돌아가자 3년 상을 마치고 형제들을 모이게 한 다음 재산을 분배하는데, 미수는 물건 가운데 번번한 것을 보면 곧
“아무에게 주어라.”하고, 종들 중에 착실한 자가 있으면 곧
“아무에게 주라.”말했으니, 부수어지고 변변하지 못한 물건을 보게 되면,“이것은 부모님의 뜻이니 내가 가져야 하겠다.”고 말하였다. 누이동생인 이정견(李庭堅)의 아내가 집이 없기 때문에 또 본집을 주고자 했는데, 여러 아우들이 굳이 말리기를,“부모님이 계시던 집은 장자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하니, 미수는 말하기를,
“다 같은 부모의 자식으로 나만 홀로 집을 가질 수는 없다.”
하고, 곧 가지고 있던 무명을 내어다 팔아 이정견의 집을 사는 자본으로 주니, 동생 인수도 또한 가재(家財)를 팔아 도와주었다. 두 형이 마음을 모아 그 철없고 어린 여러 동생들을 차례로 장가들이고 출가시키곤 하니, 온 집안에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 유효통(兪孝通) 선생(先生)의 아들 중에 정승(政丞) 황보인(皇甫仁)의 딸에게 장가든 자가 있었다. 당시의 풍속에, 장가들 때 돈 많은 사람은 반드시 진귀한 보물을 함에 담아 앞잡이에게 짊어지어 예물로 하였다. 많이 보내는 사람은 3, 4개의 함에 이르렀는데, 유씨의 아들도 2개의 함을 예물로 하였다. 황보인이 함을 재촉하여 들여다가 손님 앞에서 열어보니, 모두가 책뿐이 아닌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나중에 황보인이 사돈 유씨를 만나,
“혼인날 예물함에 왜 책만 넣어 보냈습니까.”하고 물으니,
“황금(黃金)이 상자에 가득 차 있더라도 자식에게 한 권의 경서(經書)를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란 말이 있으니, 혼인날 함에 어찌하여 책을 예물로 쓰지 못하겠습니까.”라고 유씨는 대답하였다.
○ 눈은 둥글고 빛나는 까닭으로 물건을 잘 감별하고 귀는 비고 뚫린 까닭으로 소리를 잘 받아들이며, 코는 곧고 열린 까닭으로 냄새를 잘 맡으며, 입은 옆으로 패인 까닭으로 숨을 잘 내쉬고 들이쉬며, 또 혀가 작용을 하여 음성과 언어가 있는 것이다. 귀ㆍ눈ㆍ입ㆍ코 넷이 각각 맡은 것이 있지만 겸한 것은 입이다. 그러나 선악을 판단하고 구별하는 주체는 마음이다. 만약 마음이 없다면 비록 눈이 있은들 어떻게 볼 수 있으며, 귀가 있은들 어떻게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비록 코가 있은들 어떻게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입이 있다 하나 어떻게 숨을 쉬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말하기를,“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한다.”하였다.
○ 기생 자동선(紫洞仙)은 재주와 얼굴이 뛰어나 종실(宗室) 영천군(永川君)이 흠뻑 사랑에 빠졌다. 영천군은 일찍이 청교월(靑郊月)이라는 기생을 좋아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사랑을 자동 선에게로 옮긴 것이다. 마침 송도(松都)에 갔을 때 송도 안에 있는 청교역(靑郊驛) 자하동(紫霞洞)에서 서달성(徐達成)이 시를 지어 송별해 주었는데,
청교의 버들은 가슴 아프게 푸른데 / 靑郊楊柳傷心碧
자동의 안개는 마음에 흡족하게 짙었구나 / 紫洞煙霞滿意濃
하니, 영천군이 매우 기뻐하여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이 시를 자랑삼아 읊은 적이 있었다. 한림(翰林) 장녕(張寧) 등이 본국에 봉사(奉使)하여 연회 때마다 꼭 자동선을 눈여겨보고 말하기를,
“참으로 경성(傾城)의 자태이다.”
하였다. 뒤에 중국 사신 김식(金湜)이 제천정(濟川亭)에서 놀 때에 예쁜 기생들이 앞에 가득하였는데,
“장 한림이 칭찬하던 귀국의 자동선이란 누구인가.”
라고 묻자, 예관(禮官)이 거짓 다른 기생을 가리켰다. 김이,
“아니오. 과연 이 사람이라면 장공이 반드시 칭찬하지 않았을 것이오.”
하니, 그제야 예관이 감히 숨기지 못하고 부랴부랴 말을 달려 자동선을 영천(永川)군 집에서 찾아오니, 김이 웃으며,“이 사람이 참으로 그 사람이오.”하였다.
○ 판원(判院) 김효성(金孝誠)은 사랑하는 계집이 많았고, 부인도 질투가 대단히 심했다. 어느 날 공이 밖에서 들어오다가 부인 자리 곁에 검정 물을 들인 모시 한 필이 있는 것을 보고,
“이 검은 베는 어디다 쓸 것인데 부인 자리 곁에 놓았소.”
