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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담스님의 돈점 법문
이글은 돈오점수설과 돈오돈수설에 대한 송담 큰스님의 법문입니다. 1990년 10월31일 순천 송광사에서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설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가 열리려고 할 때 한국의 언론들은 대서특필로 이를 보도했습니다. 바로 이때에 송담 큰스님께서도 인천 용화사에서 이 돈점 문제를 가지고 설법을 하셨습니다. 큰스님의 돈점법문은 돈오점수라는 문제를 불교인들이 어떻게 소화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했습니다. [미주현대불교]지는 독자들을 위해 지난달 1991년 5월호에 실은 [전강 스님의 돈접법문]에 이어 이번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송담 큰스님의 녹음 테이프를 글로 옮겨 싣습니다. 송담 스님은 전강 스님의 법을 이어 현재 인천 용화사의 조실로 계시면서 매월 한 번씩 대중법문을 하십니다. 법회때는 수 천명의 청중이 경향 각지에서 운집하며 스님의 법문은 녹음 테이프로 전세계에 유포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욕득불초 무간업인댄 (欲得不招 無間業)
막방여래 정법륜(莫謗如來正法輪)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목탁 소리에 맞춰 대중이 일제히 [나무아미타불]을 압창한다.)
정야장천 일월고( 靜夜長天 一月孤) 하니
지음자유 송풍화(知音自有松風和)로구나.
나무아미타불. (목탁 소리....대중합창)
욕득불초 무간업(欲得不招 無間業)....무간 지옥에 떨어질 죄업을 부르고자 하지 않거든,
막방여래 정법륜(莫謗如來正法輪) 여래의 정법륜을 비방하지 말아라.
정야장천 일월고( 靜夜長天 一月孤)...고요한 밤 긴 하늘에 한 달이 외로이 밝았는데,
지음자유 송풍화(知音自有松風和)....지음은 스스로 솔 바람이 있어 화답하는구나.
요새 전라도 순천 송광사에서 동서양의 세계적인 불고 석학들이 모여서 [돈오점수의 바른 뜻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갑론을박하며 상당히 열기를 가지고 논란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불교신문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불교의 목적이 확철대오해서 생사해탈하는 데에 있으니, 확철대오를 의미하는 돈오의 문제와 확철대오한 뒤에 보림한다고 하는 점수의 문제를 가지고 학자들이 모여 학술회의를 한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수행자가 확철대오했다면 그것으로써 더 이상 더 닦을 것이 없어야 진정한 확철대오일 것이요, 확철대오한 뒤에도 점점 더 닦아갈 것이 있다면 어찌 그것이 참다운 확철대오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참선하는 사람들이 확철대오를 얻기 위해서 큰 애를 씁니다. 수행자의 고행정진이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는데에 있다면 참다운 깨달음을 얻어야지 바르지 못한 깨달음을 깨달음으로 착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세계적인 학자들이 모여 국제적인 학술대회를 갖는 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 이러한 논란이 일어난 것은 한국의 어느 큰 스님이 돈오점수에 대한 책을 출판했기 때문입니다. 그 책이 출판되 뒤로 십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그 책은 불교계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세계적인 학자들이 모여 이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학술회의까지 갖게 되었으니 참으로 좋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실 스님께서 제창하시는 최상승법인 활구선(活句禪)에 의지해서 수행하는 법보제자들은 이러한 [돈오점수 논란]에 대해서 어떠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절대로 덩달아 갈팡질팡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조실 스님의 최상승 활수참선법에 의지하여 확신을 가지고 도를 닦아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갑인년 (1974)에 마침 조실 스님 (전강 스님)께서 돈오점수에 대해서 설하신 바가 있어서 우리는 방금 녹음 법문을 통해서 다 같이 이를 경청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참선의 세계에서 [무엇이 돈오이고, 무엇이 점수인가] 하는 것은 실지로 참선을 하지 아니한 사람은 모르는 것입니다. 참선도 안하면서 입으로만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백날 모여서 토론을 해봤자 이것은 구두선(口頭禪)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수행을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어떻게 깨달아야 바른 깨달음이고, 닦아야 바른 닦음 인가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조실 스님은 법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되 의리선(義理禪) 같은 사구선(死句禪)에 의지하지 말고 다만 활구선에 의지해야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신념에 의지 해서 우리는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신문지상에 그런 논란이 보도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것에 조금도 마음이 흔들릴 까닭은 없겠습니다.
