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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등 등차, 품계(品階) 병조판서 추증
장암공(諱 信甲 15세) 장암공은 직장공의 오대손이며 모헌공의 장자로 휘는 신갑(信甲)이시다. 조선 명종 갑자년(1564)에 태어나, 임란 창의하여 왜적과 싸우다 34살 때인 정유년(1597) 재란(再亂) 때 산음(산청)의 환아정 깊은물에 투신 순절하셨다. 강직(剛直)한 용맹으로 소시에 의용으로서 소문이나, 천거되어 관직 시기는 미상(未詳)이며, 선전관(宣傳官)을 제수(除授) 받았고, 전보(轉補)되어 지방으로 나아가 행초계군수(종4품관)에 이르렀는데, 왜란으로 김해(금릉)에서 모헌공이 순절하시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치욕을 씻고자, 외가인 고성에서 의병장 외삼촌 최강(崔堈), 최균(崔均), 이종사촌 이달(李達), 숙부 죽계공과 함께 의병을 모집,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가 시작되기전 창원 웅천성 전투와, 이후 고성, 함안, 사천의 왜적방어에 나서 별장(別將)으로 활약 일당백의 용맹을 떨쳐 수차례 대공을 세웠다.
정유년(1597)에 왜군이 대대적으로 재차 침략을 해오자, 병속(兵屬)들에게 산음(현 山淸지방)의 황석산성은 영 ․ 호남 요충지로 굳게 지켜서 변란(變亂)을 막아야 한다며 당부하고 산음으로 전진, 부대(분대)의 전술을 취하기도 전에 엄청난 왜적을 만나 전투를 벌이게 되어, 끝까지 대항했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 힘은 다하고 화살도 떨어져 병속들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치욕을 씻고 아버지의 원수도 갚지 못하게 됨에, 차라리 자결이 굴복(屈服)당하는 것보다 낫다’ 하시며, 갑옷을 입고 칼을 짚고 환아정(換鵝亭) 깊은 연못에 투신 순절(殉節)하셨다.
함주지와 산서록에는 “당시 남도에 날쌘 효장 2인이 있었는데 鄭起龍과 安信甲이다.”라고 전하고 있으며, 또한 난이 끝난후 이사실이 조정과 임금에게 알려져 선조대왕은 장예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정3품관)로 추증(追贈)하고, 장군의 충효를 후세에 전하고자 어필(御筆)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치욕를 씻었으니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가문일 것이다’ 하시며 하교문(下敎文)과 정려(旌閭)를 내리셨다.
정려는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판교(板橋) 위에 있었으나, 철도때문에 현재의 장소로 병자년(1936)에 이건(移建) 중수하였으며, 정려 기문은 눌재(訥齋) 김병린께서 지었다.
선조 38년(1605) 4월 26일 도승지 신흠(경)에게, 왜란(倭亂)에 무공이나 공적이 있는 사대부와 천민(賤民)도 책훈(策勳)토록 하여, 그 공을 후세에 전하여 영광을 누리도록 하라는 왕명에 따라, 장암공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등에 등차되셨고, 품계(品階)도 병조판서에 추증되셨다(宣武原從功臣錄卷 敎書참고). 또한 2000년 9월 개관된 울산광역시 충의사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충절을 바친 장암공을 비롯한 선무원종공신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봉행한다.
배는 증정부인 고양전씨 춘령(春齡)의 女이고, 묘는 모헌공 묘소 아래 간좌 합부(合祔이며, 무후하여 동생 호군공으로 세계가 이어진다. 성재(性齋) 허전(許傳)께서 묘갈을 지었다.