하고 물으니, 부인은 정색(正色)하고,
“당신이 여러 첩한테 빠져서 친 마누라를 원수같이 대하시므로, 저는 결연히 중이 될 마음을 먹고 이것을 물들여 왔습니다.”하였다. 그러나 공은 웃으며,
“내가 여색을 좋아하여 여기(女妓)ㆍ여의(女醫)로부터 양가의 사람, 천한 사람, 코머리, 바느질하는 종 할 것 없이 얼굴이 곱기만 하면 꼭 사통하여 왔으나, 여승에 이르러서는 아직도 한 번도 가까이 해본 적이 없소. 그대가 여승이 되는 것이 내가 원하던 것이오.”하니, 부인은 마침내 말 한마디 못하고 손으로 승복을 내동댕이쳤
○ 김중성(金仲誠)이 충주 목사(忠州牧使)가 되자 온 고을이 잘 다스려졌다. 일찍이 큰 누각을 지은 적이 있었는데, 아전이 고하기를,“기둥을 세운 뒤에는 쇠못을 써야 하는데 아마 만개는 되어야 할 것이옵니다. 이제 누각의 기둥이 머지않아 세워질 것이오나 관에는 쇠끄트러기 하나 없사오니 어찌 낭패가 아니옵니까.”하니, 공이 말하기를,
“염려할 것이 없다. 내 이미 구해 두었노라. 내일 기둥을 세우도록 하라.”하였다. 그러나 아전이 또 고하자, 공이 또 말하기를,“염려할 것 없다. 내 이미 구해 두었노라.”
하고는, 이날 밤 첫 새벽[三鼓]부터, 공이 관청에 앉아 일을 보며 아전을 점검하는데 늦게 온 자가 많았다. 공이 모두 늦게 온 죄를 따져 철물로 속죄하도록 하고는, 사자를 보내어 독촉하여 받아들이니, 하루도 못 되어 쇳더미가 산같이 쌓였다. 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이것도 쇠란 말이다. 못을 만들 수 있지 않느냐.”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소송을 좋아하지만 소송하는 바가 모두 내용이 없으매, 몹시 싫어하여 항상 누각 위에 앉았다가 소첩(訴牒)을 가지고 뜰에 이르는 자가 있으면 보지 못한 척하곤 했다. 그 사람이 막대에다 첩지를 끼어 흔들더라도, 공은 또 보려고도 않은 채 누각 위에 누워 끝까지 받아들이지 아니하다가, 날이 저물게 되면 여러 첩지를 모아다가 불사르니, 이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어진 목사라 일컫는다.
○ 말 의사[馬醫] 윤중년(尹仲年)이란 사람은 업(業)이 매우 정묘했고, 눈을 고치는 데도 신묘하였다. 그는 말하기를,“대체로 말이 병나는 것은 사람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고치는 방법도 같으니, 간으로 간을 보하고, 콩팥으로 콩팥을 보하며, 허파로써 허파를 보하고, 심장으로 심장을 보하며, 지라로써 지라를 보하여 오장이 모두 그러한데, 눈에 있어서만 그렇지 않겠는가. 나는 안정(眼精)을 가지고 안정을 고치는 까닭으로, 백 번 약을 써도 낫지 않는 적이 없다. 제비는 항상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온갖 벌레를 잡아 먹이로 하는데, 살은 벌써 소화가 되어도 안정만은 소화가 안 된다. 나는 제비 똥을 많이 구하여 냇물에 일면 더러운 찌꺼기는 모두 없어지고, 안정만 남으나 하루에 얻는 양이라곤 불과 아주 조금이다. 그렇게 해서 갈아 약에 타서 앓는 눈에 넣으면 자연히 신묘한 효과가 있다.”하였다.
○ 종실(宗室) 임성정(任城正)은 예능(藝能)에 뜻을 두어 거문고를 잘 타기로 당시에 으뜸이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일찍이 말하기를,“임성정의 거문고는 독특한 가락을 지니고 있어, 다른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그의 집이 숭례문 밖에 있었는데, 이른 아침마다 대문턱에 걸터앉아 두 손을 번갈아 들었다간 무릎을 치곤 했는데, 이렇게 하길 3년이 지났지만 사람들은 그 영문을 모르고 모두 미치광이로 여겼는데, 장고치기를 연습했던 것이다. 얼마 뒤에는 입가에 손을 대고 손가락을 놀려 주야로 그칠 줄 몰랐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보고도 못 본 체하며 3년 동안을 그렇게 하였는데 피리 부는 법을 연습했던 것이다. 사람됨이 파리하고 약하여 활쏘기 말타기는 잘하질 못했다. 늘 탄식하면서,
“내 비록 몸이 약하여 화살을 멀리 가게 할 수 없지만, 명중시키는 것을 위주로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활이란 인격을 보는 것이니 또한 배움직한 일이다.”
하고, 매일 아침이면 활과 화살을 가지고 산에 올라가 종일토록 과녁을 쏘기 또 3년을 하여, 마침내 활 잘 쏘기로 이름을 떨쳤다. 그 의지야말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청파극담(靑坡劇談).10
○ 조강(趙講) 선생은 천성이 고지식하였다. 충청도 진휼사(賑恤使)로 임관된 적이 있었는데, 안순(安循)이 종사관이었다. 그때에 문의(文義)ㆍ회인(懷人) 등 다섯 읍 수령들이 모두 죄를 지어 장형(杖刑)에 해당되었다. 선생이 사신의 명을 띠고 청주에 들어가 형벌을 감독하게 되었는데, 청주 목사가 그 이름을 잊어버려 소송의 첩자로 바꾸어 바치니,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다. 이윽고 판결이 끝나자, 선생이 아전에게 명하여 형을 재촉하니, 목사가 또 나와서 말하기를,
“오관(五官) 수령이 백성을 구원하지 못하여, 위로는 임금에게 죄를 얻었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죄를 얻었으니, 형장(刑杖)의 절차를 불가불 엄하게 하여 백성의 마음을 만족하게 할 것이니, 청컨대 의금부(義禁府) 형벌의 예에 의하여, 공은 대청에 앉아 계시어 당상이 되시고, 소인을 중문에 앉아 낭관이 되고, 죄인들은 대문 밖에 엎드렸다가 차례로 형장을 받게 하되, 백성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진행한다면, 이것이 조정에서 백성을 애휼하는 뜻이 아니겠습니까.”하니, 선생이 승낙하였다. 얼마 뒤에 아파서 울부짖는 소리가 안팎에 울려 퍼졌다. 다음날 선생이 나가다가 길에서 오관 수령을 만났다. 모두 들것에 실려 옷과 이불을 덮어 씌워 길가에 버려져 있었다. 선생은 말에서 내려 손을 잡고 위로하기를,“내가 공을 미워함이 아니로다. 사세가 이렇게 되어 부득이하였소.”