중국의 천목산, 고봉선사의 수법제자인 중봉선사께서 [깨달은 뒤에 닦아갈 것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문제에 대해서 설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설하신 것이 있습니다. 오는 이 자리에서 그것을 몇 말씀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마음 밖에 법이 없고, 법 밖에 마음이 없다. 마음에 털끝만큼이라도 과거로부터 쌓여 내려온 정습이 남아 있다면, 곹 이것은 깨달음이 원만치 못해서 그런 것이다. 그럴 때는 별일생애의 정신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자기의 정습이 다하지 못하고, 또 그 안에 사로잡히는 바가 있다면, 이것은 자기의 깨달음이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체중현의 도리에 집착하여 공의 이치를 다 알았다하고, 모든 공안을 보면 막힌 바가 없이 다 알 것 같고, 화엄경이고 법화경을 읽어보면 환히 자기 나름대로 다 알고, 그러니까 자기도 깨달았다고 착각을 하고서, 이제 나는 보림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병에 걸린 사람이 적지 않은데, 공안에 막히거나 정습이 다하지 못했으면 자기의 깨달음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스스로 결판을 내고 별일생애 즉 초학자와 같은 백지 상태로 다시 돌아가서 거기다가 생명을 걸고 용맹정진을 해서 기어코 확철대오를 하도록 공부를 해야 한다]고 중봉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은 뒤에는 닦을 것이 없느냐?] 중봉스님도 이렇게 자문을 하고서 스스로 대답하시기를 [미리 깨달아 보기도 전에 깨달은 뒤에 닦을 것이 있느냐 없느냐 미리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느냐? 통 밑구멍이 풍 빠진 그러한 경지가 올때까지 다시 말하면 확철대오할 때까지 가행정진하고 용맹정진하며 깨달은 뒤에 닦을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깨닫기도 전에 깨달은 뒤에 닦을 것이 있느니 없는니, 돈오하고 점수할 것이 있느니 없느니, 이런한 것을 가지고 논란을 하는 것은 정법륜을 비방해서 무간업을 자초하는 것 밖에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정말 조사의 깨달음과 같이 깨닫지를 못했으면서 조그마한 자기 나름대로 공의 이치에 불과한 체중현 도리 같은 것을 가지고 [자기도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견해에 집착하여 막행막식하고 그래 가지고 누구든지 자기와 비슷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만나면 쉽게 옳다고 인가를 해주고 이래서 자기도 망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불법까지도 망하게 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왕 깨달으면 돈오돈수를 해야 합니다. 돈수라는 것은 닦을 것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다 닦아 버렸다. 확철대오함과 동시에 다 닦아 마쳐 버렸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나 조사들 가운데는 돈오돈수한 그러한 참 조사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은 다 전생에 무량겁을 두고 닦아서 원만성취한 분들입니다. 단지 몸만 바꿔 났으니 더 간단하게 언하에 대오하여 버리고 닦을 것 조차 없이 다 돈오돈수가 된 그런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을 하기 시작하여 확철대오 할 때까지 많은 세월이 걸려서 깨닫는 이가 있는가 하면 출가하여 얼마 안가서 그냥 언하에 확철대오한 분도 있습니다. 그러니 전생의 일은 알 수 없으나 다행히 금생에 불법을 만났고 정법을 만났으니 그 바른 법에 의해서 목숨을 바쳐서 열심히 도를 닦을지 언정 빨리 깨닫고 더디 깨닫고 한 것을 미리서 부터 따질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바른 법에 의지할 것이고, 그리고 있는 정력을 다해서 전력투구를 하는 것 뿐입니다. 일년만에 깨닫든지, 삼년만에 깨닫든지 마지막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든지, 그래도 바른 법에 의지해서 전력투구를 한 사람은 아무 후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 숨질 때까지도 [이 뭐꼬?] 의단이 독로한 상태에서 숨을 딱 거둔다면, 그 사람은 금방 몸을 바꿔 나 가지고 도 불법을 일찍 만나서 정법을 만나 또 닦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생에 얼마만큼 타상일편이 되도록 공부를 잡두리 했느냐에 따라서 그 다음 생애에 좀 일찍 깨닫기도 하고 더디 깨닫기도 할 것입니다. 달마 스님의 혈맥론이나 관심론에 보면 오직 깨닫는 것만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른 깨달음을 얻는 사람은 닦을 것 있고 없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수투 조사관參禪須透 祖師關이요,
