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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최영장군위령굿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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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계시판☆ 스크랩 서울성과 남대문-정동구간 답사기,
lim888( 오 현정) 추천 0 조회 12 08.11.01 19: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남대문

 

지난 2월 미친 영감 하나가 불 질러 버린 통에 남대문은 지금 가려져 있다.

 

 

 

 

사진: 불타는 남대문 2008/2/11

 

 

 

 

 

 

 

사진: 가려진 남대문.

앞 도로에 붉게 그려진 선이 옛 성곽 선으로 상공회의소 쪽으로 나 있다.

 

  

남대문은 워낙 유명하고 필자도 몇 차례 글을 썼으니 이번은 생략한다.

필요하면 필자의 다음 글을 참고하기 바람.

 

l       남대문 상식의 허실 : 2008/2/11

l       숭례문 복원구상을 보고 : 2008/2/13

l       숭례문 옛날사진 : 2008/3/05

l       청계천 스프링과 화기 : 2008/10/21

l       숭례문 복구현장사진 : 2007/10/27

 

 

 

영남대로와 삼남대로의 시발점

 

남대문은 옛 영남대로와 삼남대로의 시발점이었다.

영남대로와 대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삼남대로는 호남대로 라고 해야 하나

관행적으로 삼남대로 라고 한다.

 

옛 영남대로는 남대문에서 대우 빌딩 뒤 후암동 쪽으로 가 용산고교 지나

이태원에서 한강진(漢江鎭-한남대교 북단)으로 가 강을 건넜다.

삼남대로는 염춘교 다리를 지나 서울 역 뒤에서 청파로를 따라 가다

남영역에서 삼각지로 틀어 밥전거리(현 국방부 옆 먹자골목)에서

동재기 나루(동작진)로 갔다.

 

청파역졸 분부하고, 숭례문 밖 내달아서 칠패 팔패, 이문동, 도제골, 쪽다리

지나 청파 배다리, 돌모루, 밥전거리, 모래톱 지나 동자기 바삐 건너…

 

위는 춘향전 이몽룡이 암행어사 내려가는 노정기 중 한 장면이다.

칠패 팔패란 지금 염춘교 시장,

쪽다리, 배다리란 지금 복개되었지만 청파로를 흐르던 만초천에 놓인 다리,

돌모루는 현 남영역 근터, 밥전거리는 삼각지 국방부 옆 먹자골목

동자기란 동작진 (현 동작대교 북단)을 말한다.

 

지금은 세종로 네거리가 도로 원표가 있는 등 중심점이지만 옛날 도성의

중심점은 종루-보신각 이었다. 따라서 도성을 들어 오는 정코스는

숭례문으로 들어와 한국은행, 명동 앞을 지나 소광통교, 대광통교를 건너

종루에 이르는 길이었다. 태평로-세종로는 길 자체가 아예 없었다.

 

 

 

 

사진: 수선전도 (首善全圖) 중 남대문-종루 구간

 

수선전도는 19세기 중반 고산자 김정희가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덕수궁(경운궁)은 써 있지 않고, 정동에서 황토마루(동아일보 앞) 지나

육조거리(세종로)로 오는 길도 아직 없다. 태평로-세종로 길은 19세기 말

광무개혁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남지 (南池)

 

남대문(숭례문)에서 서울역을 바라보면 오른 쪽에 하겐다즈가 보인다.

그 앞에 표석이 있는데 남지터(南池址)라고 쓰여 있다.

 

 

사진: 하겐다즈 앞,

 

수선전도를 보면 남지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사진 : 수선전도 중 남지

 

한양 정도 때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팠다고 하나

동대문 앞에 동지(東池), 서대문 앞에 서지(西池)가 또 있은 걸 보면

크게 믿을 것은 못 되고 그냥 재미있는 전설로 알면 된다.

 

또 남지, 남대문 하니 남인(南人)이 생각났던 모양으로 그런 전설도 있다.