하였다. 아마 선생은 청주목사의 술책에 빠졌으면서 몰랐던 모양이다. 뒤에 선생은 지위가 사예(司藝)에 지나지 못한 채, 마침내 병으로 그만두게 되었지만, 목사는 허리에 금띠를 두르고 추부(樞府)에까지 오름을 보고 선생이 탄식하기를,“내가 그한테 매수된 줄도 알지 못하고, 종신토록 뜻을 잃어 밝히지 못했으니, 참으로 당연한 일이로다.”하였다.
○ 대제학(大提學) 박연(朴堧)은 영동(永同) 사람이다. 나이 40이 되도록 영락(零落)하여 세상을 만나지 못하고, 거문고와 장기로 스스로 마음을 위로하였다. 아들 몇이 있었으나 또한 글 읽기를 힘쓰지 않아 바둑을 들고 이웃집에 들러 통음(痛飮)하는 것으로 일삼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등잔불을 켜놓고 글을 읽지 않은 적이 없었고, 또한 때때로 저[笛]를 비껴 물고 스스로 즐기곤 하였다.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첨지(僉知)에 이르렀다.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 서원(西原)을 거쳐 가게 되었다. 지위를 속여 남루한 옷차림으로 주사(州司)에 자고 가기를 청했는데, 이때 공은 이미 백발이었지만 동침하는 기생이 있었다. 거문고에 대하여 잘 알고 있기에 공이 손수 몇 곡을 타니, 여러 아전들이 모여들어 안 보는 자가 없었고, 수리(首吏)는 공이 연로하면서도 솜씨 있음을 기뻐하여 많은 음식까지 장만하여 대접하여 공은 마음껏 즐기고 놀았다. 그 뒤로는 악기만 있으면 꼭 두세 곡씩 즐기니, 아전들이 모두,“노인께서는 못하는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였다. 공이 살통의 큰 살을 뽑아서 여러 아전에게 나누어 주고 서로 한껏 즐기다간 파하였다. 아침에 공이 주관(州官)에게 이름을 통하니, 목사 이하 모두 달려와 절하고 뵈었다. 여러 아전들은 크게 놀라 모두 그 살을 돌려보냈지만 공은 또한 끝내 이에 대하여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으니,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 일을 말하고 있다.
○ 정승(政丞) 유정현(柳廷顯)이 전직 대언(代言)으로 집에 있었는데, 곡식을 맡아보던 종이 빚 받을 사람과 서로 치고 싸우다가 사람이 죽었다. 태조가 크게 노하여 팔도에 유시하여 정현을 매우 급히 찾으니, 공은 재빨리 도망쳤다. 망금(亡金)이란 자는 의산군(宜山郡) 남은(南誾)이 사랑하는 계집종이었다. 유(柳)는 망금과 서로 아는 터인데 이미 군색하여 있을 만한 곳이 없어졌으므로, 몰래 남은의 집으로 숨어 들어가 망금의 이불 속에 누웠다. 망금이 손으로 더듬어 보니 웬 남자가 아닌가. 깜짝 놀라서 일어나 물으니 대답이 없어, 머리를 움켜쥐고 밖으로 나가 자세히 보니 바로 유정현이었다. 말하기를,
“내가 살인죄를 범하여 사형을 당하게 되어 숨을 데가 없기에 이제 여기 와서 살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하니, 이 말을 들은 망금은 애처롭게 여겨 남은에게,“소인이 죽을 죄가 있습니다.”
하였다. 남은이,“무슨 말이냐.”하니, 망금은,
“대언 유정현이 지금 저의 자리에 누워서 살려 달라고 하옵는데, 이것이 저의 죽을 죄입니다.”
하자, 남은은 놀라면서,
“그 사람은 이미 사람을 죽였으니 죽어 마땅하고, 너도 숨겨 주기로 허락하였으니, 스스로 그 죄가 있다.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했다. 이날 밤 대궐을 지키는데, 망금이 따라 들어갔다. 남은이 임금에게,
“망금이 죽을 죄가 있사오매 마땅히 속히 죽이옵소서. 이제 살인자 유정현이 현재 망금의 처소에 와 있다 하옵니다.”하니, 임금이 망금을 돌아보며,
“어찌하여 죄인을 숨겼는가.”하자, 망금이 엎드려 죄를 기다리면서 또 그 사실을 낱낱이 말씀드리니, 상금은 특별히 유정현을 용서하였다. 유정현이 재생의 은혜를 고맙게 여겨, 황금 한 덩이를 몰래 소매 속에 숨겼다가 망금에게 주어 남은에게 바치게 하였으나, 남은이 크게 노하여 망금을 책망하고 금을 돌려보냈다. 무인년 사변에 남은이 패하고 유정현은 마침 진주 목사가 되었다. 망금이 영남에 가서 장사하다가 진주에 들렀다. 고을 청사에서 말린 청새치[碧魚]가 수백 동이나 쌓여 있음을 보았는데, 마침 기생 10명이 그 앞을 지나가고 있기에 김은 10여 명의 기생들에게 농담을 던지기를,
“너희들이 이 고기를 먹고자 한다면 마땅히 각각 한 동이씩을 주겠다.”
하니, 기생들은 모두 웃으면서,
“손님께서 한 사람에게 고기 대가리 하나씩만 줄 수 있다면, 우리들도 각각 술 한 잔씩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서로 약속하였다. 망금이 목사를 뵙고,“저, 망금입니다.”