학도요궁 심로단學道要窮 心路斷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목탁 소리...대중합창)
심로단시 전체현心路斷時 全體現하니
여인음수 지냉난如人飮水 知冷暖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목탁 소리....대중합창)
참선수투 조사과參禪須透 祖師關....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을 뚫어야 하며
학도요궁 심로단學道要窮 心路斷....도를 닦아 가는데는 마음 길이 끊어져야 한다.
심로단시 전체현心路斷時 全體現.....마음 길이 끊어질 때 전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니
여인음수 지냉난如人飮水 知冷暖....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겁고 더운 것은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
정말로 바르게 도를 닦고자 한다면 의단이 독로하고 타성일편이 되어서 그 공안의 의단을 타파해야 합니다.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겁고 더운 것은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물이 얼마나 차고 더운 가를 먹어 보지도 않고 남에게 물어 보았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깨달아 보지도 않고서 깨달음이 무엇인가는 정말 알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돈오점수냐?] 또는 [돈오돈수냐?] 하는 것을 백만년을 두고 패를 갈라서 토론을 하고 따져 본들 그 서을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깨달음으로 부터 멀어져 갈 뿐, 바른 길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물론 불교의 학자들은 어디까지나 학술적으로 경전을 연구하고 조사의 어록도 학자로서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하는 것이 학자로서 본업에 맞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법보제자들은 이론적으로 따지는 그러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 조실 스님이나 산승이 항상 바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학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활구선개답게 사는 것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으로서 정법을 믿고, 용맹스럽게 정진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그런 이론적이 연구나 분석적인 비교 연구가 시급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보다는 바로 화두 공안에 입각해서 활구참선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진실로 일분 참선하면 일분성불이니 참선만이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요, 마음길이 끊어져야만 그것이 바른 수행이고 조사관을 타파해야만 생사를 해탈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생사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삼세 육추의 가지가지 생각으로 인해서 몸으로, 입으로, 뜻으로, 온갖 업을 지어서 거기서 생사윤회를 하기 때문에 생사 문제를 끊으려면 마음으로 부터 일어나는 신구의 삼업을 단속해야 합니다. 덮어놓고 끊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화두를 들어 의단이 독로하여 타성일편이 되면 확철대오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보조 스님의 말이 옳으냐, 그르냐]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권군수립 장부지(勸君須立丈夫志) 하고
안리막착 황금설(眼裏莫着黃金屑)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목탁소리....대중합창)
인생수시 구장생(人生誰時 久長生)고
가련부명 제호흡(可憐浮命 諸呼吸)이니라. 나무아미타불.(목탁 소리....대중합창)
권군수립 장부지...여러분께 권고하노니 모름지기 장부의 뜻을 세워
안리막착 황금설....눈 속에 황금가루를 넣지 말아라.
인생수지 구장생 ....인생이 누가 죽지 않고 천만년을 살리요.