남지 연못은 세월이 흘러 메워지고 또 다시 파는 일이 되풀이 된 것 같은데

순조 때 남지를 복원하자 ‘전에 이 못을 다시 파니 남인인 허목(許穆)이

득세하더니 이번에는 누가 득세할꼬’ 하는 말이 돌더니 남인인 채제공

(蔡濟恭)이 득세하더라’ 하는 이야기가 전해 진다.

 

 

상공회의소 앞 성곽재현(再現)

 

남지표석-하겐다즈 앞에서 길 건너 상공회의소 앞으로 가면

서울 성곽이 복원 아니 재현(再現) 되어 있다.

(문화재는 복원이 불가하니 재현이란 말을 쓴다.)

 

 

 

상공회의소부터 명지빌딩 까지 150m 가량 성벽이 이어져 있다.

 

 

 

 

 

 

그러다가 끊어지고 이어 좌측에 중앙일보가 있다. 중앙일보 동쪽 건너편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 서소문로에 면한 축대까지 가면 표석이 하나 있다.

 

 

 

 

서소문(西小門)

그 표석은 서소문 옛터 비다.

 

 

사진: 소덕문 표석

 

서소문은  도성의 4대문 4소문 중 하나로 처음 소덕문(昭德門)이라고 했다가

예종 때 소의문(昭義門)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 뒤 일제 때 1914년 헐리지만

이름만은 아직 남아 이 일대를 서소문이라고 한다. 서소문은 당연히 길 위에

있었겠지만 길 가운데 표석을 세울 수 없으니 옆 축대 위에 세운 것이겠다.

 

 

 

사진:서소문-김영택 화백의 펜화.  거의 같은 옛 사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걸 모사(模寫)한 듯

 

 

성곽은 맞은편 경남은행 가운데로 지나갔을 것이다.

 

여기까지를 구글로 나타내 본다.

 

 

 

 

이제 의주로 쪽으로 내려가 횡단보도 길을 건넌다.

 옛 성곽은 경남은행 가운데를 지나갔겠으나 나는 그렇게 걸을 수 없으니

그 옆 골목으로 갈 수 밖에 없다.

 

 

사진: 경남은행 옆 길

 

 

수렛골

 

골목 입구 서쪽에  수렛골 표지판이 있다.

 

 

 

 

러시아대사관과 이화여고 후문

 

경남은행에서 이어졌을 성곽 선을 상상하며 100 여 미터 걷다 보면

러시아 대사관과 이화여고 후문이 나온다.

 

 

사진: 러시아대사관 앞, 왼쪽은 이화여고 후문으로 노천극장이 엿보인다.

오른 편 가로등 있는 쪽으로 들어가면 배재공원이다.

 

성곽은 사진 한 가운데를 지나 이화여고 노천극장 쪽으로 갔을 것이다.

도저히 들어 갈 수 없으니 오른 쪽 배재공원으로 우회할 수 밖에 없다.

 

 

배재공원

 

 

 

 

배재학당 동관

 

 

 

배재학당은 1885년 설립되고 이어 1887년 본당이 세워졌다.

위 사진 동관은 1916년 4월 준공된 건물이다.

당시 저 정도면 최고의 하이칼라였겠다.

배재가 고덕으로 옮겨 갈 때 서관은 뜯어 갔으나 동관은 여기 남았다.

서울시 기념물 제16호고 지금은 배재 역사전시관이다.

 

배재 동관 뒤로 돌아가면 오래 된 (525년 된) 향나무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여기다 말을 매었다는 전설이 있다.

 

 

 

 

 

 

사진: 배재 일대-일제시대인 1935년 항공사진.

왼쪽 아래로 덕수궁(경운궁), 중앙에 경성법원 (해방 후 대법원으로 바뀌다가

현재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있고, 그 오른 쪽에 배재 동관이 보인다.