하니, 유정현은 바야흐로 관사에 앉아 일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놀라 일어나 손을 잡고 끌어당겨 앉혔다. 망금이 굳이 사양하고 앉지 않으니, 곧 술자리를 마련하여 앉게 하고 수륙의 음식을 나열하여 술잔을 돌리기 한이 없었다. 술이 얼근하여 말하기를,“소인이 청새치 열 동을 쓰고자 합니다만.”하니,
“네 쓰고 싶은 대로 쓰려무나, 어찌 열 동이뿐이겠느냐.”
하였다. 술자리가 끝나 망금이 자기 처소로 돌아가, 10여 명의 기생에게 각각 청새치 한 동이씩을 주니, 기생들이 모두 놀라,“우리 목사님은 성격이 인색하셔서 비록 한 마리의 대가리라도 오히려 낭비하지 아니하지 아니하시는데, 어찌하여 손님에게는 이토록 관대하실까요.”
하였다. 그 후 유정현은 마침내 수상(首相) 벼슬을 받아 나라의 중신(重臣)이 되었고, 망금 또한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늘 남들과 이 이야기를 하였다 한다.
○ 정승(政丞) 남재(南在)가 재상을 그만두고 한가로이 묵사동(墨寺洞) 본집에서 정양하고 있었다. 날마다 바둑을 일삼았는데, 묵사(墨寺)의 한 스님이 자주 나왔다. 서로 바둑을 놓다가 스님이 거짓으로 지는 척 하노라면 공은 대단히 기뻐했다. 옷 벗기기 내기를 하여 갓을 벗긴 다음, 또 옷을 벗기고 속옷을 벗기에 이르자 스님은 감히 벗질 못하고 재삼 애원한 뒤에야 면하였다. 날이 저물어 스님이 절에 돌아오면 공은 종 서너 명을 시켜 쌀과 콩과 음식을 가져다주니, 이로 말미암아 스님은 어느 날이나 옷을 벗기지 않는 날이 없었지만, 소득은 날로 늘어만 갔다. 그러나 공은 알지 못하였다. 한 조관 민씨가 공을 찾아뵈었는데, 공이 또 대국하였다. 민이 바둑판에서 길을 다투다가 물러서지 않다가 손으로 공의 이마를 치기에 이르렀다. 공이 기분이 나빠 말하기를,
“이 손님은 기상이 호걸스러우나 성공하면 성공하겠고, 성공을 못하게 되면 성공을 못한 것이다.”하였다.
○ 고려(高麗) 신우(辛禑)의 근비(謹妃)는 이임(李琳)의 딸이요, 영비(寧妃)는 최영(崔瑩)의 딸이었다. 영비의 사적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어서, 강릉(江陵)의 나이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흔히 그 일을 이야기한다. 신우가 형(刑)을 당하게 되었을 때, 영비가 몸을 날려 달려가 구하자, 한 아전이 그의 옷자락을 잡고 물리치니, 영비가 크게 꾸짖기를,“늙은 종놈이 어찌하여 손으로 나를 더럽히느냐.”
하고, 마침내 그 옷자락을 찢어 버리니 보는 자가 모두 놀랐다. 근비는 늙도록 개성 본집에서 살았는데, 병풍 한 폭의 살이 부러졌었다. 시비(侍婢)가 그를 고치려 하자 그녀는 말하기를,
“선왕께서 친히 부러뜨리신 것이니 고쳐선 안 된다.”
하고, 기일(忌日)을 맞을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제사를 지냈다. 태조께서 근비와 영비에게 각각 수신전(守信田) 3백 결을 주었는데, 그런 일들을 표창하기 위한 것이다.
○ 대제학(大提學) 허성(許誠)이 늘 말하기를,
“지위를 탐내고 녹을 생각함은 늙을수록 더욱 예리하여, 남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으면서도 일찍이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로서 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치고는 본직에 돌아온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보고 수심에 잠겨 기분이 상하더니, 이어서 거울을 던지면서,“내 이같이 늙은 줄을 몰랐구나.”
하고, 사직하여 나오지 아니하였는데 나이 60여 세였다.
○ 고령 문충공(文忠公)의 새 집이 송침교(松針橋) 가에 있었다. 내가 장령(掌令)이 되어 대궐에 나아가니 공이 먼저 빈청(賓廳)에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중 나더러 말하기를,
“우리 새 집 북쪽에 샘 줄기가 있기에 파 보았더니, 줄기가 끊어져 물은 나오지 않고, 바윗돌이 어찌나 견고하던지 시공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쇠붙이 연모로 여러 날 공사를 하니, 또 재가 나오고 재가 다하자 큰 나무가 그 속에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도끼로 찍어보니 바로 잣나무였습니다. 나무를 다 파내자 비로소 맑고 시원한 물이 나왔습니다. 그 깊이는 거의 수십 척이나 될 겁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모르겠군요. 이것이 겁회(劫灰 겁화 때에 생기는 재를 말함)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덕이 옮겨지고 골짜기가 변하여 변화가 무궁했으니, 또한 이 곳이 일찍이 만길 골짜기로 나무가 쓰러졌다가 이에서 변천하여, 마침내 평지가 된 것인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나를 위하여 이 사실을 기록해 두지 않으시렵니까.”하였다.
○ 송흠(宋欽)이 경원 부사(慶源府使)로 있을 때에 모시던 기생이 있었다. 아침에 말하기를,
“어제 저녁 꿈에 어떤 도둑이 갑자기 달려와 영공(令公)의 머리를 베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했는데, 조금 있다가 도둑이 들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송이 꿈을 크게 꺼려 드디어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부하들이 간하여,
“자세히 보오니, 도둑이 형세가 외롭습니다. 치기만 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어찌 그 노략질을 앉아서 보기만 하시고 구하지 않으십니까.”