가련부명 재호흡....가련하다! 이 뜬 목슴이 호흡지간에 있구나.
장부의 뜻이 무엇입나까? 나도 부처님처럼 역대 조사처럼, 결정코 확철대오 할 수 있다. 원래 우리 자신도 부처님이었고 현재도 우리 안에는 비로자나 법신불이 주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닦아간다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남자거나 여자거나, 학식이 있거나, 없거나, 빈부귀천도 따질 것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도 따질 것이 없고, 나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만 철석같이 믿고 바른 법에 의해서 도를 닦아 간 사람이면 그 사람은 갑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대장부의 뜻을 확고하게 세워서 눈속에 황금가루를 넣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 황금가루입니까? 황금이라 하면 이 세상에서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이 다 할 수 있다고 모두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황금가루는 보물이요, 보물중에서도 값진 칠보 가운데 하나에 들어 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황금 덩어리를 벌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하고 일편생을 물불을 가리지 않고 페침망찬하고 모든 고생을 다 합니다. 그러나 황금가루가 아무리 칠보라 할지라도 그것을 눈에다 집어넣어는 안됩니다.
우리 도학자에 있어서 황금가루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부처님의 경전에 있는 말씀 조사어록에 있는 말씀, 3년, 5년, 또는 10년을 닦아서 자기 나름대로 반디불만한 소견난 거들이 모두 황금가루입니다. 제 아무리 애를 써서 자기나름대로 어떤 소견이 낫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조의 경지가 아니면 여지없이 버려야 합니다. 만에 하더라도 그런 것을 가지고서 얻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황금가루를 눈에다 집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여지없이 버려야 합니다. 그런 것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자기 살림살이로 삼고 있으면 더 이상 공부가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니 항상 놓아버리고 항상 백지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아까 중봉 스님이 말씀 하신 별일생애입니다.
인생수시 구장생고? 인생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이 누가 죽지 않고 천년 만년 사는 사람이 있더냐 그 말입니다. 가련부명 재호흡이다. 가련하나, 이 뜬 목숨이 호흡지간에 있구나! 뉴스에 날이면 날마다 이래 죽고 저래 죽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까? 60년, 70년, 80년을 살다가 가도 죽을 때 섭섭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이제 겨우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좀 살아보려고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고 이래 죽고 저래 죽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지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강도, 절도, 유괴범, 요새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학생, 청소년, 불량배들, 이들에 의하여 거침없이 사람 목숨이 죽어갑니다. 전화 걸다 죽고, 전화 기다리다 죽고...몽산법어에 보면 죽을 사자를 이마에 써붙이고 참선을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지금은 일부러 써붙일 것도 없고 관을 짜서 짊어지고 다녀야 할 판입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니 관을 짜가지고 다녀야 그 자리에서 담을 수 있게 생겼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 세상은 허망한 것인데 나날이 이렇게 사람의 목숨이 하루살이만도 못하게 된 것이 여실히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 모이신 사부대중은 정말 생사가 호흡지간에 있다는 것을 믿고 정진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도 제자들과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생사가 어디에 있느냐? 각자 자기 나름대로 일러보아라.} 한 제자는 말했습니다. { 생사는 하루 동안에도 있습니다. 오늘 하루 언제 죽을는지 모릅니다. } {너는 공부하기가 어렵겠구나.} 부처님이 한탄하셨습니다. 그 다음 제자는 말했습니다. {생사는 일향지간에 있습니다. 한끼 밥 먹는 사이에도 있습니다. } { 너도 공부하기 틀렸다.} 부처님은 역시 인정하시지 않았습니다. 또 한 제자가 말했습니다. {생사는 호흡지간에 있습니다. 숨 한번 내쉬었다가 들이마시지 못하면 바로 내 생입니다.