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구축된 구태환의 연출미학, 그리고 배우 이기돈의 발견. 어제 연극계 장년들과 명동예술극장에서 본 이용찬 희곡의 <가족>은 가족의 의미를 현대에 되살린 웰메이드 가족극으로, 배우들의 정제된 연기로 극적 재미와 언어의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라디오 드라마 작가로 유명했던 이용찬은 환도 후인 1957년 국립극장의 첫 장막희곡 공모전에 이 작품을 내 당선됐다. 이듬해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된 후 59년만에 같은 장소에서 공연된 것이다. 해방 시기부터 6.25전쟁까지 한국 현대사의 질곡에서 한 가족이 겪는 변화와 갈등을 플래시백 기법으로 그려낸 이 작품의 장점은 구성도 극적이지만 무엇보다 언어의 정갈성에 있다.
당시 중산층의 언어체계가 지금처럼 난삽하지 않고 품위 있게 드러나있다. 그래도 60년이 된 희곡은 박제되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를 <심판>, <고곤의 선물>로 역량을 인정 받은 구태환 연출이 마치 헌 집을 개축하여 새집처럼 만들
어내듯 깔끔하게 오늘에 구축해 냈다. <가족>은 '아버지와 아들'에 초첨이 맞춰져 있다. 가부장적 권위의 아버지의 엄함에 늘 주늑이 들었던 큰아들은 아버지가 고리대금업자에게 자존심마저 짓밟히자 업자를 계단에서 밀어낸다는 줄거리다. 2시간이 넘는 장막 희곡은 거의 대사로 차있는데 이를 큰아들 종달 역 이기돈과 아버지 박기철 역 김정호가 환상의 호흡을 이뤄냈다.
이기돈은 얼마전 7시간 장막극 <카라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스메르자코프 역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이번 작품에서 폭풍 연기로 배우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작은 체구에도 화술이 좋아 대사가 잘 전달됐고 복잡한 내면 연기도 잘 표출해냈다. 김정호도 지난해 국립 무대에서 크고 작은 역할들을 해온 베테랑으로 이번 무대에서 권위와 고뇌를 함께 지닌 가장 역할을 엣지있게 소화해냈다.
어머니 역의 박현미,형사 역 박완규, 최연희 역 우정원 등 모든 출연진의 연기가 고른 점도 <가족>의 매력이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축음기나 전화기 등 소품은 복고풍인데 배우들, 특히 여배우들의 의상이나 헤어스타일은 현대화되어 있어(그 의도는 이해하지만) 당시를 살았던 장년 관객들에게 실감이 덜 했다는 것이다.
국립극단의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는 한국을 대표하는 중견 연출진과 시즌 단원들이 중심을 이루는 역량있는 배우들에 의해 '한국인의 정체성 찾기'라는 기획의도를 성공적으로 살려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