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도둑이 드디어 인마(人馬) 백여 명을 몰고 갔는데, 한 군졸이 몸을 날려 성을 넘어가 창을 휘두르며 크게 고함쳐, 노략질했던 사람 수십 명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사실이 나라에 알려지자 세종이 크게 노하여 송을 잡아오게 하고, 그 군졸을 발탁하여 사품관(四品官)으로 삼았다. 드디어 송을 금부에 내려 군법으로 논죄하여 사사(賜死)하였다. 그가 죽을 때에 청파동(靑坡洞) 길을 거쳐 갔는데, 정승 최윤덕(崔潤德)이 송과 안면이 있는지라, 주과(酒果)를 갖추어 서로 들면서 영결하기를,
“상심하지 마시오, 국법으로 죽게 된 것이고, 하물며 인생이란 필경 한 번 죽는 것이 아니오, 나도 멀지 않아 공을 따라 갈 것이오.”하였다.
청파극담(靑坡劇談).11
○ 서원(西原)에 초수(椒水)라는 물이 있다. 내가 안찰사가 되어 이를 살펴보니, 물이 땅 속으로부터 솟아나오는데 아주 차고 맛이 쓰다. 뱀이나 개구리가 뛰어들기만 하면 곧 죽는다. 세종이 만년에 안질이 있어서 행궁(行宮)을 지어놓고 행차하고는, 이어서 눈을 씻었는데 여러 날이 지나자 효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곧 목사 박효성(朴孝城)을 당상관(堂上官)에 임명한 일도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떤 늙은 농사꾼이 언덕 위에서 잠이 들었는데, 귓가에 은은히 군마의 소리가 들리기에 일어나 보니 평지에서 물이 솟아나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달려가 사또에게 고했으며 이리하여 소문이 널리 퍼진 것이었다. 불로 끓이면 맛이 없고 독도 없으며 가려움증 같은 병은 이 물로 씻기만 하면 바로 나았다. 하류에 있는 수십 경(頃)의 논에 이 물을 대니 땅이 매우 비옥해졌다 한다.
○ 태종이 모든 짐을 벗고 풍양궁(豐壤宮)에서 거처할 때에 어떤 두 소리(小吏)가 있었는데, 서로 더불어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논하였다. 갑(甲)은,“부귀와 영달이 모두 임금에게서 나온다.”하였고, 을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품계나 하나의 자급은 모두 하늘이 정하는 것이어서 비록 임금이라 하더라도 그 사이에 작용이 있을 수 없다.”하여, 각각 자기만이 옳다고 하여 의논이 하나로 정해지지 아니하였다. 태종이 이 말을 듣고 비밀히 소지(小旨)에“지금 가는 소관(小官)에게 모름지기 한 품계를 더 올려주기 바라오.”
라고 써서 갑에게 주어 세종한테 보내게 하였다. 그러나 갑이 하직인사를 나왔는데 갑자기 급성복통을 일으켜 을을 빌어 전달하게 하였다. 다음날 정목(政目)을 태종에게 아뢰니, 을은 가자(加資)되었고 갑은 빠졌었다. 태종이 그 연유를 듣고 한참 동안 경탄하여 마지않았다.
○ 성주 호장(星州戶長) 이장경(李長庚)에게 아들 다섯이 있었다. 조년(兆年)ㆍ억년(億年)ㆍ만년(萬年)ㆍ천년(千年)ㆍ백년(百年)이라고 했는데,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조년은 강직하기로 가장 이름났고, 그 자손이 번성하였다. 손자 인복(仁復)과 인임(仁任)은 고려 말에 크게 출세하였고, 직(稷)은 본조(本朝)에 들어와 공신에 봉해지고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며, 그의 손자 정녕(正寧)은 또 상주(尙主 공주의 배필)가 되어 성원위(星原尉)에 봉해지고 아들 3형제가 모두 현관(顯官)이 되었고, 그 밖에도 높은 벼슬이 조정에 가득했다. 장경이 나이가 많아 집에 있을 때에도 청도성(淸道聲 임금의 행차 때 미리 길을 청소하는 일)을 들을 적마다 곧 침상에서 내려 땅에 엎드렸다가, 소리가 끊어지고도 얼마 뒤에야 침상에 올랐다 한다. 그 마음씀이 이와 같았으니 자손에게 보답이 있음은 마땅한 일이다.
○ 선조(先祖) 행촌공(杏村公)은 전직 시중(侍中)으로 춘천(春川)에 물러가 계셨다. 때마침 홍적(紅賊)의 반란이 일어나자, 현릉(玄陵)께서 내신(內臣)을 보내어 기용하고자 하였는데, 공은 바야흐로 길에서 오물을 호미로 치우고 계셨다. 내신은 이 분이 공인 줄 모르고 묻기를,“시중 댁이 어디에 있소.”
하니, 공이 거짓 다른 마을을 가리키고는 바로 돌아가 의관 속대하고 나아가 보셨다. 드디어 도원수로 기용되었다. 공이 돌아가시자 현릉께서 친히 그 영정을 그리고, ‘행촌(杏村)’이란 두 글자를 쓰니, 바로 현릉의 수법(手法)이라, 글씨와 그림이 모두 절묘하였다. 지금 나의 집에서 보배로 간직하고 있다.
○ 재상(宰相) 공부(孔俯)가 판예빈(判禮賓)으로 있을 적이었다. 정승(政丞) 조준(趙浚)이 공궤(供饋)하는 음식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장형(杖刑)을 주려 하자 공이 말하기를,
“죄는 진실로 사양할 수 없사오나, 어찌 재상으로서 음식으로 인하여 노해 가지고 조신(朝臣)을 볼기 치는 법이 있사옵니까.”하니, 조 정승이 웃고 그만두었다. 조와 공은 한때의 명현(明賢)으로 조는 조금도 용서하는 일이 없었고, 공은 또한 원망하는 말이 없었으니, 등급 사이에 그 엄하기가 이와 같았다.