司評金彥勖所送陣奇 |
將軍. 今月初二日定別將 崔岡 安信甲等十三人. 各率自募哨探一當百精銳騎兵. 或百餘人或五六十人. 秘密約束後. 自山陰縣. 先爲發送. 將軍則卽日稱病不出. 只與安典籍及彦勖終日對坐于換□亭房中. 苦待日沒. 是夜半. 將軍□而出. 不知去處. 從間道. 以單騎由小路□□宜寧鼎津. 宜寧諸將但見□□□陣兵儀而過也. 不知將軍出沒□一軍在前在後. 如鶻之飄忽雲中. 一軍□人亦不知將軍已能追到來在軍中也. 初三日. 早抵咸安十里許南山里. 占得 |
所謂崔㟠 安信甲. 乃安典籍所募人. 而一當百之絶士也. 爲此軍左右別將也. |
(前缺)也. 議者曰. 朝鮮二百年恭順之效. 于斯驗矣. 我朝救援屬國之恩典. 自開國已來. 又豈多見者哉. 書生于斯役也. 忝參經略幕府. 乃代經略而作露布焉. |
文曰. 伏以天討有罪. 聿興吊伐之師. 聖德好生. 不戮歸降之寇. 恩威竝至. 剿撫兼施. 箕國藉是瓦全. 邊陲從玆鞏固. 四夷仰服. 萬姓歡呼. 竊惟關白平秀吉者. 日本逆倭. 東南巨寇. 倚山海爲富. 挾諸島以稱強. 戕賊國主. 漸移源氏之宸祧. 茶毒朝鮮. 放犯天朝之屬國. 掠民財焚居室. 慘 ㅡ壬辰記錄 上
안신갑 장군 宣祖 55卷, 27年( 1594 甲午 / 명 만력(萬曆) 22年) 9月 24日 己亥 5번째기사 ○傳曰: “古人多收本土人才以爲用, 其意有在。 慶尙道, 如金太虛等表表之人, 則已爲將, 或爲守令, 多立功。 但前聞如禹拜善、安信甲者, 勇敢善戰, 命爲守令, 而以不能治民, 爲有司所劾去。 今未知在於何處, 不可棄也。 此人等, 或除某職, 隷於防禦使、節度使幕下, 領兵爲別將, 或用爲先鋒, 俾展其勇。 此外予所不知者, 何限? 悉搜訪收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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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신갑지려 명정(忠臣贈通政大夫掌隷院判決事通訓大夫行草溪郡守安信甲之閭命旌)〉이라 하였다. 안신갑공은 어려서부터 의혈남아로 소문이 높아 선전관으로 임명받아 초계군수를 지내셨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이신 안민(安愍) 감찰관(監察官 : 정6품)께서 김해의 입암강(立岩江)전투에서 왜군과 싸우시다 장렬히 사절(死節)하신 후 복수의 일념으로 지내오시던중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이 때에 공께서는 불리함 속에서도 황석산성(黃石山城)은 영호남의 요충지니 사수함이 마땅하다고 하시고는 말을 달려 나아가 왜군과 싸우시다 화살이 다하고 기운이 쇠진하여 산음(山陰 : 산청군)의 환아정(換鵝亭) 아래서 원통하게도 순절 하셨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명정(命旌)을 내리셨는데 현재의 정려각은 1937년에 건립된 것이며 정려각 옆에 애마(愛馬)와 갑옷, 투구를 묻었다고 한다. 김해군수를거쳐 대구도호부사 병마첨절제사를 역임한 안희(安憙)선생과 그의 형 안민(安愍), 조카 안신갑(安信甲), 삼현을 배향한 서원이며 순조 32년(1832)사림(士林)의 공의(共議)로 창건되었으나 1868년에 훼철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984년에 사당 없이 서당으로 중수하였는데 정면4칸, 측면2칸의 목조와가 팔작지붕이다. 대문 앞에는 무신난에 공이 있어 세위진 〈유학 안공 성흥 혜휼군졸비(幼學 安公 聖興 惠恤軍卒碑)〉비는 원래 함안읍에 있던 것을 6.25이후에 후손들이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고한다. 우배선과 관련된 실록의 기록 경상도의 김태허(金太虛) 등과 같이 뛰어난 사람들은 이미 장수가 되고 혹은 수령이 되어 공을 많이 세웠다. 다만 전에 들으니 우배선(禹拜善)과 안신갑(安信甲) 같은 자는 용감하게 선전(善戰)하였으므로 명하여 수령을 삼았는데 백성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유사(有司)가 탄핵하여 내쳤다.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버려서는 안 된다. 이 사람들에게 혹 관직(官職)을 제수하여 방어사나 절도사의 막하에 예속시켜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별장(別將)을 삼거나 혹은 선봉을 삼아서 그 용감함을 펴게 하라. 이 외에 내가 알지 못하는 자가 어찌 한이 있겠는가. 모두 수소문하여 등용하라."《선조실록 055 27/09/24(기해)》 함안지〉인물