} 마침내 부처님께서는 칭찬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생사가 호흡지간에 있다면 관을 짜가지고 다닌다 해도 해결될 일도 아니고 자가용 승용차에다 관을 넣고 관 속에 누워서 차를 타고 다닌다 해도 생사 문제가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과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항상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이 뭐꼬? 화두만 챙기고 또 챙기고 해서 화두를 들지 않아도 의단이 독로하도록 해야 합니다. 마침내 화두가 타성일편이 되도록 잡두리를 한다면, 생사 곳에서 생사에 즉해서 의단이 독고한다면, 죽은들 무엇이 무섭습니까? 사고가 나서 죽건, 병이 나서 죽건, 명이 다해서 죽건, 그까짓 죽음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정거장에 죽거나, 차를 타고 가다고 죽거나, 길에서 죽거나, 자기 집에서 죽거나, 어디서 죽은들 그 까짓 놈의 것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언제 죽어도 한번은 죽을건데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활구참선에 입각해서 항상 의단이 독고하도록 잡두리를 해간다면 장장 지금부터 죽음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화두를 들지 아니 하고 정진을 아니 한 사람은 아무리 보약을 먹고, 영양있는 것을 먹고, 관을 짜가지고 짊어지고 다녀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보약 먹는다고 안죽습니까? 교통사고 난다고 차를 안타고 집에만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집에 있는다고 안죽습니까? 평지낙상하여 죽기도 하고 밥한 숟가락 잘못 먹거나 떡 한 조각 잘못 먹어서 체해서 죽기도 하고 저녁 잘 먹고 그러고 죽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죽는다 해봤자 몸둥이 그놈, 지수화풍사대로 뭉쳐진 것이 가는 것이나까. 그런 것에 정신 팔리지말고 오직 심심 하나로 살아야합니다. 정법을 믿고 정법에 의지해서 도룰 닦는다면 이것이 생사속에서 생사 없는 영원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렇게 닦아가는 사람은 언제가는 확철대오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원래 생사는 없는 것으로 우리는 믿고 살고 있는데 이와 같이 정법을 믿는 사람에게는 생사 속에서 영원을 살아가기 때문에 사실은 말이 필요없는 것입니다.
요새는 더위도 갔고 아직 추위도 오는 않았으니 참으로 공부하기 좋은 때입니다. 옛날에 학문하는 사람들은 등화가친, 등불을 가까이 할 때 독서하기 좋은 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펴봤자 한 글자도 없는 경을 읽는 것, 즉 알 수가 없는 의단이 독로하도록만 잡두리 한다면, 걸어가면서도 이 뭐꼬? 차를 타면서도 이 뭐꼬? 세수하고 양치질하면서도 이 뭐꼬? 누어서도 이 뭐꼬? 앉아서도 이 뭐꼬? 해 갈수록 무엇이 환히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의단이 독로하도록만 잡두리하는 것입니다. 인간에는 생로병사가 있고 세상에는 흥망성쇠가 있고 이지구도 앞으로 1백 만 년 후엔 없어진다고 그러지요? 아무튼 지구도 틀림없이 없어집니다. 이 세상에 생겨난 것은 모두 결국엔 언젠가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니까 우주, 이 세계, 우리의 몸둥이, 죄다 결국엔 없어지는 건데, 그 없어지는 것을 붙잡고 늘어져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없어질 줄 알았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영원을 사는 길을 발견했다면, 그 길에 벗어부치고 대든다면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내가 금생에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확실히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그것이 궁금해서 나한테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을 듣기를 원합니다. 내가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깨달을 수 없다면 공연히 아까운 인생만 허송세월할 것이고 그러나 깨달을 수 있다면 내가 마음놓고 공부를 할 수 있겠다고 확실한 답변을 재촉합니다. 하, 그, 대단히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뭐라고 대답하느냐 하면, [깨달을 수는 있는데 앞으로 3년 후에 깨달을지 10년 후에 깨달을지 30년 후에 깨달을지 마지막 숨 닥 질때 깨달을지 그것은 내가 알 수 없으나 언제 깨달을 것인가 하는 것은 본인이 첫째, 과거에 어떻게 닦아왔는냐, 그것도 무시 할 수가 없을 것이고 또 금생에 얼마만큼 바른 법에 의해서 전력투구하느냐, 금생에 얼마마큼 여법하게 닦는냐, 그것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깨달을 것인가 자꾸 미리부터 그것에 신경을 쓰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것 따질 시간이라도 화두를 들어야 그만큼 시간은 단축된다 이 말입니다.