○ 광릉(光陵) 말년에 세 태감(太監)이 봉사(奉使)하고 돌아왔다. 그 중의 한 사람은 김보(金輔)로서 본국 장단(長湍) 사람이다. 활쏘기와 말타기로 천자에게 사랑을 얻어 갑자기 높은 반열에 올라가니, 권세가 조야(朝野)에 떨쳤다. 이때에 김초(金軺)가 영안도감(迎按都監)의 낭청(郞廳)으로 있었는데, 김보가 김초를 한 번 보고는,
“불초한 사람이로다. 다시는 내 앞에 가까이하지 말게.”
하였는데, 그 후에 김초는 범죄하여 부자가 모두 형벌을 받았다. 김보는 비루한 사람이어서 취할 만한 것이 없는 자였지만 그래도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이 있었다.
○ 동래(東萊)의 동백정(冬栢亭)은 우리나라에서 이름을 독차지하였다. 주위 몇 리(里)에까지 모두가 동백나무, 곧 화보(花譜)에 이른바 산다화(山茶花)이다. 눈 속의 푸른 잎이며 붉은 꽃이 화려하고, 동남에 큰 바다가 가로놓여 뛰어난 절경을 비길 데 없다. 우리 선조 이원공(李原公)이 일찍이 영남을 안찰(按察)할 때에 순회하다가 본 읍에 이르렀다. 문득 어느 날 공무를 마치고 나서 말을 타고 홀로 나갔다. 아전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감히 묻진 못하고 살며시 그 뒤를 밟아가 보니, 공은 벌써 동백정에 이르렀다. 나무 밑에서 시를 읊고 휘파람을 불면서, 흐뭇하여 돌아갈 줄도 모르고 있을 때, 한 늙은 사람이 술 한 그릇을 가지고 와 꿇어앉더니,
“이 늙은 것은 정자 옆에 사옵니다. 가만히 보건대 정각 위에서 한 손님이 머뭇거리시는데 대관이신 듯하기에, 감히 촌 막걸리를 가지고 와 드리나이다.”하였다. 부어라 하여 마시니 참 맛있는 술이었다. 공은 크게 기뻐하여 연달아 몇 잔을 들이켰다. 또, 고기잡이 두세 사람이 제각기 잡은 살아 있는 전복을 바쳤다. 이번엔 다시 한 백성이 노루 새끼를 안고 말을 달려 와서는,
“다행히 생육(生肉)을 얻었사온대, 마침 대인께서 여기에 계시기에 감히 드리나이다.”
하였다. 이리하여 서로 같이 줄로 앉아 차례로 술잔을 주고받고 하였다. 이때 연락이 있기를,
“아사(亞使)께서 행차하십니다.”하니, 이 말에 공이 벌떡 일어나 맞이하고 아사더러 말하기를,
“촌 늙은이의 대접에 시달리다 보니 이토록 취했구려.”하니, 아사는 말하기를,
“현감도 왔으나 감히 올라와 뵙지 못하고 있습니다.”하니, 공이 말하기를,
“어서 오라 하시오. 이 같은 들자리에서 무슨 예절을 번거로이 차리오.”
하였다. 현감이 들어오니 진수성찬이 나열되고, 풍악이 잇달아 밤이 깊도록 한껏 즐기다가 파하였다. 아까 술과 고기를 바친 늙은이는 모두 아사와 현감이 그렇게 시킨 것이었다. 공은 처음에는 본 현에서 음식을 차리는 폐단을 염려하고 몸을 빼어 혼자 돌아간 것이었는데, 마침내 술책에 빠지고 만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나이 많은 사람들은 재미있는 일이었다고 서로들 말하고 있다.
○ 윤기(尹耆) 선생은 많은 서적을 두루 읽었다. 나이 70여 세에 백발인데다가 허리는 꼬부라져서 등이 머리보다도 높았다. 임금이 일찍이 백관에게 정시(庭試)를 보일 때 나는 참시관(參試官)이었다. 선생은 종일 술만 마시고 글을 쓸 생각은 없는 것 같더니, 저녁때에 이르러 한번 붓을 휘둘러 글을 완성했는데 호방하고 건장하기는 젊은 소년과 같았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눈이 어둡고 손이 떨려 글자가 단정하지 못했고, 표(表)에서 또 몇 구가 빠져 마침내 합격하지 못하였다. 김상락(金上洛)이 선생에게 청하여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배우고자 하여 묻기를,
“책이 다만 한 권밖에 없으니 어떻게 가르침을 받겠습니까.”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영공은 들으시오.”하고는, 곧 10여 장을 외우는데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홍익성(洪益城)이 또한 맞이하여 물으니, 한 대목씩 모조리 외우는데 역시 한 자도 틀리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그를 평하여 말하기를,“사람의 총명이란 한계가 있는데, 《강목》한 질을 다 외워도 한 자도 틀리지 않는 사람이 있단 말이냐. 만약에 하늘이 낳은 재주가 아니면 응당 마(魔)가 있는 것 일게다.”하였다.
○ 봉상(奉常) 고태정(高台鼎)에게 김이란 친구가 있었는데, 집이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여창(鄭汝昌)과 담을 사이에 두고 살았다. 고 봉상이 김을 찾아가 문간에 이르러 하인을 불러,
“아무개가 왔다. 너의 주인께 빨리 나와 보시라고 여쭈어라.”하니, 머슴이 나와,
“주인어른께서 진지를 잡수시고 계시오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하자, 고 봉상은 큰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너의 주인도 사람이냐. 진지를 잡수신다고, 똥을 잡수신다 해라. 어째서 손님이 왔다는데도 나오지 않는단 말이냐.”하였다. 조금 있다가 한 늙은 어른이 안에서 허겁지겁 나오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하동부원군이었다. 고 봉상이 자기도 모르게 부끄럽고 황송하여 엎드려 사죄하기를,
“제가 친구의 집인 줄로만 알고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하였사오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하옵니다.”