 

위 사진에 보듯이 원래 배재는 현 배재빌딩, 배재공원, 러시아 대사관에

걸쳐 있었다. 80년대 배재가 고덕으로 옮겨간 후 재개발을 다 묶어서

하려 했으나 이게 잘 되지 않고 러시아 대사관은 별도로 짓고 만다.

그 과정이 상당히 졸속이었던 듯 인터넷 검색하면 궁시렁 거리는 소리가

아직도 나온다.

 

이제 배재공원을 나오면 신아빌딩이 있고 길을 돌면 정동제일교회가 보인다.

 

 

정동제일교회

 

 

 

교회 건물이 참 아늑하다. 배재와 정동제일 교회는 모두 아펜젤러가 세웠다.

 

 

 

이화학당

 

정동제일 교회 모퉁이를 왼쪽으로 돌아 이화가 있다.

우리 때 남학생은 이화여고라면 모두 침을 질질 흘렸다.

 

 

 

 

 이화는 1886년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이 세웠다.

 

 

창덕여중

 

이화를 지나면 창덕여중이 나온다.

창덕은 원래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현재 자리로 옮기는데 그 전에는 서대문 국민학교가 있었다.

 

 

 

사진: 창덕여중 구내에 있는 서대문국민학교 교적비

 

서대문 국민학교 이전 그러니까 구한말(舊韓末) 때는 프랑스 공사관이 있었다.

여기서 구한말 지도를 잠깐 본다.

 

 

 

 

 

맨 왼쪽으로 성벽이 남대문, 서소문, 서대문으로 이어져 있다.

그 옆에 필자가 배재, 이화, 창덕하고 써 넣었다.

창덕 옆 법관(法館) 글씨가  법란서(法蘭西) 곧 프랑스 공사관 이란 이야기고,

그 옆으로 아관(俄館)은 러시아 공사관, 미관(美館)은 미국 공사관이었다.

이렇게 프랑스 공사관은 성벽에 붙어 있었다.

.

 

 

사진 : 옛 프랑스 공사관

가운데 있는 양식 건물이 현재 창덕여중 자리에 있던 프랑스 공사관이다.

사진은 서대문 쪽에서 찍은 듯 한데 성벽이 프랑스 공사관(창덕여중)을

끼고 돈다. 멀리 보이는 산은 남산임에 틀림없다.

 

 

 

사진: 옛 프랑스 공사관

처음 사진과 같은 구도 인데 좀 멀리 보았다. .

앞에 보이는 문이 돈의문(서대문)이니 현 기상대 언덕 쯤에서 찍은 듯.

오른 쪽으로 성벽이 돌아가는 안쪽으로 프랑스 공사관이 있고 멀리 남산이 보인다.

 

 

위 사진으로 보나, 성벽 선을 좇아 온 결과로 보나

옛 성벽은 이화여고에서 창덕여중으로 지나 갔을 것이다.

 

 

 

사진: 창덕여중에서 본 이화여고 노천극장

옛 성벽은 저 노천극장을 지나 카메라 지점을 통과 했을 것이다.

 

창덕여중 지나 어반가든이라는 음식점이 나오는데 성벽이 지나던 지점이다.

 

 

사진: 어반가든

 

어반가든 지나면 화교(華僑)들 교회-한성교회가 있다.

 

 

 

사진: 한성교회

 

답사 하던 날이 마침 일요일 아침이라 교인들이 모여들고 있어

이리저리 살피고 사진 찍기가 조금 미안하나 시침 떼고 들어갔다.

교회 뒤로 들어가니 축대를 살피니 쓰인 돌이 심상찮다.

 

 

 

저 돌만 보면 그냥 무심코 넘길 수도 있으나 성곽 선을 죽 따라 오다가

본 것이니 옛 성곽에 쓰인 돌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한성 교회 지나면 신문로가 나오고 여기까지를 구글에 그려 본다.

 

 

[글 /구룡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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