올올무사 대청산(兀兀無事 對靑山 )하니
안고사해 천마공(眼高四海 天魔拱)이나라. 나무아미타불. (목탁 소리....대중합창)
세간시비 도불관 (世間是非都不關)하고
일여청유 소명월(日與淸流 掃明月)이니라. 나무아미타불. (목탁 소리....대중합창)
올올무사 대청산....오뚝이 일없이 청산을 대하니
안고사해 천마공......우리의 눈은 사해에 높아서 하늘나라에서 온 마군이도 팔짱을 끼고 물러가 버린다.
세간시비 도불관......세간의 시비곡절 다 불관해버리고
일여청류 소명월......날마다 청청한 도반들과 더불어 명월을 쓸자.
정법을 믿고 활구참선을 해나가는 것을 올올무사 대청산이라 합니다. 활구참선만 해나가면 이 세상에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으며 이 세상에 무엇이 부러울것이 있으며 이 세상에서 무슨 미련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장부의 기개를 가지고 나아가 정법을 닦아간 사람에게는 모든 천마 외도가 손을 비비고 뒤로 물러설 수 밖에는 없습니다. 사해는 천상천하입니다. 그러므로 활구참선을 하여우리의 눈이 사해에 높으면 하늘나라에서 온 마군이들까지도 팔짱을 끼고 물러서게 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을 하는 사람은 세간에 무엇이 옳고 그르다, 니가 옳고 내가 옳다, 흥망성쇠와 시비곡절을 다 불관해 버리고, 날마다 청정한 도반들과 더불어 함께 공부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도반입니다. 부처님도 선배 도반이고 조사도 우리의 선배 도반이고 모든 불교 성인들도 다 과거에 깨닫기 이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범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우리보다 먼저 깨달은 도반들입니다. 이들과 함께 밝은 달을 쓸자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진여불성은 밝은 달입니다. 구름이 꺼어서 어둡게 보일지언정 달 자체는 구름이 끼일 때나 안끼일 때나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자성불, 진여불성은 우리들이 깨닫지 못하고 미해 범부로 있을 때나 중생으로 육도를 윤회하고 있을 때나 언제나 부처남의 경계인 것입니다. 그것은 잠시 깜박 미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밝은 달을 쓸어봤자 무엇이 더 밝아 질 것도 없고 안쓴다고 해서 더 어두울 것도 없고 달 자체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불조와 더불어 모두 다 동창생입니다. 넓은 의미의 도반입니다. 선후배 도반들입니다. 바른 도반을 의지해야 우리는 게으름을 부릴래야 부릴 수가 없고, 사견에 떨어질래야 떨어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법단에 이렇게 불상을 모신 것도 그런 의미에서 불상을 모신것입니다. 또 결제를 해서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정진을 하는 것도 도반을 가까이 해서 도반과 더불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또 넓은 의미에서 보면 가정에서, 직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 일생동안에 만났다 헤어졌다 하는 모든 사람들, 내 마음에 든 사람, 안 든사람, 미운 사람, 이쁜 사람들이 전부 다 우리의 도반들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불보살의 화현이거든요. 이렇게 믿고 항상 이렇게 자기 눈에 비추어보면 그 사람이야말고 정말로 발심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발심한 사람에게는 이 사바세계가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훌륭하게 도를 성취할 수 있는 좋은 도량이 될 것입니다. 딱 딱 딱 (목탁소리와 함께 큰 스님의 설법이 끝납니다.)
199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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