하니, 이 말을 듣던 공은 웃으면서,“땅에 떨어지면 모두가 형제니 누군들 친구가 아니겠소.”
하고, 끌고 안으로 들어가 술자리를 베풀고 크게 마시니, 고는 술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도망쳐 달아났다.
○ 신 문충공(申文忠公)이 호남에 봉사하였을 때였다. 재주와 용모가 뛰어난 한 기생이 있었는데, 공이 정을 매우 쏟았었다. 이별에 임하여 기생더러 농담삼아,
“무엇을 나에게 주어 그것을 보면 그대를 생각하도록 하겠는가.”하니, 기생이 차고 있던 족대(足臺)를 끌러 바쳤다. 그 후 기생의 서신을 가지고 와서 공에게 바쳤는데, 서신 뒤에,
“한 쌍의 족대를 일찍이 차고 가셨기에 상을 들 때마다 그윽이 당신이 생각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공이 웃으며,“풍류 호걸이 어느 곳엔들 없으리오.”
하였다. 다음해에 다시 남주(南州)에 체찰사로 가보니, 기생은 이웃 고을 수령의 사랑을 받고 있었고, 그 수령은 또 공의 친구였다. 공이 기생한테 자기를 따르게 하여 웃고 이야기하는 것은 전과 같았지만, 다시 서로 가까이 하지는 않았으며, 그 수령을 도차사원(都差使員)으로 삼아 밤낮으로 서로 조용히 옛 이야기를 하였지만, 말이나 표정에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 도량에 탄복하였다.
○ 하동(河東)이 일찍이 말하기를,
“술은 노인의 젖이다. 곡식으로 만들었으니 마땅히 사람에게 유익할 것이다. 내 평생에 밥을 먹을 수 없었으니, 술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을는지.”
하였다. 서달성(徐達城)과 이상(二相) 이평중(李平仲)ㆍ이상 손칠휴(孫七休)도 또한 술로써 밥을 대신했다. 사람의 오장(五藏)이 강약이 다르고, 또 술도 술술 들어가는 곳이 따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사람은 필경엔 술한테 지게 되어, 술을 끊으려 하여도 끊지 못하고, 술기운이 없게 되면 다시 마시어 정신이 이미 안에서 사라진다.
청파극담(靑坡劇談).12
○ 재상(宰相) 조반(趙胖)에게는 고모가 있었는데, 원(元) 나라 탈탈 승상(脫脫 丞相)의 부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어렸을 때 고모를 따라서 탈탈 씨에게 가서 양육되었다. 탈탈이 패하자, 공은 사랑하던 미인과 소관(小官) 하나를 데리고 본국에 환란을 피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소관이 공에게 제안하기를,
“우리 세 사람이 화를 입지 않고 여기까지는 왔습니다만, 만일의 경우 의심을 하고 묻는 사람이 있게 되면, 그때는 도마 위의 고기라 하겠으며, 더구나 미인이 동행하니 더욱 사람이 눈을 놀라게 하는지라. 차라리 사랑을 베어서 살기를 도모함만 못할 것이옵니다.”
하여, 서로 의논을 하고 있었는데, 미인도 역시 영민(英敏)하였으니 이 말을 듣자,
“고기와 웅장(熊掌)을 겸하지 못할 바엔 나 때문에 다 같이 죽음을 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고,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작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서로 시가에 있는 누각에서 이별을 고했다. 공 등 두 사람이 말을 채찍질하여 길을 빨리 달려갔다. 한 6,70리쯤 가자 공은 미인을 슬프게 생각하여 촌보도 앞으로 걸어가질 못했다. 공의 생각으로는 도로 돌아가 미인을 찾아 다시 정회를 펴고자 함이었다. 그래서 소관이,
“모름지기 공이 가셔서는 안 됩니다. 제가 가서 공의 뜻을 전하고 돌아오겠습니다.”하니, 공은
“그래라.”
하고, 쾌히 승낙했다. 소관이 가서 미인이 누각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바로 목격하고는, 그 팔찌를 빼어 가지고 와서 공에게 말하기를,“아녀자란 이와 같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가 보니 바야흐로 두 말꾼과 같이 술상을 차려놓고 노래하다가 저를 보고도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더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요.”
하니, 공도 침을 뱉었다. 압록강을 건너와서야 누각에서 떨어지던 이야기를 빠짐없이 말하고 팔찌를 내어 드리니 공은 통곡하여 거의 기절하였다. 본국에 돌아와 아내를 얻어 아들 5, 6명을 낳았는데 모두 높은 지위에 올라 공훈 있는 재상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은 그 미인을 오히려 종신토록 생각하여 기일을 만나기만 하면 늘 눈물을 흘리며 제사지냈다 한다.