여지도서 慶尙道 咸安
안황(安璜) 선조24년(1591)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정5품)을 제수받아 다음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신갑, 이숙과 더불어 김해에서 적을 무찌르고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여 칠원과 영산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싸우기도 했다. 명나라 이여송군이 남진하여 옴에 따라 산청과 함양을 탈환하고 그의 형 안구(安球)와 더불어 덕유산에서도 공을 세웠다.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모든 것을 버리고 독서와 산천의 경치를 탐하여 오직 후학육성에 힘을 기우려 만년을 지냇다. 丁酉再訌公以黃石山城足爲固守應變之處前向山陰部分未定値賊猝至弓矢且盡殉節於山清換鵝亭下 宣祖朝命旌致祭文曰復父讐雪▣耻求忠臣必於孝子之門事見咸州誌山西錄及崔蘇湖均崔蘇溪坰實記興勝覧立閭于 咸安茅谷板橋上從曾孫達興重修揭板贈掌隸院判决事追贈兵判 ○純祖壬辰享咸安杜陵祠江皐柳尋春撰行狀及常享文配贈貞夫人高陽全氏父春齡 ○墓考兆下艮坐有碣床石從曾孫聖興撰遺事性齋許傳撰墓碣陰記見總錄配墓公兆右麓艮坐有床石 ○歲祀上同
贈通政大夫掌隷院判決事安公行錄
公,諱信甲字某,文成公晦軒先生十二代孫也, 安氏,自文成以後,冠冤文行,世世相承,爲東方望族,考諱慜,官監察,妣全州崔氏,贈判書雲喆女,以嘉靖甲子,生公於茅,谷,舊第公,以忠賢 後裔,剛勇素著,薦授南宣傳,行草溪郡守,歲壬辰夏,倭寇猝至,先犯金海府,時監察公,方有事于府之甘露寺,公蒼黃奔往,直抵其寺,聞監察公,率緇徒赴,府城,到立石江上,爲賊所圍,憤罵以死,已有日矣,公,奔向立石,道上有立木書之曰,朝鮮忠臣安某死此,以戶牌,懸木,以布帒,掩屍,埋其側,公憤賊手所過,解其帒,而收牌深藏, 負屍以歸,祔葬于八谷先隴,公志雪國恥復父讎,出家僮,募義士橫行賊陣椎鋒忘死,每擒賊賊,則剮其體,剖其頭,以售嘗膽之志,復讎一念, 未嘗須臾忘也,丁酉倭再猘,公謂黃石山城爲湖嶺要路,欲爲固守,應變之計,前向山陰縣,部分未定,値倭大至,賊勢鴟張,我之弓矢且盡,公知事無可爲,顧謂幕屬曰,雪恥報讎,是吾日夜腐心者,而志願未伸,事乃大謬,天也柰何寧自決之爲快耳,因被甲杖劒,而自投於換鵝亭下深潭,嗚呼,烈哉,公,弟護軍公返葬于監察公墓下,朝廷褒公之忠,命旌表其門,贈通政大夫掌隷院判決事,自上有求忠臣,必於孝子之門之敎,咸州誌曰,人稱公膽大於身,遮截 東南,一方賴之,中興誌曰,態川戰,崔堈,進兵攻之,李達,安信甲,爲左,右翼,以應之,山西錄曰,當時驍將有二人焉,一則安信甲,一則鄭起龍,觀此可以知公忠孝膽略之槩矣,太史氏必大書, 又何庸贅也,公無嗣,以護軍公之后,世修其祀事云, 강고선생문집 (江皐先生文集) 江皐先生文集卷之十九 류심춘 (柳尋春)
贈掌隷院判决事壯菴安公墓碣 壬辰殉節司憲監察茅軒安公諱慜。有子曰信甲。生於嘉靖甲子。剛勇素著。薦授宣傳官。轉至草溪郡守。島夷之亂。聞監察公死節於金海立石江。奔往甘露寺問儈徒。直向江上。有立木書曰朝鮮忠臣安某死此。又有角牌懸其上。以布帒掩其屍埋其側。公痛憤其賊手所爲。解其帒而收牌。負屍以歸。葬于八谷先壠。乃誓復父讐。出家僮募義士。每推鋒先登。擒賊則碎腦以飮。丁酉倭再入冦。公謂黃石山城嶺湖要衝。爲固守應變之計。前向山陰。部分未定。値倭大至。力盡矢竆。公知事無可爲。謂其屬曰雪恥報讐。是吾日夜腐心者。而志願未伸。天也奈何。寧自决之爲快。遂被甲杖釰。自投於換鵞亭之深潭。事聞命旌表其門。贈掌隷院判决事。仍下敎曰復父之讐。雪國之恥。求忠臣必於孝子之門。咸州誌曰公膽大于身。遮截東南。一方賴之。山西錄云當時驍將二人。一則安信甲。一則鄭起龍。嗚呼壯哉。壯菴之號。可見平日自詡之義乎。噫。臨難奮義。見危授命者。世未嘗無人。而至若忠孝雙全。仁義幷行。如公父子之烈烈炳炳者。求之古今。又豈多有乎哉。柳江臯尋春狀公父子之行甚詳。余何敢贅焉。墓在監察公墓下。世系俱載於監察公陰記。 한국문집총간 > 성재집(性齋集) > 性齋先生文集卷之二十一 > 墓碣銘 > 性齋先生文集卷之二十一 墓碣銘 性齋 許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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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 子美 (자미)[1]▼
2 세 永儒 (영유)[1]▼
3 세 孚 (부)[1]▼
4 세 珦 (향)[1]▼
5 세 于器 (우기)[1]▼
6 세 牧 (목)[1]▼
7 세 元崇 (원숭)[1]▼
8 세 瑗 (원)[1]▼
9 세 從約 (종약)[1]▼
10 세 琇 (수)[3]▼
11 세 昌恭 (창공)[1]▼
12 세 ㅁ우 (ㅁ우)[1]▼
13 세 公軫 (공진)[2]▼
14 세 愍 (민)[1]▼