○ 우리나라에 그 전에는 무명이 없어 사대부(士大夫)들이 항상 명주를 입었었다. 고려 말에 재상(宰相) 문익점(文益漸)이 중국에 갔다가 씨를 얻어 가지고 와서 자기 집 뜰에 심어 목화를 따서, 씨를 버리고 실을 뽑는 법을 찾아 사용하였는데 호남과 영남에 가장 성했고 팔도에 심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 혜택을 힘입고 나라 씀씀이도 넉넉하였는데 문공의 공이었다. 국조(國朝)에서는 대대로 그 자손에게 녹을 주어 포상했다. 또 삼베는 우리나라 산물로서 여공(女工)들이 삼 껍질로 짜는 것이다. 거칠고 빛이 검은데다가 윤택이 없다. 국초에는 조관의 단령(團領 예복)을, 겨울이면 가는 명주로 하고 여름이면 삼베를 사용하였다. 세족(世族 대대로 녹을 먹는 집)들의 모임에 한 벼슬아치가 삼베 단령을 입고 왔었는데 유난히 광택이 났다. 부인에게 물으니 곧 말하기를,
“칼로 그 겉껍질을 벗겨내면 되지요. 그 길이가 어떤 것은 반 자쯤, 혹은 반 자도 못 되지만 그러나 매우 깨끗하고 희답니다. 이것을 가지고 베를 짠 것이랍니다.”
하였다. 어떤 부인이 병을 핑계하고 집에 돌아가 시험해 보았다. 그 말대로 무딘 칼로 그 껍질로 벗기고 짰는데, 이로 말미암아 검고 가는 삼베가 우리나라에서 항상 공물(貢物)로 바치게 되었고 그리고 사대부의 성대한 복식이 되었다.
○ 우리나라 제도에 당상관은 나사(羅紗)와 능단(綾緞)으로 속옷을 만들고, 단령은 그대로 국산 베를 사용했으니, 아마도 의금상경(衣錦尙絅 비단옷 위에 무명 덧옷을 입어 그 사치함을 가리는 것)의 뜻을 취한 것인가 보다. 세조가 등극함에 단자(段子)로 단령을 만들어 입는 것을 허락하여, 상복(常服)으로 하되 가슴과 등은 품계에 따라 구분했다는 기록이 《대전통편》에 실려 있으나, 오히려 입기를 싫어하여 다만 조회에 참석할 때만 입었다. 오늘날에도 예연(禮宴)이 아니면 입지 않는다. 내가 장령(掌令)으로 정월 초하룻날 연회에 참석하여 계단 위에 앉아 있은 적이 있는데, 왜인(倭人) 한 명이 재상이 입은 단자의 가슴과 등을 보고는,
“전에 중국 재상이 그 옷을 입은 것을 보았는데, 귀국의 재상도 입는군요.”하였다.
○ 고려 때에는 6품 이상이 금띠[金帶]를, 4품 이상이 무소뿔띠를, 2품 이상이 옥띠를 띠었지만, 국조에서는 4품 이상이 은띠를, 2품 이상이 금띠를 띠고, 1품만이 무소뿔띠를 띨 뿐이다. 그러나 중국에 가는 사신만은 옥서(玉犀)의 띠에 해당하는 사람도 금띠를 띠었다. 왕자 함녕군(諴寧郡)이 천자에게 조회할 때, 천자가 무소뿔띠를 하사하여 이로부터 왕자는 무소뿔띠를 사용하게 되었다. 세조는,
“임금의 자손이나 종친 할 것 없이 무소뿔띠를 띤 사람은 비록 사신이 온다 하더라도 띠를 바꾸지 말라.”
하였다. 그 후 청성(靑城)과 서릉(西陵)이 잇달아 천자에게 조회하여 모두 무소뿔띠를 하사 받았으나 그것을 띤 조관이 사신을 보게 되면 오히려 금띠로 바꾸었으니, 중국이 어찌 우리나라의 재상이 무소뿔 띠를 띠는 줄 모르고, 두 사람에게 하사하였겠는가. 나의 의견으로는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 공주의 남편 하성(河城)이 후에 다시 공을 세워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니, 부호하기로 당대에 으뜸이었다. 그 아우 하남(河南)과 같이 모두 술을 좋아하였고, 술이 거나하게 되면 반드시 말마다 문자를 썼다. 채기지(蔡耆之)가 그를 평하여,
“부원군께서는 재물과 보배는 충분한데도 쓸 곳을 모르시고, 학문은 부족한데도 도리어 잘 쓰실 줄 아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하니, 모여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고 명언(名言)이라 생각했다.
○ 내가 젊었을 때 제주도에 사는 가씨(加氏)란 사람을 본 일이 있다. 사족(士族)의 집에 드나들면서 치충(齒虫)을 잡아내는 데 효험이 있었다. 그 후 같은 제주도의 계집종 장덕(張德)은 가씨한테서 술법을 배웠다. 치통이나 코와 눈병이 있으면 수없이 벌레를 잡아냈는데 병도 조금씩 나았다. 대낮에 침으로 핏줄을 찔러 벌레를 잡아냈는데 병도 조금씩 나았다. 대낮에 침으로 핏줄을 찔러 벌레를 잡아내면 벌레는 꿈틀거리면서 며칠이 가도 죽지 않았다. 사람들이 삥 둘러서서 보았으나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일찍이 대궐에 들어가 이를 치료하여 효험이 있었는데, 혜민서(惠民署)의 여의(女醫)로 삼고, 나이 어린 여의 몇 사람으로 하여금 그 기술을 배우게 하였으나 끝내 전한 사람이 없었다. 다만 사사종에 옥매(玉梅)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집에서 심부름하곤 하더니, 장덕이 죽자 옥매가 그 기술을 모두 알아 또한 혜민서에 소속하게 되었다. 그 집이 우리집과 이웃이어서 그의 하는 짓을 보건대 정말 신기한 기술이다. 내 일찍이 중국에 봉사하였다가 침(針)을 삼키고 콧구멍으로 나오게 하는 일이라던가, 크고 작은 어린아이가 꾸짖음에 따라 스스로 뛰게 하는 자도 있었고, 비둘기를 키워 불을 사르고 구멍으로 날아가게 하는 등 재주를 피우는 사람이 있어서 모두 눈과 귀를 놀라게 하였다. 아마 그 유(類)일 것이다.
[출처] 청파극담(靑坡劇談).12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