15 세 信甲 (신갑)[1]▼
15 세 明甲 (명갑)[2]▼
직장공파(直長公派)
8世 안원(安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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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世 안종약(安從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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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世 안수(安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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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世 안창공(安昌恭)ㅡㅡㅡ안창렴(安昌廉)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안창직(安昌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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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世 안우(安 ) 안환(安環)---ㅡㅡㅡ안염(安琰)---ㅡㅡㅡㅡㅡㅡㅡ안종(安
) 안필(安王筆)ㅡㅡㅡㅡㅡㅡㅡㅡㅡ안순(安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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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世 안공진(安公軫) 안공의(安公義) 안경지(安敬之)안처순(安處順) 안흥종(安興琮) 안처관(安處寬)안처홍(安處弘) 안처충(安處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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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世 안민(安愍)안희(安熹) 안희정(安希禎) 안의(安義) 안옥선(安玉先) 안헌(安憲) 안식(安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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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世안명갑(安明甲)안신갑(安信甲)안상문(安尙文) 안언수(安彦秀) 안흥복(安興福) 안범(安範) 안의방(安義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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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世안명갑(安明甲) 안중란(安重 )---안중신(安重信)
안신갑(安信甲) ㅣ ㅣ
17世 안서용(安瑞龍) 안성용(安成龍)ㅡㅡㅡ안호문(安好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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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世 안여웅(安如雄) 안여반(安如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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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世 안홍제(安弘濟)-안홍적(安弘迪) 안홍조(安弘祚)-안홍상(安弘祥)
안원(安瑗)ㅡㅡ>안종약(安從約)ㅡㅡ>안수(安琇)ㅡㅡ>안창공(安昌恭),안창렴(安昌廉),안창직(安昌直)
충순위병절교위,충순위(忠順衛)감찰,부솔(副率)
長子 교위공 분파도
첫댓글 직계도
안신갑:1564년-정유9월22일졸
부친이신 안민(安愍)을安慜으로 정정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